111 전쟁 (5)
“노르드바를 1군단이 접수했다고 합니다.”
부하의 보고에 빅토르 다비도프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눈을 감은 채 이마를 손으로 짚고 있을 뿐이었다.
“수령님? 어디 편찮으십니까?”
부하의 걱정에 빅토르 다비도프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자기 할 말을 던졌다.
“누구한테 보고가 왔지?”
“1군단의 우리 쪽 참모로부터 온 보고입니다.”
“다른 보고는?”
“아직까지는 따로 올라온 게 없습니다.”
“그래. 알았어. 나가봐.”
부하는 빅토르 다비도프를 향해 허리 숙여 인사한 후 방을 나섰다.
홀로 남은 빅토르 다비도프는 가만히 자기 앞에 놓인 수정구슬을 바라보았다.
‘나와 유일하게 직통으로 연락 가능한 건 아딘 콘스탄틴뿐이다. 하지만 그에게선 그 어떠한 연락도 오지 않았어. 오히려 내 연락을 무시하기만 했지.’
빅토르 다비도프는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뒤로 젖히고 눈을 감았다.
‘적은 병력인 만큼, 한 사람이라도 아끼고 싶겠지. 하지만 혁명의 목적이 결국 민중의 해방이라면, 민중이 죽어가는 것 또한 최소화해야 하는 거 아닌가?’
2군단에는 로제라는 전략병기가 있었다.
그녀는 강력한 마법으로 빠르게 적의 통신 체계를 마비시켰고, 그 틈을 타 2군단은 신속하게 왕국 동부의 도시들을 점령할 수 있었다.
하지만 1군단은 달랐다.
노보로바야 점령은 빠르게 성공했지만, 노르드바 점령에는 시간이 쓸데없이 소비됐다.
‘아딘 콘스탄틴이 지나치게 조심했던 거라면, 군사적 측면에선 오히려 그게 더 도움이 될 순 있겠지. 하지만…… 아딘 콘스탄틴이 만약…… 일부러 출병을 늦춘 거라면?’
혼탁한 가운데 한 가지 생각이 그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빅토르 다비도프는 눈을 번쩍 떴다.
‘노르드바에 산성으로 퍼져 있던 용병들을 집결시키고, 그들과 민중을 싸우게 만들어 최대한 그들의 전력을 갉아먹은 다음 손쉽게 별 피해 없이 점령할 생각을…… 애초부터 하고 있었다면?’
빅토르 다비도프는 침을 꿀꺽 삼켰다.
‘아니야…… 아닐 거야. 아딘 콘스탄틴이…… 그 정도로 쓰레기는 아닐 거야. 그날 혁명을 향한 그의 마음은 진심이었어. 그런 그가…… 민중을…… 고의로…… 아닐 거야. 그건 아닐 거야.’
빅토르 다비도프는 아닐 것이라 끊임없이 속으로 되뇌었다.
마치 세뇌라도 하려는 듯.
하지만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 불안과 함께 의심이 서서히 피어올라 독버섯처럼 자라는 것을 그는 막을 수가 없었다.
‘아닐 거야.’
* * *
광명력 993년 3월 25일 저녁, 노르드바는 1군단 혁명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아딘은 잔당을 처단하는 한편, 이산성부터 오산성까지 홀로 뛰어다니며 유사시를 대비해 남겨둔 잔여 용병들까지 싹 죽였다.
그리고 3월 26일 아침, 200명의 쿠만족 용병이 산성의 점령과 관리를 위해 50명씩 나뉘어 이산성부터 오산성까지 각자의 위치에 도착했을 무렵, 노르드바에는 피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아아아악!”
“죽여! 죽여! 죽여!”
유달리 피를 많이 본 노르드바 시민의 분노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그들의 분노는 단순히 노르드바 행정관의 목이 관청 입구에 걸린 것 만으론 가라앉히기 어려웠다.
“저년은 예전 성주부터 얼마 전 행정관까지, 아주 골고루 뇌물을 뿌리던 년이요! 죽이시오!”
“죽이시오! 죽이시오!”
죽창과 몽둥이를 든 민중이 도시 내 부유층 주거지를 돌아다니며 집 안에 숨어 있던 자들을 끌어냈다.
대개 남자들은 그 자리에 맞아 죽었고, 여자들은 온갖 치욕을 당한 끝에 공개 처형당했다.
“아아…… 선지자시여…….”
골목마다 마우세스 레비를 찾는 부유층 여인들의 안쓰러운 비명이 흥분한 남자들의 숨소리와 함께 울려 퍼졌다.
“내버려 둬.”
그리고 그것을 아딘은 방치했다.
“네?”
“내버려 둬. 오늘까지만.”
“하지만…….”
참모를 향해 아딘은 손을 들어 보였다.
참모는 결국 입을 다물고 말았다.
아딘은 의아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벨로디나인 참모들과 이해한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쿠만인 참모들을 모두 한 차례씩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지금 노르드바의 민중은 그 어느 때보다도 분노해 있다. 이 분노는 분명 우리에게 좋은 것이지만, 자칫 해소되지 않은 채 내버려 뒀다간 우리 후방이 위험해질 우려가 있다. 그러니 오늘 하루만, 그들의 분노가 자유롭게 터지는 것을 내버려 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불카르 아시오게를 위시한 쿠만인 참모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암. 그렇고 말고. 괜히 엄한 분노가 남겨진 주둔군에게 쏟아진다면 곤란해.”
하지만 체르노비치에서 파견한 벨로디나인 참모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부유층 중 상당수가 불법을 저지른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적법한 절차에 따른 처벌을 받을 권리는 있는 것 아닙니까? 이런 식으로 분노한 민중에게 맞아 죽거나 능욕당하며 죽는 건 혁명의 정신에도 맞지 않습니다.”
체르노비치 측 참모의 말에 아딘은 가만히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그대에게는 민중의 분노를 가라앉힐 복안이라도 있는가?”
“그건…….”
“오늘 하루다. 내일 해가 뜨는 순간부터는 우리 혁명군에 의해 그런 폭력 행위는 확실하게 통제될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는 말길 바란다.”
아딘의 말에 결국 체르노비치 측 참모들도 입을 다물고 말았다.
“이곳에서 사흘을 더 머무르고, 3월 29일 우리는 출병할 것이다. 각 산성을 지키러 간 200명의 용병을 제외하고, 이곳에는 총 300의 용병이 남을 것이다.”
아딘의 말에 불카르 아시오게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그럼 도합 500이나 여기에 두겠다는 건데…… 그럼 우리 측 전력이 너무 적어지는 거 아니오?”
확실히 3,300이라는 숫자는 너무 쪼들리는 숫자였다.
“콘스탄티노바 외곽 중 북부를 지키는 북방요새로 가는 길에만 우리가 점령해야 할 도시가 3곳 아니오? 그런데 여기에다 도합 500이나 남겨두면, 결국 북방요새 앞에 도착할 때에는 3천이 채 안 되는 숫자로 싸워야 할 수도 있는 거 아니냔 말이오?”
불카르 아시오게의 우려에 아딘은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차피 북방요새로 가는 길목의 도시는 그 규모가 도시보다는 차라리 촌락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수준이오. 제니스 측 용병이 주둔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기껏해야 그 지역 유지들이 사병처럼 부리는 자경단이 도시 치안을 담당하고 있는 곳이지.”
“그건 그렇긴 한데……”
“그 세 곳은 적당히 도시 유지들만 정리하면 우리 쪽 민병대가 관리할 거요. 3,300명이면 충분히 북방요새를 공략할 수 있지 않겠소?”
“흐음……”
“어차피 내가 먼저 선발대로 들어가 북쪽 성문을 열 거고, 그쪽으로 그대들은 들어오기만 하면 되는 거요. 요새 내부에서 민중과 함께 시가전을 벌인다면 충분히 북방요새도 노르드바나 노보로바야처럼 손쉽게 점령할 수 있지 않겠소?”
불카르 아시오게는 결국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2군단이 곧 동방요새 앞에 집결할 예정이다. 계속 소통을 하곤 있다지만, 자칫 1군단과 2군단이 같은 날에 콘스탄티노바 외성에 도착하지 못하는 일이 발생한다면, 혁명전쟁은 총체적인 난국을 맞이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모두들 시간표에 맞춰 제대로 움직여 주길 바란다.”
마지막 당부를 끝으로 아딘은 참모들을 해산시켰다.
참모들이 모두 나가고, 방에는 아딘과 불카르 아시오게 둘만이 남게 됐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으시오?”
아딘의 물음에 불카르 아시오게가 묘한 미소를 지었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말이오.”
“물어보시오.”
“일부러 출병을 늦춘 건 아니겠지요?”
“노르드바로의 출병은 내가 정확하게 도시 내부의 사정을 정탐한 후에 내린 결정이오.”
“뭐, 워낙에 미묘한 시점이어서 말이오. 아무튼 수고 많으셨소, 콘스탄틴 전하.”
불카르 아시오게는 묘한 미소를 짓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빠져나갔다.
그가 나가자 아딘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눈을 감은 순간, 바닥에 쓰러져 죽어 있던 노르드바 민중의 시체가 눈앞에 선명히 나타났다.
“후우…….”
아딘의 한숨과 함께 네르갈의 목걸이가 살짝 금빛을 뿜어댔다.
‘약해지지 말자.’
그렇게 다짐하며 아딘은 최대한 죄책감을 떨치기 위해 심적인 노력을 기울여야만 했다.
* * *
“아아…… 선지자시여……”
“흐헤헤헤. 야이 년아. 세상이 변했어. 이젠 너희 망할 귀족들이 아니라, 우리 세상이야.”
“흐흐흐흐. 얼마나 좋은 걸 먹고 좋은 걸 또 발랐으면 이렇게 피부가 매끄럽고 야들야들하실까?”
“아아…….”
3월 26일 저녁.
노보로바야.
인적 드문 골목에서 한 귀족 여인이 세 남자에게 둘러 쌓인 채 눈물을 흘리며 선지자 마우세스 레비를 부르짖고 있었다.
몽둥이와 죽창을 든 남자들은 씩 웃으며 여인을 희롱하고 있었다.
“아아……”
그리고 막, 세 남자 중 우두머리 격인 자가 여인의 치마 속으로 손을 넣으려 할 때.
[뻐억-!]
무언가가 날아와 정확하게 남자의 머리통에 명중했다.
남자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그 자리에서 죽어버렸다.
“흐, 흐이익!”
“뭐, 뭐야!”
갑작스럽게 날아와 남자의 머리통을 터뜨리며 그를 절명시킨 것은 조그만 돌이었다.
“누, 누구야!”
“어떤 새끼야!”
[뻐억-! 뻐억-!]
죽창을 들며 주위를 경계하는 남은 두 남자의 머리에도 돌멩이가 날아와 박혔다.
“아…… 아아아……”
절체절명의 순간, 목숨을 부지한 여인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 그대로 골목 안쪽으로 달아났다.
“잘했어.”
그리고 그 모든 장면을 골목 바깥에서 지켜보던 제이크 로버츠가 돌을 날린 랄프 넬슨을 치하했다.
“버러지 같은 것들…… 혁명이니 뭐니 말로는 거창하지만 결국 자기네들이 귀족 노릇 해먹어 보겠다 이거 아닙니까?”
분노하는 랄프 넬슨의 어깨를 토닥여 준 후 제이크 로버츠는 발걸음을 옮겼다.
“일단 지하에 있는 거점 이동 장치는 지켜냈습니다. 저 버러지 같은 것들이 찾아와 호텔을 불태웠지만…… 오히려 지상층이 모두 전소되는 덕분에 지하층은 지켜질 수 있었습니다.”
“그래. 잘 했어.”
“전도자님, 일단 이곳은 제게 맡겨두시고 몸을 피하십시오.”
제이크 로버츠가 발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랄프 넬슨을 바라봤다.
“전도자님께서 혹여나 저 무뢰배들에게 붙잡히신다면, 제가 어떻게 고개를 들고 종단에 얼굴을 들이밀 수 있겠습니까?”
제이크 로버츠는 가볍게 웃기만 할 뿐이었다.
“넬슨.”
“네, 전도자님.”
“내 능력이 자네처럼 전투 쪽으로 발달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저런 무뢰배들 손에 당할 만큼 약하지도 않아.”
“…….”
“공화국이 병력을 철수시킨다면 나도 그때 나갈 거야. 그러니 다시는 내게 이곳을 떠나라고 이야기하진 말았으면 좋겠어.”
“네. 알겠습니다, 전도자님.”
제이크 로버츠는 다시 앞을 보며 걷기 시작했다.
‘누구는 남고 싶어서 계속 남고 있는 것 같아? 도망치더라도 명분이 있어야지.’
샤를 11세가 내린 명령은 최대한 벨로디나에 제니스 공화국을 잡아두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돌아가는 사정은 그 명령의 이행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었다.
‘공화국에서 모든 병력을 철수시킨 다음에 도망쳐야 나중에 교주 앞에 가서 할 말이 생기는 거지.’
제이크 로버츠는 가만히 주위를 둘러봤다.
한때 상류층과 귀족들로 넘치던 거리에는 오물과 찢어진 여인의 옷자락, 한때 귀족이 타던 마차의 바퀴였던 것들의 잔해만이 나뒹굴고 있었다.
‘혁명이라기보단 차라리 파괴에 가까워. 도대체 왜 이런 걸 하는 거지? 뒷감당은 어떻게 하려고?’
제이크 로버츠의 눈이 거리에 내걸린 혁명기로 향했다.
황금사자의 얼굴이 수 놓인 혁명기를 바라보며 제이크 로버츠는 마음 한구석에서 피어오르는 불안을 감출 수 없었다.
‘그저 왕좌의 주인이 바뀌는 거라면 모르겠지만…… 만약 이게 기존의 모든 체제를 뒤엎는 폭력적 파괴가 된다면…….’
묵시록 종단 전도자이기 이전에 프런티어 상단 총수이자 한 사람의 상인으로서, 제이크 로버츠는 눈앞에 보이는 혼돈이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어떻게든 샤펠 제국이 군대를 일으키도록 유도해야 해.’
그렇게 생각하며 제이크 로버츠는 발걸음을 계속해서 옮겼다.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