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 전쟁 (3)
광명력 993년 3월 18일 오후.
일산성은 혁명군 1군단의 손에 떨어졌다.
이미 아딘이 병력 대부분을 처치한 상황이었던데다 지휘부까지 모조리 도륙당한 상태였기에 점령 자체는 쉬웠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노르드바를 먼저 점령하면 주위에 있는 다른 산성으로부터 공격받기 쉬워집니다. 병력을 둘로 나눠 하나는 전하와 함께 산성들을 지금처럼 정리해 나가고, 다른 한쪽은 노르드바를 점령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무슨 소리요? 병력이 얼마나 된다고 둘로 쪼개? 말이 되는 소리를 좀 하시오.”
참모들의 의견이 둘로 나뉘었다.
그리고 두 의견 모두 타당성을 지니고 있었다.
“말도 안 됩니다. 병력을 나누는 건 안 될 일입니다.”
“분지에서 자칫 고립이라도 된다면 1군단과 2군단이 북쪽과 동쪽에서 콘스탄티노바를 공격한다는 전략 자체가 틀어집니다.”
둘로 나뉜 참모들의 갑론을박을 아딘은 가만히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불카르 아시오게는 슬쩍 아딘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는 어찌 생각하시오?”
불카르 아시오게의 말에 아딘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둘 다 일리 있는 의견이오.”
“허허허. 그럼 뭐, 둘 다 실천할 생각이오?”
“그럴 순 없지.”
아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지휘봉으로 탁자에 펼쳐진 지도를 하나하나 가리키기 시작했다.
“여기가 노르드바. 벨로디나 북부 제2의 도시지.”
그의 지휘봉이 노르드바의 서쪽과 동쪽을 한 차례 씩 찍었다.
“서쪽의 이산성, 동쪽의 삼산성.”
그의 지휘봉이 노르드바 남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남쪽의 사산성과 오산성까지.”
아딘의 시선이 참모들에게로 향했다.
“이곳에 주둔 중인 병력의 총합은 3천.”
아딘은 지휘봉을 내려뒀다.
“노르드바의 병력까지 합친다면 5천이 좀 넘는 병력이 이곳 북부 길목을 지키고 있다. 뭐, 숫자로만 보면 우리랑 큰 차이가 없지. 그마저도 다섯 군데에 분산돼 있고. 문제는…….”
아딘의 시선이 지도 한가운데의 노르드바로 향했다.
“노르드바가 성벽이 없는 분지 도시라는 점이지. 사방에서 3천 정도의 병력이 몰려든다면 필연적으로 시가전이 펼쳐질 거고, 공성전에서 방어 측이 지니는 이점을 지니지 못한 만큼, 1군단이 패배하진 않겠지만 상당한 피해를 보겠지.”
아딘의 말에 병력을 둘로 나누자던 참모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하지만 병력을 둘로 나눌 경우에도 피해는 막을 수가 없단 말이야.”
그 말에 나누자던 참모들의 표정이 빠르게 어두워졌다.
“그래서 어떤 묘책을 가지고 계십니까, 전하?”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불카르 아시오게가 비아냥거렸다.
순간 참모들 가운데 몇 사람이 움찔했다.
체르노비치 소속 참모들은 굳은 표정으로 불카르 아시오게와 아딘을 바라봤다.
아딘은 불카르 아시오게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
“가장 좋은 건, 이산성부터 오산성까지 분산된 병력들이 상당한 손실을 입은 채 노르드바에 뭉쳐버리는 거겠지.”
“손실을 입은 상태로 성벽이 없는 도시에 주둔 중인 뜨내기 용병들 따위는 우리 쿠만족 사냥꾼들 앞에서 노루와 다를 바 없긴 하지. 근데, 그게 가능한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하는데? 안 그렇소이까, 전하?”
불카르 아시오게의 말에 아딘은 씩 웃으며 시선을 체르노비치 소속 참모들에게로 돌렸다.
“노르드바의 준비 상태는?”
“전하께서 명령만 내리신다면, 지금 당장에라도 가능합니다.”
아딘의 물음에 체르노비치 소속 참모의 대표자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아딘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새벽, 시작하라.”
그 모습을 바라보던 불카르 아시오게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아딘을 향해 물었다.
“민란을 일으킬 생각이오?”
아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에도 불카르 아시오게는 표정을 펼 수 없었다.
“뭐, 민란을 일으켜서 저들을 혼란에 빠뜨리는 거야 이미 노보로바야에서도 했긴 했는데…….”
민란을 일으킨 무장한 민병대는 분명 도움이 되는 존재였다.
이미 노보로바야에서 그것은 증명됐다.
문제는 지금 당면한 과제는 노르드바를 둘러싼 네 개의 산성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였다.
“민병대에게 노르드바 방어를 맡기고 산성을 하나씩 정리할 생각이오?”
불카르 아시오게의 물음에 아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따로 명령이 있기 전까지, 1군단 사령관은 병사들이 언제든 노르드바로 행군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나 갖추고 있으시오.”
그저 그런 명령만을 내릴 뿐이었다.
* * *
광명력 993년 3월 19일 새벽.
일산성과 그 위의 노보로바야가 혁명군의 손아귀에 떨어졌다는 것을 모르는 노르드바 전체가가 늘어지게 잠든 시간.
빈민가부터 시작해 하층민들이 거주하는 마을의 골목에서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어둠 속, 달빛과 횃불에 의지해 수신호와 일정한 박자의 동물 울음소리로 신호를 주고받으며 농기구와 죽창으로 무장한 민병대는 주요 전략 거점 근처에 집결하기 시작했다.
[꼬끼오-!]
그리고 첫 번째 닭 울음소리가 울려 퍼질 무렵, 노르드바 곳곳에 화재가 발생했다.
“불을 꺼! 어서!”
“흙하고 물을 가져와! 빨리!”
“이게 뭐야 대체!”
노르드바 행정관이 거주하는 사저부터 관청, 용병들의 막사, 마구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전략 거점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화재는 아직 잠에서 제대로 깨지 못한 용병들을 당황스럽게 하기에 충분했다.
“우와아아아아-!”
그리고 아직 잠에서 덜 깬 용병들이 화재 진압을 위해 동원될 무렵, 사방에서 민병대의 우렁찬 함성이 울리기 시작했다.
“미, 민란이다! 민란이야!”
“모두 무장! 각자 위치로!”
용병들은 화들짝 놀라면서도 전열을 정비하려 했다.
하지만 그들이 전열을 정비하기도 전에 분노한 민병대의 죽창과 갈고리가 그들의 피를 머금었다.
약 8백가량의 무장한 민병대에 의해 시작된 습격은, 동이 틀 무렵, 민병대가 퇴각하며 끝났다.
화재와 민병대의 습격으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용병들이 가까스로 전열을 정비했을 때, 총 2천에 이르던 노르드바 주둔군의 규모는 1,644명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그마저도 43명은 언제 죽을지 모를 중상자였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특별히 루비오 상단에서 파견한 노르드바 행정관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여전히 불타오르는 관청과 사저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그 조직화된 민병대는 뭐란 말인가?”
행정관의 물음에 용병단장은 대답하지 못했다.
“일단 불부터 끄…….”
행정관이 화재 진압을 명령하려 할 무렵,
“우와아아아-!”
새벽의 것보다 더 우렁찬 함성이 노르드바 전역에서 울려 퍼졌다.
곳곳에 민병대가 뒤섞인 상태에서 굶주린 민중이 몽둥이와 맨주먹을 들고 일어난 것이었다.
“민란?”
행정관은 안색이 창백해졌다.
“다, 당장 산성의 병력들을 불러들여! 어서!”
* * *
‘예상대로야.’
전용 막사에 홀로 앉아 두루마리를 바라보며 아딘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루마리 위에는 노르드바와 그 주변 다섯 산성의 상세한 지도가 떠올라 있었다.
그 지도에서는 수많은 검은 점과 붉은 점이 실시간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민병대 800에 민중 시위자 3만. 그리고 저쪽은 용병 4,500.’
숫자만 놓고 본다면 민병대와 민중의 승리를 예상하겠지만, 문제는 무장의 차이였다.
‘그나마 농기구와 죽창이라도 든 민병대면 모를까, 몽둥이와 주먹뿐인 민중은 용병에게 타격을 제대로 주기 힘들지.’
아딘은 씩 웃었다.
‘호각. 그러므로 저들 용병이 입을 피해는 어림잡아 사상자 2천 이상.’
아딘은 두루마리를 도로 말아 마법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곤 혁명 시작 후 계속해서 허리에 차고 있던 불멸의 검을 칼집에서 꺼냈다.
‘구태여 이 칼에 피를 덜 묻힐 수 있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황금빛 칼날을 바라보며 씩 웃던 아딘.
‘어…….’
별안간 그는 칼날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는 정색하고 말았다.
‘체르노비치는 민란으로 혼란스러운 가운데 우리가 빠르게 돌입할 거라 알고 있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달라. 최대한 민병대와 민중이 용병의 병력을 줄여놓은 상태에서 돌입하는 게 내 생각이야.’
아딘은 굳은 표정으로 검을 도로 칼집에 집어넣었다.
그리곤 다시 두루마리를 꺼내 펼쳤다.
노르드바에 모인 검은 점과 붉은 점이 치열하게 뒤섞이고 있었다.
‘내 작전은 우리 측 피해를 최소화하고, 최단기간에 콘스탄티노바 북부로 우리가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기 위함이다.’
아딘은 굳은 표정으로 마치 개미가 우글거리듯 하는 두루마리 위의 점들을 바라보았다.
‘굶주리고 억압당한 민중의 피 위에서.’
아딘은 두루마리를 말아 넣었다.
‘이건 내 생각이 아니야.’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건 아딘 콘스탄틴이나 할 생각이야.’
아딘은 주먹을 꽉 쥐었다.
‘민중의 희생을 전제로 하는 작전인 걸 알면서도, 물릴 생각이 없는 걸 보면 결국 내 생각이지. 김현수가 동의하는 아딘 콘스탄틴의 생각.’
아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의 눈동자에 슬픔이 맴돌았다.
‘판이 너무 커졌어. 유리 콘스탄틴에 대한 복수를 넘어서서 혁명, 더 나아가 인간의 진화까지.’
아딘은 가만히 자기 손바닥을 펼쳐 보았다.
‘이 길의 끝에서…… 이 손에는…… 얼마나 많은 이들의 피가 묻게 될까?’
한동안 자신의 손바닥을 바라보던 아딘은 이내 주먹을 꽉 쥐었다.
* * *
“혁명군 본대는?”
“아직 소식이 없습니다!”
“수정 구슬은 여전히 침묵 중인가?”
“네!”
“젠장!”
노르드바 민병대장은 인상을 찌푸리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골목길 곳곳에 민병대와 시위 민중의 시체가 널브러진 가운데 성난 표정의 용병들이 열 명씩 무리 지어 돌아다니고 있었다.
“에이 씨…… 도대체 본대는 언제 온다는 거야? 이대로 가면 몰살이야!”
민병대장의 외침에 부대장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콰앙-!]
그때, 아래층에서 문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다! 2층에 있어!”
“이 빌어먹을 폭도 새끼들!”
그리고 곧 성난 용병들의 게마인샤프트어가 집 안에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대장님! 일단 몸을 피하십시오! 제가 막고 있겠습니다!”
부대장은 품에서 수정 구슬을 꺼내 민병대장에게 건넸다.
그리곤 민병대의 무기 가운데 그나마 무기 같은 쌍도끼를 든 채 문을 바라봤다.
“올렉!”
“어떻게든 서쪽으로 가십시오. 거기에는 아직 여유가 있을 겁니다!”
“올렉!”
“어서 가십시오!”
민병대장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젠장!”
[우지끈-!]
민병대장은 그대로 창문을 부수고 밖으로 뛰어내렸다.
그리고 그가 뛰어내림과 동시에 2층으로 용병 다섯이 우르르 몰려들어왔다.
“덤벼 이 새끼들아!”
부대장은 우렁차게 고함지르며 도끼를 휘둘렀다.
첫 일격에 제일 앞장서서 들어오던 용병의 목이 반쯤 날아갔다.
[푹-!]
그러나 도끼가 목에 박혀 부대장의 움직임에 문제가 생긴 사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날아든 창에 의해 부대장은 배가 꿰뚫리고 말았다.
“꺼억……”
“이 빌어먹을 반란군 새끼!”
“개자식아!”
뒤이은 네 용병의 집중 공격에 결국 부대장은 처참하게 죽고 말았다.
“꺼억……”
그렇다고 그의 죽음이 의미가 있는 건 아니었다.
“젠장…….”
민병대장은 자신의 배를 꿰뚫은 창과 그것을 쥔 용병을 바라보며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
“으아아아!”
[서걱-!]
뒤이어 분노한 다른 용병의 외침과 함께 민병대장의 목을 칼이 치고 지나갔다.
민병대장은 그대로 목과 몸이 분리되며 죽어 버렸다.
“주변을 샅샅이 뒤져! 빌어먹을 것들 하나도 남김없이 다 죽여 버려!”
민병대장을 죽인 용병들은 곧 다시 주변으로 흩어지며 학살을 이어나갔다.
[노르드바! 노르드바! 응답하라, 노르드바!]
용병들이 사라지고 얼마 후, 바닥에 쓰러진 민병대장의 몸뚱아리 속에서 빅토르 다비도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본대에는 아직 출동 명령이 떨어지지 않았다고 하는데, 왜 작전을 시행한 거야!]
그의 물음에 응답해 줄 이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체르노비치의 수령 빅토르 다비도프의 통신은 그저 공허하게 시체로 가득한 노르드바 하층민 주거지 골목에 울려 퍼질 뿐이었다.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