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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108화 (108/175)

108 전쟁 (2)

순식간에 망루는 불길에 휩싸였다.

그 자리에 서서 날아오는 불덩이의 정체에 대해 논하고자 했던 두 용병은 미처 인지하기도 전에 그대로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저걸로 감시 초소는 모두 사라졌어요. 다음 교대조가 오기까지 2시간 밖엔 안 남았으니, 가급적 빨리 움직이라고 말씀해 주세요.”

상공 150m에서 검은 로브로 온몸을 가린 채 밤하늘의 어둠과 일체가 된 로제가 왼손에 들고 있는 수정구슬에다 대고 이야기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곧 수정구슬 너머에서 안톤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휴우.”

로제는 수정을 품에 넣은 후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소보렌그라드만 넘으면 나머지 두 도시는 별문제가 없을 거고…… 그러면 일단 2군단은 콘스탄티노바에 바로 집결할 수 있겠네.”

로제는 잠시 저 멀리 언덕 아래로 보이는 소보렌그라드를 바라봤다.

감시 초소 망루 5개가 그녀의 마법에 불타 없어진 것을 꿈에도 모르는 소보렌그라드는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언덕과 언덕 사이에 망루를 짓는 건 좋은 판단이었지만…… 그게 이런 식으로 사라질 줄은 몰랐겠지?”

로제는 피식 웃었다.

그때, 그녀의 수정구슬이 품에서 살짝 진동했다.

로제는 곧장 수정구슬을 품에서 끄집어냈다.

“로제?”

아딘이었다.

“네, 오라버니.”

“성공했다고?”

“네. 다섯 개 망루 다 태워 없앴어요.”

“잘했어, 로제. 정말 잘 했어. 덕분에 1시간 내로 소보렌그라드로 2군단이 진입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르보프가 보고하더라.”

“히힛.”

“너도 봐서 알겠지만 소보렌그라드는 성벽이 없는 도시야. 기껏해야 거기 영주가 쓰던 저택이나 있는 정도지. 그러니까 도시 점령전에서 전투에 참여하진 말고 공중에서 르보프한테 전황이나 신속하게 전달해주는 역할만 해 줘.”

“네, 그렇게 할 게요.”

“그래. 콘스탄티노바에서 보자.”

“네.”

곧 수정구슬은 다시 빛을 잃었다.

로제는 그것을 품에 집어넣고서 어둠을 가르고 소보렌그라드 상공으로 날아갔다.

고도를 150m 더 높여 상공 300m에 자리한 로제는 가만히 소보렌그라드를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최종 목적지인 콘스탄티노바는 오라버니 말씀에 따르면 공략하기가 쉽지는 않다고 했어. 광역권에 자리한 외곽 위성도시가 제법 단단한 요새인데다 전부 다 콘스탄티노바로 통하는 길목을 지키고 있다고…….’

즉, 지금과 달리 공방전이 시작되면 로제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많아질 것이란 뜻이었다.

그러나 그 자체는 로제에게 별달리 무거운 짐으로 다가오진 않았다.

렝고스에서 인간을 초월한 괴수들을 상대로도 버텼지 않았던가?

더군다나 그때는 지금보다도 힘을 사용하는 방식이 비효율적이었다.

그럼에도 로제는 버텼고, 살아남았다.

힘의 효율적 사용을 익힌 지금, 공방전 자체는 로제에게 별다른 긴장감을 주지 않았다.

‘콘스탄티노바를 점령하고 오라버니가 국왕이 된다면…….’

안톤과의 약속을 상기하며 로제는 얼굴을 붉혔다.

이미 자신의 감정을 아딘도 알고 있을 것이라, 그녀는 확신하고 있었다.

‘아무리 오라버니가 목석 같은 사람이라고 해도…… 왕이 된 다음 안톤 르보프가 옆에서 계속해서 권유한다면…… 어쨌건 왕에게는 후사를 이을 사람이 필요하니까…….’

광명력 993년 3월 17일 새벽.

침공받기 1시간 전의 고요한 평화를 누리는 소보렌그라드 상공에서 그렇게 로제는 전쟁과는 무관한 소박한 상상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 * *

노보로바야와 콘스탄티노바 사이에는 여섯 개의 거점이 존재했다.

그중 하나는 도시라 불릴 정도로 번성했지만, 나머지 다섯은 길목을 지키는 산성에 불과했다.

“앞의 산성들을 무시하고 우회하려면 콘스탄티노바까지 대략 반년 정도 걸릴 겁니다.”

체르노비치 조직원의 말에 불카르 아시오게는 턱을 쓰다듬었다.

“저 산성을 통과해 길을 따라가면 분지 도시가 나오는데 거기가 북부 제2의 도시 노르드바입니다. 주변 산성에 물자보급을 하는 곳인 만큼 제니스 공화국 3대 상단 소유 창고에 상당량의 식량과 무기가 보관돼 있습니다.”

불카르 아시오게는 가만히 실눈을 떴다.

조직원의 말이 계속됐다.

“저희가 마지막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대략 3만 명의 군사가 반년간 먹을 식량이 보관돼 있습니다. 작전대로라면 노르드바에 거주하는 시민에게 그것을 나눠 주고도 1군단 장병들에게 보급할 양은 충분할 겁니다.”

그 말에 불카르 아시오게가 냉소적인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 산성을 넘는 동안 우리 전사 중 500 정도가 죽는다면 좀 더 보급량이 많아지겠지. 응?”

불카르 아시오게의 반응에 조직원은 살짝 움찔하면서도 차분하게 자기 할 말을 다 했다.

“지금 콘스탄틴 전하께서 산성을 최소한의 피해로 함락시킬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조금만 기다리시면 신호가 올 겁니다.”

“그래. 우리 쪽 식량이 1주일 치도 안 남았는데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을 때쯤 신호가 오겠지?”

조직원은 거기에 대해선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왜 이렇게 속이 꼬여 있는 거야?’

한편, 불카르 아시오게는 산성을 바라보며 콧김을 내뿜었다.

‘노보로바야에 충분히 병사들을 먹일 식량이 있다고 해놓고…… 세상에 그걸 전부 백성들한테 뿌려버리면 뭐 어쩌자는 거야? 군량은 아예 신경도 안 쓰나?’

앞서 점령한 노보로바야 곳곳에 저장돼 있던 밀가루와 감자 등의 곡물들.

그것들의 총량은 1군단 병사 전체가 1년은 충분히 먹을 수 있는 양이었다.

문제는 아딘의 방침이 그것들 중 8할을 민중에게 분배하라는 것이었다.

덕분에 현재 1군단 병사들에게는 1주일 치 식량밖에는 남아 있지 않았다.

‘혁명도 좋고, 백성들한테 자기가 성군이 될 거라는 걸 강조하는 것도 좋다 이거야. 근데 최소한 병사들 먹일 생각을 해야지…….’

다음 목표인 노르드바에 식량이 얼마나 있고 하는 이야기가 그의 귀에 그다지 반갑게 들리지 않은 데는 그러한 이유가 있었다.

‘안 맞아, 정말 안 맞아.’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막사 밖으로 나갔다.

산성에서 볼 때, 주변 숲 및 땅의 색과 구별이 되지 않는 녹색 투성이의 막사를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던 불카르 아시오게는 이내 시선을 산성으로 돌렸다.

닭이 울기까지 기껏해야 1시간 정도밖에 남지 않은 이 시각, 성은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용병이 300에 그들을 위한 여러 보조 인원만 900. 총 1,200명. 순수하게 야전이라면 우리가 밀어 볼만도 하겠지만…….’

쿠만족이 뛰어난 전사이고 사냥꾼이긴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야전에 한정됐다.

산간 지방에서, 드넓은 평야에서 싸우는 일에 있어서 쿠만족을 이길 자는 기동성을 앞세운 유목민들 정도뿐이었다.

그마저도 유목민의 기동성을 쿠만족 사냥꾼들의 화살로 약화시킬 수 있기에, 쿠만족은 야전에서만큼은 무적에 가까웠다.

문제는 벨로디나에서의 전쟁 대부분이 공성전이란 것이었다.

그리고 공성전은 쿠만족에게는 상당히 낯선 형태의 싸움이었다.

‘답답하구만.’

불카르 아시오게는 그렇게 생각하며 한숨을 폭 내쉬었다.

한편, 같은 시각.

1군단의 위장을 눈치채지 못한 채 평온한 새벽을 보내는 산성.

별다른 이름 없이, 그저 일산성 정도로나 불리는, 조그만 요새.

“끄윽…….”

그곳의 중앙에 자리한 요새 사령관 숙소는 이미 피로 물들어 있었다.

“으흐으윽…….”

요새 사령관의 심장을 꿰뚫은 황금빛 검이 그의 몸에서 뽑히는 것을 방구석에서 바라보며 창기는 눈물을 흘렸다.

불멸의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낸 아딘은 그런 창기를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두려워 말라. 난 너희를 구하러 왔지, 죽이러 오지 않았다.”

아딘의 자애 어린 목소리에도 창기는 최대한 그에게서 시선을 뗀 채 몸을 파르르 떨어댔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아딘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흐으윽…… 살려주세요…….”

그 한숨조차도 창기에게는 엄청난 공포로 다가왔다.

“해가 뜨기 전까지, 누군가 너를 찾아오기 전까지, 이곳에서 가만히 숨어 있거라. 밖으로 나오면 죽을 것이다.”

그 말을 남기고 아딘은 사령관의 방을 나섰다.

이미 그의 방으로 향하는 길목에는 병사들의 시체가 즐비했다.

그들 대부분은 3초라는 짧은 시간 사이에 아딘이 휘두른 검에 맞아 죽은 자들이었다.

자신이 죽는다는 것조차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칼을 맞은 만큼 그들의 시체는 모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아딘은 굳은 표정으로 시체 사이를 지나 밖으로 나갔다.

바깥에도 이미 병사들의 시체가 여기저기 즐비했다.

모두가 게마인샤프트에서 용병으로 활동하다가 제니스 공화국에 의해 고용돼 벨로디나에서 복무 중이던 비정규 용병이었다.

‘라인하르트는 잘 지내고 있을까?’

문득 아딘은 오래전 조상과 만난 후 충격이라도 받았는지 잔뜩 침울해졌던 라인하르트를 떠올렸다.

‘두루마리로 확인해보고 싶긴 하지만…….’

그래도 한동안 같이 지내며 정이 들었던 사람이었다.

만약 그에게 안 좋은 일이라도 생겼다면, 그러한 일을 두루마리의 건조한 문체로 접한다면 마음이 상당히 아플 것이라 생각했기에 아딘은 구태여 찾지 않았다.

‘혹시 여기 비정규 용병으로 와 있는 건 아니겠지?’

그렇다면 정말 슬플 것이라 생각하며 아딘은 요새 광장으로 나갔다.

그리고 그곳을 가로질러 요새 서쪽에 자리한 병사 숙소로 향했다.

‘여기 숙소에서 현재 자고 있는 자들은 150명. 요새 사령관 처소를 지키던 자들 50명. 여기까지 쓸어버리면 요새에 남는 인력은 100명뿐이지. 대부분 요새 남쪽에 배치돼 있는.’

그들을 죽이는 것보다는 숙소에서 자고 있는 인원을 모두 죽인 후 북문을 열어버리는 것이 더 효율적일 것이라 생각하며 아딘은 그렇게 병사들의 막사로 들어갔다.

과정은 쉬웠다.

보초를 서던 자들은 모두 불멸의 검으로 죽였다.

잠든 자들은 모두 자는 와중에 칼에 맞아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아딘은 30분 동안 마치 무를 썰 듯 병사들 150명을 죽였다.

목적을 완수한 후 곧장 아딘은 북문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벽에 기댄 채 꾸벅꾸벅 졸던 병사를 죽인 후 불멸의 검으로 잠금장치를 끊어버린 뒤 아딘은 문을 활짝 열었다.

그리곤 수정구슬을 꺼내 불카르 아시오게와 함께 있는 체르노비치 조직원에게 이야기했다.

“1군단, 모두 요새로 진입. 방해 요소는 없을 것이다.”

“네, 알겠습니다.”

명령을 하달한 후 아딘은 수정구슬을 마법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리곤 불멸의 검을 든 채 가만히 북쪽 산 아래 녹지와 숲을 바라봤다.

잠시 후, 위장색 막사가 정리되고 4,850명의 용병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빠르네.”

아딘은 그렇게 간단한 평가를 남기며 씩 웃었다.

그러다 이내 그의 얼굴에선 웃음기가 사라졌다.

아딘은 시선을 뒤로 돌렸다.

요새 사령관 거처를 중심으로 북쪽과 서쪽에 가득한 용병들의 시체가 눈에 들어왔다.

현재 교대를 고대하는 요새 남부 경계병들도 곧 저렇게 될 터였다.

그리고 요새 동부에 거주하는 비전투인원들 중 무의미한 반항을 시도하는 자들도 저렇게 될 터였다.

‘내가 너무 둔감해졌나?’

아딘은 조금 전 병사들을 죽일 때를 상기해 보았다.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그저 눈앞의 적을 베어 넘긴다는 느낌으로 아딘은 검을 휘둘렀을 뿐이었다.

‘이제 와서 살인에 죄책감을 가지거나 하기에는 좀 많이 늦긴 했지만…….’

불과 2시간 사이에 200명을 죽였음에도 아무런 감흥이 없다는 것.

그것이 아딘을 정색하도록 만들었다.

‘전략적 차원에선 당연한 일이긴 한데…… 점점 내 인간성이 어디로 가는가 싶네.’

하지만 김현수처럼 비폭력주의자의 정신을 유지한다면 분명 이 세계에서 살아남기 어려울 것을 알았기에 아딘은 딱히 불평을 하거나 하진 않았다.

‘아딘 콘스탄틴의 자아가 벨로디나 왕국에서 유독 비대해졌어. 그리고 내 기분이 상하거나 할 때 또 비대해졌지. 이게 혁명 이후 국가 통치시에만 안 튀어나오면 참 좋을 텐데 말이야.’

혁명 이후를 떠올리며 아딘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안톤은 그럴 걱정 없지만…… 빅토르 다비도프나 불카르 아시오게는 내 손으로 숙청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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