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전쟁 (1)
벨로디나 왕국에 주둔 중인 제니스 공화국의 용병은 총 5만이다.
그중 5천이 콘스탄티노바 왕궁을 지키고 있고, 1만은 콘스탄티노바로 향하는 요새에 주둔 중이었으며, 2만은 콘스탄티노바와 크리미아 사이의 길목을 수호하고 있었다.
즉, 3만 5천이나 되는 병력이 수도와 남부의 부동항 사이에 집중돼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4천과 3천만으로도 충분히 북부와 동부는 장악 가능하다는 거지.”
광명력 993년 3월 11일 새벽.
콘스탄티노바 외곽, 버려진 수도원.
빅토르 다비도프는 15개의 수정구슬을 앞에 둔 채 담담한 어조로 현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야. 단순히 약탈을 하려는 게 아니라 점령을 하려는 거면 도합 7천의 보병만으로는 벨로디나 왕국을 어떻게 해볼 수 없어. 그러니 우리의 역할이 그만큼 중요한 거지.”
빅토르 다비도프의 말에 수정구슬 너머에서 그의 지령을 받고 있던 각 도시의 지부장들은 모두 결의에 찬 눈빛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빅토르 다비도프의 시선이 노보로바야와 상트보가르 쪽 지부장의 수정구슬로 향했다.
“노보로바야와 상트보가르가 혁명군의 첫 공격지가 될 것이다. 현재까지 전하께서 별다른 말씀이 없으신 만큼, 예정일은 3월 13일이다.”
빅토르 다비도프의 말에 상트보가르와 노보로바야의 지부장들은 수정구슬 너머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그 모습이 자신에게 보이진 않았지만, 빅토르 다비도프는 충분히 그들이 그러고 있으리란 걸 예측할 수 있었다.
“혁명의 시발점이 될 두 곳에서 그간 우리가 꾸준히 조직해 두었던 민중 반란 조직이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느냐에 따라 혁명 이후 민중의 목소리가 제대로 혁명 정부에 전달이 될 것이다. 너희들의 소임이 막중함을 인지하라.”
“네, 수령님.”
“알겠습니다, 수령님.”
두 지부장의 결의에 찬 목소리를 확인한 빅토르 다비도프는 이후 북부와 동부 그리고 중부 외곽지대 소도시의 지부장들에게도 적절한 타이밍에 민란을 일으킬 것을 주문했다.
“저는 어떻게 합니까?”
크리미아 지부장의 수정구슬에서 흘러나온 질문에 빅토르 다비도프는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일단 콘스탄티노바 공방전의 결과에 따라 크리미아 쪽에 정확한 지침을 내려줄 수 있을 것 같다.”
“그럼 그때까지 마냥 기다려야 하는 겁니까?”
“소규모 소요를 선동해 그쪽에 주둔 중인 용병의 발을 묶어 두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긴 하다만…… 일단은 대규모 민란은 아직은 일으킬 필요가 없다.”
“일단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수령님.”
이후에 빅토르 다비도프는 몇 가지 지침을 더 하달한 후 통신을 끊었다.
“후우……”
통신이 끝난 후 빅토르 다비도프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콘스탄티노바 권역을 점령하면 제니스 공화국은 크리미아를 통해 용병과 자산을 모두 빼낼 것이라고 전하께서는 말씀하셨지.’
아딘이 콘스탄티노바에 찾아와 빅토르 다비도프와 만났을 때, 그는 분명 그렇게 전망했다.
그리고 빅토르 다비도프도 그 전망에 대해선 긍정적이었다.
다만 너무 그것만 기대하고서 크리미아 쪽은 방치해 두는 건 도박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전하께서는 자칫 탈출하려는 자들의 무차별적인 공격으로 민중 상당수가 죽을 수도 있음을 우려하여 그러시는 것이라 하셨지만…….’
도망치려는 자들을 괜히 공격했다가 자칫 제대로 무장도 하지 않은 민병대가 대량 학살의 위험에 노출될 수도 있다는 것.
그것이 아딘이 크리미아에서는 대규모 민란을 억제하라고 빅토르 다비도프에게 주문했던 이유였다.
‘어차피 왕궁을 지키는 5천 정도를 제외하면 모두가 비정규 용병이야.’
비용 절감을 이유로 제니스 공화국은 벨로디나 왕국을 점령한 후 꾸준히 정규 용병을 비정규 용병으로 대체했다.
제니스 공화국의 주요 상단 총수들이 직접 돈을 들여 먹이고 입히며 키운 정규 용병과는 달리 게마인샤프트 일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오합지졸에 가까운, 덩치만 큰 비정규 용병들의 전투력은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그들이 비록 장비가 괜찮다곤 해도…… 민병대의 숫자가 적절하게 갖춰진다면 이기는 건 무리가 아닐 텐데…….’
그랬기에 빅토르 다비도프는 아딘에게 자신의 뜻을 분명하게 전했었다.
하지만 아딘은 다시금 분명히 말했다.
“쓸모없는 희생은 불필요하다.”
아딘의 말을 곱씹으며 빅토르 다비도프는 고양이로 변했다.
그리곤 수도원 지붕으로 올라가 저 멀리 망루마다 횃불이 켜진 콘스탄티노바 성채와 그 주변에 펼쳐진 민중의 주거지를 바라보았다.
‘전하와 우리 군대가 저 성벽을 넘을 때, 민중과 귀족을 가로막고 있던 벽은 허물어질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귀족과 민중을 가로막는 벽이 세워질 것인가?’
그런 고민을 하며 빅토르 다비도프는 가만히 콘스탄티노바 성채를 눈에 담아두었다.
* * *
3월 13일 오전.
상트보가르와 노보로바야는 비슷한 시간대에 각각 3천과 4천의 용병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그곳에 주둔 중이던 용병들이 전열을 재정비하기도 전에 내부에선 대규모 소요사태가 발생했다.
“빈민들이 횃불을 들고 거리에 불을 지르고 있습니다!”
“외곽 5km 지점의 방어선이 무너졌습니다!”
“수적으로 너무 밀립니다!”
“폭동을 진압할 병력이 없습니다!”
상트보가르와 노보로바야를 책임지는 수비대장들은 비슷한 보고를 받았고 모두 공황 상태에 빠졌다.
외부에서 몰아닥치는 거구의 쿠만족 용병과 내부에서 불을 지르고 기물을 파손하며 군량미 저장소와 무기고, 감옥을 습격하는 분노한 민중의 공세에 두 도시는 습격 하루 만에 완벽하게 혁명군의 손에 들어왔다.
“우와아아아-!”
혁명군이 차지한 두 도시에선 시청에 걸린 벨로디나 왕국기와 제니스 공화국기가 끌어 내려지고 태워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아딘이 직접 제작한, 사자의 얼굴이 수 놓인 혁명기가 내걸렸다.
민란을 일으킨 민중 가운데에는 체르노비치 조직원도 있었고, 그들에게 포섭된 외부지지자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런 조직과 무관한 순수한 민중이었다.
굶주림과 학대, 이웃의 아사에 지친 이들은 이미 분노하고 있었다.
체르노비치는 단지 그들의 분노에 기름을 끼얹었을 뿐이었다.
“만세! 만세!”
혁명기를 올려다보며 환호하는 민중 사이에서 만세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 소리를 들으며 노보로바야와 상트보가르를 점령한 1군단과 2군단은 빠르게 조직을 재편하기 시작했다.
* * *
“민병대로 급조 가능한 건 대략 1,500명입니다.”
부하의 보고에 불카르 아시오게는 고개를 끄덕이며 지도를 바라봤다.
드넓은 벨로디나 왕국의 강역이, 산맥과 강줄기가 제법 구체적으로 그려진 지도 위에서 북부 노보로바야와 동부 상트보가르에 사자의 얼굴 모양을 한 도장이 선명히 찍혀 있었다.
“노보로바야는 광역권까지 합치면 제법 넓은 지역입니다. 다만 노보로바야를 제외한 다른 광역권 소도시의 경우에는 인구가 고작해야 100명 남짓한, 도시라 부르기도 부끄러운 촌락 수준인 만큼 1,500의 민병대에 우리 쪽 용병 150이면 충분히 관리가 가능하리라 생각합니다.”
부하의 말대로였다.
어차피 북방 최대의 도시라 해봤자 콘스탄티노바와 크리미아에 인구와 경제가 대부분 집중된 벨로디나 왕국 형편상 이곳을 관리하기 위해 그렇게 많은 인력을 남겨둘 필요는 없었다.
“치안은 뭐 민병대하고 우리 애들이 담당한다 치고, 행정은 누가 담당한다고 했더라?”
불카르 아시오게의 물음에 부하는 조그만 두루마리를 확인한 후 대답했다.
“드미트리 카라모프…… 라는 사람입니다.”
“뭐 하는 사람이야?”
“여기 나온 설명으로는 예전에 노보로바야 세무관이었다고 합니다.”
“흥. 어디 숨어있으면서 지하 조직하고 연이라도 맺어뒀나 보지?”
그러면서 불카르 아시오게는 부하에게 물었다.
“그 지하 조직이라는 거, 확인해 봤냐?”
그 물음에 부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콘스탄틴이 너무 두루뭉술하게 언급한 데다가 아직 점령한 지 하루 밖엔 안 돼서……”
“하여간 마음에 안 들어. 우리한테 숨기는 게 너무 많아. 우리 입장에선 완전한 타지에 맨몸으로 칼 한 자루 들고 온 건데 말이야.”
그 말에 부하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불카르 아시오게도 딱히 대답을 바란 것은 아니었던 만큼 화제를 돌렸다.
“아무튼 이틀 내로 민병대 조직을 끝내. 늦어도 16일에는 남쪽으로 내려가야 하니까.”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같은 시각, 상트보가르.
도시 중앙에 자리한 시장 관사.
이틀 전까지 수비대장의 거처로 쓰이던 곳에, 노보로바야와 마찬가지로 혁명기가 휘날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내부에선 야민 벤키시와 다리아 그리고 민중 대표 3인방이 앉아 있었다.
“우리 쪽에서 민병대를 모집한다면 700명 정도는 나올 것 같습니다.”
민중 대표의 말에 야민 벤키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리는 한 100명 정도 남겨두면 되겠네요?”
다리아의 말에 야민 벤키시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도시 규모로 보면 사실 800명도 치안대로 쓰기에는 많아 보이는 게 사실이니까요.”
그녀의 솔직한 발언에 민중 대표 3인방은 얼굴을 살짝 붉혔다.
“뭐, 틀린 말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의 역할이 치안만 담당하는 게 전부는 아니니까 문제입니다.”
“어차피 기본적으로 도시를 관리하는 건 저기 민중 대표분들이 한다고 하지 않았나요? 전 그렇게 들었는데? 콘스탄틴 씨한테서?”
그녀의 입에서 콘스탄틴이란 단어가 나오자 민중 대표 3인방 중 하나가 흠칫 놀랐다.
잠시 민중 대표의 눈치를 살피던 야민 벤키시가 다소 어눌한 쿠만어로 말했다.
“콘스탄틴 전하에 대한 말. 조심해서 하시오. 아직 저들 중 전하를 모르는 사람. 많소.”
그 말에 다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어차피 조만간 다 알게 될 건데.”
그런 그녀의 모습에 야민 벤키시는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하긴 아직 스물도 안 됐지.’
그녀의 나이가 고작 19세라는 것을 들은 만큼, 야민 벤키시는 이해하기로 했다.
자기도 5년 전에는 저런 모습이었을 테니까.
‘근데 싸울 때 모습만 생각하면…….’
야민 벤키시는 잠시 다리아가 싸우던 모습을 회상했다.
넘실거리는 녹색 검기를 무차별적으로 휘두르며 용병들을 고기 썰 듯 썰고 다니던 그녀의 위용.
상트보가르가 반나절 만에 혁명군의 수중에 떨어진 가장 큰 이유는 상트보가르에 주둔 중인 용병의 숫자가 적어서가 아니라 다리아 때문이라 야민 벤키시는 생각했다.
‘일단 지금 중요한 건 빨리 치안대랑 임시 행정부를 만들고 서진하는 거니까.’
그렇게 야민 벤키시는 민중 대표 3인방과 함께 점령지 관리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 논의는 노보로바야에서 불카르 아시오게가 내린 결론과 유사한 결론을 도출하며 끝났다.
* * *
벨로디나 동부 제1의 도시인 상트보가르와 벨로디나의 수도 콘스탄티노바 사이에는 3개의 소도시가 자리하고 있다.
그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소보렌그라드는 인구만 5만에 이르는, 벨로디나 동부 도시 치고는 제법 큰 규모를 자랑하는 도시였다.
“게마인샤프트였으면 벌써 봄이었을 건데…… 어흐 살 떨려.”
소보렌그라드 외곽 15km 지점부터 5km 간격으로 세워진 망루.
그중 가장 서쪽에 자리한 망루에선 두 명의 용병들이 추위에 몸을 떨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으으…… 다음 달부터 선착순으로 계약 해지 신청을 받는다던데…… 그냥 계약 해지하고 게마인샤프트로 가는 게 나으려나?”
한 용병의 물음에 곁에 있던 다른 용병은 콧방귀를 뀌었다.
“가서 할 일은 있고?”
그러면서 그는 가만히 허공을 바라봤다.
늦은 밤, 하늘을 수놓은 별무리 가운데 유독 밝고 큰 게 그의 눈에 들어왔다.
“별똥별인가?”
처음 그것을 바라보던 그의 시선은 호기심으로 가득했다.
“어?”
그러나 점차 그 별이 가까워지고, 또 크기가 빠르게 커지기 시작하자 그의 표정은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야. 저, 저거 뭐야?”
“뭐가?”
그 용병의 물음에 처음, 계약 해지 이야기를 꺼냈던 용병이 신경질적으로 허공을 바라봤다.
그 순간.
[화아악-!]
[콰아앙-!]
커다란 불덩어리가 그대로 망루에 날아와 부딪히며 폭발했다.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