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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105화 (105/175)

105 민란 계획 (3)

빅토르 다비도프에게 민란 준비를 맡긴 후 1월 14일 상트보가르를 떠난 아딘은 동쪽이 아닌 서쪽으로 날았다.

이틀에 걸쳐 비행한 끝에 그가 도착한 곳은 콘스탄티노바였다.

광명력 993년 1월 16일 정오.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채 아딘은 콘스탄티노바 시가지를 걸었다.

샤펠 제국이나 제니스 공화국과 비교했을 때 분명히 뒤쳐진 2류 국가였지만, 그런대로 중앙집권적 권력이 어느 정도 갖추어져 있던 벨로디나 왕국.

그곳의 심장인 콘스탄티노바에 1년만에 돌아온 아딘이 본 것은 골목길마다 버려진 아사자들의 시체와 그 곁에서 죽어가는 예비 아사자들이 내뿜는 힘겨운 숨결이었다.

‘아아…….’

로브에 얼굴을 반쯤 가린 채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아딘은 가슴에서 솟구쳐 오르는 감정에 고통을 느끼며 가볍게 탄식했다.

‘내가 왜…….’

그것은 이러한 세계관을 만들어낸 창조자 김현수가 느끼는 죄책감과 한때 번영했던 도시에서 삶의 대부분을 보낸 왕자 아딘 콘스탄틴이 느끼는 안타까움이 뒤섞인 감정이었다.

‘바로 잡아야 해. 반드시.’

더 이상 혁명은 유리 콘스탄틴에 대한 복수 하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이 모든 걸 전복시켜야해.’

아딘의 시선이 시가지와는 동떨어진, 귀족들과 유리 콘스탄틴이 살고 있는 성으로 향했다.

‘저곳에 혁명기가 꽂히는 날…….’

그날을 기약하며 아딘은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그가 한참을 걸어 인적 드문 거리 뒷골목 초엽을 지날 무렵이었다.

“으흑-!”

한 사람의 억눌린 신음이 아딘의 귀를 때렸다.

“일으켜 세워!”

뒤이어 날카로운 노인의 음성이 뒷골목에서 울려 퍼졌다.

아딘은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우리 걸 그렇게 먹고 튀면, 무사히 숨어 있을 줄 알았나?”

윤기가 흐르는 가죽옷을 입은 노인이 지팡이를 흔들며 열불을 내고 있었다.

노인의 앞에선 두 장정에게 양팔이 붙들린 대머리 중년인 하나가 입과 코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아편을 제공해주는 대가로 밀하고 감자를 받았으면 우리한테 당연히 떨어져야할 몫이 있잖아, 안 그래?”

그러면서 노인은 대머리 중년인의 명치를 지팡이로 쿡 찔렀다.

“으헉-!”

중년인은 고통을 호소했다.

‘마약상인가?’

아딘은 인상을 찌푸리고 팔짱을 낀 채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말해. 밀하고 감자 어디에 꿍쳐 뒀어?”

노인의 물음에 중년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으시겠다?”

노인이 두 장정에게 눈짓했다.

“으아아아악-!”

두 장정이 힘껏 팔을 꺾어버리자 중년인은 비명을 내질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끝내 노인이 원하는 답을 내놓지 않았다.

‘단순히 마약상끼리의 결제 문제라면 저 정도로 입을 다물진 않을 건데?’

아딘은 인상을 찌푸리며 마법 주머니에서 두루마리를 꺼내 펼쳤다.

노인은 아딘의 예상대로 전형적인 마약상이었다.

본래 게마인샤프트 북부에서 활동하다가 벨로디나가 제니스의 괴뢰국이 된 후 콘스탄티노바까지 사업을 확장한 케이스였다.

문제는 중년인이었다.

<막심 트리마코프>

<광명력 948년 1월 10일 생, 광명력 993년 1월 16일 현재 45세>

<전 동방광명교 총대주교 성전 집사장이었다.>

<현재 총대주교 성전 고위 사제들과 귀족들에게 아편을 건네고 그 대가로 식량을 받는 중계업자로 활동 중이다.>

<장부 조작으로 마약 조직의 눈을 속이며 빈민가에 곡식을 무상으로 뿌리는 의인이다.>

의인.

그것이 두루마리의 평가였다.

아딘은 두루마리를 도로 집어 넣었다.

그리곤 막심 트리마코프에게 다가갔다.

“응? 넌 뭐…….”

아딘은 그대로 노인의 머리통을 발로 찼다.

[빠직-!]

아딘의 발길질에 맞은 노인은 그대로 목이 돌아가며 그 자리에서 죽어버렸다.

“두, 두목님……!”

“이 새끼가……!”

장정 둘은 그대로 막심 트리마코프를 놓은 후 주머니에서 칼을 꺼내 아딘에게 달려들었다.

허접스럽기만 한 그들의 칼질을 여유롭게 피한 후 아딘은 두 사람의 안면 정중앙에 주먹을 날려 주었다.

[뻑-!]

[뻑-!]

아딘의 주먹이 가한 힘은 그대로 둘의 얼굴을 짓뭉개버렸다.

두 사람은 그대로 뒤통수까지 터져버렸고, 터진 곳으로 찢어진 뇌가 흘러내렸다.

“으히이익-!”

바닥에 쓰러져 고통을 호소하던 막심 트리마코프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팍 숙였다.

그런 막심 트리마코프를 향해 아딘은 입을 열었다.

“막심 트리마코프.”

아딘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막심 트리마코프는 더욱 벌벌 떨었다.

“저, 저는 정말 모릅니다. 아무것도 모릅니다.”

일단 부정하고 보는 막심 트리마코프의 반응에 아딘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크허엉-!]

그 순간, 네르갈의 목걸이가 아딘의 감정에 반응하며 음파를 뿜어댔다.

그 음파에 노출된 막심 트리마코프는 괜히 마음이 안정됨을 느끼며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어째서 그랬지?”

아딘의 물음에 막심 트리마코프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뭐, 뭘 말씀이십니까?”

“어째서 마약 조직을 속여 곡식을 빼돌려 그걸 빈민가에 뿌렸느냔 말이다.”

아딘의 말에 막심 트리마코프는 눈을 부릅떴다.

“어, 어떻게…….”

“차라리 그걸 암시장에 풀어 막대한 이익을 취한 후 크리미아를 통해 제니스 공화국이나 하다못해 게마인샤프트 남부 정도로라도 도망갔다면 평생을 풍족하게 살았을 텐데?”

발길질과 주먹질로 사람 셋을 죽인, 로브를 뒤집어 쓴 정체 불명의 사내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

자신의 비밀스러운 사업을 낱낱이 까발리는 아딘의 말에 막심 트리마코프는 정신을 제대로 차리질 못했다.

“그대에게 남은 것이라곤 마약 중개상이라는 오명과 마약 조직의 추적뿐인 그 일을 왜 했지?”

거듭되는 아딘의 물음에 결국 막심 트리마코프는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마땅히 선지자 마우세스 레비의 재림을 기다리는 이라면 해야 할 일이어서 그랬습니다.”

굉장히 신앙적인, 동방광명교 율법학자를 흡족하게 할 만한 모범적인 답변에 아딘은 한숨을 내쉬었다.

“진정 그 이유 하나뿐인가?”

“총대주교 성전에서 집사장으로 일하며 저는 고위 사제라는 자들의 본질을 알게 됐습니다. 그럴수록 선지자 마우세스 레비께서 재림하시는 날만을 고대하게 됐고 말입니다.”

자신도 바닥에 누운 시체들과 같은 처지가 되리라 지레짐작한 막심 트리마코프는 담담한 어조로 자신의 신앙을 아딘에게 고백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집사장 시절, 장부 조작으로 성전의 물품을 빼돌렸습니다. 그걸로 빈민들이 배불리 먹을 식량을 마련했고 말입니다.”

그런 막심 트리마코프의 선행은 유리 콘스탄틴의 등극과 그로 인한 총대주교 성전 인력 구조조정으로 집사장 직위를 내려놓은 이후에도 계속됐다.

“처음에는 내부 조력자를 통해 물품 몇 개를 빼돌려 장물로 파는 수준이었습니다. 하지만 날이 가면 갈수록 식량 사정이 악화됐고 결국…….”

“마약 조직과 손을 잡게 됐다?”

막심 트리마코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편을 판 행위는 분명 죄악입니다. 선지자 마우세스 레비께서 금지하신, 사람을 미혹하는 식물에 손을 댄 행위니 말입니다.”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있던 막심 트리마코프는 이내 당당한 눈빛으로 고개를 치켜 들었다.

“하지만 전 후회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율법을 위반한 결과 전 빈민가의 많은 이들을 배불리 먹일 수 있었습니다. 제 행위가 옳았는지, 그릇됐는지는 천계의 신들께서 그리고 선지자 마우세스 레비께서 판단하실 겁니다.”

그러면서 막심 트리마코프는 가만히 눈을 감고 합장했다.

마치 순교를 기다리는 듯한 그 경건한 자세에 아딘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눈을 떠라. 난 널 죽일 생각이 없다.”

아딘의 말에 막심 트리마코프는 살며시 눈을 떴다.

그는 불신 가득한 눈빛으로 아딘을 바라보며 물었다.

“어째서 그러는 겁니까?”

그 물음에 아딘이 역으로 물었다.

“어째서 그래야 하는 거지?”

“그건…….”

“그대가 마약을 귀족들에게 팔았건, 장부를 조작했건 그건 내가 지금 처분할 일이 아니야.”

“…….”

“막심 트리마코프.”

아딘은 천천히 그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일어나라. 그리고 앞장 서라.”

“어, 어딜 말입니까?”

“그대가 성안으로 아편을 운송하던 길로.”

그러면서 아딘은 처음으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 * *

한때 왕자로서, 콘스탄티노바를 포함한 벨로디나 전역을 자신의 것으로 여겼던 아딘 콘스탄틴.

역설적으로 그러한 생각이 콘스탄티노바 성채와 왕궁으로 이어지는 비밀 통로의 존재를 파악하지 못하는 데 일조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항상 큰길로 다니면 되는데, 구태여 오래전에 만들어진,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하수도의 존재를 알 필요가 없었으니까.

“이 길을 아는 사람은 단언컨대 저 하나뿐입니다.”

횃불을 든 채 앞장선 막심 트리마코프의 말에 아딘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크기도 적당히 수레가 지나갈 만하고 거기다 지하 깊숙한 곳에 있으니 바깥의 경비병에게 쓸데없이 발각될 일도 없고. 딱 안성맞춤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비밀 통로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 놓으며 막심 트리마코프는 아딘을 안내했다.

“여깁니다. 여기에서 위로 올라가면 총대주교 성전의 버려진 화장실로 이어집니다.”

막심 트리마코프의 말에 아딘은 가만히 천장을 올려다 보았다.

조그만 사다리로 이어진 천장 끝에는 구멍 하나가 뚫려 있었다.

“저게 뭐지?”

아딘의 물음에 막심 트리마코프는 가벼운 어조로 대답했다.

“변기 구멍입니다. 저리로 예전엔 사제들이 똥을 누었고, 그 똥이 저 구멍을 통해 이쪽으로 떨어져 내렸었죠.”

그 말에 아딘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 모습을 보고 막심 트리마코프는 실실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마지막으로 이 화장실에서 누가 똥을 싼 게 대략 20년 전일 테니 말입니다.”

그러면서 막심 트리마코프는 이 구식 화장실 폐쇄를 자기가 직접 담당했음을 자랑했다.

“그때는 뭐 집사장은 아니었지만, 그런대로 여기를 폐쇄하고 관리할 권한 정도는 있던 처지였습니다. 덕분에 지금까지 유용하게 쓰고 있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막심 트리마코프는 사다리를 가리켰다.

“올라가 보시렵니까?”

그 물음에 아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직은 그럴 필요가 없어.”

그러면서 아딘은 막심 트리마코프에게 돌아가자며 고갯짓했다.

막심 트리마코프는 아딘의 앞에 서서 길을 걸어가며 총대주교 성전 화장실의 역사에 대해 쭉 늘어놓았다.

어딘지 모르게 더럽기만 한 그 이야기에 아딘은 질색하면서도 막심 트리마코프의 입을 막거나 하진 않았다.

그렇게 다시 한참을 걸어 두 사람은 버려진 하수구 밖으로 나왔다.

이미 해는 서쪽으로 저물어 석양이 지고 있었다.

“막심 트리마코프.”

아딘은 가만히 막심 트리마코프를 불렀다.

“네?”

막심 트리마코프는 살짝 불안한 눈으로 아딘을 바라봤다.

“그대는 어째서 내게 비밀 통로를 알려줬지?”

아딘의 물음에 순간 막심 트리마코프는 당황했다.

“그, 그러게 말입니다?”

“내가 그대를 죽일 것 같아서? 죽일 것 같은 이유로 이런 비밀을 알려줄 정도라면 내가 아니라 마약상에게 먼저 곡식이 어디로 갔는지를 알려줬겠지.”

“그, 그렇죠.”

“왜 알려줬지?”

“그, 그게…….”

막심 트리마코프는 말을 더듬었다.

“내 목소리가 익숙해서 그런 거 아니었나?”

“네?”

아딘은 천천히 로브 후드를 뒤로 넘겼다.

석양 아래 아딘의 담갈색 머리카락과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죽다 살아난 상황에서 오는 감정적 동요, 강한 힘을 지닌 자의 말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목소리. 그것이 그대의 마음을 쉽게 열었겠지.”

아딘의 모습을 본 막심 트리마코프의 눈이 심하게 떨렸다.

“난 그대를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대는 날 기억할 수밖엔 없겠지. 모든 왕족은 늘 일주일에 한 번씩 총대주교 성전으로 와 선지자의 석상 앞에서 자기 죄를 회개해야 했으니까.”

그대로 막심 트리마코프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와, 왕자 전하…….”

“그래도 내가 성전에서는 여론이 좋은 모양이었나보군. 날 알아차리고 무릎을 꿇는 걸 보면 말이야.”

아딘의 말에 막심 트리마코프는 그저 떨리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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