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민란 계획 (1)
곧 구슬은 빛을 잃었다.
통신이 끊김을 확인한 아딘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구슬을 살펴보다가 한 차례 주위를 살피곤 마법 주머니에서 두루마리를 꺼냈다.
두루마리는 구슬에 대해 설명하지 못했다.
‘이것도 결국 내가 만든 세계와 무관하단 건데…….’
아딘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두루마리를 집어넣었다.
‘묵시록 종단, 엘프숲의 뱀 인간 그리고 이런 마법 도구들…… 내가 만든 기존의 세계관에 배치되는 것들인데…….’
아딘은 가만히 팔짱을 낀 채 구슬을 지켜보다가 한 차례 쓱 만져보았다.
구슬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아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지하실을 빠져나갔다.
지하실을 나서자 기다리고 있던 여인이 아딘을 힐끔 바라보더니 그를 바깥으로 안내했다.
“다비도프에게는 지난번 여관에서 보자고 말하시오.”
아딘의 말에 여인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아딘은 쓴웃음을 지으며 여관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무너진 경제를 살리지 못한다면 결국 혁명은 무너지겠지.’
을씨년스러울 정도로 고요한, 한때 번화했던 홍등가를 지나며 아딘은 생각했다.
‘비록 내부에 혁명에 반동을 줄 세력은 없다곤 하지만, 혁명이 무너지고 국가가 사분오열되면 결국 벨로디나는 또 제니스에게 혹은 샤펠에게 집어 삼켜지게 돼.’
신물을 모음으로서 아딘이 얻은 것은 힘이었다.
어떤 싸움에서도 패배하지 않을 힘.
전쟁에서 아군을 승리로 이끌어 갈 힘.
그것을 아딘은 손에 쥐었다.
거기다 로제와 안톤까지, 군사적인 측면에서 아딘은 든든한 지원군까지 갖고 있었다.
하지만 경제와 내치는 그런 힘으로 어찌 해볼 수 없는 것이다.
아무리 신물이 장엄한 황금빛 찬란함을 뿜어낸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해 후광효과를 받아 아딘이 백성으로부터 신적 존재로 추앙받는다 해도, 그들의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한다면 결국 아딘의 혁명 정부는 무너지게 될 터였다.
‘혁명 정부가 무너진다면…… 뭐, 로제하고 둘이서 그냥 돌아다닐 수는 있겠지. 하지만…….’
마냥 방랑자 생활을 하기에는, 아딘 콘스탄틴의 자아가 지닌 벨로디나에 대한 애정이 너무도 강했다.
김현수의 자아가 시종일관 아딘 콘스탄틴의 자아를 눌러두면서도, 유일하게 제대로 누르지 못하는 것이 바로 벨로디나에 대한 사랑이었다.
‘그러고 보면 참 웃겨. 나는 분명 아딘 콘스탄틴을 계획할 때, 그저 갑질만 할 줄 아는 악질 망나니 왕족으로 설정했는데 말이야. 행간에 아딘 콘스탄틴이 벨로디나를 사랑한다고 해석할 만한 걸 넣어둔 것도 아닐 테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아딘이 골목길을 걷고 있을 때였다.
[뻐억-! 뻐억-!]
묵직한 무언가로 살덩어리를 때리는 소리가 아딘의 귀에 박혔다.
아딘은 소리의 진원지를 찾아갔다.
“어윽…… 으윽……”
한 남자가 바닥에 웅크린 채 신음하고 있었다.
“이 모자란 새끼! 멍청한 새끼!”
그리고 가죽갑옷 위에 두꺼운 털옷을 입은 치안대 용병 하나가 그 남자를 발로 밟고 있었다.
“이 새끼야. 내가 꽁으로 먹고 간다 했어? 나중에 다 돈으로 준다고 했잖아!”
용병의 입에선 나름 유창한 벨로디나어가 튀어나왔다.
아딘은 그가 분명 게마인샤프트에서 고용된 비정규 용병일 것이라 추정했다.
“도, 돈이 문제가 아니잖아요.”
바닥에 웅크린 사내는 그렇게 맞고도 자기 뜻을 굽히지 않을 기세였다.
“사과…… 하세요. 제 여동생한테 몹쓸 짓을 한 거.”
“이 새끼가 근데!”
[뻐억-!]
다시 구타가 시작됐다.
벨로디나인은 쓰러져 신음했고, 용병은 적반하장격으로 성질을 부리며 폭력을 이어갔다.
‘어쩌면 나는 민초의 저런 기세에 희망을 걸어야 할 수도 있겠어.’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아딘은 천천히 용병에게로 다가갔다.
“이 새끼! 더러운 새…….”
아딘은 그대로 용병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뭐…….”
강제로 몸이 돌려진 용병의 눈앞에 주먹이 날아들었다.
[뻐억-!]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용병은 그대로 정신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아딘은 용병의 허리춤에서 칼을 뽑아 들었다.
그리곤 그것을 바닥에 웅크린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벨로디나 남성 앞에 던져 주었다.
“이, 이게 무, 무슨……”
영문을 몰라 하는 남성을 뒤로한 채 아딘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이, 이봐요.”
남성은 자리에서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그러나 이미 아딘은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춘 후였다.
“도, 도대체 무슨…….”
멍하니 아딘이 사라진 곳을 보던 사내의 눈에 곧 검과 기절한 용병이 들어왔다.
곧 사내의 눈빛이 변했다.
사내는 떨리는 손으로 검을 집어 들었다.
그리곤 천천히 용병에게 다가갔다.
용병 앞에서 사내는 잠시 주저했다.
하지만 이내 사내는 검을 하늘 높이 들었다가 아래로 강하게 내리쳤다.
곧 골목길에는 비릿한 피냄새가 퍼졌다.
* * *
광명력 993년 1월 13일 저녁.
함박눈이 내리는 가운데 아딘은 상트보가르 유일의 여관에서 조용히 술을 마시며 다비도프를 기다리고 있었다.
[똑똑똑-!]
아딘이 혼자서 술 반 통을 비웠을 무렵, 여관 문을 두드리는 인위적인 소리가 그의 귀를 때렸다.
“열려 있으니까, 들어와.”
아딘의 말에 곧 문이 열리며 빅토르 다비도프가 들어왔다.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옷과 머리에는 눈을 맞은 흔적이 없었다.
“앉게.”
아딘이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맞은편 자리를 권했다.
빅토르 다비도프는 가볍게 예를 갖춘 후 자리에 앉았다.
아딘은 그의 잔을 채워 주었고, 빅토르 다비도프는 가볍게 그에게 감사를 표한 후 첫잔을 그대로 쭉 들이켰다.
아딘은 다시 그의 잔을 채워 주었다.
그사이 빅토르 다비도프가 입을 열었다.
“쿠만에 가신 일은 잘 되셨다고 들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결과가 나왔는가를 알 수 있겠습니까?”
그 물음에 아딘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소드 마스터 둘을 구했어. 르보프가 거기 있더군. 다른 한 명은 쿠만족 전사고.”
“르보프? 안톤 르보프 말입니까?”
“그럼 다른 르보프가 있었나?”
“허어. 실종됐다길래 여기저기 찾아다녔는데, 쿠만에 있었다니…….”
빅토르 다비도프의 말에 아딘은 씩 웃었다.
“자네는 나도 그렇고 르보프도 그렇고 죽었을 거라 믿는 게 합리적인 부분에서 끝까지 비합리적인 불신을 가졌구만?”
“직접 시체를 보기 전까진 안 죽었다고 믿는 게 더 합리적인 것 아닙니까?”
“그렇다고 치지.”
아딘은 한 차례 웃으며 잔을 들었다.
빅토르 다비도프도 잔을 들었다.
잔과 잔이 허공에서 부딪혔고, 두 사람은 술을 넘겼다.
빅토르 다비도프가 술잔을 채우는 사이 아딘이 입을 열었다.
“병력은 7천 명 정도가 될 것 같네. 문제는 카판족이야.”
“카판족?”
아딘은 빅토르 다비도프에게 카판족의 와해와 자신에게 합류한 100인의 정예 전사단에 대해 간략하게 이야기해주었다.
이야기를 듣던 빅토르 다비도프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왜 전하께서 민란의 규모를 키워야 한다고 하셨는지를 이제야 이해하게 됐습니다.”
“빠르게 이해해서 좋군.”
“쿠만인이 강력한 전사인 건 맞지만, 야전에서 기병대의 역할을 대체할 수는 없으니…… 결국 기병대를 대신할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것. 그게 전하의 고민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민란으로 적 병력을 양분시킨 상태에서 전하와 소드 마스터가 개인기를 펼치고, 그 상황에서 쿠만인 용병들이 밥값을 한다면…… 흐음…….”
빅토르 다비도프는 잠시 입을 다문 채 고민에 잠겼다.
아딘은 그의 고민을 기다려주며 조용히 술잔을 비웠다.
그렇게 아딘이 다섯 번째 술잔을 비웠을 무렵, 빅토르 다비도프가 상념에서 깨어났다.
그는 아딘의 잔을 채워 주며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어쩌면…… 의외로 이번 혁명 전쟁은 우리에게 굉장히 유리할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게…… 벨로디나 최고위 귀족들 사이에서 나온 이야기인데…… 제니스 공화국이 우리를 짐으로 여기고 있다고 합니다.”
“짐?”
빅토르 다비도프는 아딘에게 자신이 들은 정보를 알려주었다.
가만히 그 이야기를 듣던 아딘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하기야 식민지는 애초에 비효율적인 과시용 정책이니까.’
제니스 공화국이 벨로디나 왕국을 괴뢰국으로 만들었을 땐, 분명 기대 수익이 있을 터였다.
문제는 현재 벨로디나가 그들의 기대 수익 이상으로 유지 비용을 발생시키고 있다는 점이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하이로드 가문이 없어진 영향도 있을 거고.’
원작에선 하이로드 가문이 적절한 금융 정책 및 공급 정책을 펼쳐서 벨로디나의 경제 상황을 안정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한 성공이 있었기에 주인공 존 크리스토퍼 하이로드가 2부에서부터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하이로드 가문이 사라진 지금, 벨로디나의 경제를 안정화시킬 금융 및 공급 전문 상인은 제니스에 없었다.
‘제이크 로버츠가 돈세탁을 잘 한다는 측면에서 금융 전문가라 할 수 있지만, 그 사람은 애초에 드라기 상단의 하수인에 불과하니…….’
빅토르 다비도프의 말마따나 어쩌면 혁명 전쟁이 굉장히 쉬워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품으며 아딘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더더욱 민란이 규모가 커져야 해.”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단순하게 왕위 계승권을 명분으로 내가 용병만 이끌고 저들을 물리치는 것과 민중이 주체가 된 민란이 주도하는 혁명 중 어떤 게 저들에겐 더 골치 아픈 존재겠나?”
아딘의 말에 빅토르 다비도프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어쩌면 정말로 아딘 콘스탄틴은 달라진 걸 수도 있겠어.’
긴가민가하는 생각에 한동안 고뇌했던 빅토르 다비도프는 마음이 한결 편해짐을 느끼며 술을 쭉 들이켰다.
아딘이 그의 잔을 채워 주며 말을 이었다.
“단순히 내가 유리 콘스탄틴을 몰아내고 제니스의 세력을 국외로 축출한다면 그건 그저 내전에 불과할 뿐이야. 왕족 간의 내전 말이야. 그렇게 된다면 제니스 입장에서는 이번의 실패를 거울삼아 새로운 전략을 수립하겠지. 가령 나를 암살하려고 한다거나.”
아딘이 술잔을 든 채 말했다.
“그리고 나에 대한 암살 시도가 성공한다면, 콘스탄틴 왕가가 단절되는 만큼 제니스 입장에서는 보다 더 쉽게 우리 벨로디나를 집어삼킬 수 있겠지.”
“그렇게 된다면 이 땅과 백성은 더한 착취에 시달리게 될 것이고 말입니다.”
“그렇지. 그렇기에 사실 이번 혁명은 민란이 주가 되어야 하네. 백성이 들고 일어난 상태에서 내가 용병과 합류해 자기들을 몰아낸다면, 이미 공화정을 운영 중인 제니스 입장에서는 함부로 다시 치고 들어오기가 어려워지겠지.”
빅토르 다비도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일리 있는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문득, 빅토르 다비도프는 한 가지 궁금증을 떠올렸다.
“전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굉장히 감동적입니다.”
“비꼬는 건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아딘은 씩 웃었다.
빅토르 다비도프가 질문을 이었다.
“그래서 문득 든 생각인데…… 혹시 혁명 이후에…… 벨로디나 왕국을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이끌어 나갈 것인지를 제게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딘은 가만히 빅토르 다비도프의 눈을 바라보았다.
“지난번에 전하께서는 기존 귀족들을 등용할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기존 귀족을 등용하지 않고 어떤 식으로 국가를 이끌어 나갈 것인지, 간단한 윤곽이라도 보고 싶습니다.”
“흐음…… 윤곽이라…….”
“적어도 제가 혁명에 있어서 민란 조직 등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될 터인데, 혁명 후 세상에 관한 윤곽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빅토르 다비도프의 진지한 말에 아딘도 미소를 지운 채 진지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미래에 대한 비전 없이는 올바른 리더가 될 수 없는 법이지.”
아딘은 술을 쭉 들이켰다.
그리고 잠시 생각을 정리한 후 은은한 미소를 지은 채 빅토르 다비도프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