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용병 (5)
<아르게 벤바사>
<광명력 967년 4월 4일 출생, 광명력 992년 11월 14일 사망, 향년 35세>
<카판족 족장이었다.>
<소드마스터였다.>
<샤펠 제국 황제 샤를 드 퐁피두의 최측근 로이에 의해 살해당했다.>
‘로이?’
아딘의 상념이 로이에 관한 의문으로 향했다.
곧 두루마리는 로이에 관한 정보를 아딘에게 제공해주었다.
<로이>
<광명력 961년 5월 19일 출생>
<광명력 982년 3월 4일 샤펠 제국 28대 황제 프랑수아 4세에 의해 샤를 드 퐁피두의 최측근 경호원으로 발탁되었다.>
<소드 마스터이다.>
정보는 딱 그것뿐이었다.
정작 아딘이 알고 싶었던, 왜 그가 푸스타 광야까지 가서 아르게 벤바사를 죽였는지에 관한 정보는 그 어디에도 나오지 않았다.
‘뭐지? 도대체 왜?’
아딘은 두루마리를 도로 말아 넣었다.
‘꼬였다. 단단히 꼬였어.’
아딘은 잠시 로이에 관한 문제는 덮어두기로 했다.
어차피 당장 해결이 불가능한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해결 불가능한 것에 목숨을 걸 이유는 없었다.
중요한 건, 믿었던 카판족이 와해됐다는 것이다.
‘정예 전사 100인이 살아남아 있다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애초에 아딘이 구상했던 카판족 궁기병 2천에 쿠만족 보병 3천은 이미 어그러진 것이다.
‘완전 땡 보병으로는…… 야전에서 위험해.’
아무리 쿠만인이 위대한 전사의 혈통을 지닌 전투민족이라 한들, 그들 역시도 살과 피로 이루어진 인간에 불과하다.
백병전에서야 압도적 우위를 점할 수 있겠지만, 상대방이 원거리에서 공세를 퍼붓는다면 쿠만인 보병만으로는 답이 나오질 않을 터였다.
‘이 일을 어쩌지? 당장 카판인을 대체할 병력을 구할 수도 없는데…….’
근처에 있던 바위에 쌓인 눈을 털어내고, 그 위에 걸터앉으며 아딘은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기동대장을 할 아르게 벤바사도 죽었고, 기동대 노릇을 할 카판족 전사도 정예 전사단 100명뿐이고…….’
아딘의 머리가 복잡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기존에 짜 두었던 큰 그림은 이미 엎어졌다.
이미 엎어진 그림 위에 새로운 그림을 덧칠하려니 그림은 더욱 엉망진창이 돼 갔다.
“크음…….”
가벼운 두통이 아딘을 괴롭혔다.
아딘은 인상을 찌푸리며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오라버니.”
그런 아딘의 모습을 바라보며 로제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딘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일단 돌아가자. 춥다.”
아딘의 말에 로제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 * *
100명의 건장한 젊은 남성들이 50마리의 튼튼한 군마를 타고 갑자기 나타난다면, 인구 100만을 자랑하는 제니스 공화국이나 샤펠 제국의 대도시에서도 화제가 되기에 충분했다.
“그 인간들 도대체 뭐야?”
“카판족이라는데?”
“카판족?”
“저기 서쪽 어디 대평원에 사는 유목민이래.”
“걔들이 여기까지 왜 와?”
광역권까지 합쳐도 인구가 채 3만을 못 넘기는 발리크 요새는 구성원 모두가 만나기만 하면 갑작스럽게 나타난 정예 전사단에 대해 떠들어댔다.
“우리 사냥터를 함부로 헤집고 다녔데.”
“뭐야, 그럼 침략자잖아?”
“사냥터지기는 가만히 있었데? 그걸 보고도?”
“싸우기 직전에 저기 여관에 머무는 벨로디나 놈이 말렸다고 그러던데?”
“벨로디나 놈이?”
그들에 관한 이야기는 곧 아딘에 관한 잡설로까지 확대됐다.
“도대체 그 벨로디나 놈은 뭐 하는 놈이래?”
“나야 모르지.”
“여관 주인 말로는 무슨 용병 이야기를 꺼냈다는데?”
“용병? 뭐야, 그럼 용병을 구하러 여기까지 온 거야?”
“벨로디나 상황이 요즘 영 수상하다던데.”
그렇게 발리크 요새 인근 마을의 쿠만인들 사이에 설왕설래가 이어지는 사이, 발리크 요새 사령관 쿤다르 아시오게의 명의로 공고문이 각 마을 광장마다 붙여졌다.
내용은 단순했다.
-용병을 모집하고 있으니 관심있는 사람은 지원하라.
“용병하면 또 우리 쿠만인이지.”
“아무래도 벨로디나에서 사달이 난 것 같아.”
용병 모집 공고를 보고 쿠만인들은 또 이런저런 이야기를 여기저기서 꺼내며 쑥덕거렸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모집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너무 오랫동안 여기 박혀 있었어. 오랜만에 가서 몸 좀 풀고 와야지.”
“벨로디나는 여기보다 확실히 볼거리도 많고 그렇다던데, 이 기회에 한번 가 보는 거지.”
“근데 벨로디나로 가는 게 확실한가?”
“아니면 어때? 그냥 이 기회에 어디든 쿠만 밖으로 나가 보는 거지.”
별다른 저항 없이 손쉽게 잡히는 짐승이 아닌, 가열차게 저항하여 잡는 맛이 있는 인간을 때려잡고자 혹은 외부 문물을 접하고자 하는 등의 욕구가 쿠만인들을 발리크 요새로 모여들게 했다.
그렇게 공고가 나가고 2주가 지났을 무렵, 애초에 아딘이 요구했던 3천 명보다 더 많은 7천 명의 지원자가 발리크 요새에 도착했다.
* * *
광명력 992년 12월 20일.
“뭐?”
여관 주점에서 불카르 아시오게는 아딘을 빤히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7천 명 전부를 용병으로 고용하겠다니?”
불카르 아시오게의 물음에 아딘은 의연한 표정으로 물을 한 모금 마신 후 대답했다.
“말 그대로요. 7천 명 모두를 용병으로 고용하겠소.”
“흐음…….”
불카르 아시오게는 팔짱을 낀 채 가만히 아딘을 바라봤다.
“왜 갑자기 4천 명이나 더 고용하겠다는 거지?”
“계산을 해보니 점령지 치안 유지 등을 위한 인력이 더 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왔소.”
“점령지 치안 유지라…… 허허허.”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처음보다 2배 이상 뻥튀기되는 게 이상하긴 했지만, 논리적으로 틀리진 않았다.
하지만 불카르 아시오게는 아딘의 말 뒤에 숨은 본심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가만히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아딘은 그런 불카르 아시오게의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돈이 좀 많이 들어갈 텐데?”
“전쟁에서 이기면 그 정도는 얼마든지 충당할 수 있소.”
“흐음…….”
물론 아딘의 말은 다소 과장이 있었다.
당장 전쟁에서 승리하고 왕국을 장악하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인플레이션 해소였다.
그리고 인플레이션을 해소하기 위해선 최대한 상품 공급을 늘리고 화폐 공급을 통제해야 했다.
즉, 한 번에 7천 명에게 급여를 지급할 여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딘은 그것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
벨로디나의 상황에 대해 자세하게까지는 모르던 불카르 아시오게도 더 이상 그것에 대해 문제삼지 않았다.
“그렇게 하지. 뭐, 우리 입장에서야 손해 볼 일은 아니니까.”
불카르 아시오게가 수락하자 아딘은 한 차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 그리고 내 딸도 용병으로 참여할 예정이야. 알아 둬.”
“따님이?”
“왜, 안 되나? 다리아 정도면 능히 장군의 기상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데?”
불카르 아시오게의 말에 아딘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장군감?’
분명 쿠만인답게 건장한 체격이긴 했지만, 장군감이란 느낌이 들 정도의 거구는 아니었다.
일반적인 벨로디나 여성은 물론 벨로디나 남성 평균보다도 큰 키에 벌어진 어깨가 일품이긴 했지만, 전장에서 큰 역할을 할 거라 기대되는 것까진 아니었다.
“일단 알겠소.”
하지만 당장 다리아의 참전을 문제 삼을 이유는 없었다.
“그래. 출병은 언제 할 생각이지?”
불카르 아시오게의 물음에 아딘은 짧게 대답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면 할까 하오.”
“나쁘지 않은 선택이군.”
그렇게 아딘과 불카르 아시오게는 대략적인 용병 고용에 관한 계약서를 벨로디나어와 쿠만어로 각각 2장 작성하여 나눠 가졌다.
불카르 아시오게는 다시 발리크 요새로 돌아갔다.
그리고 아딘은 자신을 방으로 돌아가 두루마리를 꺼내 펼쳤다.
<다리아 아시오게>
<광명력 974년 7월 7일 출생>
<불카르 아시오게의 딸>
<소드 마스터이다.>
두루마리에 적힌 4줄의 설명과 초상화.
그것을 본 아딘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소드 마스터였다고?”
애초에 아딘은 쿤다르 아시오게와 불카르 아시오게 정도나 신경을 썼을 뿐, 다리아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때문에 아딘은 이제야 다리아가 소드 마스터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러면 또 좀 전략이 달라지겠지.”
아딘은 씩 웃으며 두루마리를 접었다.
그리곤 계약서를 쓰고 남은 사슴 가죽을 펼쳐 그 위에다 숯으로 대략적인 전략에 대한 큰 그림을 써넣기 시작했다.
* * *
쿠만에서 맞이하는 연말연시는 눈보라로 시작해 눈보라로 끝났다.
눈보라를 보고 싶어 했던 로제는 처음에는 엄청나게 내리치는 눈들을 보며 신기해했지만, 그것도 며칠 계속되자 나중에는 아예 쳐다도 보지 않았다.
그렇게 한 해가 지나 광명력 993년이 됐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동안 자신의 방에서 전략을 구상하던 아딘은, 대략적인 그림을 안톤에게 일러준 후 홀로 벨로디나로 떠났다.
“2월 중순까지는 돌아올 테니, 그때까지 안톤 그대는 과거의 무력을 완전히 회복해두게. 그리고 로제 너는 최대한 효율적으로 광역 마법을 사용하는 능력을 함양해두고.”
1월 7일 정오.
여관 뒷마당에서 아딘은 안톤과 로제에게 그렇게 당부했다.
“반드시 전하께서 흡족하실 만한 실력을 구축해 놓겠사옵니다.”
“알았어요, 오라버니. 조심히 다녀오세요.”
두 사람의 배웅을 받으며 아딘은 불칸의 갑옷을 입고 그대로 서쪽으로 날아올랐다.
그렇게 사흘간 쉬지 않고 비행한 끝에 1월 10일 밤, 아딘은 상트보가르에 도착했다.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아딘은 항구 윗길을 찾아갔다.
“으스스하군.”
사람 하나 다니지 않는, 한때 숱한 뱃사람이 숱한 여인과 짧은 추억을 나누었던 공간을 홀로 거닐며 아딘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가만 보자…… 여기겠구나.”
그러다 아딘은 한 건물에서 멈춰섰다.
“보자, 신호가…….”
[똑똑-!]
[똑똑-!]
[똑똑똑똑-!]
아딘은 빅토르 다비도프가 알려준 대로 세 차례 일정한 리듬에 맞춰 문을 두드렸다.
잠시 후, 문이 열리며 한 여인이 얼굴을 보였다.
“다비도프가 여기로 오면 된다고 말했는데 말이오?”
아딘의 말에 여인은 잠시 주위를 살피더니 그에게 턱짓했다.
아딘은 열린 문으로 들어갔고, 여인은 아딘이 들어오자마자 문을 닫았다.
“따라와요.”
여인은 무뚝뚝한 목소리로 아딘에게 말하며 앞장섰다.
어딘지 모르게 차갑기만 한 그녀의 모습에 아딘은 쓴웃음을 지으며 그 뒤를 따라 지하실로 내려갔다.
여인은 지하실로 내려가자마자 수정구슬에 손을 올렸다.
[웅웅웅웅-!]
수정구슬이 여인의 마력에 반응했다.
그 모습을 여인의 뒤에서 가만히 아딘은 지켜보기만 했다.
잠시 후.
“무슨 일이지?”
수정구슬에서 빅토르 다비도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수령님, 그가 찾아왔습니다.”
그 말을 남기고 여인은 자리를 비켰다.
지하실에 홀로 남게 된 아딘은 수정구슬을 신기한 표정으로 바라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비도프?”
“오랜만입니다, 전하.”
“대충 2개월 만인가?”
“목소리를 들어보니, 쿠만에 가셨던 일은 잘 해결을 보신 것 같은데, 맞습니까?”
“잘 해결했지. 근데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네.”
“문제라 함은……”
“아무래도 민란의 비중을 좀 높여야 할 것 같다네.”
“민란의 비중을 높인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잘 와 닿지 않습니다.”
“나도 수정구슬을 보고 이야기하고 싶은 내용은 아닐세. 그러니 자네와 만나서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내가 그리로 갈까? 아니면 그대가 이리로 올 텐가?”
“제가 지금 어디 있는 줄 알고 오신다고 하시는 것입니까?”
빅토르 다비도프의 물음에 아딘은 슬쩍 미소를 지었다.
“자네가 말해주는 곳에 있겠지.”
이미 두루마리로 그가 콘스탄티노바의 어느 다락방에 숨어 지내는 것을 확인했지만, 아딘은 괜히 시치미를 뗐다.
“됐습니다. 제가 그리로 가겠습니다. 이틀 정도만 기다리십시오.”
“그렇게 하지. 만나는 장소는 어디가 좋겠나?”
“지난번 여관은 이미 한 번 노출이 됐습니다. 제니스 측에서 눈치를 챘는지까지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만일을 대비해 일단 제3의 장소를 알아본 후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하지. 기다리고 있겠네.”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