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용병 (4)
정말 먼 길을 쉬지않고 달렸다.
절대로 녹지 않는 영구 동토라고 아주 어렴풋하게나마 알려진 쿠만에 도착한 카판족 정예 전사단은 생각보다는 그런대로 살 만해 보이는 곳을 보며 비로소 고단한 여정이 일단락됐다는 안도감을 품게 됐다.
“일단 말들을 좀 먹여. 그리고 우리도 제대로 된 걸 좀 먹자.”
야민 벤키시의 명령에 따라 전사들은 살아남은 50마리의 말들에게 풀을 먹였다.
바닥 곳곳에 자라난 잡초부터 솔잎까지, 말이 먹을 만한 것은 닥치는 대로 찾아냈다.
그렇게 말들이 어느 정도 배를 채웠을 때쯤, 야민 벤키시는 자신들이 먹을 식량 확보에 나섰다.
“멧돼지다!”
“노루도 있어!”
“저기 숫사슴이다!”
유목민 출신답게 그들의 시력은 굉장했다.
나무와 나무 사이에 숨어 있던 짐승들은 순식간에 카판족 전사들의 시야에 포착됐고, 그 즉시 놈들에게는 화살이 날아들었다.
“대장. 이 정도면 며칠 동안 두고두고 먹을 수 있겠는데요?”
멧돼지만 10마리, 노루 20마리, 숫사슴 7마리를 잡은 끝에 전사들은 사냥을 멈췄다.
“기본적으로 되게 추운 지역이니까, 저것들 좀 남겨둔다고 상하고 이러지는 않을 거 아닙니까.”
“오랜만에 좀 마음 놓고 먹어봅시다, 대장!”
“그래요! 콘스탄틴을 찾는 건 찾는 거고, 일단 먹고 봅시다!”
열흘이 넘는 시간 동안 육포만, 그것도 아끼고 아껴서 먹었던 전사들의 아우성에 야민 벤키시는 결국 그들의 요구를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도 본인부터가 굶주린 상태였다.
그렇게 카판족 정예 전사 100인은 10명씩 둘러앉아 사냥한 짐승을 손질했고, 요령껏 불을 피워 통으로 요리해 먹기 시작했다.
양념도, 술도, 향신료도, 곁들일 탄수화물도 없는, 오로지 순수한 육식이었지만 그래도 그들은 잠시나마 행복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행복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응?”
정예 전사단이 둘러앉은 조그만 광장.
그 광장을 내려다볼 수 있는 야트막한 언덕 위로 50명의 거구들이 등장했다.
“모두 전투 준비!”
호의적으로 보이지는 않는 거구들의 등장에 야민 벤키시는 본능적으로 전사들에게 전투 태세를 갖출 것을 명했다.
자리에 앉아 미친 듯이 먹는 것에 열중하던 전사들은 야민 벤키시의 명령이 떨어짐과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나 화살을 활시위에 먹였다.
‘쿠만족?’
야민 벤키시는 긴장한 표정으로 언덕 위에 나타난 거구들을 바라보았다.
숫자는 50명.
하나하나가 거대했고, 단단해 보였다.
‘일단 호의적인 모습은 아니다.’
한편으로는 당연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떻게 보면 저들의 영역에 들어와 함부로 사냥을 한 것이니까.
‘그래도 대화는 통하지 않을까?’
야민 벤키시는 살짝 인상을 찌푸린 채 쿠만인 사냥꾼들을 향해 더듬더듬 벨로디나어로 이야기했다.
“나, 나는 키시의 아들 야민이다.”
그가 벨로디나어로 이야기하자 쿠만인들 사이에 살짝 동요가 일었다.
야민 벤키시가 말을 이었다.
“나는 그대들과 싸우고 싶지 않다.”
“싸우고 싶지 않다면서 왜 남의 사냥터를 함부로 휘젓고 다닌 거야!”
나무에 쌓인 눈이 떨어질 정도로,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야민 벤키시가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았다.
사냥꾼 가운데 가장 덩치가 큰 자, 불카르 아시오게가 말 위에서 거대한 칼을 든 채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벨로디나 말이 어색한 걸 보니 벨로디나 놈은 아니고, 도대체 너희들 뭐 하는 것들이야!”
불카르 아시오게의 두 번째 외침에 일순간 말들 가운데 일부가 흥분하기 시작했다.
‘쿠만인의 목소리에는 어떤 신비로운 힘이 있다고 전설로 듣기는 했는데…….’
심장을 벌렁거리게 만드는 울림에 야민 벤키시는 마른침을 삼켰다.
하지만 그래도 이야기는 해야 했다.
여기서 충돌이 발생하면, 당장 싸움에서 이길지도 자신할 수가 없었고 이긴다고 하더라도 장기적으로는 결국에는 이 땅에서 모두 죽게 될 테니까.
“먼저 그대들의 사냥터 함부로 사용한 것,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 오랫동안 이동하느라 지쳤고 배고팠다. 양해 바란다.”
야민 벤키시의 말에 불카르 아시오게는 더욱 눈알을 부라렸다.
“그럼 먼저 양해를 구하고 했어야지!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너희들 뭐야! 뭐 하는 것들이야!”
불카르 아시오게의 기세에 살짝 눌리면서도 야민 벤키시는 꿋꿋하게 서서 말을 이었다.
“우리는 카판인이다. 카판족 정예 전사단 100인이 우리다.”
“뭐? 카판?”
불카르 아시오게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야민 벤키시가 말을 이었다.
“우리는 한 남자를 찾고 있다. 아딘 콘스탄틴. 그 남자가 여기에 있는가?”
“아딘 콘스탄틴?”
불카르 아시오게의 표정에 의구심이 잔뜩 서렸다.
‘카판족이면 여기랑 완전히 반대편에 있는 것들인데, 거기 것들이 왜 여기까지 와서 그 인간을 찾는 거지?’
불카르 아시오게는 한동안 말없이 잔뜩 긴장한 카판족 전사들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때 하늘에서 무언가가 떨어졌다.
* * *
“사냥터지기가 너무 시간을 지체하는 것 같사옵니다.”
여관 1층 주점.
구석 자리에 세 사람이 모여 식사를 하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안톤의 말에 아딘은 씩 웃었다.
“그렇게 큰소리치고, 식탁을 손으로 내려치고서 또 바로 올 수는 없잖아? 한, 사나흘 정도 시간이 필요하겠지. 우린 그저 여유롭게 기다리기만 하면 돼.”
아딘의 말에 안톤은 여전히 우려스러운 표정을 하면서도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라버니, 근데 쿠만족이 그 정도로 대단한가요?”
“응?”
“여기까지 오셔서 계속 오라버니는 기다리기만 하시잖아요. 그 정도로 쿠만족이 대단한가요?”
로제의 물음에 아딘은 미소를 지었다.
“대단하지. 어느 정도냐면, 그 순수하게 근력만 따진다면 오크랑 비등비등할 정도야.”
“오크요?”
로제는 그다지 감흥이 없다는 표정이었다.
‘하기야 자기 손으로, 그것도 마법으로 벌레 죽이듯 죽였으니…….’
도리어 반응을 보인 쪽은 안톤이었다.
“오, 오크라니…… 저, 전하께서 아가씨와 함께 오크를 보셨사옵니까?”
안톤의 반응에 아딘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에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렝고스에서 오크와 접점이 있었다고.”
“저, 전하께옵서는 그저 슈드 자치령부터 렝고스까지 두루 다니셨다고만 말씀하셨사옵니다.”
“그랬나?”
그러면서 아딘은 안톤에게 간략하게 렝고스에서 있었던 일들을 알려주었다.
아딘의 이야기를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듣던 안톤은 아딘이 토리 잭슨을 구해주고 그녀를 집으로 복귀시켰다는 이야기를 할 때부터 진지한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딘의 이야기가 끝났을 무렵, 안톤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잭슨 가문은 본래부터가 제니스 서부에서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자들이옵니다. 그런 자들에게 은혜를 입었다면, 어떤 식으로든 추후에 외교적으로 이용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옵니다.”
“뭐, 그건 일단 우리의 당면 과제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다음에 생각해도 늦지는 않을 것 같군.”
그렇게 쿠만족의 강함에 대한 로제의 의문에서 시작된 대화가 차후 잭슨 가문을 활용한 대제니스 외교에 관한 이야기로 마무리될 때쯤, 여관 문이 열렸다.
“아! 때마침 여기 계셨군요!”
사냥터 파수꾼이 구석 자리에 앉은 아딘을 보곤 부리나케 그에게로 달려왔다.
“사냥터지기께서 찾아올 것 같기에 여기 있었는데…… 바쁘신가 보오?”
아딘의 말에 파수꾼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급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큰일 났습니다.”
큰일이란 말에 아딘과 안톤, 로제의 표정이 급격히 굳었다.
“지, 지금 웬 마적 떼들이 손님을 찾으며 난동을 피우고 있습니다.”
“마적 떼? 나를 찾고 있다고?”
아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설마 카판족이?’
아딘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일어나자 로제와 안톤도 차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둘러 주십시오. 사냥터에서…… 잘못하면 전쟁입니다.”
파수꾼의 말에 아딘은 고개를 끄덕이며 로제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르보프. 그대는 만일에 대비해 이곳을 지키고 있게.”
따라 나서려던 안톤은 아딘의 명령에 고개를 푹 숙이며 주점에 남았다.
“어디지?”
여관 밖으로 나온 아딘이 파수꾼에게 물었다.
“저기 북서쪽 구릉 너머입니다. 따라오십시오.”
파수꾼의 말에 아딘의 시선이 북서쪽으로 향했다.
[파아앗-!]
그 순간, 아딘은 황금빛에 휩싸였다.
잠시 후, 황금빛이 사라졌을 때, 불칸의 갑옷으로 무장한 아딘은 곧 하늘로 날아올랐다.
로제는 아딘과 함께 동시에 날아올랐다.
“어……?”
순식간에 북서쪽으로 사라지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파수꾼은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기만 할 뿐이었다.
* * *
[쿠웅-!]
강한 진동파와 함께 아딘은 쿠만족과 카판족 사이에 착륙했다.
뒤이어 로제가 아주 부드럽게 착지했다.
불칸의 갑옷을 보자 카판인들은 모두 화살을 아래로 내렸다.
“저건 또 뭐야?”
그리고 불카르 아시오게는 긴장한 표정으로 아딘을 바라봤다.
곧 아딘은 불칸의 갑옷을 벗었다.
“응? 저런 무기가 있었나?”
불카르 아시오게의 의문에 대답이라도 하듯, 아딘은 가만히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내가 대화를 해볼 것이니, 잠시 기다려 주시오!”
아딘의 말에 불카르 아시오게는 사냥꾼들에게 긴장을 풀 것을 명령했다.
‘다행이야.’
파수꾼의 호들갑과는 달리 유혈사태는 발생하지 않은 상태였다.
‘저 사람은…… 분명 그 백인대장이라는 사람인데……’
야민 벤키시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던 아딘은 양자 사이에 전운이 가라앉은 것을 확인하고는 천천히 야민 벤키시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그대는 백인대장 아닌가?”
아딘의 물음에 야민 벤키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근데 어찌 여기까지 와서 소란을 일으킨단 말인가? 내가 분명히 그대들을 찾으러 갈 테니 기다리라 했을 텐데! 자칫 서로 손을 잡아야 할 아군끼리 피바람이 불 수도 있었어!”
“족장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어찌…… 뭐?”
아딘의 표정이 굳었다.
“족장님께서 괴한에 의해 살해당하셨습니다.”
그때부터 야민 벤키시는 아딘에게 그가 떠난 이후 있었던 일들에 대해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르게 벤바사의 죽음, 장로들의 분열, 내전 그리고 디아스포라까지.
이야기를 하던 와중에 결국 야민 벤키시는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그리고 이야기를 듣던 아딘은 살짝 창백해진 표정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도대체 누가…… 아르게 벤바사를…….’
아르게 벤바사는 소드마스터였다.
나이가 나이인 만큼 노련함을 부족하겠지만, 분명히 검기를 다룰 줄 아는 소드마스터였다.
그런 그를 해치운 괴한.
‘도대체 누가?’
아딘은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일단 저들을 쉬게 해야 해.’
아딘은 야민 벤키시를 뒤로한 채 불카르 아시오게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들은 나와 뜻을 함께하기로 한 카판족의 정예 전사들이오. 그대들과 소통이 부족해 시작이 좋지는 않았지만, 저들과 그대들은 한 깃발 아래에 있단 말이오.”
불카르 아시오게는 인상을 찌푸렸다.
“한 깃발 아래에 있다면서 왜 함부로 남의 사냥터를 침범한단 말인가! 왜!”
“오해가 있었던 거요. 그 부분에 대해선 대승적으로 넘어가 주시기 바라오.”
불카르 아시오게는 불만 섞인 표정으로 아딘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카판족 정예 전사들과 싸워봐야 당장 이긴다는 보장도 없었고, 설령 이긴다 하더라도 딱히 얻을 것도 없었다.
더구나 아딘이 중간에 서서 하나의 깃발 운운하고 있는 만큼, 여기서는 물러나는 것이 상책이었다.
“나중에 사냥터 침범에 관한 건에 대해선 톡톡히 값을 받아낼 것이오!”
그렇게 불카르 아시오게가 물러나려 할 때, 아딘이 그의 발을 잡았다.
“저들에게 거처를 좀 제공해 주시오.”
불카르 아시오게의 인상이 순간 구겨졌다.
하지만 그는 결국 한숨을 내쉬며 아딘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쟤들 데리고 대충 발리크 요새 근처 빈집에 좀 넣어 놔라.”
불카르 아시오게는 부하들에게 그렇게 명령한 후 말을 타고 사라졌다.
“고맙소!”
사라지는 불카르 아시오게의 등을 향해 그렇게 고함친 후 아딘은 야민 벤키시에게 사냥꾼들을 따라가라 이야기했다.
그리고 사냥꾼들과 정예 전사들이 멀어지자 아딘은 마법 주머니에서 두루마리를 꺼내 펼쳤다.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