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용병 (3)
불카르 아시오게의 말에 아딘의 얼굴에 살짝 걸쳐 있던 미소가 천천히 사라졌다.
물론 미소만 사라졌을 뿐이었다.
그 이상의 행동을 아딘은 하지 않았다.
그저 담담한 표정으로 불카르 아시오게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왜, 내 제안이 마음에 들지 않나?”
그렇게 이야기하며 불카르 아시오게는 슬쩍 딸을 바라보았다.
다리아는 말없이 살짝 시선을 아래로 내려 원탁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살짝 붉게 달아오른 그녀의 귓가는 지금 그녀가 지닌 감정 상태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아딘 또한 슬쩍 그녀를 바라본 후 다시 불카르 아시오게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 문제는…… 너무 나간 것 아닌가 싶은데 말이오?”
“나는 보다 확실한 길을 생각해서 말하는 것뿐이지. 결정은 그대가 하는 것이고.”
“이 자리에서 그렇다, 아니다 정할 만큼 간단한 문제는 아닌 것 같다는 말씀만 드리겠소.”
“그러시든가.”
의외로 불카르 아시오게가 간단하게 발을 빼자 아딘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눈치 싸움인가? 아니면, 쿠만인 특유의 단순한 습성 탓인가?’
잠시 고민하던 아딘은 이내 표정을 가라앉혔다.
불카르 아시오게가 결혼 동맹에 관해 일단 넘어가기로 한 이상, 진짜 중요한 이야기를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일단 내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면, 이제 구체적인 실무 협상을 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은데 말이오?”
아딘의 말에 불카르 아시오게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가 요구한 3천의 용병, 충분히 동원할 수 있네. 뭐, 소집까지 시간은 걸리겠지만, 늦어도 올해가 지나가기 전에는 가능하지.”
아딘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체 인구는 100만이 좀 넘지만, 밀도는 엄청나게 낮은 것이 쿠만인인 만큼 3천의 용병을 소집하기 위해선 시간이 걸릴 수밖에는 없을 터였다.
그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문제는 그 대가라는 게 너무 추상적이야. 연합 왕국을 만들어 우리 종족을 거대한 국가의 일원으로 받아들인다는 발상은, 칼밥을 먹어야 할 용병들에게는 굉장히 추상적인 말이야.”
“물론 개별 용병들에게도 충분한 대가가 지급될 것이오. 선금으로 2만 골드를 지불할 생각을 갖고 있기도 하고.”
“2만 골드라…… 예전 같았으면 제법 큰 돈이겠지만 말이야.”
“물론 전후에 잔금을 지급할 예정이오. 다만, 그 경우에는 보다 더 실무적인 라인에서 협의가 필요하다는 게 내 생각이고 말이오.”
“협의?”
“전사자 유족에 대한 보상 및 각자의 전공에 관한 성과급 등등.”
“허!”
불카르 아시오게는 한 차례 크게 웃었다.
그리곤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거는…… 진짜 문자 그대로 나중에 이야기해도 늦진 않을 것 같아.”
“맞는 말이오.”
“근데 사실 봐서 알겠지만 여기는 돈이 별로 쓸모가 없는 지역이야. 예전에 벨로디나하고 무역을 좀 할 때나 결제 대금을 지급하기 위해 돈이 필요했지만, 지금은 아예 그마저도 필요 없지.”
불카르 아시오게의 말대로였다.
당장 안톤만 하더라도, 아딘과 재회하기 전까지는 사냥감을 여관주인에게 건네고 그 대가로 방과 식사를 대접받았으니까.
“사실 그래서 연합 왕국이 진정으로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지.”
다소 논리적 비약이 심한듯한 아딘의 말에 불카르 아시오게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건 무슨 소리지?”
“내가 구상하는 연합 왕국은 단순히 지금처럼 각자가 각자의 공간에만 머무르며, 말로나 연합이라는 표현을 쓰는 그런 체제가 아니오.”
불카르 아시오게는 가만히 아딘을 바라봤다.
아딘은 물을 한 모금 들이켠 후 말을 이었다.
“쿠만인 용병 중 원하는 사람은 전쟁이 끝난 후 현재 벨로디나 왕국의 영역에 정착하게 될 것이오. 당당한 연합 왕국의 시민으로서 말이오.”
“……시민?”
불카르 아시오게가 굳은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아딘을 바라보았다.
“자네, 그게 무슨 말인줄 아나?”
아딘은 담담하게 그의 말을 들을 뿐이었다.
“우리 쿠만인을 그대 벨로디나인에 동화시키겠다는 선언을 이 자리에서 하는 건 좀 아니지 않나?”
* * *
“조금만 더 버텨라! 하루만 더 달리면 된다!”
야민 벤키시의 말에 99인의 정예 전사들은 어금니를 꽉 깨물며 말고삐를 더욱 옥죄었다.
[히히히힝-!]
그야말로 강행군이었다.
드넓은, 눈으로 덮인 벌판을 달리고 또 달리는 와중에 말들 중 절반이 죽어버렸다.
그리고 살아남은 말들은 죽은 말들이 태우던 전사까지 태우며 이중고를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민 벤키시는 속도를 늦추지 못했다.
서서히 내리기 시작하는 눈발의 기세가 심상찮았기 때문이었다.
‘어떻게든 아딘 콘스탄틴과 만나야 한다. 그래서 어떻게든 그의 계획에 동참하여 우리가 전공을 세워야 한다. 그래야…… 그래야…….’
100인의 정예 전사는 부족의 분열을 막지 못했다.
그랬기에 지금 야민 벤키시는 어떻게든 아딘의 밑에서 공을 세워 아딘이 만들겠다는 새로운 벨로디나 왕국의 깃발 아래 흩어진 동족을 모으는 것을 꿈꾸고 있었다.
그리고 그 꿈이 이루어지기 위해선 어떻게든 아딘과 만나야 했다.
“하아-!”
마음이 급한 만큼 야민 벤키시는 말을 더욱 재촉했다.
[히히히힝-!]
순식간에 얼어붙는 더운 콧김을 내뿜으며 야민 벤키시의 말은 거칠게 눈밭을 달리고 또 달렸다.
* * *
쿠만인.
고대 거인족의 직계 후손인 이들은 벨로디나인과 유전적으로 큰 차이가 없는 만큼, 얼마든지 그들 속에 섞여들 수 있었다.
실제로 쿠만족 역사에서 벨로디나인 혹은 그 외 민족과 쿠만인 사이에서 아이들이 나오는 경우가 제법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쿠만인이 여전히 그들만의 혈통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그들이 결코 쿠만 바깥으로 나가지 않기 때문이었다.
덩치만 큰 사냥꾼이 나가봐야 뭐 하겠냐? 용병이나 깡패밖에는 더 하겠냐?
이게 대대로 쿠만인의 세계관을 지배하던 사고방식이었다.
그리고 지금 아딘은 그런 쿠만인의 사고방식을 깨겠다는 선언을 했다.
“용병으로 참가한 자들이 살아남아 거금을 받는다면, 그들에게는 충분한 정착 비용이 되겠지. 그들 중 가족이 있는 자들은 가족을 부를테고 말이야.”
불카르 아시오게는 술을 쭉 들이켰다.
곁에 있던 다리아가 그의 잔을 채웠다.
“그렇게 그들이 성공적으로 벨로디나의 도시에 정착한다면, 그다음 세대에 이르러서는 쿠만에서 벨로디나 도시로 이동하는 인구가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하겠지. 성공한 동족이 있으니까.”
불카르 아시오게가 다시 잔을 비웠다.
다리아가 또 잔을 채웠다.
“그런 식으로 이르면 3세대, 늦어도 5세대 안에 쿠만은 사람보다 호랑이 보는 게 더 쉬운, 유령의 지방이 되겠지. 그리고 우리 쿠만인은 자신의 조상을 잊고, 정체성을 상실한 채 벨로디나인처럼 될 것이고 말이야.”
[탕-!]
말을 마친 불카르 아시오게가 원탁을 손바닥으로 내려쳤다.
가볍게 친 것임에도 식기 일부가 엎어지며 원탁에 음식이 널브러졌다.
“기가 차는군. 이제 보니 우리한테 용병을 구하러 온 게 아니라, 우리 동족 전체를 집어삼키러 온 거였어.”
불카르 아시오게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며칠 후에 다시 오지.”
그리고 그는 여관에서 나가 버렸다.
남아 있던 다리아는 엉거주춤하게 선 채 아딘과 문을 바라보다 아딘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곤 황급히 아버지를 따라 나갔다.
사라진 자들의 여운을 바라보며 아딘은 피식 웃었다.
“거 어차피 쿤다르 아시오게하고 협의한 다음에 다시 올 거면서 무슨 열혈 민족주의자처럼 행동하고 있을까?”
그것이 만약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한 외교적 행동이었다면, 굉장히 쓸모없는 짓이었다 생각하며 아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딘이 2층으로 올라가자 주방에서 숨죽인 채 그 모습을 바라보던 주인이 황급히 나와 원탁을 치우기 시작했다.
* * *
“뭐?”
쿤다르 아시오게는 여우 수프를 먹다 말고 그릇을 내려놓았다.
그런 그를 향해 불카르 아시오게는 말했다.
“말 그대로입니다. 참가한 용병에게 벨로디나에 정착할 기회를 준다고 합니다.”
“허어. 이 인간이 진짜…….”
쿤다르 아시오게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래서, 넌 뭐라고 했는데?”
“며칠 후에 다시 간다고 이야기하고 나왔습니다.”
쿤다르 아시오게는 미심쩍다는 표정으로 아들을 바라봤다.
“너는 따로 생각이 있나 보구나?”
불카르 아시오게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생각, 한번 들어나 보자.”
쿤다르 아시오게의 말에 불카르 아시오게는 한 차례 헛기침을 한 후 입을 열었다.
“솔직히 아버지도 동의하는 부분일 것 같은데, 우리가 언제까지 여기에 처박혀 있을 순 없잖습니까?”
쿤다르 아시오게는 계속 말해 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는 사실 나갈 예정이었습니다.”
“내가 죽고 네가 이 자리에 앉으면?”
“뭐, 아버지가 특별하게 나갈 생각이 없으셨다면 말이죠.”
“뜨거운 효자 나셨구나. 허허허.”
“뭐, 아무튼 원래는 좀 과격한 방법으로 나갈 예정이었습니다. 싸울 수 있는 것들 다 모아서 아예 전쟁을 벌일 생각이었죠.”
“근데?”
“근데 그렇게 되면 우리가 점령군이 되는 거 아닙니까?”
“점령군보다는 차라리 정착민이 낫다?”
“그겁니다.”
쿤다르 아시오게는 혀를 차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불카르 아시오게가 말을 이었다.
“솔직히 여기에 처박혀 있으면 우리 쿠만인은 언젠간 멸종될 겁니다. 당장 저기 깊은 산골짜기에는 3대째 친족간 통혼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지금이야 완전 산골짜기에서나 그러지만 나중에 가면 여기서도 그런 일이 일어날 겁니다.”
쿤다르 아시오게는 가만히 팔짱을 꼈다.
“차라리 이 기회에 최대한 쿠만 밖으로 벗어나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닌 것 같습니다.”
“벗어나서 벨로디나의 도시에 정착하면, 그렇게 우리 종족의 정체성은 사라지는 거고?”
“그건 그때 가서 후손들이 알아서 하지 않겠습니까?”
“책임은 후손에게 미루고, 네가 원하는 과실은 네가 다 받아먹고. 하! 대단한 조상님 나셨어.”
쿤다르 아시오게는 다시 여우 수프 그릇을 들었다.
“너 알아서 해. 어차피 앞으로 종족을 이끌 지도자는 너니까.”
쿤다르 아시오게의 허락에 불카르 아시오게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언제 다시 찾아갈 거냐?”
“뭐, 한 사나흘 지나서 가야지 적당히 제 면이 세워지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쿤다르 아시오게는 피식 웃으며 그대로 여우 수프를 쭉 들이켰다.
* * *
광명력 992년 12월 7일 오전.
“슬슬 갈 때가 됐구만.”
불카르 아시오게는 자신의 집에서 나오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어차피 결론은 정해져 있었다.
불카르 아시오게는 예전부터 쿠만족의 거점을 서부로 옮기고 싶어 했던 만큼, 아딘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저 자신이 먼저 조급함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이런 식으로 시간을 미룰 뿐이었다.
“어차피 자기도 급하긴 마찬가지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그가 막 여관으로 가려 할 때였다.
“대장님! 대장님!”
사냥터 파수꾼 하나가 다급한 표정으로 불카르 아시오게에게 달려왔다.
“뭐야? 호랑이가 떼거지로라도 나타난 거야?”
불카르 아시오게의 물음에 파수꾼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그의 앞에 멈춰 섰다.
“마, 말…… 말을 탄 인간들이 지금 사슴이랑 멧돼지를 마구잡이로 사냥하고 있습니다.”
순간 불카르 아시오게의 표정이 굳었다.
“뭐?”
“마, 말을 탄 인간들이 갑자기 오늘 새벽부터 난입해서 멧돼지부터 사슴까지 닥치는대로 화살로 잡고 있습니다.”
“이 새끼들이…….”
불카르 아시오게는 정색하며 마구간지기에게 말을 가져오라 손짓했다.
곧 황색 말이 나오자 불카르 아시오게는 그 위에 올라타며 파수꾼에게 명령했다.
“너는 가서 애들 50명 정도 모아와라. 빨리!”
“네, 네!”
불카르 아시오게는 그대로 말을 몰아 사냥터로 나아갔다.
“이 새끼들이……!”
단 한 차례도 침략받지 않은 대지.
비록 그 이유가 구석진 곳에서, 딱히 얻을 것도 없는 자리에 터전이 있었던 것도 있었지만, 어쨌건 단 한 번도 침략당하지 않았다는 것은 쿠만인 모두가 지닌 자부심의 근원이었다.
그런 곳이 침략당했다.
더구나 자신이 관할하는 사냥터가.
불카르 아시오게의 얼굴이 점차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