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8 용병 (1)
광명력 992년 12월 1일 아침.
로제는 눈을 떴다.
용의 힘이 그녀의 몸 상태가 악화되는 것을 막아준 덕분에, 일주일가량 섭식을 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상태는 아주 좋았다.
물론 허기 자체는 어찌할 수 없었던 만큼, 아딘은 깨어난 그녀에게 성대한 상을 차려주었다.
“감사하옵니다. 전하께 충성을 다하듯, 아가씨도 마찬가지로 지극정성으로 섬기겠사옵니다.”
깨어난 로제에게 안톤은 무릎을 꿇고 머리를 땅에 박았다.
오체투지보다는 약하지만, 아딘을 제외한 이에게 그가 표할 수 있는 최대한의 예의를 로제에게 보였다.
그런 안톤에게 로제는 귓속말로 한마디 할 뿐이었다.
“약속이나 지키세요.”
안톤은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발리크 요새.
쿠만족의 정치적 중심지이자, 오랜 세월 외적의 진입을 허락하지 않은 철옹성.
그곳의 중심부에는 제법 높은 탑이 하나 있다.
그리고 그 탑의 최정상부에는 쿠만족장 쿤다르 아시오게의 거처 겸 집무실이 자리하고 있다.
“외지인이 일주일 넘게 우리의 터전에 있는데, 어찌 그냥 두고만 보고 계십니까?”
광명력 992년 12월 1일 정오.
여우를 끓여 만든 수프로 점심을 해결하는 쿤다르 아시오게에게 제사장이 따지고 있었다.
“그들이 오고 나서부터 신령께서 나의 부름에 응하시지 않고 계신단 말입니다. 이는 분명 우리 부족 전체에게 위험한 일이란 말입니다.”
제사장의 항의에도 쿤다르 아시오게는 그저 귀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묵묵히 수프만 떠먹을 뿐이었다.
“족장님!”
제사장은 갑갑한 마음에 목청을 높였다.
[딸랑~ 딸랑~!]
그러면서 동시에 목걸이를 흔들었다.
그러자 목걸이에 달린 방울들이 움직이며 경쾌한 소리를 냈다.
그제야 쿤다르 아시오게는 제사장을 바라봤다.
“거 신령님이 안 오시면, 다른 잡귀라도 부르시든가.”
“네?”
제사장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신령님을 부르는 사람이 자네 하나만은 아닐 테고, 아무래도 바쁘시겠지. 그러니 점을 치고 싶거들랑 잡귀라도 부르든가 하란 걸세. 아니면 제기라도 깨끗이 닦고 있든가.”
“족장님! 신령님이 들으시면 부정 탈 소리를 하고 계십니까!”
“부정 탈 소리인지 아닌지는 신령님께서만 아시겠지.”
입구에서 들려온 제3자의 목소리에 제사장의 고개가 획 돌아갔다.
쿤다르 아시오게의 젊었을 때 모습을 한 누군가가 제사장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며 들어오고 있었다.
“어서 오거라.”
쿤다르 아시오게의 환영에 남자, 불카르 아시오게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인 후 제사장과 약간 떨어진 곳에 앉았다.
“여우 수프 좀 먹어라.”
“괜찮습니다. 먹고 왔습니다.”
“여우 수프를 먹었다는 게냐? 아니면 점심을 먹었다는 게냐?”
“강바닥에서 자고 있던 거북이 하나를 삶아서 먹고 왔습니다.”
“오호. 내가 말년에 손주를 하나 더 보겠구나.”
“말년 같은 소리…… 지금 제가 애를 낳으면 그 애가 애를 낳을 때에도 아버님은 정정하실 겁니다.”
“끔찍한 소리를 하는구나. 허허허.”
부자간에 오가는 다정한 대화에 제사장이 낄 자리는 없었다.
제사장은 가볍게 콧방귀를 뀐 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아무튼 나는 분명히 경고했습니다. 외지인들이 계속 여기에 있는 이상, 신령님께서 응답해 주시지 않는다는 것을요!”
그리고 제사장은 거칠게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그가 사라지고, 문이 닫히자 불카르 아시오게가 콧방귀를 뀌었다.
“신령은커녕 잡귀하고도 통한 적 없을 인간이 하여간 허풍은.”
“내비둬라. 안 그래도 요즘 발리크 요새 내에서 저 양반 권위가 땅바닥으로 떨어졌는데, 당연히 저렇게라도 나와야지. 세상에서 제일 쉬운 게 남 탓 아니냐.”
“남 탓도 사람 봐 가면서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게 됐으면 사기도 상황 봐 가면서 쳤겠지.”
쿤다르 아시오게의 말에 불카르 아시오게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올여름, 예기치 못한 폭염을 제대로 예언하지 못했던 제사장의 실책 이후 그의 권위는 현재 바닥을 기는 중이었다.
발리크로부터 비교적 거리가 먼 곳에 자리한 산골 촌락에서야 여전히 제사장의 권위가 먹힌다지만, 적어도 이곳, 발리크 요새 부근에 형성된 도시에서는 더 이상 그의 말이 먹히지 않았다.
“예전에는 부정 탄다고 보이는 즉시 태워지던 동방광명교의 상징물이 대놓고 대문에 걸리고 있어. 당연히 위기감이 느껴지겠지.”
“흥. 그러게 평소에 좀 겸손하시지. 하여간…….”
“저 인간 험담하려고 온 건 아닐 거고. 그래, 알아는 봤고?”
쿤다르 아시오게의 말에 불카르 아시오게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누구야. 외팔이하고 친하게 지내는 걸로 봐서 벨로디나 사람인 건 확실합니다.”
“거 외팔이라 부르지 말라니까.”
“그럼 뭐라 부릅니까? 지가 이름도 말 안 하는데. 외팔이라 부르지.”
“거 그냥 벨로디나 사냥꾼이라 부르래도.”
“귀찮습니다.”
쿤다르 아시오게는 할 수 없다는 듯 피식 웃으며 여우 수프를 쭉 들이켰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불카르 아시오게가 하던 말을 이었다.
“여하간 지난 일주일 동안 여관 밖으로 거의 나가지를 않았습니다. 외팔이도 아예 사냥을 포기했는지 계속 여관 안에만 있고 말입니다. 사낭터 애들 몇 놈이 가서 술 마시면서 염탐을 해 봤는데, 아예 밥도 자기네들 방에서 먹는 모양입니다.”
“허어. 밥도 자기 방에서 처먹는다고? 확실히 의심스럽긴 의심스럽구나.”
“그렇죠?”
“그래서, 어떻게 할까? 오늘 밤에 애들 불러다 여관 다 때려 부수고 걔들 끌어낼까?”
쿤다르 아시오게의 말에 불카르 아시오게는 손을 내저었다.
“어후. 우리가 무슨 야만인입니까? 그딴 식으로 일을 처리하게?”
“그럼 어쩔 건데? 너한테 뭐 복안이라도 있을 거 아니야? 말해 봐.”
“당당하게 찾아가서 불러야죠. 같이 앉아서 술잔 기울이며 대화를 나누다 보면 뭐 정체가 드러나지 않겠습니까?”
“걔들이 술만 처먹고 말은 안 하면?”
“그땐 뭐…… 야만인이 돼야죠.”
“새끼. 애비보곤 야만인이니 뭐니 해놓고…….”
“일단 신사적으로 나갔다가, 안 되면 야만적으로 나가는 거. 괜찮은 방법 아닙니까?”
불카르 아시오게의 말에 쿤다르 아시오게는 피식 웃었다.
“아무튼 네가 한 번 만나 봐. 단순히 벨로디나가 시끄러워서 조용한 여기로 온 건지, 아니면 다른 목적이 있는 건지.”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 * *
“오른팔은 쓸 만하고?”
아딘의 물음에 안톤은 오른손에 쥔 단검을 책상 위에 내려놓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예전의 기량을 발휘하긴 힘드오나, 늑대 정도는 때려잡을 수 있을 것 같사옵니다.”
“그래,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천천히 적응하도록 해. 뭐, 바로 우리가 가서 싸우고 할 것도 아니니까.”
“감사하옵니다, 전하.”
그렇게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똑똑똑!]
누군가 방문을 노크했다.
아딘은 시선을 방문으로 돌렸고, 안톤은 단검을 집어넣었다.
“여관 주인입니다.”
아딘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무슨 일이오?”
“사냥터지기가 손님을 좀 뵙고 싶어 합니다.”
순간 아딘과 안톤의 표정이 모두 변했다.
아딘은 살짝 놀란 표정을, 안톤은 살짝 긴장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잠시 서로를 바라봤다.
“곧 내려가겠소.”
“네, 그럼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여관주인의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느끼며 아딘은 안톤을 향해 말했다.
“사냥터지기면 불카르 아시오게인데…… 무슨 일로 날 보자는 거지?”
“아무래도 전하께옵서는 이들에게 외지인이시오니 그 까닭에 찾아온 것 아니겠사옵니까?”
“그대에게도 찾아왔었나?”
“신에게는 따로 불카르 아시오게가 오지는 않았고, 사냥꾼 몇이 찾아왔을 뿐이옵니다.”
“흐음…… 뭐, 내려가 보면 알겠지.”
“신이 호위하겠사옵니다.”
안톤의 말에 아딘은 피식 웃었다.
“내 한 몸 정도는 충분히 지킬 수 있으니 그대는 오른손 수련이나 하고 있게.”
그렇게 아딘은 방을 나서서 1층 주점으로 내려갔다.
불카르 아시오게는 정중앙 원탁에 앉아 이미 술을 한 병 마시고 있었다.
‘혼자 왔나?’
아딘은 미소를 지으며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날 찾으셨다고 들었소.”
아딘의 입에서 대뜸 쿠만어가 나오자 불카르 아시오게는 흠칫했다.
“우리 말을 아주 유창하게 하시는군. 마치 원주민처럼.”
“언어에 관심이 많아서 말이오.”
“일주일 동안 여관에만 머무는 외지인이 있다길래 뭐 하는 사람인지 구경 한 번 하려고 불러 봤소이다.”
“보시다시피 여행자요.”
“여행자?”
불카르 아시오게는 피식 웃었다.
“여행자치고는 복장이 좀 화려한 것 같은데?”
“뭐, 옷을 어떻게 입는지야 당사자의 자유 아니겠소?”
“말을 참 잘 하시는군.”
불카르 아시오게의 말은 다분히 냉소적이었다.
그는 술을 병째 벌컥벌컥 들이켠 후 술병을 탁 소리 나게 원탁에 내려놓았다.
그리곤 아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지. 당신 누구요? 뭐 하러 이 촌구석까지 와 있는 거요?”
그 물음에 아딘은 그저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 * *
“요즘 아라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소이다.”
“무슨 소리요?”
“우리를 약간 짐덩어리 취급하고 있는 것 같다는 말이외다.”
“짐덩이?”
콘스탄티노바 남쪽, 대귀족들의 저택이 밀집해 있는 지역.
그 가운데서도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한때는 다른 이의 것이었지만, 유리 2세가 제니스를 등에 업고 정권을 장악한 이후로는 재상 알레그로프 백작이 차지한 저택.
그곳의 응접실에서 집주인 알레그로프 백작은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제 아라곤에서 연락이 왔소. 얼마 전 최고위급 회의가 열렸다고 하더이다.”
알레그로프 백작에게 손님, 메로네프 공작이 자신이 들은 정보를 알려주었다.
“주 의제가 우리에 관한 거였는데, 대체로 3대 상단 총수 모두 우리를 짐덩이로 여기고 있다는 게 핵심이오.”
“아니, 짐덩이라니? 자기네들한테 준 이권이 얼마인데!”
“자기네들 말로는 투입 대비 산출의 가성비가 떨어진다나?”
“가성비 같은 소리하고 있네!”
“여하간 아라곤의 분위기가 작년 같지 않소이다.”
“허어…… 그렇다고 그들이 우릴 버리기라도 하겠소?”
“모르는 일 아닙니까?”
“허어…… 이런…….”
그렇게 두 사람은 안색이 어두워진 채 돌아가는 정세에 대해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두 사람의 곁에서 시중을 들던 하녀의 귀에 고스란히 다 들어갔다.
그날 밤, 하녀는 외출을 핑계 삼아 거지들이 바글거리는 다리 아래로 향했다.
거기서 하녀는 자신이 들은 내용을 거지 왕초에게 보고했다.
보고를 받은 거지 왕초는 그대로 매음굴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매음굴을 총괄하는 왕할멈에게 알레그로프 백작가 하녀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고스란히 전달해 주었다.
왕할멈은 그대로 자기 방 바로 위, 다락방으로 들어갔다.
“수령님.”
왕할멈의 부름에 어둠 속에서 샛노란 빛 2개가 나타났다.
곧 빛은 왕할멈에게 가까워졌다.
“무슨 일인가?”
왕할멈에게 가까이 다가온 고양이가 사람의 말을 하며 물었다.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왕할멈은 고양이, 체르노비치 수령 빅토르 다비도프에게 자신이 들은 이야기를 고해바쳤다.
이야기를 듣던 빅토르 다비도프는, 왕할멈의 이야기가 끝나자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했네.”
왕할멈은 그에게 공손하게 인사한 후 다락문을 닫고 다시 아래로 내려갔다.
다시 홀로 남은 빅토르 다비도프는 다시 구석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그는, 살짝 벌어진 지붕 틈 사이로 들어오는 별빛을 올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제니스 공화국이 우리나라를 짐덩어리 취급한다라…… 충분히 이해는 돼. 먹고 보니 말도 안 되는 물가상승에 광물자원을 빼면 딱히 뽑아 먹을 것도 없으니까.’
빅토르 다비도프는 어쩌면 혁명이 굉장히 쉽게 끝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안 그래도 짐덩이인데 죽은 줄 알았던 전대 국왕의 장남이 용병을 이끌고 나타나고, 주요 도시에서 대규모 민란이 발생하면, 어쩌면 쉽게, 아주 쉽게 벨로디나를 놈들로부터 해방시킬 수도 있겠어.’
빅토르 다비도프는, 그러나 마냥 기뻐할 수는 없었다.
‘혁명이 성공한 이후…… 과연…… 아딘 콘스탄틴을 믿을 수 있을까?’
별빛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 점차 우울한 기운이 서리기 시작했다.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