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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97화 (97/175)

097 충신 (5)

11월 25일 늦은 저녁.

안톤은 방바닥에 무릎을 꿇고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런 안톤의 앞에 선 로제는 양팔을 활짝 벌린 채 마찬가지로 눈을 감고는 무어라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아딘은 문가에 선 채 초조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안톤의 오른팔이 돌아온다면, 적응기간이 좀 필요하긴 하겠지만, 그래도 충분히 우리 전력에 도움이 된다. 도움이 되는 걸 넘어서서, 전략병기가 될 수 있겠지.’

대마법사와 소드마스터는 전장에서 가히 전략 단위에서 승패를 좌우할 수 있을 만큼 막강한 존재다.

그렇기에 현존하는 양대 강국, 샤펠 제국과 제니스 공화국은 각자가 보유한 소드마스터와 대마법사에 관한 정보를 일체 외부에 누설하지 않았다.

누설되는 정보가 없기에 상대방에 대한 전쟁억지력이 발휘되는 것이고, 그렇기에 양대 강국은 국경을 마주하고 있음에도 평화가 유지되는 것이다.

벨로디나 왕국 또한 소드마스터의 존재를 분명하게 숨기고 있었다.

안톤이 소드마스터라는 것은 오로지 왕실의 극히 일부 사람만이 알고 있는 정보였다.

‘군은 3방면으로 쪼개져야 해. 하나는 노보로바야를 점령하고, 하나는 콘스탄티노바를 점령하고,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군소도시를 점령하고.’

노보로바야의 경우, 아르게 벤바사에게 맡기겠다는 것이 아딘의 구상이었다.

문제는 콘스탄티노바와 군소도시였다.

‘원래라면 콘스탄티노바를 점령하는 즉시 로제에게 수도 방위를 맡기고 군소도시를 내가 직접 돌아다니는 건데…….’

만약 안톤이 오른팔을 다시 회복한다면, 군소도시는 그에게 맡겨두어도 충분할 터였다.

‘아니면 수도 방위를 맡기고 군소도시를 나랑 로제가 둘로 쪼개져서 점령한다든가…….’

여하간 안톤의 오른팔이 재생된다면, 아딘에게는 다양한 선택지가 생기는 것이었다.

적어도 아르게 벤바사의 죽음을 모르는 현시점에서, 아딘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제발…….’

아딘은 간절히 합장한 채 가만히 로제와 안톤을 바라봤다.

“시작할게요.”

한동안 중얼중얼 주문이라도 외우는 양 알아들을 수 없는 말소리를 내던 로제가 천천히 눈을 뜨며 모두가 알아들을 수 있게 말했다.

아딘은 심호흡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

안톤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지만, 마찬가지로 긴장한 듯 땀 한 방울을 이마에서 떨어뜨렸다.

[우우우우웅-!]

곧, 로제를 중심으로 강력한 에너지 파장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가벼운 진동파로 시작한 파장은 이내 조그만 폭풍이 돼 방 안의 물건들을 사방으로 휘날리도록 만들었다.

‘제발…….’

로제가 일으킨 용의 힘에 신물들까지 반응했다.

[크허엉-!]

네르갈의 목걸이가 포효하며 황금빛을 내뿜었다.

금빛은 방 전체로 은은하게 퍼졌고, 로제가 일으킨 에너지 파장과 만나며 마치 나선형 은하와 같은 빛무리를 만들어 냈다.

‘부디…….’

점차 로제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눈을 감은 그녀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고, 어금니를 꽉 깨문 그녀의 턱은 달달달 떨렸다.

그녀가 일으킨 힘과 네르갈의 목걸이가 뿜어낸 파장에 정면으로 노출된 안톤도 힘겹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하여 신음조차 내지 않았지만, 당장이라도 터질 듯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과 머리카락이 젖을 만큼 과하게 분비되는 땀이 그가 느끼는 어려움을 외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신이시여…….’

아딘은 합장한 채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피조물에 불과한, 신들을 찾았다.

비록 로제처럼 힘을 끌어내는 것도 아니고, 안톤처럼 거기에 정면으로 노출된 것도 아니었지만, 두 사람 모두에게 아무런 해가 없기를 바라는 아딘에게는 지켜보는 것조차 고역이었다.

[우우우우우웅-!]

그렇게 10분가량 지났을 무렵,

[파아앗-!]

황금빛을 머금은 에너지 파장이 일순간 안톤의 오른쪽 어깨 절단면에 집중됐다.

그리고 아딘은 볼 수 있었다.

서서히 안톤의 오른팔이 재생되는 것을.

마치 지워졌던 그림이 다시 복구되는 것처럼, 녹았던 눈이 다시 쌓이는 것처럼, 안톤의 오른팔은 서서히 되살아나고 있었다.

‘오오…….’

아딘은 아예 양손을 깍지낀 채 눈조차 깜빡이지 않고 그 장면을 생생하게 담아냈다.

그렇게 또 10분이 지났다.

[우우우우웅-!]

에너지 파장은 사라졌다.

파장이 남긴 잔여물이 약간의 진동파만을 일으킬 뿐이었다.

“허억……!”

안톤은 거칠게 숨을 토해내며 눈을 떴다.

그리곤 떨리는 눈빛으로 다시 자라난 자신의 오른팔을 바라보았다.

로제도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곤 자신이 이룩한 결과물을 보며 힘겹게 미소를 지었다.

안톤이 천천히 오른팔을 들어올렸다.

그리곤 눈앞에서 손가락을 쥐었다, 폈다 반복해 보았다.

“아아……”

별안간 그의 눈에서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려 광대에 흐르던 땀과 하나가 됐다.

[풀썩-!]

그리고 그는 정신을 잃은 채 옆으로 쓰러졌다.

“후우…… 오라버니…… 성공…….”

[풀썩-!]

그리고 로제도 그 자리에서 힘없이 쓰러졌다.

“로제! 안톤!”

아딘은 황급히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다행히 맥박은 정상적으로 뛰고 있었다.

아딘은 곧장 두루마리를 꺼내 펼쳤다.

안톤은 별다른 이상이 없었다. 그저 육체에 가해진 피로가 너무나 강했기에 뇌가 강제적으로 그를 잠들게 한 것뿐이었다.

문제는 로제였다.

“로제…….”

생각 이상으로 그녀는 힘을 과하게 썼다.

당장 생명에 지장이 있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과거 강물의 흐름을 멈췄을 때보다도 더한 데미지가 그녀의 심장에 가해졌다.

아딘은 떨리는 눈으로, 바닥에 쓰러진 로제를 바라봤다.

엄청난 고통이 그녀를 짓누르고 있을 것이 분명함에도, 그녀는 웃고 있었다.

* * *

11월 26일 새벽.

벨로디나 동북부 페름 지방.

쌓인 눈 위로 흰털이 아름다운 페름 여우 한 마리가 지나가고 있다.

그런 페름 여우를 나무 사이에 모습을 감춘 채 어둠 속에 은신 중인 올빼미 한 마리가 주시하고 있다.

곧 페름 여우는 자신이 위기에 처했음을 감지했다.

페름 여우가 귀를 쫑긋 세운 채 주위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올빼미는 천천히 자신이 날아올라 페름 여우를 공격할 타이밍을 기다렸다.

자칫, 페름 여우가 자신이 노리던 들쥐를 잡으면 굶주려야 하기 때문이다.

[두두두두두-!]

그 순간, 땅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올빼미와 페름 여우가 노리던 들쥐가 가장 먼저 반응하여 도망쳤다.

페름 여우도 화들짝 놀라며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그리고 올빼미는 눈을 한 차례 껌뻑인 후 소리의 진원지를 바라보았다.

“하앗-! 하앗-!”

100명의 남성들이 말을 탄 채 눈길을 질주하고 있었다.

“하아-! 하아-! 하아-!”

선두에 선 사람은 카판족 정예 전사의 수장인 백인대장 야민 벤키시였다.

그 뒤로는 99인의 카판족 정예 전사들이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채 달리고 있었다.

‘콘스탄틴은 분명 쿠만으로 간다고 했다. 그렇다면 어떻게든 우리는 쿠만으로 가야 한다.’

야민 벤키시의 얼굴에는 비장함이 서려 있었다.

‘이미 카판족은 와해됐다. 젠장…… 망할 장로놈들…… 족장님이 돌아가셨다고, 그렇게 서로 싸워?’

아르게 벤바사가 죽은 후, 장로들 간에 내분이 일어났다.

아딘과의 협력을 거부하던 장로들이 족장이 죽은 이상 기존 합의는 파기됐다고 주장하며 투표로 꺾인 뜻을 다시 관철하려 했다.

반면 아딘과의 협력을 찬성하던 장로들은 족장이 죽었다고 해서 부족 전체가 멸절된 것이 아닌 이상 합의는 유효하다고 주장했다.

그 분열은, 얼마 지나지 않아 내전으로 이어졌다.

좁은 곳에 서로 엉켜 있던 만큼, 내전은 짧은 시간 동안 엄청난 사상자를 만들어냈다.

그 과정에서 장로들 또한 칼에 맞아 죽어버렸다.

‘나에겐 족장님 같은 통솔력이 없어.’

하룻밤 동안 일어난 내전을, 야민 벤키시와 정예 전사들은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특정 구역에 속하지 않은, 오로지 아르게 벤바사에게만 속한 친위대였던 만큼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야민 벤키시는 그 일을 후회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말렸어야 했어. 우리가 나섰더라면…… 그랬더라면…….’

카판족은 이제 회생불가의 상태가 됐다.

생존자들 중 부상자는 푸스타 광야에 버려졌다.

비교적 이동이 자유로운 자들은 가족 단위로 뿔뿔이 흩어졌다.

그리고 야민 벤키시는 이렇게 정예 전사단을 이끌고 쿠만으로 가고 있었다.

‘카판족은 끝났어.’

자기들이야 뭉쳐 다니기만 한다면, 대군에게 포위당하지 않는 한 죽을 일은 없다.

문제는 가족 단위로 흩어진 자들이었다.

드넓은 푸스타 광야를 벗어나는 게 먼저 그들에게는 험난한 관문이 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상당수의 가족이 죽을 것이다.

그리고 가까스로 푸스타 광야를 벗어난 이들을 기다리는 것은, 말조차 통하지 않는, 제니스 공화국 소속 용병들이 될 것이다.

운이 좋다면 노예가 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용병들에 의해 살해당할 터였다.

‘젠장……’

어금니를 꽉 깨물고, 야민 벤키시는 터져 나오려는 눈물을 가까스로 참아냈다.

‘흔들리면 안 돼.’

지금 자신이 흔들린다면, 자신만 믿고 따라온 99인의 정예 전사는 모두 혼란에 빠질 터였다.

‘쿠만…… 쿠만으로 가야 해.’

페름 지방을 지나 쿠만으로 가는 길은, 상트보가르를 지나 쿠만으로 가는 길보다도 더한 우회로였다.

이들이 아무리 빨리 달려도 2주는 시간이 걸릴 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야민 벤키시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그저 달리는 것밖엔, 어떻게든 쿠만에 당도하여 아딘과 만나는 것밖엔, 그때까지 아딘이 쿠만에 남아 있어 주길 기도하는 것밖엔, 야민 벤키시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우리라도 살아야지…… 어떻게든 살아야지…….’

자신들만이라도 살아야, 그래서 어떻게든 벨로디나 왕국에 섞여들어 씨를 뿌려야, 카판족의 명맥을 다시 이어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그 생각은 강한 강박관념이 돼 야민 벤키시를 압박했다.

“하아-!”

그 압박감 속에서 야민 벤키시는 더욱 가열차게 말들을 동쪽으로 몰고 또 몰았다.

* * *

11월 26일 정오.

안톤은 잠에서 깼다.

잠에서 깨자마자 안톤은 되살아난 오른팔이 가져다주는 이질감에 한동안 멍하니 침대 위에 앉아 있어야 했다.

그런 안톤에게 아딘은 손수, 여관 주인이 만든 점심을 가져다주었다.

“화, 황공하옵니다, 전하!”

안톤은 진심으로 황송하다는 양 침대 위에서 내려와 무릎까지 꿇으며 아딘이 가져다준, 음식이 올려진 쟁반을 양손으로 받았다.

“오랜만에 오른손으로 먹는다고, 흘리거나 하지는 않겠지?”

그런 안톤에게 아딘은 농담 한마디를 던졌다.

그리고 그는 곧장 로제의 방으로 향했다.

“로제…….”

로제는 여전히 깨어나지 않은 채 잠들어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의식적으로 뇌가 외부와의 연결을 차단한 채 강제적으로 휴식을 취하는 상태였다.

깨울 수도 없는, 그저 뇌가 다시 외부와 연결되기를 기다리는 수밖엔 없는 상황이었다.

“어째서 그렇게까지…….”

침대가에 앉아 아딘은 가만히 로제의 손을 잡아 주었다.

그녀의 손은 차가웠다.

아딘은 가만히 그녀의 맥박을 확인해 보았다.

다행히 맥박은 계속해서 정상적인 흐름을 보이고 있었다.

“이 전쟁에서…… 우리가 정말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게 됐어. 다 네 덕분이야, 로제.”

완전한 힘을 되찾기까지는, 제법 시간이 걸릴 터였다.

짧으면 열흘, 길면 이 겨울이 끝날 때까지.

하지만 어쨌건 안톤은 과거 위대한 소드마스터, 벨로디나 왕실의 칼과 방패 역할을 하던 시절로 화려하게 돌아갈 터였다.

그렇게 된다면, 전쟁은, 엄청난 병력차에도 불구하고, 아딘에게 유리해질 터였다.

“고마워, 로제.”

로제가 힘을 남용하면 어떻게 되는질 잘 알고 있었던 만큼, 아딘은 그녀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가만히 허리를 숙여 로제의 이마에 키스해주었다.

“빨리 일어나. 안톤하고 같이 맛있는 걸 먹으면서 앞으로의 구상을 같이 공유하자.”

아딘은 가만히 로제의 머리를 한 차례 쓰다듬은 후 그녀의 방을 나섰다.

무표정한 얼굴로 누워있던 로제는, 아딘이 나갈 무렵, 어느새 얼굴에 은은한 미소를 피우고 있었다.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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