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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96화 (96/175)

096 충신 (4)

“네. 알겠습니다.”

곧 안톤의 입에서 긍정의 답변이 흘러나왔다.

그 말을 들은 로제의 표정이 환해졌다.

“어떻게든, 최소한 전하께 다른 여식이 붙는 것만큼은 최대한 차단하면서, 최대한 아가씨와 전하가 이어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겠습니다.”

“고마워요. 정말로 고마워요.”

안톤은 잘 안 될 수도 있다거나, 확신할 수 없다거나 하는 단서는 달지 않았다.

그저 로제에게 최대한 자신이 노력하겠음을 어필할 뿐이었다.

말 그대로 다시 오른팔이 생긴다면, 아딘을 배신하는 행위를 제외한 모든 것을 할 각오가 충분히 돼 있었으니까.

그런 안톤을 바라보며 로제가 말했다.

“그럼 일단 같이 오라버니 방으로 올라가요. 가서 오라버니한테 말씀드리고 시작해야죠.”

로제의 말에 안톤은 고개를 한 차례 푹 숙인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부탁드립니다.”

“열심히 해 볼게요.”

* * *

제니스 공화국을 통치하는 공식적인 기관은 공화국 원로원이다.

총 600명의 의원으로 구성된 공화국 원로원에서 모든 법률이 제정됐고, 집정관이나 법무관 등의 행정관에 대한 임면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현상일 뿐이었다.

실질적으로 제니스 공화국을 통치하는 기관은 공화국 상인 총동맹, 약칭 공상맹이었다.

그리고 그 공상맹을 지도하는 구성원이 제니스 공화국 3대 상단의 총수들이었다.

광명력 992년 11월 25일 정오를 조금 넘긴 시각.

콘테 상단 총수 크리스티나 콘테의 저택에 3대 상단 총수가 모였다.

모인 사람은 3대 상단 총수뿐만이 아니었다.

이제 갓 임기를 시작한 집정관과 법무관 그리고 원로원 의장까지 3인의 공화국 지도자들도 이 자리에 함께 배석했다.

그들 간의 서열은 좌석 배치에서 드러났다.

회의 장소를 제공한 크리스티나 콘테가 상석에 앉았고, 그 좌우에는 마리오 드라기와 마르코 테드 루비오가 자리했다.

이들 셋 사이에는 사실상 서열 차이가 없었다.

차이는 그다음부터였다.

총수들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 원로원 의장이 착석했고, 그다음에는 집정관이 마지막으로 제일 말석에는 법무관이 각각 앉아 있었다.

“바쁘신 와중에도 이렇게 모여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오늘의 의장 크리스티나 콘테였다.

우아한 기품이 느껴지는, 이제 겨우 34세에 불과하지만, 그 누구에게도 무시당하지 않는 여인의 인사에 루비오와 드라기는 가벼운 미소로 화답했다.

“자주 찾아뵙지 못하고, 이렇게 오랜만에 뵙게 되어 송구스럽습니다.”

3인의 지도자 중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원로원 의장이었다.

70줄에 육박하는 노인이, 자기의 절반도 되지 않는 세월을 살아온 여인 앞에서 한껏 자세를 낮추는 모습이 일견 이상해 보일 법도 하건만, 이 자리에 배석한 이들 중 그것을 느끼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아닙니다. 의장님께서 바쁘신 걸 뻔히 아는데, 오히려 제가 이렇게 시간을 빼앗은 건 아닌가 싶어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그런 의장에게 크리스티나 콘테는 예의를 갖춰 화답해 주었다.

그다음으로는 집정관과 법무관이 차례로 크리스티네 콘테에게 인사를 올렸고, 마찬가지로 그녀는 두 사람에게도 적당한 예의를 갖춰 화답해주었다.

의례적인 인사가 끝나자 본격적으로 회의는 시작됐다.

“오늘 우리가 이야기할 주제는 벨로디나 경영에 관한 평가입니다.”

크리스티나 콘테의 말에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이제 곧, 우리가 유리 콘스탄틴을 앞세워 벨로디나를 보호령으로 만든 지 1년이 됩니다. 그간의 성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 봤으면 하는데.”

크리스티나 콘테의 시선이 드라기에게로 향했다.

드라기가 살짝 콧방귀를 뀌더니 입을 열었다.

“성과라고 할 것도 딱히 없다는 게 내 생각이오. 처음에 우리가 계산을 좀 잘못했던 것 같다는 생각이 요즘 부쩍 드는데,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거요?”

드라기의 물음에 딱히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잘못해도 아주 잘못했지.”

3대 상단 총수 중 가장 연장자인 루비오의 말에 원로원 의장이 움츠러들었다.

“당시 집정관이 그럴듯한 계산서를 들고 와서 우리보고 벨로디나를 집어삼키자고 했었는데…… 요즘 그 인간 뭐 하고 있소이까?”

루비오의 질문은 원로원 의장을 향한 것이었다.

원로원 의장은 고개를 떨군 채 한껏 움츠러든 목소리로 대답했다.

“듣기로는 슈드 자치령 별장에서 첩들과 같이 살고 있다고…… 죄송합니다.”

“의장께서 죄송할 건 없고.”

“흥! 우리한테 커다란 똥덩어리를 안겨주고 자기는 편하게 은퇴 생활이나 한다고?”

당장에라도 전직 집정관에 대한 암살 공모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 속에서, 이제 갓 집정관이 된 이와 신임 법무관은 잔뜩 고개를 낮춰야만 했다.

“지금 이 자리는 전직 집정관에 대한 성토보다는 벨로디나 경략에 관한 토의를 위한 자리입니다. 총수님들은 진정하시고,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눠 보심이 어떻겠습니까?”

크리스티네 콘테가 다소 흥분한 두 남자를 달랬다.

드라기는 그대로 물을 쭉 들이켰고, 루비오는 한 모금 넘겨 목을 축인 후 입을 열었다.

“5만 용병 중 드라기 총수가 2만을, 나와 콘테 총수가 각각 1만 5천을 동원했지. 처음 계산대로라면 사실 그들에 대한 유지 비용보다 벨로디나에서 얻을 이익이 더 큰 상황이었지만, 현실은 전혀 달랐어.”

루비오의 말을 드라기가 이어 받았다.

“뭔 놈의 중앙집권화됐다는 왕국이 화폐 사용률이 그렇게 떨어지는 건지 모르겠소. 길은 길대로 엉망이고. 막말로 제대로 된 도시라고 할 만한 게 크리미아랑 콘스탄티노바, 노보로바야 3군데 빼고 뭐 있기나 하오?”

드라기의 말에 두 총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드라기의 말이 계속됐다.

“거기다 아무리 우리가 내정에 대해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기로서니 어떻게 1년도 안 돼 물가가 10배 가까이 폭등한단 말이오? 그것 때문에 거기 주둔 중인 용병들한테 직접 식량을 보내느라 운임비가 더 나가는 판국이오.”

그러면서 드라기는 크리스티나 콘테를 바라봤다.

해운업을 독점하는 콘테 상단이 운임비 대부분을 꿀꺽했기 때문이었다.

크리스티나 콘테는 애써 그 시선을 외면했다.

이번엔 루비오가 입을 열었다.

“그뿐만 아니라 북부에서 나타난 마적단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지.”

마적단이란 말에 드라기의 표정이 팍 썩어들어갔다.

“내 말이 그 말이오. 어디서 튀어나왔는지도 모를 것들이…….”

“그들에게 납치된 사람 중 생존자가 없어서 정확한 정체도 현재 파악하지 못하고 있지.”

“말이나 타는 것들이 도대체 광물 원석은 들고 가서 뭘 어쩌겠다는 거요?”

드라기의 말에 크리스티나 콘테가 입을 열었다.

“그 부분에 관해서는 우리 상단에서 조사한 바가 있어요.”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빼앗긴 광물은 레베크라는 샤펠 제국 밀수꾼에 의해 시세의 반값으로 처분되고 있어요.”

“샤펠 제국?”

“밀수꾼?”

루비오와 드라기의 눈썹이 살짝 위로 솟아올랐다.

크리스티나 콘테는 고개를 끄덕였다.

“광물과 식량의 물물교환 형식이죠.”

“아니, 샤펠 제국에서 벨로디나 북부까지 무슨 수로 식량을 옮긴다는 거요?”

드라기의 물음에 루비오도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샤펠 제국과 벨로디나 사이에는 엘프숲이라는 거대한 천연림이 자리하고 있다.

엘프숲 외곽을 통해 이동한다 하더라도 벨로디나 접경지까지는 보름 이상이 소모된다.

더구나 마적단이 주로 활동하는 곳은 벨로디나 북부.

두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는 건 당연했다.

“공간이동 마법으로 식량을 운반하는 것 같다고 정보원들이 알려왔습니다.”

공간이동이라는 크리스티나 콘테의 말에 모인 사람들 모두가 아연실색했다.

“아니, 그 비싼 마법사를 고작 밀수에 쓴다고?”

드라기는 기가 찬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당장 자신이 크리미아로 공간이동 할 때 동원되는 마법사의 숫자만 다섯이었다.

그 다섯으로도 겨우 자신과 수행원 그리고 그들이 먹을 식량과 옷가지 정도만을 이동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그 비용은 상당히 비쌌다.

그런데 공간이동 마법을 밀수에 이용한다?

“도저히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거 아니요?”

드라기의 물음에 크리스티나 콘테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레베크라는 자에 대해 조사를 맡긴 상태입니다. 다만 실명인지 가명인지조차 알 수 없는 상태이고, 거점이 샤펠 제국이라 근시일 내로 알아내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크리스티나 콘테의 말에 루비오는 팔짱을 낀 채 가볍게 침음성을 냈고, 드라기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루비오가 물을 마저 한 잔 더 마신 후 입을 열었다.

“어쨌건, 1년간 느낀 거지만, 벨로디나 경영은 이익보단 손해가 현시점에서는 더 큰 상황이야.”

그러자 드라기가 동조했다.

“맞습니다. 안 그래도 로버츠한테 쿠만족을 용병으로 고용해 보라고 지시까지 해둔 상태이오.”

“쿠만족?”

“마적단은 때려잡아야겠고, 따로 투입할 용병은 없고, 그러니 그 야만인들이라도 동원해야지 않겠소?”

“그건 그렇지만…… 이거 원…… 배보다 배꼽이 더 커버린 상황이니…….”

한참 동안 불만을 토로하던 총수들은 다른 3명에게 의견을 물어보았다.

가장 먼저 발언을 하게 된 원로원 의장은 일단 싼 가격에 저품질 곡물을 벨로디나에 공급하고 제니스의 금화를 기준통화로 만들어 물가를 잡자 건의했다.

집정관 또한 그런 원로원 의장의 의견에 동조했다.

마지막으로 발언을 하게 된 법무관은 다소 독특한 의견을 제시했다.

“제가 보기엔 차라리 벨로디나가 자체적으로 군사력을 확충하도록 하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법무관은 한 번 숨을 고른 뒤 이어 말했다.

“일단 왕궁 경비 인력만 우리 쪽 용병으로 확충하고, 나머지 병력은 벨로디나에서 자체적으로 운용하게 하는 겁니다. 그러면 일단 용병 주둔비가 절감될 거 아니겠습니까? 벨로디나가 자칫 독립할 수도 있으니 대신 그들의 자체 운용 병력 규모에는 제한을 가하고 말입니다.”

그 말에 세 총수는 흥미롭다는 반응을 보였다.

법무관이 용기를 가지고 말을 이었다.

“어차피 현재 벨로디나 국왕은 허수아비에 불과합니다. 적당히 우리는 왕실 경비 병력과 국정 자문 위원들, 무역기지 사령관들을 통해 국정을 배후에서 지휘하면 지금처럼 벨로디나를 우리 영향권하에 두면서 동시에 비용은 절감할 수 있을 거라고 감히 이야기해봅니다.”

크리스티나 콘테가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물었다.

“괜찮은 의견 같습니다, 법무관님. 실례지만 성함이……?”

“헤, 헨리 피셔입니다.”

“피셔 법무관님의 의견에 대해 한번 진지하게 고민을 해보겠습니다. 나쁘지는 않은 의견 같습니다.”

자신을 향한 총수들의 우호적인 반응에 법무관 헨리 피셔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푹 숙여 고마움을 표했다.

“일단 아직은 1년 밖엔 안 됐습니다. 각자 벨로디나 경영에 있어 보완할 점이 있는가를 다시 한 번 각자 확인해 주시고 다음에 또 같이 의견을 모아 봤으면 좋겠습니다.”

크리스티나 콘테의 마지막 발언을 끝으로 회의는 끝났다.

회의가 끝난 후 크리스티나 콘테는 따로 법무관 헨리 피셔를 자신의 서재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그런 헨리 피셔를 바라보며 원로원 의장과 집정관은 그가 인생의 전환점일 수도 있는 기회를 잡았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젊은 친구가 잘 됐어.”

원로원 의장은 그렇게 이야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겨우 27세 아닙니까?”

“더구나 피셔 가문이 남해안의 어촌계를 장악하고 있는 만큼, 자금 걱정은 없을 것이고 말이야. 허허허.”

“드디어 공화국 내에서 어촌계가 힘을 발휘할 때가 오는 겁니까?”

“그거야 모르지. 피셔 법무관이 얼마나 잘 하느냐에 따라 달라지지 않겠나?”

원로원 의장의 말에 집정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건 젊은 친구가 잘 되길 바랄 뿐입니다.”

집정관은 그렇게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의 속내는 말과는 달리 그다지 편치 않았다.

‘젠장…… 안 그래도 집정관의 위상이 전대 집정관 때문에 많이 낮아졌는데…… 이러다 법무관이 집정관보다도 우위에 서겠어.’

그렇게 벨로디나 왕국 경영에 관한 제니스 공화국 핵심 수뇌부 회의는 새로운 정계의 신성이 등장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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