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95화 (95/175)

095 충신 (3)

“로제.”

아딘이 입을 열자마자, 로제가 재빠르게 말을 내뱉으며 아딘의 말을 가로막았다.

“팔을 다시 회복시키는 건 자신 못해요.”

자신의 의중을 읽은 로제의 모습에 아딘은 잠시 입을 다문 채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로제도 담담히 아딘의 눈빛을 받아 넘겼다.

잠시 후, 아딘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렵겠지. 단순하게 병을 치유하는 것도 아니고, 사라진 신체 부위를 재생하는 거니까. 어렵겠지.”

“아버지 정도면 모를까, 저는 자신 없어요. 죄송해요, 오라버니.”

아딘은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네가 죄송할 건 없어, 로제. 나도 혹시나 하고 물어보려던 거 였으니까.”

아딘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실망한 기색을 숨기질 못했다.

‘안톤의 팔이 다시 되돌아온다면 참 많은 도움이 될 텐데.’

그러나 로제가 자신 없다고 하는 이상, 어떻게 해볼 방법은 없었다.

‘그렇다고 다시 샤푸르하고 루이 알랭한테 갈 수도 없고 말이야.’

아딘은 가만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창밖의 눈으로 쌓인 쿠만 일대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결국 물량에서 압도적으로 밀리는 만큼, 속전속결로 콘스탄티노바를 점령해야 해. 민란이 일어나서 민병대가 가담해준다고 하더라도 분명한 한계는 있으니까.’

아딘의 머릿속에서 빠르게 가상 편재가 구축되기 시작했다.

‘일단 안톤의 군사적 역량은 이미 검증이 됐으니, 총사령관직을 맡기고, 아르게 벤바사는 기동대장으로 해서…… 그리고 나하고 로제는 따로 별동대로 둘이서만 편입이 된 채…… 그래. 이렇게 하면 그림은 대충 나오겠어.’

아딘은 마법 주머니에서 두루마리를 꺼내 펼쳤다.

이내 두루마리에는 벨로디나 왕국에 주둔 중인 제니스 공화국 소속 용병들의 편재와 주둔지가 상세하게 나타났다.

‘수적으로 밀리지만 나에게는 두루마리가 있어. 적의 편재와 전략 등에 대해 알고자 하면 얼마든지 알 수 있지.’

주둔지와 편재 등을 통해 아딘은 적들의 전략 거점을 파악할 수 있었다.

‘노보로바야, 콘스탄티노바 그리고 크리미아. 결국엔 북부에서 광물 자원을 수탈하는 루트로 전략 거점이 마련돼 있어. 그 외 지역은 거의 버려둔 지역인데다…… 그래. 이렇게 하면 되겠지.’

그렇게 아딘이 두루마리를 살피며 전략을 고심하고 있을 때, 로제는 가만히 아딘을 바라보며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어떻게 하지?’

그녀는 아딘에게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다.

분명 사라진 신체 부위를 다시 살리는 것 자체에 대해선 가능하다 혹은 불가능하다 자신 있게 말할 수가 없었다.

‘오라버니를 위해서라면 시도해 볼 수도 있어. 하지만……’

조금 전, 아딘에게 정략결혼을 제안하면서 안톤은 로제에게 단단히 찍힌 상황이었다.

비록 아딘이 자신의 결혼은 알아서 한다고 일축함에 따라 사실상 없는 일이 됐지만, 로제 입장에선 여간 기분이 나쁜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오라버니랑 이야기 나누는 걸 봐서는…… 오라버니가 상당히 신뢰하는 사람인 건 확실해.’

아딘이 전략을 고민하듯, 로제도 자기 나름의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아딘에게 있어서 현재 가장 중요한 전략 목표가 유리 콘스탄틴 타도와 제니스 공화국 세력 축출이라면, 로제에게 있어서 현재 가장 중요한 전략 목표는 아딘이었다.

‘아버지는 말하셨지. 솔직해지라고.’

불멸의 신전에서 루이 알랭과 함께하는 동안, 로제가 배운 것은 다만 용의 힘을 효율적으로 통제하는 방법과 다양한 종류의 마법만이 아니었다.

루이 알랭은 분명히 로제에게 이야기했다.

솔직하라고. 너의 감정과 생각에 솔직해지라고.

너에게는 솔직해도 될 충분한 자격과 힘이 있다고.

사실 벨로디나가 어찌되건, 그건 로제에게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었다.

그저 아딘이 품고 있는 이상 속에 벨로디나 해방이 있기에 그것을 위해 아딘의 힘이 되어 줄 따름이었다.

실질적으로 그녀에게 중요한 건 아딘 뿐이었다.

‘결단을 해야 할 때가 온 거야?’

고심하는 아딘의 듬직한 등을 바라보며 로제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걸어갔다.

“어디 가?”

그녀의 기척을 알아차린 아딘이 물었다.

“잠깐 바람 좀 쐬러요.”

로제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아딘에게 대답했다.

아딘도 마찬가지로 마주 웃어 보이며 말했다.

“너무 멀리 나가지는 마.”

“여관 근처에서 살살 걸을 거예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렇게 로제는 방을 나와 1층 홀로 내려갔다.

홀에서는 안톤이 술을 마시며 테이블 위에 초상화가 그려진 가죽을 올려두고서 무언가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 안톤을 정색하고 바라보던 로제는 소리 없이 그가 앉은 테이블로 향했다.

그리고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헙-!”

안톤은 화들짝 놀라며 로제를 바라봤다.

로제는 잠시 안톤을 바라보다 이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의 충신이라 하셨죠?”

로제의 물음에 안톤은 부끄럽다는 듯 얼굴을 붉히며 씁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전하를 끝까지 보필하지 못한 처지에 충신이라니…… 가당치도 않습니다.”

로제의 시선이 안톤의 오른쪽 어깨로 향했다.

“팔 하나를 내어줄 만큼, 오라버니는 당신에게 중요한 사람이죠?”

안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조금 전에 오라버니에게 그런 제안을 했나요? 정략결혼이라는?”

로제의 목소리에 담긴 약한 살기를 느끼며 안톤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렇습니다. 쿠만인으로부터 대대적인 지원을 받아냄과 동시에 전하의 치세에 동방이 어지럽지 않도록 통제하기 위해선 필요한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안톤의 단호한 대답에 로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순순히 넘어가는 듯한 그녀의 모습에 도리어 당황한 쪽은 안톤이었다.

조금 전 방에서 보여주었던 그 가공할 기세로 미루었을 때, 이번에도 그와 비슷한 수준의 압박을 각오했건만…….

그런 안톤에게 로제는 담담한 어조로 이야기했다.

“오라버니는 당신의 팔이 그렇게 된 것에 대해 상당한 부채의식을 가지고 계신 것 같아요.”

그 말에 안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것은 그저 마땅히 제가 했어야 할 일을 하는 와중에 생긴 상처에 불과합니다. 살짝 불편하긴 하지만, 삶에 지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전하께서 만약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절대 그렇게 생각하실 필요가 없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당신은 그렇게 생각할진 몰라도, 오라버니는 아니에요. 하아…… 그래서 오라버니는 제가 당신의 팔을 재생해주길 바라고 있어요.”

로제의 말에 순간 안톤은 바보 같은 표정을 지어 보이며 고개를 모로 살짝 숙였다.

“그게 무슨……?”

“말 그대로예요. 제가 당신의 오른팔을 다시 살리길 오라버니께서는 바라고 계세요.”

로제의 말에 안톤은 잠시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다가 이내 피식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신의 말을 농담으로 치부하는 그의 모습에 로제는 잠시 그의 왼팔을 훑어보았다.

순간 그녀의 눈에 안톤의 왼손에 가득한 흉터들과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듯한 상처가 들어왔다.

“잠깐 손 좀 내밀어 보겠어요?”

로제의 제안에 안톤은 의아해하면서도 순순히 손을 내밀었다.

그런 안톤의 손을 향해 로제가 오른손을 뻗었다.

그리고 가만히 용의 힘을 끌어 올렸다.

‘응?’

그녀가 힘을 끌어올리는 순간, 안톤은 미증유의 힘이 자신의 손을 중심으로 회전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딱히 적대적인 느낌은 없었기에 가만히 있긴 했지만, 그는 의구심 가득한 표정으로 가만히 로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는 서서히 자신의 왼손에 가득하던 흉터와 상처가 아물고 새살이 돋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이건……!’

잠시 후, 로제는 힘을 거두었다.

그리고 안톤은 완전히 깨끗해진 자신의 손을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로제는 그런 안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잠시 후, 안톤이 입을 열었다.

“사제도 이렇게는 하지 못 할 겁니다.”

“그러니 오라버니가 팔을 재생시킬 수는 없냐고 하신 거죠.”

“허허…….”

순간 안톤은 가슴 깊은 곳에서 엄청난 갈망이 용암처럼 터져 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잃어버린 팔과 옛 실력의 부활에 대한 갈망이었다.

그러한 갈망은 안톤의 표정에서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로제의 표정은 여러모로 복잡했다.

“봐서 알겠지만, 나한테는 사람의 병과 상처를 치유할 능력이 있어요. 앉은뱅이를 일으켜보기도 했고, 장님을 눈뜨게도 해봤죠.”

로제의 말에 안톤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의 표정에선 점점 더 간절함이 강하게 묻어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완전히 신체에서 분리된 부위를 재생시키는 건 나도 자신할 수 없어요.”

안톤은 주먹을 꽉 쥐었다.

순간 사라진 오른손의 감촉이 느껴졌다.

가끔 느껴지던 환상통이었다.

‘이게…… 환상통이 아니라…… 실제 감각이 될 수도 있다고?’

순간 안톤의 뇌리로 지난 1년의 세월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늘 사용하던 팔을 잃은 채 고통받던 그 세월.

익숙하지도 않은 왼손으로 검을 휘두르느라 평소 같았으면 단칼에 베어 죽일 수 있었을 산적과 다섯 합 이상 겨루어야 했던 일들.

가끔 자기도 모르게 오른손으로 검을 뽑으려다 그제야 팔이 사라진 걸 깨닫고 괴로워하던 나날들.

그 모든 나날들이 지나고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주군의 동생이라는 대단한 능력자.

‘어쩌면…… 어쩌면……’

안톤은 희망이란 것을 품기 시작했다.

아딘을 만나며 한 번 품었던 희망이 로제를 통해 다시 한번 더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런 안톤을 살짝 안타까운 표정으로 바라보던 로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미리 말해두지만 자신 있게 가능하다, 불가능하다, 이야기할 수가 없어요.”

“괘, 괜찮습니다. 안 돼도 상관 없습니다. 부디…… 부디 한 번만이라도 시도해주십시오.”

안톤은 간절해졌다.

없을 땐 상관이 없었지만, 막상 희망이란 놈이 생기자 그는 조급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런 안톤에게 로제는 자신의 뜻을 알렸다.

“시도는 해볼게요. 대신, 조건이 있어요.”

“뭐든 말씀하십시오. 주군을 배신하는 일이 아니라면, 뭐든 들어주겠습니다.”

안톤의 말에 로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아시겠지만, 저와 오라버니는 친남매가 아니에요.”

안톤은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선왕 블라디미르 2세가 낳은 자식이라곤 아딘과 드미트리 둘뿐이었고, 사생아도 따로 두지 않았으니까.

무엇보다도 그녀의 외형적 특징은 벨로디나에선 볼 수 없는 인종의 것이었다.

“오라버니는 저를 노예 상태에서 해방해 주셨어요. 그리고 제게 많은 가르침을 베푸셨죠.”

로제는 가만히 안톤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막상 본론을 이야기하려니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남자로 느끼게 되셨습니까?”

그런 로제를 대신해 안톤이 입을 열었다.

아까 방에서의 경험으로 로제가 아딘을 어떻게 보는가에 대해 대강 감을 잡고 있었던 만큼, 그의 추론은 정확했다.

그리고 그 정확한 추론이 되려 로제에겐 용기를 주었다.

로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

“맞아요. 그렇게 됐어요.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언제부터인가 자연스럽게.”

로제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 조건은 간단해요. 제가 만약 당신의 오른팔을 되살려낸다면, 당신은 나와 오라버니의 사이에서 제대로 된 중매를 서 주세요.”

로제의 말에 순간 안톤은 망설였다.

‘전하께서 원하시지 않으신다면…… 어떻게 하지?’

자기 팔도 팔이었지만, 그보다 중요한 게 아딘의 의중이었다.

적어도 안톤에게는 그랬다.

그랬기에 그는 즉답하지 못했다.

그런 그의 충성심을 바라보며 로제는 한 차례 웃음을 터뜨렸다.

“오라버니가 확실히 복은 많은 것 같아요. 당신 같은 충신도 있고.”

“……”

“중매를 서달라는 게 꼭 이어달라는 건 아니에요. 결국엔 오라버니의 뜻이 어떠한지, 제가 어떻게 하는지가 더 중요하게 작용할 테니까요.”

“그러면……?”

“그냥…… 중간에서 최대한 저에게 유리하게 상황을 조성해 달라는 거예요. 설령…… 설령…… 잘 안 된다 하더라도…… 그건 어디까지나 제 탓이 되겠죠.”

로제는 그렇게 말하며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로제를 바라보며 안톤도 다소 진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