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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92화 (92/175)

092 새로운 동맹 (2)

아딘의 물음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두루마리가 맛이 간 게 아니라면 다비도프 백작은 여전히 급진적인 이상을 가지고 있어. 그런데 갑자기 귀족 타령이라니?’

가히 공산주의자인가 싶을 정도로 급진적인 빅토르 다비도프의 이상.

만약 그가 혁명가가 아니라 사상가의 길을 걸었더라면 어쩌면 이 세상에 다비도프주의라는 이름의 사회주의 이념이 탄생했을지도 몰랐다.

그랬기에 아딘은 의구심을 품은 채 빅토르 다비도프를 바라보았다.

그런 아딘의 모습에 빅토르 다비도프는 한숨을 포옥 내쉬더니 술잔을 비우곤 품에서 파이프를 꺼내 담뱃잎을 넣고 불을 피웠다.

“후우-!”

한 차례 길게 담배 연기를 뿜어낸 빅토르 다비도프는 씁쓸한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백성들에게는 왕만 필요한 게 아니었습니다, 전하.”

“그러면?”

“그들에게는 귀족들도 필요했습니다.”

“귀족들도 필요했다?”

아딘은 팔짱을 낀 채 흥미로운 표정을 지으며 빅토르 다비도프를 바라봤다.

‘갑자기 급진주의자에서 보수주의자로 전향이라도 한 건가? 두루마리는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는데?’

그런 아딘에게 빅토르 다비도프는 자신이 깨달은 바에 대해 천천히 알려주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백성들이 직접 자기들의 일을 처리하는 체제를 구상했습니다. 자기들끼리 모여 의논하고, 문제를 해결하고, 통치하는 그런 체제 말입니다.”

그러한 이상주의적 정치관은 그러나 경험 앞에서 철저히 현실주의적으로 바뀌어 갔다.

“하지만 백성들에게는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 아니, 심지어 자치권에 대한 관념조차도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일종의 직접 민주주의 체제를 구상했지만, 일반 백성들에겐 그것을 구현할 역량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저는 혁명 이후 실무적인 통치를 귀족들에게 맡길 생각을 품게 됐습니다.”

물론 그 귀족이라 함은 대영지를 보유한 자들이 아닌, 빅토르 다비도프의 이상에 동의하는 중소지주나 몰락 가문 출신 귀족들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 중에 상당수는 과거 아딘 콘스탄틴에 의해 이런저런 피해를 본 경험이 있는 자들이었다.

“그러니 전하께서 후에 혁명이 끝난 다음 공식적으로 유감 표명을 하셔야 한다는 겁니다.”

빅토르 다비도프는 말을 끝마친 후 자기 잔에 술을 따른 뒤 그것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아딘은 피식 웃었다.

‘사소한 감정 변화에 불과하니 두루마리가 인지를 못 한 건가?’

아딘은 가만히 팔짱을 푼 채 빅토르 다비도프를 향해 이야기했다.

“너무 앞서나가지 마시오, 다비도프 백작.”

그 말에 빅토르 다비도프가 흠칫하며 아딘을 바라봤다.

“통치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생각은 먼저 유리 콘스탄틴과 제니스 공화국을 몰아낸 다음에 해도 늦지 않소이다.”

“…….”

“그리고 너무 백성들의 역량을 과소평가하지는 마시오. 사실 그게 바로 내가 그리고 다비도프 백작이 몰아내고자 하는 전형적인 귀족적 특권의식 아니겠나?”

아딘의 말에 빅토르 다비도프는 무어라 항변할 수가 없었다.

그런 빅토르 다비도프의 잔을 채워준 후 아딘은 자기 잔을 들었다.

“그 문제는 우선 혁명 전쟁이 끝난 다음에 생각하지. 지금은 우리의 새로운 동맹을 축하할 때가 아니겠나?”

아딘은 씩 미소를 지었다.

빅토르 다비도프는 잠시 인상을 찌푸린 채 아딘을 바라보다가 이내 천천히 잔을 들었다.

곧 두 사람의 잔이 허공에서 부딪혔고, 비워졌다.

* * *

광명력 992년 11월 19일 아침.

“그간 잘 쉬고 가오.”

아딘의 인사에 통나무여관 주인은 미소를 지으며 굽신거렸다.

“아이고. 방이 하나라 불편을 끼쳐드린 건 아닌지 영. 다음에 들르실 예정이시라면 꼭 찾아와 주십시오. 방을 아주 싹 깨끗하게 치워놓고 수리해 두겠습니다. 헤헤헤.”

여관 주인을 향해 아딘은 미소를 지어보인 후 로제와 함께 천천히 동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일주일 정도는 걸릴 거야.”

국경의 끝을 알리는 텅 빈 망루가 보이기 시작할 무렵, 아딘은 로제에게 이야기했다.

“그 정도는 충분히 버틸 수 있어요, 오라버니.”

“그나마 지금은 눈보라가 멈춰서 다행이야. 뭐, 언제 다시 불어닥칠지는 몰라도 운이 좋다면 쿠만에 도착할 때까지 안 만날 수도 있겠지.”

“저는 개인적으로 눈보라가 보고 싶기는 해요.”

“보는 거랑 직접 그 속을 통과하는 거랑은 상당히 다를걸?”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두 사람은 망루를 통과했다.

그리고 두 사람을 뒤따르던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빠르게 둘을 앞지르더니 이내 한 명의 사람으로 변했다.

“12월 10일까지 전하께서 분부하신 대로 준비를 끝내놓겠사옵니다.”

보다 공손해진 말투로 빅토르 다비도프는 아딘에게 이야기했다.

아딘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지나치게 서두르다 자칫 발각되는 일은 없어야 하네.”

“염려 마시옵소서.”

“그리고 전력을 계산할 때 나와 내 동생도 거기에 포함을 하는 게 좋을 걸세. 충분히 군단 하나만큼의 역할을 할 수 있을 테니까.”

아딘의 말에 빅토르 다비도프는 힐끔 로제를 바라보았다.

로제는 가슴을 편 채 당당한 자세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무슨 여자애가 저런…….’

마법사로서 그녀가 지닌 힘의 크기를 대충 가늠한 빅토르 다비도프는 떨리는 눈으로 시선을 아딘에게 돌렸다.

“적절한 위치에 들어가실 수 있도록 준비해 두겠사옵니다.”

“그래.”

그렇게 아딘은 빅토르 다비도프에게 몇 가지 당부 사항을 전달한 후 그 자리에서 불칸의 갑옷을 입고 로제와 함께 동쪽으로 날아올랐다.

빅토르 다비도프는 그 자리에서 한동안 가만히 동쪽으로 사라져가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과연 내가 올바른 선택을 한 걸까?’

자신의 예상과는 달라도 너무 다른, 막강한 힘을 지닌 아딘과 그가 여동생이라 소개하는, 어마무시한 힘을 보유한 마법 소녀.

‘자칫 혁명이 더 엄혹한 전제 군주의 등장으로 끝날 수도 있는데…….’

하지만 지금 당장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딘이라는, 콘스탄틴 왕조의 적통을 배제하고 혁명을 진행하기에는, 민란의 주체가 될 민중의 구심점 역할을 할 존재가 전무했기 때문이었다.

‘위대한 선지자시여 우리를 굽어 살피소서.’

속으로, 동방광명교의 실질적 숭배 대상인 마우세스 레비에게 기도한 후 빅토르 다비도프는 이내 다시 고양이로 변해 상트보가르로 되돌아갔다.

* * *

“무슨 고민이라도 있나?”

“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총수님.”

“요 며칠 동안 표정이 안 좋아. 혹시 건강에 문제라도?”

“아닙니다. 그저 잠을 좀 설쳤을 뿐입니다.”

제이크 로버츠의 말에 드라기 상단 총수 마리오 드라기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 사람아. 그러게 적당히 하라니까. 아무리 돈이 많으면 뭐하나? 몸이 아프면 아무 쓸모도 없는 거야.”

“죄송합니다.”

“내가 봤을 때 자네는 늦었지만 결혼할 필요가 있어. 부인이 있고 자식이 있어야지 몸 관리를 좀 하지.”

“염려 감사합니다.”

제이크 로버츠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지만, 속으로는 냉소를 머금었다.

마리오 드라기가 걱정하는 게 자신의 건강 자체가 아니라, 자칫 건강을 잃어 돈세탁을 더는 못하게 되는 상황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겉으로 드러낼 만큼 제이크 로버츠는 어리숙하지가 않았다.

그는 그저 절제된 예의를 차릴 뿐이었다.

“나도 요즘 피곤하긴 마찬가지야. 벨로디나에선 연일 용병을 증원해달라는 요청이 날아오는데, 이게 또 요즘 용병 운용이 만만치가 않거든.”

그러면서 마리오 드라기는 제이크 로버츠에게 최근 샤펠 제국 북부의 귀족 간 대립이 심상치 않아 용병이 많이 그쪽으로 차출이 됐다는 이야기부터 게마인샤프트 서부 일대에서 전운이 고조됨에 따라 비정규 용병을 고용하기도 어렵게 됐다는 이야기까지를 한탄조로 늘어놓았다.

‘또 나보고 뭘 토해내라고?’

그 이야기가, 단순한 넋두리가 아님을 제이크 로버츠는 알고 있었다.

그는 겉으로는 마리오 드라기에게 공감하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그가 무얼 요구하려나 우려하며 가만히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게 참…… 그렇다고 마적들을 놔두자니 광물 수급에 차질이 생기고 말이야.”

마리오 드라기는 골치 아프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술을 쭉 들이켰다.

그러더니 제이크 로버츠를 바라보며 본론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말이야. 좀 용병을 다른 곳에서 끌어오면 싶어.”

그 말에 제이크 로버츠는 바짝 긴장했다.

혹시라도 자신이 비자금으로 만들어둔 비밀 용병단의 존재가 들통난 것일 수도 있는 만큼, 지금부터는 조그만 실수도 범하지 말아야 할 터였다.

“어디서 말입니까?”

“쿠만에서 말이야.”

쿠만이라는 말에 제이크 로버츠의 표정이 더욱 굳었다.

“쿠, 쿠만 말입니까?”

“거기 원래 종종 벨로디나 애들한테 용병 제공하고 했잖아? 최근에 그쪽하고 교역도 거의 끊겨서 걔네들도 많이 힘들 텐데, 적당히 보수 지급해 준다 하고 고용하면 되지 않겠나?”

평시였다면 분명 일리 있는 말이었다.

쿠만인들이 수렵과 밭농사로 자급자족한다곤 하지만, 종종 용병으로 활약하여 외부에서 막대한 자금과 식량을 받아가기도 했으니까.

문제는 타이밍이었다.

‘하필…….’

현재 쿠만에는 아딘이 가 있다.

그는 그곳에서 쿠만인들을 용병으로 고용하고자 여러 시도를 하고 있을 터였다.

그런 곳에 용병을 구하러 간다는 건, 자칫 사자 아가리로 걸어 들어가는 일일 수도 있다.

‘로이 장로께서 마적들의 우두머리를 죽이셨어. 그리고 마적들은, 장로께서 말씀하시기론 파벌이 크게 둘로 나뉘어 있다고 했지. 그럼 분명 앞으로 마적의 위협이 줄어들 거란 말이야.’

우두머리의 사망과 파벌 간 대립.

충분히 예상 가능한 시나리오였다.

그 과정에서 카판족의 마적 행위가 사라지거나 한다면 자신이 쿠만으로 갈 일도 없어질 것이다.

문제는 지금 이 자리에서 그걸 마리오 드라기에게 말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애초에 마적의 정체가 카판족인 것도 다들 모르는 상황이니까.’

괜히 이런 소리를 했다간, 운이 좋으면 꿈이라도 꿨느냐며 핀잔을 들을 것이고 재수가 없으면 괜한 의심을 받아 하는 일이 모두 꼬이게 될 것이었다.

‘외통수야.’

마리오 드라기의 어조가 명령조가 아니라 해서 그걸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의 말을 무시했다간, 여러 경로에서 자신이 횡령한 자금 흐름이 추적당할 터였다.

제이크 로버츠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마리오 드라기가 자신이 어느 정도 뒷돈을 챙겨 뒀음을 인지하고 있음을.

그저 자신의 충성스러운 부하인 까닭에 그것을 그냥 내버려 두고 있음을.

“벨로디나로 돌아가 상황을 확인하고 접촉해 보겠습니다.”

결국 제이크 로버츠는 마리오 드라기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마리오 드라기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흐하하하! 이래서 난 로버츠 자네가 좋아. 아주 화끈하거든.”

“감사합니다.”

“그래. 그래도 너무 무리하지는 마. 적당히 며칠 쉬었다가 벨로디나로 가서 한 번 알아보란 말이야.”

“네, 그리하겠습니다.”

물론 제이크 로버츠는 마리오 드라기의 당부대로 며칠 쉬거나 하지는 않았다.

말이 며칠 쉬어라였을 뿐, 실제로 마리오 드라기가 원하는 것은 그가 즉각적으로 움직이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지난 세월 곁에서 보좌하며 지켜봐 왔던 제이크 로버츠는 곧장 캐치했다.

그랬기에 그는 마리오 드라기의 저택에서 나오자마자 거점 이동 장치로 향했다.

“움직여라, 줄리아. 함께 가야 할 곳이 있다.”

지하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줄리아는 제이크 로버츠의 부름에 후다닥 짐을 챙겼다.

“어디로 가십니까, 전도자님?”

줄리아의 물음에 제이크 로버츠는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일단…… 아퐁으로 가자.”

“네, 알겠습니다.”

제이크 로버츠는 거점 이동 장치 위에 올라선 채 가만히 줄리아를 기다렸다.

곧 줄리아가 그의 곁에 섰고, 제이크 로버츠는 거점 이동 장치를 활성화시켰다.

‘일단 로이 장로에게 이 문제를 보고해야 해.’

뭔가 점점 자기가 구상했던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일들이 진행된다는 느낌에 제이크 로버츠의 표정은 급격히 어두워져 갔다.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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