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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91화 (91/175)

091 새로운 동맹 (1)

빅토르 다비도프는 망설였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자신이 계획하고 있는 민란.

이미 그 기반은 마련이 된 상태였다.

당장 콘스탄티노바 암시장에서 밀가루 한 포대의 거래 가격이 골드 단위가 된 것이 현실이다.

서민 경제가 완벽하게 무너진 이 시국에 민란 정도는 구태여 그가 일으키지 않더라도 일어나게 될 터였다.

중요한 건 그런 민란을 혁명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하지만 현 벨로디나 민중의 의식 수준에서 혁명을 위해선 역설적으로 왕이 필요했다.

민중이 느끼기에 외세의 괴뢰 역할을 하는 왕이 아닌, 진정한 의미에서 자신들을 이끌어줄 왕이.

‘아딘 콘스탄틴…… 분명 필요한 존재이긴 한데…….’

그랬기에 빅토르 다비도프는 아딘을 찾아다녔다.

어딘가에 살아 있으리라 믿고, 부디 살아 있기를 기도하며, 자신의 조직 체르노비치를 이용해 찾고 또 찾았다.

하지만 막상 아딘과 마주하게 됐을 때, 빅토르 다비도프는 망설이게 됐다.

‘자칫 혁명이 저 망나니의 사욕을 채워줄 수도 있어.’

빅토르 다비도프는 아딘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지 않았다.

오래전부터 민중을 위한 국가를 꿈꿔온 사람이라기에는 그가 해온 행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단 자기를 숨기려 했다는 게 말이 안 돼. 구태여 숨길 필요가 없잖아? 더구나 망나니질을 하면서까지.’

오히려 망나니 기질 덕분에 선왕 블라디미르 2세가 태자 책봉을 미뤘다는 것이 당대 콘스탄티노바 정가의 주류 견해였다.

‘내 마법을 막아낸 것. 분명 저 목걸이 때문이야.’

빅토르 다비도프는 아딘의 목걸이를 바라봤다.

사자 얼굴 펜던트가 자신을 보며 으르렁거리는 것만 같은, 황금빛 찬란한 보물.

그것이 자신의 근거리 마법으로부터 아딘을 지켜줬다 확신하며 빅토르 다비도프는 파이프에 새 담뱃잎을 구겨 넣고는 불을 피웠다.

‘당연히 망설여지겠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아딘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술잔을 비우고 다시 채웠다.

‘하지만 결국 자기에게는 선택지가 하나뿐이라는 걸 깨닫는데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겠지.’

두루마리가 확인해준 빅토르 다비도프에 관한 정보.

민란을 기반으로 한 혁명과 그것의 구심점이자 상징이 되어 줄 존재로서의 국왕.

그 국왕의 자리에 가장 적합한 정통성을 지닌 아딘.

‘그대의 패를 내가 다 보고 있는데 질 수가 없지.’

상대방의 패는 모두 아딘이 알고 있다.

그리고 빅토르 다비도프는 아딘의 패를 모르고 있다.

이 차이가 결국 이 담판의 끝을 좌우하리라 아딘은 확신했다.

“후우-”

잠시 후, 한참을 담배 연기를 소리 없이 코로 내뿜던 빅토르 다비도프가 긴 한숨과 함께 마지막 연기를 입으로 내뱉었다.

다 탄 담뱃재를 비워내고 파이프를 품에 넣은 후 빅토르 다비도프는 술을 쭉 들이켰다.

그리곤 자리에서 일어나며 아딘에게 이야기했다.

“일단…… 이틀만 시간을 주십시오. 저 혼자서 어떻게 결정할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조직원들과도 상의를 해 보고 결정하겠습니다.”

그 말에 아딘은 씩 웃었다.

빅토르 다비도프를 수령으로 하는 일인 지배 체제의 체르노비치에서 상의란 개념은 무의미했다.

단지 시간을 벌기 위한 핑계임을 알았지만, 아딘은 내색하지 않았다.

“그리하시오. 나는 여기서 사흘 정도 더 묵을 생각이니, 이곳으로 찾아오면 된다네.”

빅토르 다비도프는 아딘을 향해 가볍게 예의를 표한 후 다시 연기가 돼 여관에서 사라졌다.

그가 사라지는 것을 보며 아딘은 술을 천천히 들이켰다.

‘다행이야. 그래도 여기서 세력을 모을 요소들을 찾게 돼서.’

카판족 기병대에 쿠만족 보병대 그리고 빅토르 다비도프의 풀뿌리 혁명 조직까지.

의외로 유리 콘스탄틴 타도까지는 쉬울 것 같다고 생각하며 그렇게 아딘은 조용히 술과 함께 밤을 보냈다.

* * *

광명력 11월 17일 저녁.

샤펠 제국 수도 아퐁.

황궁 알현실.

화려한 옥좌에 샤를 11세가 근엄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와 열 걸음 떨어진 곳에선 로이가 고개를 푹 숙이고 양손을 앞으로 모은 채 서 있었고, 그보다도 40보 더 뒤에는 제이크 로버츠가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팍 숙인 채 자리하고 있었다.

“아딘 블라디미로비치 콘스탄틴이라…….”

샤를 11세는 콧방귀를 뀌었다.

“예언 속 황금 갑옷의 정체가 몰락한 변방 왕국의 왕족이라…….”

샤를 11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긴…… 황금 갑옷이 재앙을 불러온다고 했지, 어떤 영웅적 행보를 한다고 예언하지는 않았으니까.”

그의 시선이 로이에게로 향했다.

“오히려 이렇게 되면 우리 입장에선 쉬워질 수도 있어. 이리저리 숨어다니는 걸 찾기보단 차라리 콘스탄티노바에 처박혀 있는 게 우리 입장에선 잡기가 더 쉬우니까.”

샤를 11세는 의심하지 않았다.

아딘이 반정에 성공하리라는 것을.

아비에서 자식으로 몸을 갈아타며 수백 년을 살아온 존재이자, 막강한 정보력을 가진 샤펠 제국 황제로서 그는 아딘의 성공을 확신했다.

“공화국 놈들은 벨로디나를 그저 착취할 생각만 했을 뿐, 관리할 생각을 하지 않았지.”

샤를 11세의 말에 제이크 로버츠가 움찔했다.

“덕분에 벨로디나의 민생은 파탄 지경에 이르렀어. 그런 상황에서 황금 갑옷을 지닌, 왕위에 강한 정통성을 가진 아딘 콘스탄틴이 반정을 일으킨다면 당연히 대권은 그에게로 옮겨가겠지.”

그렇게 된다면 제니스와 벨로디나 사이에 전쟁이 발발할 수 있다고 샤를 11세는 생각했다.

“하지만 공화국 놈들은 그놈을 이길 수 없을 거야.”

샤를 11세의 시선이 처음으로 제이크 로버츠에게 향했다.

“그대, 전도자 제이크 로버츠에게 내가 특명을 하달하겠다.”

특명이란 말에 제이크 로버츠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더욱 푹 숙였다.

“마, 말씀하시옵소서.”

“공화국 지도부가 벨로디나와의 전쟁에서 패색이 짙어질 때쯤, 휴전 협정이 아닌 우리 제국에 도움을 요청하도록 하라.”

“네, 네?”

제이크 로버츠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샤를 11세를 바라보았다.

“그대가 그간 쌓아 놓은 비자금을 푼다면 얼마든지 로비는 가능할 것이다.”

“그, 그건…….”

제이크 로버츠는 도무지 상황이 자기 의도대로 흘러가지 않는 모습에 적잖이 당황했다.

‘이, 이게 도대체 무슨 경우야?’

그렇게 그가 샤를 11세의 물음에 확답하지 못하고 있을 때, 샤를 11세는 로이에게 가볍게 턱짓했다.

로이는 샤를 11세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 천천히 제이크 로버츠에게 다가갔다.

로이가 가까이 다가오자 제이크 로버츠는 침을 꿀꺽 삼켰다.

제이크 로버츠 앞에 멈춘 로이는 말없이 천천히 기세를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그 기세에 제이크 로버츠는 숨이 탁 막히는 것을 느꼈다.

“전도자는 들으라.”

로이의 기세에 짓눌려 제이크 로버츠의 의식이 흐려질 무렵, 샤를 11세가 입을 열었다.

강한 에너지가 담긴 샤를 11세의 음성에 가뜩이나 정신이 없는 상황에서 제이크 로버츠는 압도당하고 말았다.

“마, 말씀하시옵소서, 교주님.”

“그대에게 특명을 하달하노라. 가서 공화국 지도부가 벨로디나와의 전쟁에 우리 제국을 끌어들이도록 유도하라.”

“며, 명을 바, 받들겠…… 사옵니다.”

제이크 로버츠의 입에서 복종의 말이 나오자 로이에게서 뿜어져 나오던 강한 기세가 사라졌다.

“허억…… 허억…….”

자신을 짓누르던 기세로부터 자유로워진 제이크 로버츠는 땀을 뻘뻘 흘리며 가쁘게 호흡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장로 로이는 남고, 전도자 제이크 로버츠는 제니스 공화국으로 돌아가 기반을 미리 다져놓고 있거라.”

샤를 11세의 축객령에 제이크 로버츠는 후들거리며 가까스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샤를 11세에게 허리 숙여 인사한 후 알현실을 빠져나갔다.

제이크 로버츠가 사라지고 알현실에는 샤를 11세와 로이만이 남게 됐다.

샤를 11세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로이에게 말했다.

“엘드랄. 너는 어떻게 생각하지?”

“힘들지 않겠습니까, 아이드 님.”

“그렇겠지?”

샤를 11세는 가만히 턱을 쓰다듬었다.

“마리오 드라기라면 몰라도 제이크 로버츠 정도로는 분명히 힘들 거야. 공화국 놈들, 겉으로는 평등이니 시민권이니 하면서 뒤로는 샤펠 제국보다도 더한 계층 구조를 이루고 있으니까.”

“맞습니다. 제이크 로버츠 정도로는 기껏해야 원로원의 비주류들 정도에나 접촉이 가능할 것입니다.”

샤를 11세는 고개를 끄덕였다.

로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가 한 번 나서서 처리해도 괜찮겠습니까?”

그 물음에 샤를 11세는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됐어. 그 정도로 급하지는 않아. 솔직히 별 기대는 안 하고 있어.”

“그렇다면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로이의 물음에 샤를 11세가 씩 미소를 지었다.

“적당히 때를 봐서 움직여야겠지. 정예 부대를 구성해서 말이야.”

“정예 부대라 함은……?”

샤를 11세가 손가락으로 자신과 로이 그리고 땅을 가리켰다.

그 의미를 파악한 로이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미리 대비해 두고 있겠습니다.”

“그래. 무려 300여 년 동안 기다려온 일이야. 너무 서두르다가 또 때를 놓치면 곤란해져. 여유를 가지라고.”

* * *

11월 18일 저녁.

통나무여관.

일찍 저녁 식사를 끝낸 아딘은 로제를 먼저 방으로 올려보냈다.

요 며칠 아딘이 식당에서 잠을 청한 덕에 깊이 잠들었던 로제는 한결 피로가 풀린 얼굴로 아딘에게 인사한 후 방으로 올라갔다.

그녀가 올라간 후, 아딘은 여관 주인에게 부탁해 가벼운 술상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는 빅토르 다비도프가 오길 기다리며 홀로 술잔을 기울였다.

그리고 술 1병을 비우고 두 번째 병마저 절반 정도 비웠을 무렵, 빅토르 다비도프가 여관을 찾아왔다.

처음 찾아왔을 때와는 달리 이번엔 아주 당당하게 문을 열고 들어서는 빅토르 다비도프를 환영하며 아딘은 그에게 맞은편 자리를 권했다.

빅토르 다비도프는 결심이 선 표정으로 아딘의 맞은편에 앉았다.

“자, 한 잔 받으시오.”

아딘은 그의 잔을 채워주었고, 빅토르 다비도프는 받자마자 잔을 비웠다.

그리고 아딘이 다시 잔을 채워주고 있을 때, 빅토르 다비도프는 입을 열었다.

“손을 잡겠습니다.”

그 말에 아딘은 씩 웃었다.

“대신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빅토르 다비도프의 단어 선택.

일반적으로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라는 문장이 나올 판에 ‘조건’ 대신 ‘부탁’이라는 단어를 쓰는 그의 어휘 능력.

아딘은 살짝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 보시게.”

“일반 백성들은 사실 왕자 전하의 지난 악행을 잘 알지 못합니다. 콘스탄티노바의 백성들 중에는 일부 더러 아는 자들이 있긴 하지만, 그마저도 추상적일 뿐입니다.”

아딘은 고개를 끄덕였다.

빅토르 다비도프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귀족들 가운데에선 전하의 악행을 기억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혁명이 성공한 후, 그들과 자리를 한다면 우선 지난날의 악행에 관한 유감 표명이라도 해 주십시오.”

빅토르 다비도프의 말에 아딘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어 답하기 시작했다.

“내가 다비도프 백작의 이상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건가 의문이 드는군.”

“네?”

“다비도프 백작이 꿈꾸는 혁명…… 그 혁명에 옛 귀족들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지?”

빅토르 다비도프는 쉽사리 아딘의 질문을 이해하질 못했다.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는 빅토르 다비도프에게 아딘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혁명이란 말일세. 단순히 유리 콘스탄틴을 타도하고 그가 끌어들인 외세를 몰아내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야.”

“……”

“이전에 이 나라를 지배하던 모든 것을 파괴하고 새로운 구조를 세우는 것. 그게 바로 혁명이야.”

아딘의 말에 빅토르 다비도프는 입을 다물었다.

“혁명이 끝나면 옛 귀족 직함은 모두 사라질 걸세. 남는 건 오로지 관직에 따르는 칭호와 구심점으로서 국왕이라는 자리만이 있을 뿐이지.”

“…….”

“그대는 혁명 이후에도 귀족 세력들과 무얼 하고자 한 건가? 그들의 땅을 빼앗아 농민에게 나눠주길 꿈꾸는 사람이?”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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