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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90화 (90/175)

090 국경에서 만난 옛 적 (4)

아딘의 말에 남자는 눈을 부릅뜨지도, 화들짝 놀라지도 않았다.

그저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아딘과 거리를 벌린 다음 지팡이를 전방으로 뻗을 뿐이었다.

[파지직-!]

강한 전류가 순식간에 지팡이에서부터 뻗어나와 아딘에게로 날아들었다.

가히 회심의 일격이라 부를 법한 기습이었다.

그러나 그가 날린 번개는 아딘의 목에 걸린 네르갈의 목걸이가 만들어낸 파장에 휘말렸고, 이내 허공에서 허망하게 흩어졌다.

“……!”

그제야 남자는 놀랐다.

[크헝-!]

네르갈의 목걸이가 파동을 음파로 변환하여 분출했다.

거기에 담긴 초저주파가 일순간 남성의 몸을 마비시켰다.

그런 남성을 향해 아딘은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했다.

“빅토르 니콜라예비치 다비도프. 역시 궁정 마법사답게 대단하군. 아, 지금은 공식적으로 죽은 사람 취급이니, 전 궁정 마법사라고 해야 하나?”

아딘의 말에 남성, 빅토르 다비도프는 이를 갈았다.

“자기가 꼭꼭 숨겨두었던 지하조직의 정체를 말했을 때보다도 마법이 막혔을 때 놀란 걸 보면 역시 아직까지는 자신에 대한 애착이 강하게 남아 있는 것 같아. 안 그래?”

“그러는 왕자 전하는…… 근거리에서 날린 마법을 너무도 쉽게 막으시는 걸 보니…… 1년 동안 재미있는 물건들을 모으신 모양입니다?”

으르렁거리는 빅토르 다비도프의 모습에 아딘은 씩 웃었다.

“앉게. 조금 전 공격은 없던 일로 칠 테니까.”

“전하 같으면 앉으시겠습니까?”

“앉겠지. 내가 자네였다면. 자네의 이상을 위해서라도, 자네가 키운 조직을 위해서라도, 혁명을 위해서라도.”

아딘의 입에서 혁명이란 단어가 나오자 빅토르 다비도프는 눈을 감았다.

그리곤 잠시 생각을 한 끝에 결국 그는 터덜터덜 자리로 돌아가 아딘의 맞은편에 앉았다.

“언제부터 알고 계셨습니까?”

“작년 말, 드미트리하고 싸우기 직전에.”

“그때 한창 정신없었는데…… 된통 걸린 모양입니다?”

“뭐, 피차 정신없긴 마찬가지였지. 덕분에 드미트리는 죽고 나라가 공화국의 괴뢰국이 됐지만 자네의 조직은 건실하게 살아남았지.”

아딘은 미소를 지으며 빅토르 다비도프의 잔에 술을 따라 준 후 병을 그에게 건넸다.

빅토르 다비도프는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아딘의 잔을 채워준 후 아딘이 건배 제의를 할 틈도 주지 않고 자기 잔에 찬 술을 쭉 넘겼다.

“크으…….”

“급하게 마실 것 없어. 천천히 마셔. 시간은 많으니까.”

아딘은 다시 빅토르 다비도프의 잔을 채워 주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드미트리만 첩자들을 운용했을 것 같나? 나에게도 귀가 있고 눈이 있었어. 단지 차이가 있다면, 내 귀와 눈은 주인과 다른 마음을 품지 않았다는 것뿐이고.”

“흥! 장담하진 마십시오, 왕자 전하. 그중에서도 저처럼 큰 대의를 위해 움직였던 것들이 있었을 겁니다.”

“아니, 없어. 그대와 같은 대의를 품기에는 다들 그 시절에 만족하고 살던 것들이니까.”

아딘의 말에 빅토르 다비도프는 한숨을 내쉬며 품에서 파이프를 꺼냈다.

그리곤 담뱃잎 한 장을 찢어 넣은 뒤 마법을 이용해 불을 붙였다.

곧 담배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며 여관 식당을 덮기 시작했다.

* * *

빅토르 니콜라예비치 다비도프.

벨로디나 왕국의 백작이자 궁정 마법사였던 이 남자에게는 꿈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민중을 위한 국가를 건설하는 것.

귀족과 대지주의 땅을 농민에게 나눠주고, 대상인과 고리대금업자의 돈을 영세상인과 정직한 노동자에게 분배하는 것.

그것이 그의 꿈이었다.

그랬기에 처음 두루마리로 그의 프로필을 확인했을 때, 아딘은 다소 놀랐다.

그리고 빅토르 다비도프가 오래전부터 운용해온, 거지와 창녀, 노예로 구성된 비밀결사 체르노비치 - 어둠의 자식에 관한 정보를 확인했을 때 아딘은 빅토르 다비도프를 포섭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카판인 궁기병과 쿠만인 보병으로 전쟁을 일으킬 경우 벨로디나 전체를 장악하는데 꽤나 시간이 걸릴 터였다.

하지만 거기에 민중 반란까지 가세한다면 기간을 단축할 수 있음은 물론 적의 시선을 분산시켜 각개격파 시도까지도 가능해질 터였다.

하지만 당장 민중 반란을 일으킬 방법이 없었기에 다소 자신과 로제가 무리하여야 할 작전을 구상하던 아딘에게 빅토르 다비도프의 체르노비치는 딱 필요한 조직이었다.

“자네는 정말 대단해.”

진실을 이야기할 수 없었던 만큼, 빅토르 다비도프에게 체르노비치에 관해 알게 된 사연을 대충 꾸며내 둘러댄 후 아딘은 곧장 본론을 꺼내 들었다.

“만약 자네가 나의 편이었다면, 어쩌면 나도 그런 식으로 연기를 할 필요는 없었겠지.”

연기라는 말에 빅토르 다비도프는 아딘을 힐끔 바라봤다.

아딘은 짐짓 슬픈 표정을 지어 보이며 술을 한 모금 넘겼다.

“자네를 포함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를 망나니 왕자 정도로나 생각했겠지.”

빅토르 다비도프는 부정하지 않았다.

아딘의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건 반쯤은 연기였어. 나를 감추기 위한, 내 꿈을 감추기 위한 연기.”

빅토르 다비도프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무슨 개소리를 하느냐는 그의 얼굴에 아딘은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믿어지진 않겠지만, 나 또한 백성을 위한 국가를 꿈꾸었다네. 다비도프 백작.”

아딘의 말에 빅토르 다비도프의 눈이 순간 떨렸다.

그러나 그 떨림은 이내 비웃음으로 바뀌었다.

“백성을 위한 국가를 꿈꾸셨다는 분이 왜 그렇게 망나니처럼 사셨습니까? 오히려 그렇게 사신 덕분에 전하에 대한 악명이 자자했는데 말입니다.”

“그래야 백성들이 들고 일어났을 테니까.”

아딘의 말에 빅토르 다비도프의 표정이 굳었다.

“내가 원래 꿈꾸던 것은, 나 자신이 절대적인 악의 화신이 되는 것이었네. 망나니 국왕이 돼 악정을 펼치다 보면 어느 순간 백성의 분노가 하늘을 찔렀을 것이고, 그때 내가 적당히 몇 군데에 불을 지피면 대규모 민중 반란이 일어났겠지.”

“…….”

“그랬으면 피는 많이 흘렸겠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폐위되거나 혹은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모든 권력을 잃은 채 의전용 국왕으로 전락했겠지.”

아딘의 말에 빅토르 다비도프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술을 쭉 들이켰다.

‘오케이. 흔들리고 있어.’

자신이 지어낸, 오로지 빅토르 다비도프를 포섭하기 위한 스토리에 대상이 흔들리는 걸 확인하고서 아딘은 속으로 만세를 불렀다.

그러나 겉으로는 의연하게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뭐, 이제는 아무 의미 없는 소리가 됐지만 적어도 나는 그런 꿈을 품고 있었지.”

아딘은 말을 마치고 술을 마저 쭉 들이켰다.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빅토르 다비도프는 말없이 담배만 뻑뻑 피워댔고, 아딘은 입을 다문 채 빅토르 다비도프를 바라보기만 했다.

잠시 후, 담배를 다 태운 빅토르 다비도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벨로디나에는 왜 다시 나타나신 겁니까?”

“……”

“전하께서 르보프의 호위를 받고 벨로디나를 떠나셨다는 정보가 제가 마지막으로 확인한 전하에 대한 정보였습니다. 엘프숲으로 들어가신 것이 전하의 마지막 족적이었단 말입니다. 그런데 왜 다시 돌아오신 겁니까?”

“내가 다시 돌아올 거라 믿었기에 부하들에게 내 초상화를 돌린 거 아닌가?”

“어디까지나 생사를 확인하고 싶어서 그랬던 것뿐이었습니다.”

“그게 아니지. 자네는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어, 다비도프 백작.”

거짓말이란 말에 빅토르 다비도프의 눈에 살짝 이채가 서렸다.

“자네는 날 찾아서 반란의 명분으로 삼으려 했던 것 아닌가?”

아딘의 말에 빅토르 다비도프는 심장에 커다란 돌이 떨어지는 느낌을 받아야 했다.

‘어, 어떻게 그걸…….’

움찔하며 놀라는 빅토르 다비도프를 바라보며 아딘은 씩 웃었다.

* * *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계층으로 비밀결사를 조직해 정보를 수집하고 민중 반란을 일으킬 여러 창구를 마련하는 동안 빅토르 다비도프는 절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이 나라 백성들은 아직 왕이 필요하다는 것을.

공화정이라는 체제는 이들에겐 아직 많이 낯설다는 것을.

그것을 깨닫게 된 순간 빅토르 다비도프는 절망했다.

그리고 그가 절망한 사이 내전이 발발했고, 전쟁은 제니스 공화국을 등에 업은 유리 콘스탄틴의 승리로 끝났다.

아딘과 드미트리가 모두 패배한 순간, 그는 숨었다.

그리고 때로는 추한 몰골의 노인으로 혹은 고양이로 변신하며 몸을 숨긴 채 조직을 이끌었다.

그러면서 그는 조직원들에게 아딘의 초상화를 나눠주었다.

안톤 르보프와 함께 탈출한 그를 찾아내 어떻게든 반란의 구심점으로 삼을 생각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아직 이 나라 백성들은 왕을 필요로 한다. 비록 그것이 의전 기능만 하는 허수아비일지라도 백성들에게는 구심점이 돼 줄 군주가 필요하다. 이게 자네의 결론이었겠지.”

아딘의 말에 빅토르 다비도프는 떨리는 손으로 술병을 들어 자기 잔을 채웠다.

“뭐, 놀랄 건 없네. 내 결론도 그거였으니까.”

빅토르 다비도프는 술을 쭉 들이켰다.

“뭐, 옛날이야기는 여기까지 하지. 어차피 자네가 꿈꾸던 것이나 내가 고민하던 것이나 제니스가 이 나라를 접수하면서 모두 물거품이 됐으니까.”

아딘은 빅토르 다비도프의 잔과 자기 잔을 다시 채웠다.

그리곤 다소 진지한 표정으로 상체를 앞으로 숙인 채 목소리를 낮춰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난 자네와 앞으로의 이야기를 하고 싶네, 다비도프 백작.”

그 말에 빅토르 다비도프는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아딘을 바라보았다.

아딘은 천천히 그에게 말했다.

“함께 손을 잡고 한 번 해보지 않겠나? 혁명 말이야.”

빅토르 다비도프는 거기에 대해 곧장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저 촛불 아래 황금빛 사자 얼굴 목걸이를 한 아딘의 모습을 의심과 불안, 기대가 뒤섞인 눈으로 바라보는 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 * *

11월 16일 저녁.

노보로바야 프런티어 호텔 최상층.

제이크 로버츠는 마치 하인처럼 로이의 뒤에 선 채 두손을 앞으로 모으고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로이는 그런 제이크 로버츠를 등진 채 푹신한 소파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일 아침, 아퐁으로 간다.”

로이의 말에 제이크 로버츠는 살짝 고개를 들었다.

“놈의 정체가 아딘 블라디미로비치 콘스탄틴이란 것과 반란을 일으킬 계획이 있다는 것. 이것을 교주께 아뢰고 의견을 구하여야 한다. 이 이상 내가 나서는 건 주제 넘는 행동이다.”

“알겠습니다. 준비하겠습니다.”

“쿠만에 갔다는 것은 분명 쿠만인을 용병으로 고용하기 위함일 것이다. 그들은 카판인과는 달리 한 명, 한 명이 대단한 전사여서 아무리 황금 갑옷이라 하더라도 쉽게 힘으로 누르진 못하겠지.”

로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최대한 빨리 아퐁에서 교주님께 지침을 하달받아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것이다. 늦어도 사흘 안에.”

로이는 천천히 제이크 로버츠에게 다가갔다.

“이곳에도 신도가 있다고 알고 있다.”

“네, 맞습니다, 장로님. 랄프 넬슨이라고, 제 비서 겸 신도입니다.”

“그에게 쿠만으로 갈 짐을 챙기라고 명하라. 어둠을 타고 빠르게 간다고는 하지만, 여기서 쿠만까지 가는 길은 눈으로 뒤덮인 곳. 나는 괜찮겠지만, 너는 자칫 얼어 죽을 수도 있다.”

순간 제이크 로버츠가 눈을 부릅떴다.

“저, 저도 쿠만으로 갑니까?”

로이가 물끄머리 제이크 로버츠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나 혼자 갈까?”

“그, 그게…….”

로이는 지긋이 제이크 로버츠를 바라봤다.

자신의 눈을 뚫고 들어와 뇌를 후비는 것 같은 로이의 눈빛에 제이크 로버츠는 결국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아, 알겠습니다, 장로님.”

로이는 씩 웃으며 제이크 로버츠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오늘 밤은 푹 자두는 게 좋을 거다. 내일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아퐁으로 떠날 거니까. 저번에는 교주님을 알현하는데 시간이 걸렸지만, 이번엔 도착하자마자 알현할 수 있을 거니 꽤나 속도전이 될 거다.”

“…… 알겠습니다.”

제이크 로버츠는 차마 표현하진 못하고, 속으로 한숨을 내쉬면서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다.

‘차라리 그냥 입을 다물고 있을 걸 그랬어…….’

최대한 자신의 비밀 상단과 용병이 피해를 보지 않게 하고자, 황제가 직접 군대를 동원케 하고자 계획한 것이 점점 산으로 가고 있음을 느끼며 제이크 로버츠는 털레털레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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