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9 국경에서 만난 옛 적 (3)
벨로디나에는 2개의 항구도시가 존재했다.
하나는 남부의 대도시 크리미아였고, 다른 하나가 이곳 동부의 국경도시 상트보가르였다.
으레 항구도시가 그렇듯 크리미아와 상트보가르는 모두 유흥 문화가 발달해 있었다.
그중 크리미아의 경우 벨로디나가 제니스의 괴뢰국이 된 현재에도 여전히 불야성을 이루었지만, 상트보가르의 경우에는 아니었다.
[똑똑-!]
불과 1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쿠만으로 향하는 사람과 쿠만에서 오는 사람을 반기던 여인의 웃음과 분내가 가득했던 항구 윗길.
여인은커녕 고양이 한 마리 지나다니지 않는, 어둠에 잠긴 거리에 거지가 나타난 건 제법 늦은 밤이었다.
[똑똑-!]
거지는 거리의 한구석에 자리한 조그만 건물의 문을 계속해서 두드렸다.
[똑똑똑똑-!]
거지가 세 번째 문을 두드렸을 때, 문에 난 조그만 창이 살짝 열렸다.
“나야. 검은쥐.”
거지는 창 너머에서 자신을 보는 시선을 향해 신분을 밝혔다.
이윽고 창이 닫혔고, 문이 열렸다.
거지는 곧장 건물 안으로 들어갔고, 이내 문은 다시 굳게 닫혔다.
“무슨 일이지?”
붉은 머리카락을 길게 기른 여인이 문가에서 거지에게 물었다.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하지.”
“용건부터 이야기해.”
거지는 벽에 걸린 촛불 아래 드러난 여인을 바라보고 하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로 추정되는 인물이 나타났다.”
거지의 말에 여인의 미간이 좁혀졌다.
“들어와.”
곧 여인은 거지를 건물 내부 깊숙한 곳으로 끌고 갔다.
다소 복잡한 복도를 지나 거지가 여인과 함께 도착한 곳은 담배 연기와 정체불명의 약품 냄새가 가득한, 일종의 실험실이었다.
“또 약을 만들고 있었던 거야?”
“약이라도 팔아야 자금을 모을 거 아니야. 애들도 다 내보냈는데.”
“약 사는 놈들은 있고?”
거지가 대화를 이어나가려 했다.
그러나 여인은 대화를 이어나갈 생각은 없어 보였다.
“어디서 그를 봤다는 거지?”
“통나무여관에서. 우리 애들이 구걸하러 갔는데, 담갈색 머리에 눈동자를 한 남자가 밥을 사줬다더라고.”
“밥을 사줘?”
여인은 믿기 힘들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거지도 어깨를 으쓱했다.
“뭐, 믿어지진 않지만 실제로 잘 얻어먹고 왔다더라고.”
“그러면 사람 잘못 본 거 아니야? 그가 거지한테 적선을 베풀 종자는 아니잖아.”
“하지만 외형적 조건은 수령님이 보여주셨던 초상화와 일치했어. 그러니 수령님께 연결을 좀 시켜줬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거지의 말에 여인은 말없이 파이프를 문 채 담배 연기를 코로 뿜어댔다.
잠시 후, 여인은 파이프를 다시 재떨이에 걸쳐 놓은 후 거지에게 따라오라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앞장섰다.
이윽고 두 사람은 실험실 아래에 있는 지하실로 들어갔다.
마찬가지로 담배 냄새와 약품 냄새로 가득한 지하실 한가운데에는 조그만 원탁이 하나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사람 머리통만 한 크기의 수정구슬이 기묘한 보랏빛을 은은하게 자체적으로 뿜어대고 있었다.
“수령님께서 지금 깨어있으시길 바라야겠네.”
거지의 말에 여인은 콧방귀를 뀌었다.
“주무시고 있어도 아마 바로 깨실걸?”
그러면서 그녀는 가만히 수정구슬 위에 양손을 올려놓았다.
[웅웅웅웅-!]
그러자 수정구슬의 보랏빛이 더욱 요란하게 방출되기 시작했다.
강한 진동음과 함께 요란한 보랏빛이 뿜어져 나오길 잠시.
“무슨 일이지?”
수정구슬 너머에서 중년 남성의 음성이 상당한 노이즈를 가진 채 들려왔다.
“수령님. 검은쥐의 보고입니다. 그로 추정되는 인물이 현재 이곳에 머무르고 있다 합니다.”
“……뭐?”
수정구슬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소리에 노이즈가 상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여인은 차분하게 거지에게 들은 이야기를 수정구슬 너머 남자에게 들려주었다.
남자는 잠자코 여인의 이야기를 듣다가, 여인이 말을 끝마치자 한숨과 함께 천천히 이야기했다.
“믿을 수 없군. 일단…… 내가 당장 그쪽으로 출발하겠다. 이틀에서 사흘 정도 걸릴 것 같은데, 최대한 목표물의 발을 잡아두길 바란다. 혹여나 목표물이 어딘가로 떠난다면 뒤에 사람을 붙이고.”
“네, 알겠습니다.”
곧 수정구슬의 빛이 다시 이전처럼 은은해졌고, 목소리도 더 이상 흘러나오지 않게 됐다.
여인은 천천히 수정구슬에서 손을 뗀 후 거지를 바라보며 말했다.
“들었지? 수령님께서 오신다고 하니까, 그때까지 잘 감시하고 있어.”
거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그는 슬쩍 머리를 긁으며 여인에게 은근한 어조로 이야기했다.
“이왕 온 김에 그…… 오랜만에…….”
그런 거지를 향해 여인은 냉정한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시끄럽고, 필요하면 약이나 좀 받아 가.”
그렇게 여인은 지하실에서 위로 올라갔고, 거지는 아쉬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그 뒤를 따랐다.
* * *
광명력 992년 11월 16일 저녁.
상트보가르에서 유일하게 영업 중인 여관 통나무여관에서, 아딘은 여느 날처럼 창가에 앉아 로제와 함께 저녁을 먹고 있었다.
“잠이 잘 안 와?”
부쩍 수척해진 로제의 얼굴을 바라보며 아딘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네? 아…… 네, 조금…….”
“내일 아침에 출발할 수 있겠어?”
“괘, 괜찮아요. 오늘 밤에 푹 자면 되니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로제는 자신하지 못했다. 자신이 오늘 밤 푹 잘 수 있을지.
‘어떻게 푹 자겠어요.’
통나무여관에서 유일하게 손님에게 제공하는 방은 둘이서 자기에는 다소 좁은 측면이 있었다.
아딘의 경우에는 여러모로 벨로디나에 들어선 순간부터 마음이 무겁기도 했고, 또 쿠만으로 가 쿠만인들과 협상할 것을 생각하느라 머릿속이 복잡하기도 했던 만큼 딱히 그런 감정을 느끼진 않았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아딘에 비해 그런 마음의 짐이나 고뇌로부터 자유로웠던 로제는 아딘과 딱 붙어 잔다는 사실에 굉장히 긴장하고 설레야 했다.
덕분에 그녀는 근 이틀 동안 잠을 설쳤고, 그랬기에 지금 그녀의 안색은 상당히 수척해진 상태였다.
“아니면 여기서 며칠 더 쉬어가도 좋아.”
“아, 아니예요. 오라버니 일정대로 하시면 돼요.”
그렇게 이야기하며 로제는 열심히 돼지고기를 집어 먹었다.
그 모습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아딘은 가만히 숟가락을 들어 보르쉬를 떠 먹기 시작했다.
‘흐음…… 확실히 내일 중으로 떠나야 할 것 같긴 한데 말이야.’
그러면서 아딘은 시선을 힐끔 창밖으로 돌렸다.
살짝 열린 창문틈 사이로 거지 두 명이 눈에 들어왔다.
‘어제 저녁에도 왔던 거지들이야. 그러고 보니 어제 오전에 왔던 거지들이 오늘 오전에도 왔었지?’
이틀에 걸쳐서 비슷한 시간대에 똑같은 거지가 우연히 같은 장소에 나타날 가능성은 매우 낮으리라.
‘단순한 거지라기에는 뭔가 느낌이 이상해.’
아딘은 가만히 숟가락을 내려놓고 마법 주머니에서 두루마리를 꺼내 펼쳤다.
그 순간, 바깥에 있는 두 거지에 관한 정보와 그가 밥을 사주었던 거지, 그리고 이틀에 걸쳐 오전에 여관 주변을 배회하던 거지들에 관한 신상이 쭉 떠올랐다.
‘체르노비치? 어둠의 자식?’
그리고 여섯 거지의 신상에 공통으로 나타난 ‘체르노비치’라는 단어가 아딘의 눈길을 끌었다.
‘어둠의 자식이라…… 뭐지?’
혹시나 샤펠 제국에서 알게 된 묵시록 종단 같은 존재인가 아딘은 잠시 생각했다.
‘아니야. 묵시록 종단은 두루마리가 설명하지 못하는 존재야. 심지어 그 존재 자체가 데이터에 없다는 듯 아예 인지를 못 하지.’
하지만 체르노비치라는 조직은 명백하게 두루마리에 떠올라 있었다.
‘내가 만든 설정은 아닌데…… 흠…….’
잠시 두루마리의 알고리즘에 관해 고민하던 아딘은 이내 고개를 가로저은 후 체르노비치에 관한 정보를 찾았다.
곧 두루마리 위로 체르노비치에 대한 설명이 쭉 떠올랐다.
그리고 그것을 차분히 읽던 아딘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이 인간이 여기서 왜 나와?’
아딘은 두루마리를 말아 다시 마법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리곤 주방에서 재료를 손질하던 있던 주인에게 사흘 더 묵겠다고 이야기했다.
“오, 오라버니. 저, 저는 정말 괜찮아요. 그냥 내일 출발하시면 돼요.”
로제는 화들짝 놀라며 아딘을 만류했다.
아딘은 미소를 지으며 로제에게 대답했다.
“아니야. 이대로 출발했다간 눈보라에 네가 견디기 힘들 거야.”
“전 괜찮은데…….”
“그리고…… 여기서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서 말이야.”
“네?”
로제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아딘은 씩 웃으며 말했다.
“손님이 지금 오고 있어.”
* * *
11월 17일 자정.
[때엥~ 때엥~ 때엥~]
상트보가르 중심에 있는 동방광명교 사원에서 힘없는 종소리가 울려 퍼지며 날이 바뀌었음을 도시에 알리는 시각.
[후우우웅-!]
한 차례 강풍과 함께 골목길에 한 남자가 나타났다.
매부리코에 왼쪽 눈가에 손톱만 한 크기의 사마귀가 인상적인 늙은 남자는 잠시 주변을 확인한 후 지팡이로 가볍게 땅바닥을 두 차례 두드렸다.
[퍼엉-!]
가벼운 폭발음과 함께 남자는 곧 연기에 휩싸였다.
그리고 연기가 사라졌을 무렵, 남자가 서 있던 자리에는 날렵한 회색 고양이 한 마리가 자리하고 있었다.
[미야옹-]
고양이는 한 차례 가볍게 울음을 내뱉은 후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고양이가 도착한 곳은 불 꺼진 통나무여관이었다.
‘저곳인가?’
고양이는 여관 주위를 세 차례 정도 빙글빙글 돌며 구조를 파악했다.
이윽고 굳게 걸어 닫힌 문가의 조그만 틈새를 발견한 고양이는 그곳으로 부드럽게 달려갔다.
그리곤 그대로 연기처럼 변해 미끄러지듯 조그만 틈새를 통해 여관 안으로 들어섰다.
내부로 들어서자마자 고양이는 다시 원래 형상을 되찾았다.
[미야옹-]
또 한 차례 가볍게 울음을 터뜨린 후 고양이는 살금살금 어둠 속을 헤치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고양이가 유연한 동물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연기가 되는 동물은 아니지.”
그 순간, 한 남성의 음성이 고양이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고양이는 바짝 긴장한 채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술병과 술잔 2개 그리고 안주로 먹을 채썰기 한 구운 감자가 자리한 테이블에서 아딘은 가만히 고양이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만 본래 모습대로 돌아오지? 그리고 이왕이면 여기 촛불에 불도 좀 붙여 주고 말이야. 내가 다른 건 다 있는데 무한 발화 성냥 같은 건 없어서.”
아딘의 말에 고양이는 살짝 몸을 떨었다.
그런 고양이를 향해 아딘은 다시 한번 이야기했다.
“1년 전에는 내가 아마 그대를 죽이려 들었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 예전의 은원 관계를 떠올리기에는 전반적인 사정이 좋지 않지. 안 그런가, 다비도프 백작?”
아딘의 말에 고양이는 한 차례 움찔했다.
그러더니 이내 사람처럼 체념의 한숨을 내쉬었다.
[퍼엉-!]
다시 한 차례 가벼운 폭음과 함께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곧 연기가 자연스럽게 허공 중에서 흩어졌을 때, 고양이가 있던 자리엔 매부리코와 사마귀가 인상적인 노인이 서 있었다.
“1왕자 전하를 알현하여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안 잡힙니다, 그려.”
“외모를 노화시켰다고 해서 말투까지 노화가 되면 어떻게 하나? 원래대로 좀 돌아와 줘. 구태여 이 상황에서 이중으로 용모를 감출 필요는 없잖아?”
아딘의 말에 노인은 한숨을 폭 내쉬며 지팡이로 가볍게 바닥을 톡톡 두드렸다.
그러자 이내 노인의 모습은 사라지고 까칠한 인상의 중년 남성이 나타났다.
“그래. 얼마나 보기 좋나? 이쪽으로 와서 앉아 봐. 이왕이면 촛불에 불도 붙이고. 어둠이 내 시야를 방해하진 않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좀 분위기를 띄워야지.”
아딘의 말에 중년 남성은 한숨을 내쉬며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그러자 아딘이 앉은 테이블과 뒤쪽 벽면에 달린 촛불에 불이 붙으며 여관 내부를 밝히기 시작했다.
“좋아. 한결 편하잖나, 분위기가.”
아딘은 씩 웃었다.
중년 남성은 똥 씹은 표정으로 천천히 걸어가 아딘의 맞은편에 털썩 앉았다.
“오랜만에 만나서 이런 말부터 하긴 좀 그렇지만, 다비도프 백작이란 표현은 쓰지 말아 주십시오.”
그 말에 아딘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럼 뭐라 불러드릴까? 생으로 이름을 부르기는 좀 그렇고…… 체르노비치의 수령님이라고 불러드릴까?”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