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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88화 (88/175)

088 국경에서 만난 옛 적 (2)

로이의 도발에 아르게 벤바사는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감정적으로 대응하기에는 상대에게서 풍겨 나오는 기세가 만만찮았기 때문이었다.

‘빈틈이 없다.’

닭이나 잡으면 적당할 단검에 그마저도 팔을 아래로 늘어뜨린 상태였지만, 로이가 취한 자세에서 아르게 벤바사는 그 어떠한 빈틈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것이 그를 더욱 신중하게 했고, 쉽사리 움직이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생긴 것답지 않게 신중하기는.”

그런 아르게 벤바사의 신중함에 대해 로이는 한 차례 비아냥거렸다.

그리곤 비웃음 가득한 표정 그대로 직접 움직였다.

[휘익-!]

족장의 장막이고 장로 회의가 열리는 장소이니만큼 제법 공간은 넓찍했다.

하지만 두 고수가 맞붙기에는 그리 넓지 않았다.

순식간에 로이는 아르게 벤바사에게 접근해 그의 옆구리를 향해 칼을 찔러 넣었다.

아르게 벤바사는 몸을 옆으로 살짝 비틀면서 손목 스냅을 이용해 로이의 목을 칼로 쳤다.

로이는 그대로 상체를 뒤로 젖히며 찔러 들어가던 검을 회수했다.

그리곤 자신의 얼굴을 스쳐 지나가는, 타오르는 검기로 가득한 아르게 벤바사의 칼등을 살짝 단검으로 밀었다.

[부우웅-!]

아르게 벤바사의 힘에 로이의 힘까지 더해지자 칼은 큰 궤적을 그리며 장막 내부를 한 바퀴 휩쓸었다.

[부우욱-!]

뿜어져 나온 검기에 닿은, 각종 짐승의 가죽으로 만들어진 장막 천이 그대로 찢어졌다.

“으어억-!”

“뭐, 뭐야!”

장막 주변을 경호 중이던 정예 전사 중 일부가 검기의 폭풍에 휩쓸리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가까스로 그것을 피한 자들은 모두 당혹스러워하며 칼을 뽑아 들었다.

찢어진 천박 사이로 아르게 벤바사가 먼저 뛰쳐 나왔다.

“모두 피해!”

그는 주변에 서 있던 정예 전사들에게 고함을 질렀다.

정예 전사들은 당혹스러워하면서도 아르게 벤바사의 목소리에 서린 긴장감에 즉각 주변으로 흩어진 후 다시 전열을 갖추었다.

“허어. 내 힘을 도리어 역이용하여 넓은 공간으로 전장을 옮긴다? 좋은 판단이군.”

천천히 천막에서 걸어나온 로이가 아르게 벤바사의 판단에 살짝 감탄하며 미소를 지었다.

‘우리 쪽으로 끌어들이면 참 좋을 텐데 말이야.’

그리고 그는 진지하게 아르게 벤바사를 묵시록 종단에 초대하고 싶다는 생각도 품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지금은 아이드 님의 명령을 이행하여 황금 갑옷의 흔적을 쫓아야 한다.’

입단 권한은 어디까지나 교주의 몫.

로이는 그저 황금 갑옷을 추적하라는 명을 수행하는, 조금은 특별한 장로일 뿐이었다.

“난 네놈이 마음에 든다.”

로이가 아르게 벤바사를 향해 이야기했다.

“젊은 나이에 소드 마스터인 것도, 그 짧은 순간에 자신의 유불리를 따져 전장을 옮기는 판단력도 모두가 마음에 든다.”

갑작스러운 로이의 말에 아르게 벤바사는 침을 꿀꺽 삼키며 그를 노려보았다.

로이가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만약 네놈이 내게 황금 갑옷에 대하여 알려준다면, 나는 너를 위대하신 교주님께 천거하겠다. 그리되면 너의 삶은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은총과 환희로 가득하게 될 것이다.”

그 말에 아르게 벤바사는 더욱 긴장하기 시작했다.

‘황금 갑옷? 설마…….’

일주일도 넘게 지났지만, 여전히 지워지지 않는 아딘과의 대결.

자신을 압도하는 황금빛 갑옷의 아딘을 떠올리며 아르게 벤바사는 칼을 쥔 손에 더욱 힘을 줬다.

‘아딘 콘스탄틴을 쫓아온 의문의 고수…… 말하는 걸 들어보면 무슨 사교 출신인 것 같은데…… 뭐지?’

아르게 벤바사는 아무런 대답 없이 칼을 고쳐 쥐었다.

그 모습에서 그가 딱히 호응할 생각이 없음을 간파한 로이는 살짝 실망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표정을 보아하니 황금 갑옷과 조우한 건 확실한 것 같은데…… 말할 생각은 없는 모양이야. 의리라도 지키는 건가?”

“……네놈은 누구냐?”

“알 것 없다. 그리고 이대로 네놈과 노닥거릴 여유도 없고.”

그러면서 로이는 주변을 훑어보았다.

자신과 아르게 벤바사를 중심으로 100m가량 거리를 둔 정예 전사들이 활시위에 화살을 먹인 모습을 보며 그는 코웃음을 쳤다.

“황금 갑옷이 왔다면 절대 조용히 지나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네놈을 죽이는 건 안타깝지만, 그래야만 여기 있는 쓰레기 중 일부가 입을 열 것이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그렇게 이야기를 마친 후 로이는 느닷없이 모습을 감췄다.

아르게 벤바사는 바짝 긴장하며 오감을 활성화했다.

“조, 족장님! 뒤에!”

하지만 그의 감각보다 정예 전사의 눈에 로이가 먼저 잡혔다.

‘뒤?’

순간 아르게 벤바사는 등골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푸욱-!]

그리고 그가 그것을 느낀 순간, 차가운 단검이 그의 심장을 뚫고 앞으로 살짝 삐져 나왔다.

“커흡…….”

아르게 벤바사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그의 칼은 검기를 잃은 채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네놈이 강한 힘을 지녔기에 이 나이에 이 야만인들의 우두머리가 됐겠지만, 또한 그 힘이 있었기에 이렇게 죽게 됐다. 네놈이 조금만 힘이 약했더라면 내 의지에 쉽게 복종해 모든 것을 이야기했겠건만.”

[쑤욱-!]

로이는 그대로 단검을 뽑았다.

아르게 벤바사는 가슴과 입에서 피를 토해내며 그 자리에서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정예 전사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땅바닥에 누운 아르게 벤바사를 바라보았다.

로이는 단검에 묻은 피를 털어 버린 후 시선을 주변으로 돌렸다.

“자, 너희들 중 내게 황금 갑옷에 대해 말해줄 사람이 과연 누가 있을까?”

그 말과 동시에 로이의 눈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 * *

“진짜 올해 초부터 시작해서 완전히 도시가 망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나마 저는 장인어른이 로타바야에서 다분 농사지을 땅이라도 좀 가지고 계신 분이라 그리로 여편네하고 애들 다 보내둬서 버티는 거죠. 아니었으면 벌써 가게 접고 어디 광산에라도 갔을 겁니다.”

아딘과 로제를 창가 자리로 안내한 후 주방에 들어가 요리를 하는 내도록 여관 주인은 신세 한탄을 늘어놓았다.

“솔직히 예전 같았으면 그까짓 감자 2개 가져가라면 가져가라고 했을 겁니다. 근데 손님도 아시겠지만 요즘 어디 감자 구하기가 쉽습니까? 에효.”

신세 한탄을 하는 사이 어느새 요리는 완성됐다.

으깬 감자와 닭고기가 들어간 벨로디나식 수프 보르쉬와 닭고기로 만든 샤슬릭이 아딘과 로제 앞에 놓였다.

“여기서 주무시고 동부로 가신다고 하셨죠?”

여관 주인의 말에 아딘은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동부 분위기가 어떨는지 모르겠습니다. 옛날에는 그래도 친구 녀석이 쿠만으로 종종 갔다 오고 해서 소식을 대충 들었는데…… 그리고 지금 저희 여관에 쓸 방이 1개뿐인데 괜찮으시겠습니까?”

1개뿐이란 말에 아딘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지금 손님이라곤 자신들밖에 없는데 다른 방이 없다니?

“이게 원래 방이 3개인데 하나는 지금 창고로 쓰고 있고, 다른 하나는 며칠 전에 눈이 내린 게 녹으면서 물이 새는 바람에…….”

여관 주인의 말에 아딘은 고개를 끄덕이며 로제를 바라봤다.

“어떻게 할래?”

아딘의 물음에 로제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천천히 대답했다.

“뭐…… 방이 하나뿐이라도…… 여기서 쉬어 가야지 않겠어요, 오라버니?”

“그래야겠지?”

아딘은 여관 주인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관 주인은 활짝 웃으며 다시 주방으로 들어갔다.

“먹자.”

“네.”

방이 1개면 어떻고 그게 또 좁으면 어떠랴? 그저 며칠 쉬면 그만인 것을.

아딘은 그렇게 생각하며 천천히 보르쉬를 떠먹었다.

여관 규모치고는 제법 맛이 좋았기에 아딘과 로제는 음식에 대해선 만족할 수 있었다.

“술이 빠지면 또 섭섭하지 않겠습니까? 술은 마음껏 드십시오. 할 게 없어서 심심하면 담아 둔 게 술이니까.”

여관 주인이 서비스로 내놓은, 제법 도수가 높은 술까지 곁들어지자 그런대로 늦은 점심 식사는 상트보가르의 우울한 첫인상을 지워줄 정도로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치러졌다.

“아이구, 선생님. 자비 좀 베풀어 주십쇼. 천계의 신들께서 자비를 베풀어 주실 겁니다.”

그리고 식사가 끝나갈 무렵, 거지 두 명이 여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감자 반쪽만 주시면 우리가 그걸 또 반으로 나눠서 알뜰하게 먹을 수 있습니다. 좀 도와 주십쇼.”

거지 소년들은 한껏 슬픈 표정을 지어 보이며 여관 주인에게 읍소했다.

“이봐, 거기.”

그런 거지들을 아딘이 불렀다.

거지들의 시선이 동시에 아딘에게로 향했다.

“너희 둘뿐이야?”

아딘의 물음에 거지들은 대번에 아딘에게 달려와 그의 발치에 엎드려 절했다.

“아이구, 귀하신 도련님. 네 맞습니다. 저희 두 형제뿐입니다. 어려서 어머니아버지 잃고……”

“됐고. 저기 가서 앉아.”

아딘의 말에 거지들은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아딘이 가리킨 곳으로 가 앉았다.

아딘은 점차 표정이 썩어가는 여관 주인에게 이야기했다.

“저 애들한테도 우리한테 줬던 거랑 똑같이 주게. 술은 빼고. 값은 내가 치를 테니까.”

“아이구. 손님, 당연히 그래야죠. 헤헤헤.”

곧 주방에선 요리가 시작됐다.

아딘은 자기들끼리 신나서 떠드는 거지들을 바라보며 가만히 술잔을 기울였다.

“며칠 동안 쉬시다 가실 거예요?”

거지들의 모습에서 과거의 자신을 보며 슬픈 표정을 짓고 있던 로제가 아딘을 향해 물었다.

“사흘 정도만 쉬자. 여기서 거기까지 날아가면 사흘이니까.”

“눈보라가 심하게 친다고 하셨죠?”

“그렇지.”

“이런 말 하면 좀 그렇긴 한데…… 살짝 기대하고 있어요.”

“기대? 뭘?”

“눈보라요. 자치령에 있을 때는 눈보라는커녕 진눈깨비도 보기 힘들었거든요. 그나마 오라버니 따라다니면서 여기에 와서 쌓인 눈 정도나 봤는데…….”

로제의 말에 아딘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너무 기대하지는 말어. 생각만큼 낭만적이지는 않으니까.”

그러면서 아딘은 로제를 향해 벨로디나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김현수가 현실의 러시아를 모티브로 직접 만들어낸 설정부터, 아딘 콘스탄틴이 왕자로서 보고 듣고 배운 것까지.

다양한 벨로디나에 관한 지식들이 로제에게 전달됐다.

그리고 아딘이나 로제나 그것에 너무 집중하는 바람에 둘 다 거지들이 자신들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 * *

11월 14일 늦은 밤.

상트보가르 거지들의 아지트로 쓰이는 도시 북부의 버려진 수도원.

여섯 명의 거지들이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게 사실이야?”

거지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자가 물었다.

“그렇다니까요. 분명 담갈색 머리카락에 담갈색 눈동자를 지닌 남자였어요.”

“젊고 잘생기고.”

“개망나니같지는 않던데, 그것만 빼면 수령님이 말씀하신 그대로라니까요?”

점심때 아딘에게 밥을 얻어먹은 두 거지 소년의 말에 나이 많은 거지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 인간이 왜 여기 나타난 거지?”

“쟤들이 본게 수령님이 말씀한 인간이란 보장은 없지 않나?”

“모르지.”

“아이고.”

다른 두 거지들이 젊은 거지들의 이야기를 두고 서로 답도 안 나오는 대화를 나누는 사이 나이 많은 거지는 침묵을 깨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흘 동안 여기에 머문다고 했다고?”

“네, 분명히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뭐 동쪽으로 간다고 하던데 눈보라니 뭐니 이야기하고 뭐 아무튼 그 뒤로는 복잡한 이야기들이 많아서 다 기억은 못 했죠.”

“흐음…….”

나이 많은 거지는 침음성을 내며 다시 침묵했다.

하지만 이번 침묵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나이 많은 거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너희들 여기 잘 지키고 있어. 난 저기 항구 윗길에 좀 다녀와야겠다.”

나이 많은 거지의 말에 한 거지가 씩 웃어 보였다.

“그새 또 발정이 난 거요, 형님? 무슨 개도 아니고.”

그런 거지의 얼굴 향해 나이 많은 거지가 살짝 발길질을 했다.

“임마. 내가 거기 그 짓거리 하려고 가는 줄 알아? 네가 저기 콘스탄티노바까지 다녀 올 거야? 내일 저녁까지 수령님 여기로 모셔올 수 있어?”

그 말에 짓궂은 말을 했던 거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 지키고 있어 이 거지들아.”

“잘 다녀오십쇼, 거지 형님.”

그렇게 나이 많은 거지는 수도원을 떠나서 남쪽 항구를 향해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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