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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87화 (87/175)

087 국경에서 만난 옛 적 (1)

“저 자식 잡아!”

“어딜 도망가!”

허름한 장터.

물건을 사러 오는 사람도 별로 없지만, 그렇다고 파는 사람이 많지도 않은 곳.

대낮의 태양 아래에서 한 남성이 다른 남성을 쫓아가고 있었다.

도망자의 손에는 감자 2개가 들려 있었고, 쫓아가는 자의 손에는 손도끼가 들려 있었다.

“알아서들 피해!”

쫓아가는 자는 도저히 발걸음으로 따라잡기가 힘들었는지 제자리에 멈춰서고는 그대로 손도끼를 도망자의 등판을 향해 날려버렸다.

[부우웅-!]

[뻐억-!]

손도끼는 뼈를 으깨는 소리와 함께 정확하게 도망자의 등판에 날아가 박혔다.

“끄억……!”

도망자는 자신이 달리던 속도에 손도끼의 힘까지 더해지며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손도끼의 날이 그다지 날카롭지가 않아 도끼 자체는 깊게 박히지 않았지만, 던진 자의 힘과 도끼의 무게가 더해지며 도망자에게 상당한 피해를 안겼다.

“이 자식이! 도망을 가?”

쫓아가는 자는 그대로 도망자에게 달려가 바닥에 쓰러진 그의 머리통을 마구잡이로 밟기 시작했다.

얼마 안 되던 사람들은 서둘러 자리를 뜨거나, 오랜만에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생겼다는 양 낄낄거리면서 구경했다.

“오라버니…….”

그리고 그 모습을, 외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건 상관없이 자기 잠만 자는 부랑자의 곁에서 바라보던 로제가 아딘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아딘은 굳은 표정으로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더니 이내 천천히 두 사람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로제는 다행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 뒤를 따랐다.

“이 버러지 같은 도둑놈! 오늘 시체 하나 치워보자!”

“그만하지?”

“어떤 새끼…….”

쫓아가던 자는 자신의 복수를 방해하며 개입하는 목소리에 신경질을 부리려다 말고 입을 다물어야 했다.

딱 봐도 귀공자처럼 생긴 사람이 귀공자처럼 차려입은 채 굳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던 만큼, 함부로 화를 내기가 힘들었던 것이었다.

“뉘, 뉘신데 남의 일에 끼어드는 겁니까?”

“고작 감자 2개 훔쳤다고 사람 등판에 도끼를 날리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아딘의 말에 쫓아가던 자는 인상을 찌푸렸다.

“높으신 분들은 잘 모르겠지만, 요즘 감자가 감자인 줄 아십니까? 옛날 같았으면 1포대기 꽉꽉 채운 걸 살 돈으로 요즘은 1개를 사고 있습니다.”

벨로디나 왕국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식량난과 인플레이션.

그것이 만들어낸 처참한 광경에 아딘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는 사이 로제는 쓰러진 도망자의 등에서 도끼를 뽑아낸 후 남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은밀히 그의 상처를 치료해 주었다.

“말투를 들어보니 콘스탄티노바에서 오신 분 같은데 거긴 어떨지 몰라도 여긴 치안이 엉망입니다. 저라고 도끼 차고 다니고 싶겠습니까? 제가 맨손이면 다른 누가 칼부림을 해버리니 그러는 거지?”

쫓아가는 자도 그리고 쫓기던 도망자도 본래부터 악한 이들은 아닐 터였다.

그저 국가가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를 못하니 다들 도둑이 되고 폭력적으로 변하게 된 것이리라.

“이쯤에서 그만하고, 감자나 챙겨서 가게.”

아딘의 말에 쫓아가던 자는 궁시렁거리며 바닥에 구르고 있던 감자 2개를 챙겨 장바구니에 넣고, 피 묻은 손도끼를 바지 뒤쪽에 집어넣었다.

“너 인마, 다음에 또 걸리면 그땐 진짜 송장으로 만들어 버릴 거야!”

남자는 마지막으로 도망자를 그렇게 위협한 후 사라졌다.

그러자 쓰러져 있던 사람은 신음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난 후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고선 그대로 골목으로 사라졌다.

“고맙단 말도 안 하고 가네요?”

그 모습을 바라보던 로제가 황당하다는 어조로 아딘에게 이야기했다.

아딘은 쓴웃음을 지으며 가만히 그녀에게 움직이자 손짓했다.

“죽을 뻔한 걸 살려줬으면 고맙다고 해야지……”

“저 사람은 아마 자길 구해준 것에 대한 고마움보단 감자를 도로 주인에게 돌려준 것에 대한 분노가 더 클지도 몰라.”

“네? 아니,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 있어요?”

“극한의 상황에 몰리다보면 모두가 이상해지는 법이거든. 사람이건 짐승이건.”

광명력 992년 11월 14일 정오.

이틀간 공중으로 이동하여 벨로디나 동부 국경도시 상트보가르에 도착한 아딘과 로제는 노보로바야보다도 더한 도시의 모습을 봐야만 했다.

“그래도 여기가 작년 이맘때까지만 해도 이 정도로 낙후되고 맛이 간 지역은 아니었는데 말이야.”

“어쩌다 이렇게 된 거예요?”

“제니스가 북방개발조합으로 모든 벨로디나 내부 상행위를 통합하면서 이쪽에서 동부 쿠만 지방으로 오가던 상인들이 한순간에 밀수꾼 취급을 받게 됐거든.”

“그래도 그 조합에서는 상거래를 하잖아요?”

“제니스가 관심을 가지는 건 벨로디나의 지하자원과 농작물이야. 쿠만인이 파는 담비 가죽이라든가 하는 건 관심 밖이야.”

그러면서 아딘은 벨로디나와 쿠만 사이에 오가던 무역에 대해 간략하게 로제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벨로디나가 식량과 무기를 팔면 쿠만에서는 담비 가죽과 녹용, 아주 가끔 아이스 트롤의 간 등을 판매하는 교역 구조에 대해 로제는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하긴 제니스 사람들은 꼭 여기가 아니라도 그런 사치품들을 많이 구경할 테니까요. 당장 파세레빌에서 나는 진주도 참 많이…….”

파세레빌에서 아테인 가문이 제니스의 부자들을 상대로 진주 장사를 했던 것을 이야기하려던 로제는 순간 떠오른 악몽과도 같은 일에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아딘은 가만히 그녀의 손을 잡아 주었고, 아딘의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로제는 동요하던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보자…… 여기가 유일하게 영업 중인 여관인데…….”

그렇게 한참 동안 음침한 분위기가 도사리는 도시를 돌아다니던 아딘과 로제는 마침내 어느 한 지점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두루마리가 알려준, 유일하게 영업을 하는 여관 앞에서 아딘은 살짝 인상을 찌푸려야 했다.

“그사이에 망했나?”

불과 하루 전날, 출발하기 전 확인했을 때까지만 해도 영업 중이라던 여관은 문이 굳게 닫힌 채 인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이를 어쩐다…….”

상트보가르를 떠나 쿠만까지 가려면 하늘을 날아서도 사흘이다.

아무리 아딘과 로제가 범인과는 차원이 다른 신체적 조건을 지니게 됐다지만, 그래도 사흘 연속 노숙을 하며 비행하는 건 피곤한 일이었다.

더구나 동쪽으로 가면 갈수록 눈보라와 강풍이 심한 만큼, 이곳에서 충분히 휴식을 취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아딘이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여관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어?!”

등 뒤에서 익숙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딘과 로제는 동시에 시선을 뒤로 돌렸다.

아까 전, 허름한 시장에서 도둑을 흠씬 두들겨 패던 남자가 장바구니를 든 채 웃고 있었다.

“어이쿠, 내 정신을 좀 봐.”

사내는 곧장 여관 문을 열쇠로 열더니 두 사람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서 오십시오! 아까 전에는 장을 보고 있던 거라. 헤헤헤.”

웃기지도 않는 우연에 그래도 여관에서 며칠 쉬다 갈 수 있다는 안도감이 결국 아딘을 상트보가르 처음으로 활짝 웃게 했다.

* * *

푸스타 광야 카판족 정착지.

석양이 점차 짙게 깔리기 시작하는 이곳의 일상은, 항상 그러했듯 몇 안 되는 가축을 우리에다 밀어 넣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중이었다.

“응?”

그런 카판족 정착지 입구에서 경계를 서던 경비의 눈에 두 남성이 들어왔다.

상당히 세련된 복장을 한 만큼, 눈에 확 띄는 두 사람의 등장에 경비는 바짝 긴장한 채 뿔피리를 꺼내려 했다.

[휘익-!]

그 순간, 한 줄기 바람이 그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풀썩-!]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서 경비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목이 절단돼 죽어버렸다.

한 줄기 바람과 함께 순식간에 경비의 곁을 지난 남자, 묵시록 종단 장로 로이는 저 멀리 서 있는 제이크 로버츠를 손가락을 가리켰다.

가만히 거기서 대기하라는 의미였다.

제이크 로버츠는 빠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주변에 엄폐가 가능한 곳을 찾아 몸을 숨겼다.

그것을 확인한 로이는 어느새 정착지에 깔리기 시작한 그림자 속으로 녹아들었다.

그 상태로 로이는 그림자에서 그림자를 넘나들며 카판족 정착지 전체를 훑어보았다.

“도무지 납득할 수가 없습니다. 원수와 손을 잡다니요!”

“들고 일어나야 합니다. 벤바사 그 놈이 자기 힘을 믿고 설치는 모양인데,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순 없습니다.”

“우리도 먹고 살아야죠. 언제까지 여기서 마적질이나 하고 살 겁니까?”

“이왕 이렇게 된 거 난 차라리 도시로 가겠어. 가서 돼지 도축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거기서 내 애들을 키워야지.”

정착지 곳곳을 1시간 정도 돌아다니며 로이는 정보를 수집했다.

‘원수와의 거래라……. 구체적인 내용을 알기 위해선 결국 대가리를 쳐야 한다는 건가?’

자신이 들은 정보를 취합한 후 로이는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그것은 이곳의 우두머리를 직접 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대로 로이는 그림자를 타고 빠르게 아르게 벤바사의 거처로 향했다.

“최근 정찰조가 서북부에서 얼어붙은 호수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얼음이 겨울에 얼마나 두꺼워질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지금은 당장 얼음을 깨고 낚시가 가능하다고 합니다.”

아르게 벤바사의 장막에서는 야민 벤키시가 정찰조의 보고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흐음……”

야민 벤키시의 말을 듣고 아르게 벤바사는 잠시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족장님?”

그 모습이 평소와는 달라 보였기에 야민 벤키시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야민.”

“네, 족장님.”

“일단 잠시 나가 있어 줄래? 생각을 좀 정리해야 할 것 같아.”

“아, 네. 알겠습니다.”

아딘과의 계약부터 여전한 일부 장로들과 구역의 반발, 거기다 새로 들어온 북서부의 얼어붙은 호수 이야기까지.

여러모로 아르게 벤바사가 골머리를 싸매고 있으리라 생각하며 야민 벤키시는 그대로 장막 밖으로 나갔다.

야민 벤키시가 나가자 한동안 침묵하고 있던 아르게 벤바사는 천천히 눈을 뜨며 입을 열었다.

“우리 둘뿐인 것 같으니, 나와보지?”

아르게 벤바사는 그렇게 이야기하며 장막 한구석의 어둠을 응시했다.

“훗.”

그러자 이내 어둠 속에서 로이가 튀어나왔다.

“대단한 감각이군. 소드 마스터인가?”

“당신네들은 그렇게 부르지. 뭐, 우리도 그렇게 부르긴 하지만.”

“젊은 친구가 참 운이 좋아. 노련한 기사가 평생을 수련해도 도달할 수 없는 타고난 자질을 일찍이 깨우쳤으니 말이야.”

“그러는 그쪽도 대단하군. 그림자를 타고 움직이는 건가?”

“그렇다고 볼 수 있겠지.”

“그런 대단한 능력을 지닌 사람이 왜 여기에 들어와 있지? 쥐새끼처럼?”

아르게 벤바사의 도발에 로이는 무심한 표정을 지어보일 뿐이었다.

“소드 마스터라면 내 능력이 먹히지는 않을 테니, 결국 실력으로 입을 열게 하는 수밖엔 없겠군.”

도리어 무심한 표정으로 중얼거린 로이의 말에 아르게 벤바사의 관자놀이에 주름이 생겼다.

“고작 숨는 능력 하나 대단하다고 자신감이 지나치신 것 같은데?”

로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휘익-!]

그저 빠르게 바람처럼 움직여 아르게 벤바사를 향해 나아갈 뿐이었다.

“헙-!”

갑작스러운 로이의 기습에 아르게 벤바사는 옆으로 몸을 한 차례 굴렸다.

그러자 그가 있던 자리로 로이가 단검과 함께 스쳐 지나갔다.

[스르릉-!]

아르게 벤바사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며 바닥에 누워 있던 칼을 뽑아 들었다.

말을 잡을 때 쓰는 외날검을 든 채 아르게 벤바사는 눈을 부라렸다.

“그저 운만 좋은 녀석은 아니었군.”

“흐아압-!”

로이의 말에 아르게 벤바사는 그대로 힘을 끌어올렸다.

곧 그의 칼 전체가 타오르는 검기에 뒤덮였다.

살벌한 검기를 마주하고서 로이는 씩 웃었다.

“오랜만에 재미있는 상대를 만난 것 같아.”

그 순간, 로이의 단검에도 시커먼 연기처럼 검기가 피어올랐다.

‘소드 마스터?’

그것을 본 아르게 벤바사의 표정이 굳었다.

‘뭐 하는 놈이지?’

아르게 벤바사는 최대한 마음을 가라앉히며 로이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그런 아르게 벤바사를 향해 로이가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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