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6 대승적으로 (3)
11월 8일 저녁부터 11월 10일 저녁까지.
사흘간 카판족은 정착지 정중앙에 자리한 광장에 모여들어 난상토론을 벌였다.
경계를 위한 필수 인력과 약탈을 위해 나가 있는 인력, 아동 및 만삭 임산부, 병으로 거동이 불편한 자를 제외한 2만 4천여 명이 옹기종기 모여든 곳에서 장로들은 3대3으로 나뉜 채 거침없이 자신들의 입장을 밝혔다.
“우리를 학살하고 고향에서 쫓아낸 것도 모자라 이제는 자기들의 밑으로 개처럼 기어들어 오라고 합니다! 그것도 전쟁을 위한 도구로! 이게 말이나 됩니까!”
“우리가 비록 마적질을 해 먹고 살지언정 벨리키의 개가 될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배부른 개로 사느니 배고픈 카판인으로 죽는 게 낫습니다!”
아딘의 제안에 반대하는 3인방은 선동적인 어조로 강경한 투쟁을 요구했다.
모두가 1년 전 대학살의 아픔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던 만큼, 처음에는 강경파에 호응하는 목소리가 컸다.
“우리야 여기서 살다 죽어도 좋지만, 우리 자식들은 어떻습니까? 그 아이들도 여기서 우물이 언제 마를까 걱정하며, 우물이 나올 때까지 땅을 파며, 마적질을 하며 살아야 합니까?”
“우리가 벨리키 놈들의 내부로 들어가 군권을 쥐게 된다면 우리 후손들은 당당하게 벨리키 놈들로부터 카판인의 자긍심을 지키며 살 수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개처럼 자존심을 굽힌다면 우리 자손들은 평안하게 살 수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그러나 온건파가 자손들의 삶을 두고서 이야기하기 시작하면서 여론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부모와 형제, 일족이 죽은 것에 대한 원한은 모두 가지고 있지만, 척박했던 카판 대평원조차도 비옥하게 느껴질 만큼 황량한 푸스타 광야에서 자식들이 살도록 내버려 두는 것도 쉬운 선택은 아니었다.
“벨리키 마귀 놈이 진짜 우리를 받아 줄까? 벨로디나의 백성으로?”
“자기 숙부한테 반란을 일으키는 거라며? 그러다 지기라도 하면 우리 모두 몰살 아니야?”
“이기고 나서 돌변해가지고 우리 다 죽이면 어쩌지?”
“그렇다고 애들을 여기서 계속 키울 수도 없잖아. 3만 명이 먹는 물도, 식량도 부족하고 배출하는 용변도 제대로 처리가 불가능한데.”
장로들이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뉘었듯, 카판인들도 둘로 나뉘었다.
차이가 있다면 아딘의 이야기를 불신하는 파벌과 자식 때문에라도 거래가 성사되길 바라는 파벌로 나뉜 것이었다.
11월 10일 늦은 밤.
아르게 벤바사는 내일 저녁, 거수투표로 총의를 결정하겠다는 선포를 한 후 군중을 해산시켰다.
그리곤 홀로 광장에 남아 찬란한 만월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아르게 벤바사에게 야민 벤키시가 다가와 물었다.
“족장님,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아르게 벤바사는 여전히 시선을 달에 둔 채 답했다.
“족장만 아니었다면, 죽든 말든 놈에게 달려들었을 것이다. 차라리 놈의 손에 죽을지언정 타협을 할 생각은 추호도 없어. 그게 내 진심이야. 하지만…….”
아르게 벤바사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 잠깐의 침묵에서 야민 벤키시는 그가 느끼는 내적 갈등과 중압감을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할 수 있었다.
“야민.”
“네, 족장님.”
“조용히 정예 전사들을 소집해라. 그리고 그들에게 전달해라. 내일 우리의 총의가 아딘 콘스탄틴과의 타협으로 모일 수 있도록 사람들을 설득하라고.”
“네, 알겠습니다.”
야민 벤키시의 대답을 듣고서, 아르게 벤바사는 시선을 달에서 그에게로 돌렸다.
그리곤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가만히 그의 어깨를 토닥여 준 후 천천히 자신의 장막으로 되돌아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젊은 나이에 너무도 무거운 짐을 진 그의 모습이 너무 딱하다고 야민 벤키시는 생각했다.
* * *
11월 11일 오전.
노보로바야 프런티어 호텔 최상층 특실.
묵시록 종단 장로 로이는 가만히 원탁에 앉아 차를 마시며 50장에 이르는 문서를 차근차근 읽고 있었다.
그의 맞은편에선 제이크 로버츠가 바짝 얼어붙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
차 한 잔 마실 동안 50장에 이르는 문서를 모두 살핀 로이가 제이크 로버츠를 향해 물었다.
“푸스타 광야 어딘가에 있을 거라, 이건가?”
“네. 그렇습니다.”
“흐음…… 너무 힌트가 적어. 푸스타 광야가 무슨 들판 수준도 아닌데 말이야.”
로이가 팔짱을 끼고 살짝 인상을 찡그린 채 중얼거렸다.
“벨로디나 국토의 절반 크기에 해당하는 광야라…….”
딱히 자신을 힐난하거나 한 것은 아니었지만, 제이크 로버츠는 심장이 급격히 얼어붙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마, 마적이 고, 고문 도중에 죽어버려서 정확한 위치는…… 죄송합니다.”
제이크 로버츠의 말에 로이는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
“됐다. 푸스타 광야로 특정만 됐으니 찾는 건 문제 없다. 마적단이라면 제법 규모가 있을 테니까, 아무리 푸스타 광야가 넓다 한들 생명체의 흔적을 찾기 힘든 곳에서 말과 사람의 무리 정도 찾는 거 어렵지 않다.”
로이는 자신의 잔에 차를 다시 채워 넣었다.
“오늘 밤, 함께 이동한다.”
“네?”
로이의 말에 제이크 로버츠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오늘 밤, 너와 나 이렇게 둘이서 푸스타 광야로 이동한다.”
“아…… 네. 근데 이동하실 거면 밤보단 낮이 좋지 않겠습니까?”
제이크 로버츠의 말에 로이는 피식 웃었다.
“그러고 보니 자네는 날 잘 모르겠군.”
“네? 아…… 네. 죄송합니다. 자주 찾아뵈었어야 했는데…….”
“아니야. 어차피 자치령이나 제국 내에서도 나에 대해 아는 사람은 드무니까.”
로이는 차를 한 모금 넘겼다.
“오늘 밤에 알게 되면 그만이지.”
그리고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제이크 로버츠는 차마 무어라 말은 하지 못한 채 그저 가만히 고개를 숙여 로이의 시선을 피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날 밤, 제이크 로버츠는 로이에게 이끌려 어둠을 타고 북서쪽으로 이동하며 그에 대해 아주 잘 알게 됐다.
* * *
11월 12일 아침.
잠에서 깬 아딘과 로제는 아침부터 찾아온 카판족 전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그들의 정착지로 들어섰다.
장막 밖으로 나와 아침을 맞이하던 카판인들은 자신들의 말을 타고 들어오는 아딘을 바라보며 각양각색의 반응을 보였다.
증오와 분노를 기반으로 아딘에 대한 두려움과 기대감이 아딘을 바라보는 카판인들의 시선 속에 공존하고 있었다.
자신을 향한 그러한 다양한 시선을 받으며 아딘은 아르게 벤바사의 장막으로 로제와 함께 들어갔다.
“크흠!”
“으음……”
아딘이 당당한 자세로 장막에 들어서자 미리 모여 있던 장로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헛기침하거나 침음성을 내뱉었다.
아딘에게 강경한 쪽이건, 온건한 쪽이건, 종족의 원수가 종족을 이끄는 자신들의 곁에 있다는 것 자체가 그들로서는 상당히 불편한 일이었다.
“어서 오시오.”
유일하게 헛기침하지도, 침음성을 내뱉지도 않은 아르겐 벤바사가 아딘을 환영하며 앉을 것을 권했다.
아딘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후 자리에 앉았다.
좌우로 여섯 장로를 둔 채 아르게 벤바사와 마주 보게 된 아딘은 담담한 표정을 지은 채 자신을 향한 시선을 받아냈다.
“지난밤, 카판인 24,031명이 거수를 하여 총의를 모았다.”
아르게 벤바사의 말에 아딘은 고개를 끄덕였다.
강경파 장로들이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헛기침했다.
아르게 벤바사는 살짝 그들을 노려본 후 천천히 아딘에게 결과를 이야기해 주었다.
“17,001명이 너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데 동의했다.”
아르게 벤바사의 말에 로제는 흠칫하며 놀라워했다.
강경파 장로들의 표정은 눈에 띄게 어두워졌고, 온건파 장로들은 씁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아딘은 여전히 담담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기만 할 뿐이었다.
“후회 없는 선택이 될 것이라 내 장담하지.”
아딘의 말에 아르게 벤바사는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강경파 장로들이나 온건파 장로들이나 모두 헛기침하며 침음성을 내뱉었다.
잠시 후, 아르게 벤바사가 입을 열었다.
“총의는 그렇게 결정이 됐고, 중요한 건 세부적인 내용이겠지.”
그 말에 아딘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우리는 여기서 계속 초라하게 살 운명이었다. 엄청난 능력을 지닌 너와 손을 잡고서 벨로디나를 엎어버릴 수 있다면, 그래서 우리가 이곳을 떠나 비옥한 땅으로 가게 된다면 분명 그건 좋은 일일 것이다.”
문제는 아직까지는 아딘으로부터 선언 수준의 이야기만 들었다는 것이었다.
아르게 벤바사는 그점을 지적하며 아딘에게 구체적인 계획이 있느냐를 물었다.
“우리가 동원할 수 있는 전사는 3천 명이 전부다. 그나마도 우리 정착지를 지킬 병력을 뺀다면 2,500을 넘기기가 힘들겠지. 너와 네 여동생이 강하다 한들, 겨우 2,500의 전사만으로 전쟁을 수행하기란 힘들 것이다.”
아르게 벤바사의 말에 아딘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이제부터 동쪽으로 갈 것이다. 가서 쿠만족과 만나 그들의 전사들을 내 군대에 합류시킬 것이다.”
아딘은 아르게 벤바사와 여섯 장로에게 자신의 계획을 이야기해 주었다.
전투 민족인 쿠만족을 용병으로 활용한다는 말에 아르게 벤바사는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쿠만족에 대해서라면 나도 들은 적이 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타고난 전사라고 들었다.”
“그들 중 5천 명이 용병으로 참여한다면, 전쟁은 반드시 우리의 승리로 끝날 것이다.”
‘우리’라는 말에 순간 아르게 벤바사는 피식 웃었다.
“우리라…….”
강경파 장로들은 눈을 부라리며 이를 갈았고, 온건파 장로들은 혼란한 심정을 숨기지 못한 채 표정으로 고스란히 노출해버렸다.
“과연 그대와 카판인이 우리가 될 수 있을지는…… 그대의 뜻대로 그대가 왕좌에 앉을 때 정해지지 않을까?”
아르게 벤바사의 말에 아딘은 고개를 끄덕였다.
“장담하지. 그때가 되면 비록 그대들이 날 용서하지 못하더라도, 벨로디나 왕국의 당당한 일원으로 대접받으리란 것을.”
아딘의 말에 아르게 벤바사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 같아선 축배라도 들고 싶지만 아직은 그럴 분위기가 아닌 것 같다.”
아르게 벤바사의 말에 아딘도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축배는 그대들과 내가 콘스탄티노바에 입성하여 우리가 됐을 때, 함께 들도록 하지.”
아딘은 씩 웃었다.
아르게 벤바사도 따라서 씩 웃었다.
그렇게 아딘은 아르게 벤바사에게 3개월 안으로 되돌아올 것을 약속한 후 로제와 함께 조용히 카판족 정착지를 빠져나갔다.
“오라버니, 잘하셨어요. 축하드려요.”
지난 일주일간 머물렀던 장소에 도착했을 때, 로제가 아딘에게 이야기했다.
아딘은 가만히 로제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가자. 오랜만에 뜨끈한 물에 몸도 좀 녹이고, 밥 다운 밥도 먹어보고 해야지.”
“샤슬릭에 보르쉬도요!.”
“그래. 좋지.”
“히히히.”
그렇게 아딘과 로제는 동남쪽으로 방향을 잡고 날아올랐다.
* * *
[히히힝-!]
태양이 서쪽으로 기우는 늦은 오후.
주인 잃은 말들은 황무지 위에서 투레질하며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노새들이 이끄는 짐수레에는 목적지를 잃은 광물들이 가득했다.
바닥에는 피가 흥건하게 고여 있었고, 그 위에는 그것을 속에 담고 살던 카판족 전사들의 시체가 누워 있었다.
“여기서 서북쪽으로 말 타고 사흘 거리라…… 내일 새벽 안으로 도착하겠어.”
그 살벌한 풍경 한가운데에서 로이는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수고했다. 그만 쉬어라.”
눈이 풀린 채 무릎을 꿇은 상태로 로이에게 자신이 아는 것, 즉 카판족 정착지의 위치를 술술 불었던 카판인 전사를 향해 로이는 짐짓 자비로운 어조로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 순간,
[퍼엉-!]
전사의 머리통이 그대로 터져 버렸다.
사방으로 살점과 핏덩이를 뿌린 채 한동안 흔들거리던 카판인의 육신은 이내 땅에 누웠다.
그 모습을 무심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로이는 시선을 제이크 로버츠에게로 돌렸다.
제이크 로버츠는 창백한 안색으로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전도자 로버츠여.”
로이의 부름에 제이크 로버츠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푹 숙였다.
“충고 하나 해주지.”
“네, 네?”
“그대가 우리 종단을 위해 큰일을 하고 싶다면 앞으로는 돈을 만지는 법보다는 칼을 만지는 법에, 황금보다는 피에 더 익숙해져라.”
제이크 로버츠는 침을 꿀꺽 삼켰다.
“해가 지면 즉시 출발하겠다.”
“아, 알겠습니다, 장로님.”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