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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85화 (85/175)

085 대승적으로 (2)

광명력 992년 11월 8일 아침.

여덟 기의 말이 여덟 사람을 태우고 카판족 정착지 동쪽 입구로 나서고 있었다.

선두의 흑마 위에 올라탄 아르게 벤바사는 무심한 표정이었고, 그 뒤를 일렬로 따르는 일곱 장로의 표정은 각양각색이었다.

대체로 아딘에 대해 강경한 주장을 펼쳤던 두 늙은 장로는 불만 가득한 표정이었고, 일단 아딘과 대화를 해보자던 다른 두 장로는 기대 반 우려 반 섞인 표정이었다.

나머지 두 젊은 장로는 각자의 의견과 무관하게 모두 긴장한 표정이었다.

백인대장 야민 벤키시는 대열의 후미에서 굳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딘 콘스탄틴. 네놈이 무얼 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부디 내 선택이 우리 족속 전체를 위한 게 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정착지에서 벋어나 점차 아딘과 로제가 노숙하는 장소에 가까워지면서 대열의 긴장감은 높아져 갔다.

이미 한 번 아딘과 맞서 싸웠다 패배한 아르게 벤바사와 야민 벤키시는 물론, 나머지 여섯 장로도 아딘에 대한 견해차와 무관하게 모두 마른침을 삼켜야만 했다.

“올 거라고 믿고 있었다, 아르게 벤바사.”

어느덧 가까이 다가온 여덟 인마를 향해 아딘은 담담한 표정과 어투로 이야기했다.

“마귀 자식!”

한 장로가 아딘을 바라보며 씹어먹듯 말을 내뱉었다.

순간 아르게 벤바사의 시선이 그에게로 돌아갔다.

“조용히 하라 했을 텐데?”

험악한 표정으로 아르게 벤바사가 이를 갈며 이야기하자 그 장로는 헛기침하며 시선을 회피했다.

아르게 벤바사는 다시 시선을 아딘에게로 돌렸다.

아딘은 짐짓 못 들은 척, 아르게 벤바사에게 본론을 이야기했다.

“나의 제안을 받아들이러 온 거면 좋겠어.”

아르게 벤바사는 가볍게 심호흡한 후 입을 열었다.

“지난밤, 장로 회의에서는 결의했다. 너와 먼저 대화를 한 다음, 그 내용을 부족민들에게 알려주고서 전체 총의를 모아보기로 말이다.”

아르게 벤바사의 말에 아딘은 고개를 끄덕였다.

‘생존자가 많지 않아서 그런가 확실히 정치문화가 많이 바뀌었어.’

이곳 푸스타 광야에서 로제와 함께 노숙하는 동안 아딘은 그저 하늘만 바라보고 있진 않았다.

두루마리를 통해 끊임없이 카판족에 관한 정보를 습득했다.

그래야만 최대한 그들을 설득할 수 있으리란 생각 때문이었다.

그리고 거기서 아딘은 카판족이 작년 대학살 이후 생활 양식은 물론 정치 문화마저도 변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장로 회의에서 결정된 사안이라면 무조건 수용했을 텐데 말이야.’

예전 부족 연합 체제하의 장로 회의와 달리 그저 각 구역을 대표하는 어른의 결정에 불과한 것이 현재의 장로 회의였던 만큼,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장로들의 입김은 강하다.’

다만 과거와 같은 권위는 없을지언정, 어쨌건 저들은 3만 카판족의 구역별 대표자다.

지금 이 자리에서 저들을 얼마나 설득하냐에 따라 카판족 전체 총의에 충분히 영향을 줄 수 있는 만큼, 아딘 입장에서는 최대한 심혈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정확하게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다오.”

아르게 벤바사의 말에 아딘은 고개를 끄덕인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왕좌를 외세의 힘을 빌려 차지한 찬탈자 유리 콘스탄틴의 벨로디나를 부정한다. 그렇기에 찬탈자와 그 배후에서 그를 허수아비로 세워두고 이 나라를 착취하는 제니스 공화국을 몰아내는 혁명전쟁을 일으키고자 한다.”

이미 나흘 전 직접 들은 바 있었던 만큼 아르게 벤바사나 야민 벤키시는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다른 여섯 장로들의 경우에는 아르게 벤바사에게서 간접적으로 전해 들었던 내용인 만큼 다소 놀라는 눈치였다.

“그대에게는 충분한 힘이 있다, 아딘 콘스탄틴. 신께서 내게 내려주신 소드 마스터의 힘조차도 그대 앞에선 한낱 어린아이의 장난일 뿐이었고, 우리의 정예 전사들의 화살은 그대를 보좌하는 여인의 마법 앞에선 모기 날갯짓에 불과했다.”

아르게 벤바사의 말에 야민 벤키시는 고개를 푹 숙였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도 맞춘다는 백인 정예 전사가 무기력하게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당했던 기억이 다시 떠오르며 그를 부끄럽게 했다.

“그대의 힘이라면 능히 콘스탄티노바의 왕궁으로 쳐들어가 찬탈자를 죽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우리더러 손을 잡자고 한단 말인가?”

아르게 벤바사의 말은 나름 일리가 있었다.

기실 아딘에게 강경한 장로들 가운데서는 이런 측면 때문에 아딘을 더욱 의심하는 자도 있었다.

자신을 향한 의심의 눈초리를 모두 받아내며 아딘은 답했다.

“내 목표는 단순히 찬탈자 유리 콘스탄틴의 제거에 있지 않다. 그를 제거하고 이 땅에 자리 잡은 제니스 공화국의 세력을 몰아내는 것, 그리하여 이 나라 백성들이 자유로워지는 것이 내가 추구하는 혁명전쟁이다. 아무리 나와 내 동생이 강하다 한들, 단둘이서 한 국가를 상대로 싸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용병 노릇이라도 하란 말인가?”

아르게 벤바사의 말에 아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르게 벤바사의 미간이 좁혀졌다.

“난 카판족이 단순히 나의 용병이 되길 바라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벨로디나 왕국의 정규군이 돼 주길 바란다.”

그 말에 아르게 벤바사를 비롯한 여덟 명 모두가 눈을 부릅뜨며 화들짝 놀랐다.

한동안 아르게 벤바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정규군? 용병이 아니라?’

아르게 벤바사는 떨리는 눈으로 아딘을 바라보았다.

“이, 이 미친 작자가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야!”

그때, 장로 하나가 고함을 질렀다.

“우리 동포를 18만이나 학살한 나라에 우리더러 군인으로 사역하라고? 우리를 아예 노예로 삼을 생각이더냐!”

그러자 다른 장로가 맞장구를 쳐주기 시작했다.

“우릴 무시하지 마라! 설령 이 광야가 우리 카판인의 무덤이 될지언정 마귀만도 못한 너의 밑에 개처럼 기어들어 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아르게 벤바사는 한동안 두 장로가 난동을 피우도록 방치했다.

자신을 향한 험악한 살기 어린 험악한 말과 저주를 들으면서 아딘은 속으로 씩 웃었다.

‘무력으로만 대장로 자리를 꿰차지는 않은 모양이야.’

다분히 의도적인 아르게 벤바사의 방치를 바라보며 아딘은 담담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이 말똥에 처박……”

장로들의 분노가 점차 상스런 욕설로 변해갈 때쯤, 아르게 벤바사가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장로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

아르게 벤바사가 입을 열었다.

“어째서 우리가 우리 동포를 학살한 국가의 정규군이 되어야 하지?”

그 물음에 아딘은 단호한 어조로 대답했다.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다.”

“……뭐?”

“내가 그대들과 함께 만들고자 하는 것은 이전의 벨로디나 왕국이 아니다. 그대들을 무시하고, 경멸하고, 혐오하는 그런 나라가 아니란 말이다.”

“…….”

“그대들이 당당한 벨로디나 시민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는 나라. 그것이 내가 원하는 나라다.”

“…….”

“카판 대평원에서, 왕국의 변방에서 동떨어져 사는 삶이 아닌, 벨로디나 왕국 안에서, 모든 시민과 뒤섞인 채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내가 그대들을 정규군으로 만들고자 하는 이유다.”

아딘의 말에 아르게 벤바사는 다시 침묵했다.

이번에는 장로들도 침묵했다.

애초부터 강경했던 이들이나, 대화를 추구했던 이들이나 모두 당혹스럽긴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아딘 콘스탄틴.”

잠시 후, 아르게 벤바사가 입을 열었다.

“진심인가?”

아딘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게 벤바사는 떨리는 눈으로 아딘을 바라보며 말고삐를 세게 쥐었다.

[히히히힝-!]

흑마가 한 차례 울부짖으며 투레질했다.

잠시 고민하던 아르게 벤바사는 이내 말머리를 돌리며 아딘에게 이야기했다.

“사흘 내로 총의를 모아서 그대에게 우리의 결정을 알리겠다.”

그 말을 남기고서 아르게 벤바사는 다시 정착지로 돌아갔다.

장로들도 저마다 복잡한 심경이 가득한 표정을 지은 채 그 뒤를 따랐다.

맨 마지막으로 야민 벤키시가 말머리를 돌리는 걸 확인한 아딘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라버니.”

로제가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아딘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로제가 미소를 지으며 아딘의 손을 잡아주었다.

“잘 하셨어요.”

아딘은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인 후 시선을 정착지로 돌렸다.

“저들이 내 제안을 받지 않는다면 난 그저 원래 계획대로 동쪽으로 가면 그만이야. 카판족 궁기병까지 있다면 좋겠지만, 없다고 해서 쿠만족 전사들이 모자랄 건 없으니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아딘은 간절히 바랐다.

부디 저들이 자신의 뜻을, 사과를, 구상을 수용해 주기를.

* * *

11월 4일 오전, 제이크 로버츠는 줄리아와 함께 아퐁 외곽에 마련해둔 프런티어 상단 소유 창고에 자리한 거점 이동 장치를 통해 아퐁에 도착했다.

그는 곧장 일면식이 있는, 새로이 장로가 된 대장군 라르고 드 로망스 백작의 저택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꼬박 반나절을 기다린 끝에 제이크 로버츠는 가까스로 라르고와 만날 수 있었다.

“황제 폐하께 전달해 주십시오, 대장군님. 황금 갑옷에 관한 중요한 서신입니다.”

황금 갑옷이란 말에 라르고는 화들짝 놀라며 제이크 로버츠가 건넨 서신을 받았다.

그는 황급히 다시 황궁으로 되돌아갔고, 그다음 날 아침이 돼서야 집으로 복귀했다.

그리고 11월 8일 정오.

아퐁에 도착한 지 나흘 만에 제이크 로버츠는 황제 샤를 11세와 대면하게 됐다.

“뵙게 되어 영광이옵니다, 황제 폐하. 가문 대대로 오늘의 영광을 잊지 아니할 것이옵니다.”

최대 500명까지 수용 가능한, 사방이 금과 보석으로 구성된 화려한 알현실.

그곳에서 제이크 로버츠는 샤를 11세와 대면하고 있었다.

9개의 계단 위에 자리한 황좌에 앉아 근엄한 자세로 제이크 로버츠를 맞이하며 샤를 11세는 입을 열었다.

“황금 갑옷이 나타났다고?”

이렇다 할 미사여구나 치하 없이 곧장 본론으로 들어가는 그 모습에 제이크 로버츠는 속으로 움찔했다.

그러나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러하옵니다, 폐하.”

“황금 갑옷이 왜 프런티어 호텔에 투숙했을까? 하필 자네가 그리로 간 날에?”

샤를 11세의 말에 제이크 로버츠는 미처 답하지 못했다.

“그래서, 황금 갑옷은 어디로 갔다고?”

샤를 11세는 곧장 화제를 돌렸다.

제이크 로버츠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북쪽으로 갔사옵니다.”

“북쪽이라…… 광산 지대로 갔을까?”

“마땅히 갈만한 곳은 그곳뿐이지만, 여러 가능성을 열어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옵니다.”

“가능성?”

“어쩌면 최근 노보로바야와 쿠발 광산 사잇길에 출몰하는 마적단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옵니다.”

제이크 로버츠의 말에 샤를 11세는 흥미롭단 표정을 지어 보였다.

“무슨 근거로 그런 소리를 하는 거지?”

“명확한 근거는 없사오나, 정황상 둘의 등장 시기가 겹치기 때문이옵니다.”

그러면서 제이크 로버츠는 샤를 11세에게 노보로바야 북부의 마적단에 관한 이야기를 간략하게 요약해 말했다.

한동안 잠자코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샤를 11세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로이!”

샤를 11세의 부름에 알현실 구석, 탁자 아래 그림자에서 한 사람이 튀어나왔다.

“헙-!”

그 광경에 제이크 로버츠는 결국 기겁을 하고 말았다.

샤를 11세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씩 웃더니 자신을 향해 고개 숙이고 있는 로이에게 이야기했다.

“제이크 로버츠 전도자를 따라 노보로바야로 다녀와야겠다.”

“속히 다녀오겠사옵니다.”

“그래.”

샤를 11세의 시선이 제이크 로버츠에게로 향했다.

“그대 전도자 제이크 로버츠는 당장 장로 로이와 함께 노보로바야로 떠나라. 그리고 함께 그대의 가설을 증명하기 위한 조사를 해보아라.”

“아, 알겠사옵니다.”

“모든 조사가 끝난 이후에 그대가 교육 중인 예비 신자의 정식 입단에 관하여 답을 내려 주겠다.”

샤를 11세의 말에 제이크 로버츠의 표정이 환해졌다.

“충심으로 전력을 다하여 명령을 수행하겠사옵니다!”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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