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4 대승적으로 (1)
<친애하는 종단의 수호자시오 경애하는 샤펠 제국의 황제이신 샤를 드 퐁피두 폐하께 충성스러운 종 제이크 로버츠가 문안드리옵니다.>
아주 의례적인 인사로 제이크 로버츠는 서신의 머리말을 적었다.
그 이후에는 자신이 노보로바야에서 만난 황금 갑옷에 관한 보고를 상세하게 써 내려갔다.
<이에 폐하께 영원의 충성을 맹세한 종으로서 급히 찾아뵙게 되었사옵니다. 부디 제가 폐하의 어전에 나아가 영광된 얼굴 아래에서 모자란 지혜로 꾸며낸 하자가 있는 계획을 아뢸 수 있도록 허락하여주옵소서.>
그렇게 서신을 쓴 제이크 로버츠는 좌측 하단에 프런티어 상단 총수 직인을 찍은 후 깃펜을 내려놓았다.
잠시 잉크와 도장이 마르는 사이, 그는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공화국이 나서면 곤란하다. 디에고 공작과 그의 군대를 몰살시킨 자를 공화국이 어떻게 할 수는 없어.’
그것은 그가 내린 객관적인 판단이었다.
제니스 공화국은 3대 상단 및 그들의 영향을 받는 여러 중견 상단과 지역 유지들이 개별적으로 육성한 용병이 국가 안보를 책임지는 방위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상단이 국가를 좌지우지하는 정치적 환경과 더불어 국방비 절감이라는 경제적 이유가 만나 탄생한 제니스 공화국 특유의 안보 체제는, 유사시 안보에 커다란 구멍이 생길 수밖에 없는 약점을 지니고 있다.
‘지금이야 3대 상단 용병으로도 충분히 벨로디나 왕국을 커버할 수 있어. 하지만 황금 갑옷이 작정하고 난동을 부리기 시작한다면 내 용병까지도 차출하게 될 거야.’
드라기 상단 몰래, 그들의 돈을 알음알음 10년간 횡령하여 육성한 자신의 용병단이 허망하게 사라질 수 있다는 사실에 제이크 로버츠는 한 차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안 돼. 절대로 안 돼! 그럴 순 없어.’
제이크 로버츠는 눈을 떴다.
‘공화국이 너무 세력이 커져도 곤란해. 이대로 가다간 10년 내로 게마인샤프트도 공화국에게 먹히겠지. 그러면 곤란해.’
그는 잉크와 직인이 마른 것을 확인한 후 그것을 돌돌 말아 끈으로 가운데를 묶어 봉인하고선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라와라.”
“네?”
제이크 로버츠는 거점 이동 장치 위에 올라선 채 줄리아를 향해 말했다.
“아퐁으로 간다. 따라와라.”
아퐁이란 말에 줄리아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드디어!’
예비 신자로서 아무런 권능도, 지혜도 없이 그저 막연하게 어떤 비밀 종교 집단의 존재만을 인지하고 있던 그녀에게 아퐁으로 간다는 제이크 로버츠의 말은 정식 입단이 된다는 말로 해석됐다.
“네, 네!”
줄리아는 곧장 제이크 로버츠의 곁으로 가 섰다.
그녀의 초롱초롱한 눈빛을 확인한 제이크 로버츠는 콧방귀를 뀌며 거점 이동 장치를 작동시켰다.
잠시 후, 거점 이동 장치는 환한 빛을 내뿜었고 두 사람은 그 빛에 휩싸였다.
[파아앗-!]
그리고 한 차례 섬광이 일어났고, 이내 두 사람은 빛과 함께 사라졌다.
* * *
본디 카판족은 3만 명가량의 인구로 구성된 부족 7개가 연합한 형태의 정치 체제를 구축하고 있었다.
대략 21만에 달하던 카판족이 벨로디나 1왕자 아딘 콘스탄틴과 2왕자 드미트리 콘스탄틴에 의해 대량 학살의 피해를 입고서 딱 3만 명이 살아남은 현재에도 7개 부족 연합 체제의 외형은 유지하고 있었다.
물론 실질적으로 과거처럼 부족별로 나뉘지는 않고, 그저 7명의 장로가 정착지의 각 구역을 대표하는 체제를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불가하오. 그걸 말이라고 하시오, 대장로!”
카판족 족장 아르게 벤바사는 그런 장로들 가운데 하나였다.
통상적으론 족장이란 칭호를 썼지만, 이렇게 일곱 장로가 한자리에 모일 경우, 대장로라는 호칭으로 불리었다.
그리고 광명력 992년 11월 5일 현재, 아르게 벤바사는 대장로로서 장로 회의를 주재하고 있었다.
“놈은 우리의 원수요! 21만에 달하던 우리 동포가 3만으로 줄었소! 무려 18만이나 놈과 놈의 형제에 의해 죽었단 말이오!”
“그렇소! 우리 모두 목숨을 다하여 놈을 쳐 죽여 동포의 원혼을 갚아야 하오! 놈이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우리 5천 전사의 능력이라면 능히 원수를 갚을 수 있소이다!”
아르게 벤바사는 자신을 향해 침을 튀겨가며 아딘에 대한 반감과 적개심을 드러내는 두 장로를 바라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자가 우리의 원수인 것은 분명하지만 대장로와 백인대를 모두 죽일 수 있었음에도 살려두고 사과하며 거래를 요청했다는 건 적어도 지금 우리를 적대하려는 건 아니란 거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최소한 그자가 거래하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 들어는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반대 의견의 등장에 처음 강경론을 펼쳤던 두 장로의 눈에 불꽃이 튀겼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시오! 그런 마귀와 손을 잡으면 어찌 우리가 무덤에서 동포의 넋과 마주할 수 있단 말이오!”
“동포의 넋은 넋이고, 일단 우리가 살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
“비참하게 사느니 명예롭게 죽는 것이 카판인의 긍지외다!”
“우리 모두가 죽고 나면 누가 명예와 긍지를 기억해준단 말입니까!”
곧 두 집단 사이에 설전이 벌어졌다.
네 사람 모두 나이로는 최연장자에 속했던 만큼, 아르게 벤바사로서도 그들의 논쟁에 쉽사리 끼어들 수가 없었다.
“저 간악한 놈들이 그대 누이들을 욕보이고 죽인 걸 벌써 잊었단 말이오!”
“마적질이나 하면서 죄 없는 광부들을 쳐 죽이면 저 간악한 것들과 뭐가 다르단 겁니까!”
하지만 양자 간에 고성이 점차 살기를 띠기 시작하자 아르게 벤바사는 마냥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만!”
아르게 벤바사가 우렁차게 소리쳤다.
소드 마스터의 힘을 담은 그의 음성은 쩌렁쩌렁하게 그의 장막 내부에 울렸고, 설전을 벌이던 장로들은 모두 입을 다물어야만 했다.
아르게 벤바사는 두 집단 모두에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한 후 그때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던 나머지 두 장로를 바라보았다.
“두 분의 의견은 어떠하십니까?”
아르게 벤바사와 동년배인 만큼 발언권이 약했던 두 젊은 장로들은 잠시 눈치를 살피더니 양쪽에 각각 한 명씩 붙었다.
‘동률이란 말인가?’
결국 자신에게 선택권이 주어진 것을 보고서 아르게 벤바사는 한숨을 내쉬며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놈은 우리의 영원한 원수외다. 놈의 피로 동포의 넋을 위로하든가, 우리의 피로 긍지를 증명하든가 해야 하오, 대장로!”
“우물이 말라가고 있습니다. 배급할 식량도 줄어들고 있습니다. 놈은 왕자입니다. 혹시 압니까? 우리가 당당하게 예전처럼 살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줄지?”
“개처럼 사느니 사자처럼 죽읍시다!”
“배고픈 사자는 배부른 개만도 못한 신세입니다.”
자신을 향한 두 집단의 호소에 아르게 벤바사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장로들은 그런 아르게 벤바사를 바라보며 계속해서 자기 주장을 펼쳤고, 아르게 벤바사의 뒤편에서 그를 호위하는 백인대장 야민 벤키시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그들을 지켜보았다.
“일단…….”
잠시 후, 아르게 벤바사가 눈을 뜨고 입을 열었다.
“내일 이 시간에 다시 이곳에서 모이도록 하겠습니다. 제게 하루의 시간을 주십시오.”
아르게 벤바사의 말에 두 집단의 장로들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날 설득하겠답시고 찾아오지 마십시오. 오늘 하루, 난 그 누구와도 만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 말에 장로들의 표정에 서린 불만은 더욱 강해졌다.
그들은 헛기침을 하며 성큼성큼 아르게 벤바사의 장막을 빠져나갔다.
장로들이 모두 나가자 야민 벤키시가 아르게 벤바사에게 물었다.
“족장님. 어떻게 하실 겁니까?”
“야민.”
“네, 족장님.”
“난 이미 놈 앞에서 머리를 푼 순간 결심했다.”
“네?”
알 수 없는 말만 남긴 채 아르게 벤바사는 야민 벤키시에게 나가라 손짓했다.
야민 벤키시가 장막에서 나가는 것을 본 아르게 벤바사는 그대로 자리에 드러누워 가만히 눈을 감았다.
* * *
“오라버니.”
“응?”
“과연 저 사람들이 나올까요?”
로제가 만든 투명한 반구형 실드 내부에서 두 사람은 나란히 누워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차가운 북풍을 막아주는 실드 속에서 바라보는 푸스타 광야의 밤하늘은 너무도 아름다워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벌써 사흘이 지났어요.”
“저쪽도 생각할 거리가 많겠지.”
아딘은 그렇게 말하며 가만히 별의 바다를 응시했다.
그런 아딘을 지켜보며 로제는 입을 열었다 닫았다 반복했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아딘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할 이야기 있으면 해.”
아딘의 말에 로제는 잠시 입을 다문 채 긴 숨을 내쉬었다.
이윽고 결심이 선 그녀는 아딘을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오라버니…… 저 유목민들…… 오라버니가…… 그러니까…….”
“죽였어.”
“아…….”
“개인적인 편견과 정치적 이유로 다 죽이라 명령했어. 1년 전에.”
“……”
“놀랐니?”
“……네.”
사흘 전, 아딘과 아르게 벤바사 사이에 오갔던 대화를 들었긴 했지만 혹시나 싶었다.
하지만 아딘이 자신의 학살 사실을 담담한 어조로 이야기하자 로제는 순간 판단력이 헝클어지는 것을 느끼며 제대로 대처를 하질 못했다.
“자크 드 아테인이 너한테 찾아와 사과하면 넌 바로 받아줄 수 있겠니?”
“……아니요.”
“그런 거야. 저 사람들도 날 바로 받아들일 순 없는 거야. 그러니 기다려야지.”
로제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곤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로제.”
“……네, 오라버니.”
“과거의 행동이, 비록 내가 직접 의도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누군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다면 마땅히 용서를 빌어야겠지?”
“……용서를 빈다고 그 상처가 씻겨질까요?”
“씻겨지진 않겠지. 대신 그 상처 위에 새 살을 입혀줘야겠지.”
“새 살?”
아딘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로제도 따라서 상반신을 일으켰다.
아딘이 로제를 바라보았다.
“난 이 나라의 왕자야. 벨로디나 왕국 제18대 국왕 블라디미르 일리치 콘스탄틴 폐하의 장남인 만큼, 이 나라에 대한 정당한 소유권을 요구할 자격이 나에게는 있어.”
로제는 침을 꿀꺽 삼켰다.
“난 이 나라의 왕이 될 거야. 하지만 이 나라는, 내가 왕으로 군림할 벨로디나 왕국은 이전의 벨로디나 왕국과는 다를 거야. 농노와 귀족, 노예와 주인이 없는 나라. 모두가 동등한 시민으로 자신의 뜻을 펼치며 살아갈 수 있는 나라. 그런 나라를 만들 거야.”
“…….”
“저들이 다시는 마적단이 되지 않아도 되는, 저들이 다시는 학살당하지 않을 그런 나라를 난 저들에게 선물해주고 싶어. 사죄의 의미로, 과거의 아딘 콘스탄틴이 저지른 죄를 참회하는 마음으로.”
아딘은 다시 바닥에 누웠다.
로제는 흔들리는 눈으로 잠시 아딘을 바라봤다.
“용서는 저들의 몫이야. 난 단지 저들에게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다시는 과거와 같은 비극이 발생하지 않을 수단을 마련해줄 뿐이고.”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아딘은 말을 마무리했다.
“저들이 영원히 날 용서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저들에게 다시는 학살과 약탈이 없는 국가를 주겠다는 내 뜻은 변하지 않아.”
로제는 가만히 아딘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이내 그녀는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그의 가슴팍에 머리를 기대고 그의 배에 손을 얹으며 누웠다.
아딘은 가만히 그녀의 몸을 팔로 감아 안아 주었다.
“오라버니. 근데 오라버니가 왕이 되면 나는 왕의 동생이 되는 거예요?”
로제의 물음에 아딘은 3초 정도 생각을 하다 천천히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왕족이 되는 거지.”
“그럼 저도 콘스탄틴 왕가의 일원이 되겠네요? 로제 콘스탄틴?”
“그렇지. 어…… 근데 정정할 게 있는데 너는 로제 콘스탄틴으로는 안 불리울 거야.”
“네? 그럼요?”
“로제 콘스탄티나. 넌 이렇게 불릴 거야.”
“왜요?”
“벨로디나에선 여자의 이름 뒤에는 아 발음을 붙이거든.”
“아……”
그렇게 두 사람은 별을 바라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이내 두 사람은 별의 바다 아래에서 스르륵 잠이 들었다.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