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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83화 (83/175)

083 과거의 망령 (4)

갑자기 나타난 아딘을 본 순간, 아르게 벤바사는 정수리를 망치로 강하게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정수리에서 시작된 전류가 척추를 타고 흘러내려 온몸 구석구석으로 퍼져가 세포 하나하나를 일깨우는 그 느낌.

그 끝에서 아르게 벤바사의 분노가 광기와 함께 활화산처럼 터져 나왔다.

차갑게, 마치 지나가는 들개를 죽이는 사람처럼, 자신의 가족과 공동체 일족을 무참히 도륙한 원수.

그런 원수가 눈앞에 무방비로 있다는 사실에 아르게 벤바사는 그대로 눈이 돌아가 버렸다.

그리고 아딘이 스스로의 입으로 자신의 정체를 밝혔을 때, 아르게 벤바사는 망설일 것이 없었다.

평생 누군가에게 무릎을 꿇은 적이 없던 남자 중의 남자.

머리카락을 풀어 내리느니 차라리 목을 잘라버리겠다던 옹고집쟁이.

그런 사람, 아버지 바사 벤하킴이 무릎을 꿇고 머리를 풀어 내린 채 일족의 목숨을 구걸했음에도 불구하고 일관되게 학살을 명했던 마귀를 향해 아르게 벤바사는 말을 몰아 달려들었다.

비겁하게 죽음 대신 동족의 시체 더미 속에 숨어 벌레처럼 생존하는 것을 택한 스스로에게 찾아온 소드 마스터로서의 힘을 발휘하여 아르게 벤바사는 아딘에게 일격을 가했다.

그러나 아르게 벤바사는 뜻을 이룰 수 없었다.

원수를 갚기는커녕 도리어 그의 일격에 말에서 낙마하고 무기마저 두 동강 난 채 피를 토하는 신세가 됐다.

살아남은 3만 카판족 가운데 가장 실력이 우수한 정예 전사들이 근거리에서 날린 화살은 아딘의 후방에 있던 마법사 소녀 로제에 의해 모조리 막혀버렸다.

거기서 아르게 벤바사는, 정예 전사들과 마찬가지로, 이 싸움은 이길 수 있는 싸움이 아니란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그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살아남은 카판족을 이끌고 북쪽으로 도망치면서 수천 번 다짐했던 복수가, 불같은 분노 속에서 얻은 소드 마스터로서의 힘이, 황금빛으로 무장한 아딘 앞에서 무용지물이라는 사실이 그를 웃게 했다.

그리고 그다음에 그에게 다가온 것은 3만 카판족의 우두머리라는 지위에서 오는 무거운 책임감이었다.

거기서 그는 선택했다.

아버지 바사 벤하킴이 자기 부족을 위해 그러했듯, 그도 자존심과 목숨을 내놓았다.

“아르게 벤바사.”

머리를 풀어 내린 채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는 그의 이름을 아딘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불렀다.

아르게 벤바사는 아예 머리를 땅에 조아리며 아딘에게 사정하기 시작했다.

“부탁한다! 내 목숨과 존엄을 그대에게 바칠 테니 우리 족속을 살려다오! 멀리 떠나라면 떠나겠다. 내가 죽는다면 내 뒤를 이을 백인대장 야민 벤키시에게 다짐을 받을 수도 있다.”

아르게 벤바사의 말에 말 위에서 머리를 숙이고 있던 백인대장 야민 벤키시가 땅으로 내려와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자 다른 정예 전사들도 모두 땅으로 내려와 야민 벤키시와 똑같은 자세를 취했다.

“내 목숨을 거두어가고 남은 3만 동포들을 살려다오! 부탁한다!”

아르게 벤바사는 울먹이며 자비를 호소했다.

그의 모습에 전의를 상실한 정예 전사들도 모두 수치심을 느끼며 눈물을 흘려야 했다.

그런 그들을 가만히 바라보던 아딘은 이내 불칸의 갑옷을 해제하고 불멸의 검을 도로 마법 주머니 속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곤 천천히 아르게 벤바사에게 다가갔다.

“크흐윽…….”

자괴감, 분노, 절망 그리고 우두머리로서의 책임감이 뒤섞인 눈물을 쏟아내는 아르게 벤바사.

그의 앞에서 멈춰선 아딘은 한숨을 포옥 내쉰 후 입을 열었다.

“일어나라.”

아르게 벤바사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머리를 풀어 내린 채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한 아르게 벤바사의 모습에 아딘은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일어나라.”

아딘의 말에 아르게 벤바사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슷한 체구였던 만큼 아딘과 아르게 벤바사는 자연스럽게 눈을 마주할 수 있었다.

온갖 감정의 파도가 몰아치는 아르게 벤바사의 눈을 아딘은 씁쓸함과 비탄이 가득한 눈으로 가만히 바라보았다.

“……미안하다.”

순간 정적이 광야 위에 내렸다.

울먹이던 아르게 벤바사와 100인의 정예 전사들 모두 울음을 멈춘 채 아딘을 바라보았다.

“미안하다.”

환청을 들었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아르게 벤바사에게 아딘은 다시 한번 명확하게 자신의 의사를 밝혔다.

“미안하다.”

세 번째 아딘이 같은 말을 내뱉었을 때, 아르게 벤바사는 일그러진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으며 천천히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난 너희를 해하러 온 것이 아니다. 진심 어린 사과를 하고자 이곳에 왔다. 더 큰 미래를 향한 협력을 위해 이 자리에 섰다.”

뒷걸음질 치던 아르게 벤바사는 그대로 말과 부딪혔다.

[히히히힝-!]

말은 가볍게 투레질하면서도 자리에서 비켜서지는 않았다.

“크흑……”

아르게 벤바사가 고개를 숙인 채 어깨를 들썩이기 시작했다.

“크흐하하하하하-!”

이내 그는 고개를 뒤로 젖힌 채 광소를 터뜨리기 시작했다.

그의 미치광이와도 같은 웃음소리는 대략 1분간 지속됐다.

정예 전사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큰 혼란 속에서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로제는 긴장한 표정으로 언제라도 아딘 주변에 실드를 두를 만반의 채비를 해둔 채 가만히 주변을 관조했다.

“…….”

그리고 아딘은 슬픈 눈으로 아르게 벤바사를 바라보며 침묵했다.

“미안하다고?”

광소가 실소가 될 무렵 아르게 벤바사는 말하기 시작했다.

“뭐가 미안하다는 거지? 내 가족을 죽인 게? 우리 일족을 몰살한 게? 아니면, 나를 이렇게 비참하게 만든 게?”

아르게 벤바사는 손가락으로 아딘을 가리켰다.

그의 검지는 눈에 띄게 팔과 함께 덜덜덜 떨리고 있었다.

“이제 와서? 이제 와서!”

그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눈물이 그의 광기 어린 실소와 뒤섞이며 기괴한 형상을 그려냈다.

“왜 이리도 날 비참하게 만드는 거지? 왜? 네놈은 그렇게도 내가 밑바닥으로 떨어지는 걸 보고 싶은 거냐?!”

지난 1년여 동안 속에 쌓아 둔 감정.

아버지에 대한 죄송함, 가족에 대한 미안함, 일족에 대한 부채 의식.

카판족 전사답지 못하게 비겁한 방법으로 동족의 시체를 방패 삼아 살아남았다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

아딘과 벨로디나 왕국에 대한 분노와 증오.

살아남은 3만 카판족의 우두머리로서 느끼는 부담스러운 중압감.

거기서 발생하는 스트레스 등.

그 모든 감정이 한꺼번에 튀어나와 폭발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광기와 실소, 눈물과 떨림으로 드러났다.

“바사의 아들 아르게여!”

그런 아르게 벤바사를 향해 아딘은 묵직한 일성을 날렸다.

불칸의 갑옷과 네르갈의 목걸이 그리고 불멸의 검이 그의 목소리에 공명하며 힘을 보탰다.

신물의 힘이 더해진 아딘의 목소리는 점차 자기 파괴적으로 치닫고 있던 아르게 벤바사의 내면을 뒤흔들어 놓았다.

그것이 아르게 벤바사의 정신을 일깨웠다.

“그대와 나. 우리 둘은 피해자와 가해자이기도 하지만 모두가 백성을 거느리고 있는 존재다.”

“……”

“그대가 굶주린 일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마적 행세를 하는 것도, 내가 날 죽이려는 자들이 권력을 잡은 이곳으로 돌아온 것도 모두 각자의 백성을 위해서다.”

“……”

“그대가 카판의 백성을 위해 머리를 풀었듯 나도 벨로디나 백성을 위해 이 자리에 섰다.”

“…….”

“아르게 벤바사. 나는 그대에게 손을 내밀고자 한다. 과거의 망령을 떨쳐내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해, 굶주린 카판의 백성을, 억압받는 벨로디나의 백성을 위해. 나의 힘이 되어다오.”

아딘이 손을 내밀었다.

아르게 벤바사는 굳은 표정으로 가만히 그 손을 바라보았다.

그의 뇌리에서 무수한 생각들이 오가기 시작했다.

그 생각의 파도 속에서 한동안 아르게 벤바사는 표류해야 했다.

그리고 아르게 벤바사는 인상을 찌푸리며 아딘에게 이야기했다.

“원수와 손을 잡는 것은…… 내가 혼자 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아르게 벤바사는 주먹을 꽉 쥐었다.

“원수를 용서하는 것도 내가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아르게 벤바사는 이를 뽀드득 갈며 말을 마무리했다.

“그대가 진정으로 우리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기다려라. 이곳에서. 우리가 마음을 모을 수 있을 때까지.”

아르게 벤바사의 말에 아딘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렸다.

“기다리겠다.”

아딘의 말에 아르게 벤바사는 한동안 그를 이글거리는 눈으로 노려본 후 훌쩍 뛰어올라 말등에 올라탔다.

“돌아간다!”

아르게 벤바사는 정예 전사들에게 그렇게 명령한 후 말고삐를 당겼다.

[히히히힝-!]

아르게 벤바사의 흑마가 카판족 정착지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정예 전사들도 모두 말에 올라타 일제히 아르게 벤바사의 뒤를 따랐다.

황무지에 잠시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휘이이이잉-!]

그 흙먼지는 곧 로제가 일으킨 가벼운 바람에 사방으로 흩어졌다.

“오라버니!”

로제는 빠르게 아딘의 곁으로 다가왔다.

“괜찮아요?”

로제의 물음에 아딘은 그녀를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로제.”

“네, 오라버니.”

“너는…… 자크 드 아테인이 용서를 빌면 받아 줄 수 있겠어?”

아딘의 물음에 순간 로제는 흠칫했다.

천천히 굳어가는 그녀의 표정과 싸늘해지는 눈빛 너머로 아딘은 그녀가 지닌 뿌리 깊은 증오를 볼 수 있었다.

혹여 그녀가 폭주할까, 아딘은 가만히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아딘의 손길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점차 로제는 마음의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다소 그녀의 표정이 풀리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아딘은 입을 열어 말을 이었다.

“지금 나는 3만 명의 사람들에게 용서를 빌고 있는 거야. 자크 드 아테인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큰 상처를 준 이들에게, 과거의 망령을 잊고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협력하자고 이야기한 거야.”

아딘의 시선이 저 멀리 카판족 특유의 투박한 멋이 느껴지는 장막들로 가득한 그들의 정착지로 향했다.

그런 아딘을 가만히 올려보던 로제는 이내 천천히 그의 허리를 껴안아 주었다.

아딘도 한 손으로 그녀의 등을 토닥여주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 * *

광명력 977년.

당시 드라기 상단의 총수 권한 대행으로서 차근차근 상단을 장악해 나가던 마리오 드라기를 보좌하던 제이크 로버츠에게 한 남자가 찾아왔다.

그는 제이크 로버츠에게 효율적인 자금 세탁 방법에 대해 알려주었고, 그 기술을 십분 활용한 덕분에 제이크 로버츠는 순식간에 드라기 상단 내에서 드라기 가문의 혈족 다음가는 권위를 가질 수 있게 됐다.

그리고 마리오 드라기가 제이크 로버츠에게 위성 상단인 프런티어 상단 총수직을 맡겼을 무렵, 그에게 자금 세탁 기술을 알려준 남자는 은밀한 종교적 가르침을 그에게 설파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묵시록 종단과 제이크 로버츠 간 인연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15년이 지난 지금, 제이크 로버츠는 그에게 자금 세탁과 묵시록 종단의 교의를 가르쳐 주었던 전도자의 뒤를 이어 제니스인 최초의 묵시록 종단 전도자로서 공화국 내 종단 신도를 관리하고 교세를 넓히는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위이이잉-!]

그런 그가 교주로부터 받은 능력은 거점 이동이었다.

“전도자님?”

광명력 992년 11월 4일 오전.

제이크 로버츠는 벨로디나 왕국 노보로바야의 프런티어 호텔 지하 거점에서 제니스 공화국 아라곤에 자리한 자신의 저택 지하 거점으로 이동했다.

아직 교주로부터 입단 승인을 받지는 못한 예비 신도 줄리아는 장부 정리를 하던 와중에 갑자기 발동된 거점 이동 장치에서 튀어나온 제이크 로버츠를 보며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오, 오신다는 기별도 없이 어떻게……”

자신을 향해 의문을 표하는 줄리아에게 조용히하라 손짓한 후 제이크 로버츠는 그대로 자기 책상으로 향했다.

‘무슨 일이시지?’

줄리아는 침을 꿀꺽 삼키며 제이크 로버츠를 바라보았다.

감히 그에게 이유를 물을 수도 없었고, 가까이 다가가 무얼 하는가 볼 수도 없었기에 그녀는 불안함과 궁금증이 뒤섞인 눈빛으로 책상에 앉아 깃펜으로 종이에다 빠르게 무언가를 써 내려가는 제이크 로버츠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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