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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82화 (82/175)

082 과거의 망령 (3)

광명력 992년 11월 4일 아침.

냉기 어린 삭풍이 황량한 대지를 할퀴고 지나가는 푸스타 광야.

관습적으로 벨로디나 왕국의 강역으로 여겨지지만, 벨로디나 왕국조차도 자기네 땅이라 생각하지 않는 그야말로 허허벌판인 곳.

마땅히 농사도, 목축도, 수렵도, 채집도 할 거리가 없는 그야말로 황무지인 푸스타 광야.

[히히히힝-!]

[푸르릉-!]

이곳에 3만 카판족이 자리 잡은 지는 채 반년이 되지 않았다.

‘어떻게 정확하게 3만 명만 살아남았을까?’

태양이 뜸과 동시에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한 카판족을 허공에 뜬 채 로제와 함께 내려다보며 아딘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려가자.”

“네, 오라버니.”

그대로 아딘과 로제는 땅으로 내려왔다.

두 사람이 땅으로 내려옴과 동시에 로제가 걸어두었던 은신 마법도 해제됐다.

“응?”

갑작스럽게 영역에 짠! 하고 나타난 아딘과 로제의 모습은 그대로 영역 입구에서 대기 중이던 파수꾼에게 발각됐다.

[뿌뿌-! 뿌뿌-! 뿌뿌뿌뿌뿌-!]

파수꾼은 망설임 없이 뿔나팔을 일정 리듬에 맞춰 불러서 적대 세력의 출몰을 부족에게 알리고는 냅다 정착지 내부로 줄행랑을 쳤다.

곧 카판족 정착지에서는 일대 소란이 일어났다.

“토벌군이라도 온 거야?”

“둘이라든데?”

“갑자기 나타났다는 걸 보면 마법사인가?”

“젠장!”

이곳에 정착한 이후 저지른 짓이 있었던 만큼 카판족 전사들은 긴장한 채 빠르게 무장을 끝마치고 말에 올랐다.

“따라와!”

날만 60cm, 창대만 2m에 이르는 거대한 폴암을 든 카판족 족장 아르게 벤바사가 흑마를 탄 채 선두에서 출발했다.

그 뒤를 100기의 정예 카판족 기병이 뒤따랐다.

잠시 후, 그들은 파수꾼이 이야기한 장소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때까지 아딘과 로제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서 있었다.

‘뭐지?’

서른의 나이에 카판족을 이끌게 된 아르게 벤바사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아딘은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아르게 벤바사.’

이미 두루마리로 그에 대한 정보를 파악한 아딘은 무거운 마음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아르게 벤바사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오라버니…….’

이미 아딘으로부터 아무것도 하지 말고 자기방어만 하라는 말을 들은 로제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101기의 유목민 기마 전사에게 다가가는 아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때는…….’

아딘은 가만히 있으라 했지만, 혹여나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바로 나설 수 있도록 로제는 만반의 준비를 끝마친 채 두 손을 모아 아딘을 바라보았다.

그런 로제를 뒤로한 채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가던 아딘은 대략 아르게 벤바사와 100m 정도 간격을 두고서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아르게 벤바사는, 가까이온 아딘의 외모를 확인하곤 눈을 부릅뜬 채 폴암을 쥔 손을 바들바들 떨어대기 시작했다.

“후우…….”

그 모습을 보고 아딘은 한숨을 내쉰 후 담담한 어조로 모두에게 똑똑히 들릴 만큼 큰 소리를 내어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벨로디나 왕국 제18대 국왕이시었던 블라디미르 일리치 콘스탄틴의 장남이자 유일하게 생존한 콘스탄틴 왕가의 적통인 아딘 블라디미로비치 콘스탄틴이다.”

아딘의 소개가 끝나자 그제야 정예 전사들은 하나둘씩 아딘의 모습을 기억해낼 수 있었다.

‘담갈색 머리!’

‘담갈색 눈동자!’

‘마귀 새끼!’

멀찍이서 직접 봤거나 혹은 그를 본 사람으로부터 외모에 대한 묘사를 들었거나 한 전사들이 모두 부들거리는 사이 아딘은 말을 마무리했다.

“찬탈자 유리 일리치 콘스탄틴에 대항하고자 하는 정통성 있는 왕위 계승자로서 그대들의 대표자, 족장 아르게 벤바사와 할 이야기가 있어서 이렇게 찾아왔다.”

그리고 아딘의 말이 끝난 순간.

“으아아아아-!”

아르게 벤바사가 그대로 말을 몰아 아딘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화르르륵-!]

핏발선 눈으로 아딘에게 돌격하는 아르게 벤바사의 폴암 칼날은 불꽃처럼 맹렬히 타오르는 푸른 검기로 뒤덮여 있었다.

“죽어-!”

순식간에 아딘을 향해 돌진해온 아르게 벤바사.

그의 폴암이, 맹렬히 타오르는 검기가 아딘의 목을 노리며 나아갔다.

그리고 그 순간, 아딘이 황금빛 광채와 함께 잔상을 흩뿌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부우웅-!]

아르게 벤바사의 폴암은 헛되이 허공을 가르고 지나갔다.

[히히히힝-!]

목표물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아르게 벤바사는 즉시 말고삐를 당기며 말을 통제했다.

그리곤 이내 말머리를 뒤로 돌렸다.

‘저건……!’

그리고 아르게 벤바사는 볼 수 있었다.

온통 황금빛으로 가득한 불칸의 갑옷으로 무장한 아딘이 황금빛 찬란한 불멸의 검을 든 채 당당하게 서 있는 모습을.

“흐라아앗-!”

아르게 벤바사는 그대로 말의 옆구리를 차 다시 아딘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빠르게 다가오는 아르게 벤바사와 그의 폴암에서 타오르는 푸른 검기를 바라보며 아딘은 한 차례 심호흡했다.

‘10m.’

그리고 아르게 벤바사와의 거리가 10m 남짓 됐을 무렵, 아딘은 그대로 그 자리에서 도약해 역으로 아르게 벤바사에게 다가갔다.

아르게 벤바사는 자신을 향해 도약해오는 아딘을 향해 폴암을 휘둘렀다.

‘됐어!’

리치에서 확실하게 차이가 나는 만큼 아르게 벤바사는 자신의 폴암이 아딘에게 타격을 줄 것이라고 확신했다.

‘허공에 뜬 채로 피하기도 힘들어!’

무쇠로 만든 수레마저도 손쉽게 잘라내는 자신의 검기.

가족과 동포의 죽음 속에서 홀로 살아남은 자신에게 내려준 신의 축복.

그것이 허공에 뜬 아딘의 허리를 가르기 위해 다가가는 모습이 아르게 벤바사의 눈에는 매우 느릿느릿하게 잡혀 들었다.

‘됐어! 됐어! 됐……’

그리고 곧, 아르게 벤바사의 눈에 자신의 폴암을 정면으로 치기 위해 휘둘러지는, 황금빛 칼날이 들어왔다.

[콰아앙-!]

이윽고 폭음과 함께 아르게 벤바사는 그대로 뒤로 구르며 말에서 떨어져 내렸다.

불멸의 검으로 아르게 벤바사의 공격을 허공에서 정면으로 쳐낸 아딘은 여유롭게 허공에서 한 차례 공중제비를 돈 후 아르게 벤바사로부터 5m가량 떨어진 지점에 안전하게 착지했다.

“크웁…… 푸훕-!”

속이 진탕 된 것을 느끼며 아르게 벤바사는 피를 토해냈다.

가까스로 폴암을 놓치진 않고 있었지만, 이미 칼날에 서려 있던 검기는 사라지고 없었다.

‘강하다…… 너무…….’

단 일격의 충돌로 아르게 벤바사는 자신과 아딘 사이의 격차를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나 그는 마냥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는 가까스로 폴암을 지팡이 삼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퉤-!”

그리곤 핏덩이와 섞인 침을 뱉어낸 후 다시 자세를 바로잡았다.

[화르륵-!]

또 한 번 그의 폴암 칼날에서 푸른 검기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우와아아아아-!”

“족장님 만세!”

“찢어 죽여 버리십시오!”

인간을 초월한 소드 마스터의 싸움에 감히 끼지는 못한 채 정예 전사들은 함성을 지르며 아르게 벤바사를 응원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천천히 사방으로 퍼지며 아딘은 물론 로제까지도 둘러싸는 포위망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족장님께서 밀리신다면…….’

상대방은 고향 카판 대평원에서 동족에 대한 대량 학살을 명령했던 원수.

그런 자가 족장을 힘으로 이길 만큼 강해진 상태로 나타났다면, 그나마 살아남은 3만 명의 동족들까지 모두 이 황량한 광야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공포.

그것이 정예 전사들의 뇌리를 휘감았다.

‘어떻게든 막아 내야 해!’

그들은 모두 같은 생각을 하며 포위망을 구축하며 활에 화살을 먹였다.

그러는 사이 전투 태세를 끝마친 아르게 벤바사는 아까보단 다소 차가워진 눈으로 아딘을 바라보며 빈틈을 찾기 시작했다.

‘아…….’

그리고 그는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싸움…… 내가 이길 수가 없어.’

그야말로 빈틈이 없는 아딘의 자세에 아르게 벤바사는 이를 갈았다.

‘젠장…….’

자신이 보는 앞에서 아버지 바사 벤하킴과 일족을 모두 쳐 죽이라 명령한 원수 중의 원수를 눈앞에 두고도 무력하기만 한 자신에게, 아르게 벤바사는 다시 한번 자괴감을 느껴야만 했다.

마치 작년 이맘때 카판 대평원에서, 죽은 동족의 시체 더미 아래에 숨은 채 아버지와 형제들이 참수당하는 모습을 보던 때처럼.

“흐아아아아-!”

그것이 아르게 벤하킴을 움직이게 했다.

비록 빈틈도 없었고, 몸 상태도 좋지 않다곤 하지만, 그대로 가만히 있기에는 스스로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타탓-!]

그대로 아르게 벤바사는 도약했다.

[부우웅-!]

그리곤 그대로 위에서 아래로 폴암을 휘둘렀다.

그 순간, 아딘의 검이 궤도를 틀었고, 그의 발이 일정한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서걱-!]

곧 불멸의 검이 아르게 벤바사의 왼손과 오른손 사이 폴암 창대를 정확하게 가르고 지나갔다.

[뻐억-!]

그리고 아딘의 발이 그대로 아르게 벤바사의 가슴팍을 걷어찼다.

“커헉-!”

아르게 벤바사는 허공에서 피를 흩뿌리며 뒤로 날아가 자기 말 발치에 철푸덕 쓰러지고 말았다.

[히이이잉-!]

말이 화들짝 놀라는 가운데 아르게 벤바사는 누운 채 쉴새 없이 기침하며 괴로움을 호소했다.

그 모습을 본 카판족 전사들은 눈에 불이 들어왔다.

“발사!”

그리고 곧 백인대장의 발사 명령이 떨어졌다.

명령과 함께 정예 전사들은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를 놓았다.

무려 100개의 화살이 일제히 아딘을 향해 날아갔다.

[우우웅-!]

[투두두두둥-!]

빠르게 날아들던 화살은 그러나 간발의 차로 아딘의 주변을 뒤덮은 반구형 실드에 가로막혀 버렸다.

200m 바깥의 물소도 일격에 관통할 만큼의 강한 화살이었지만, 대기 중이던 로제가 만들어낸 실드 앞에선 빗방울만도 못한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

“발사!”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예 전사들은 흔들림 없이 두 번째 화살을 아딘을 향해 날렸다.

그러나 첫 번째와 마찬가지로 두 번째도 그저 빗방울만 못한 존재로 전락한 채 허망하게 땅바닥에 쏟아져 내리는 처지가 됐다.

“마법사! 저 여자가 마법사다! 저 여자를 노려!”

전사들 가운데 일부가 로제를 향해 세 번째 화살을 날렸다.

[휘유우우웅-!]

그 순간, 강풍과 함께 토네이도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토네이도는 그녀를 향해 날아가던 화살과 아딘을 향해 날아가던 화살들을 모조리 흡수해 버렸다.

“아…….”

그 경이로운 장관에 결국 정예 전사들의 사기는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잠시 후, 토네이도가 사라지고 바람이 그쳤다.

전사들의 활은 그들의 고개와 함께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모두가 치욕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이며 이를 갈아댔다.

그리고 아르게 벤바사는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나 아딘을 바라보며 기괴한 표정으로 웃었다.

“흐하하하하-!”

입가에 피를 질질 흘린 채 아딘을 보고 미친 듯이 웃어대던 아르게 벤바사.

[휙-!]

이내 그는 들고 있던 반동강 난 폴암을 바닥에 집어 던졌다.

그리곤 머리를 묶어주던 털실을 단검으로 잘라내 기다란 머리카락을 아래로 흘렸다.

그는 서글픔과 괴로움 가득한 표정으로 아딘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내 아버지, 바사 벤하킴도 나처럼 머리카락을 푸셨다.”

아르게 벤바사의 말에 아딘은 갑옷 너머에서 슬픈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한 일족의 수장이 머리를 푸는 것은 내 존엄과 목숨을 바칠 테니 우리 일족만큼은 살려달라는 뜻이다.”

아르게 벤바사는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부탁한다. 이제 우리는…… 우리 카판족은…… 저게 전부다. 자비를 베풀어다오. 내 아버지에겐 그러지 않았더라도…… 제발…… 부탁한다.”

아르게 벤바사의 행동에 정예 전사들은 그만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죽이지 않고 종으로 부린다고 해도 좋다. 눈을 뽑고, 팔다리를 자르고 원숭이처럼 부려먹어도 좋다. 제발 살려만 다오. 우리 부족을 살려만 다오!”

아르게 벤바사마저도 결국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1년 전, 그의 아버지가 빌었을 때, 아딘은 학살로 답을 대신했다.

어찌 보면 하나 마나 한 행동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아르게 벤바사로서는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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