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81화 (81/175)

081 과거의 망령 (2)

<제이크 로버츠>

<광명력 950년 12월 31일생, 광명력 992년 11월 2일 현재 41세.>

<프런티어 상단 총수>

<드라기 상단 총수 마리오 드라기의 최측근 인사로 주로 자금 세탁을 도맡고 있다.>

<본래 슈드 자치령과 게마인샤프트 서부를 오가며 자금 세탁을 했으나 프런티어 상단 출범 이후에는 자금 세탁 이외에 사업도 하게 되면서 활동 범위가 대륙 전체로 확대됐다.>

<가족 없이 혼자 생활하고 있으며 돈과 일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워커 홀릭이다.>

방으로 돌아와 다시 두루마리를 펼쳐보았지만 특별히 마법적 능력에 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아까 보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저 제이크 로버츠가 어떠한 인간인지에 관해서만 두루마리는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었다.

“흐음…….”

아딘은 전등 아래에서 손으로 턱을 쓰다듬으며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과민 반응한 건 아닌데 말이야. 분명 목걸이가 반응을 했단 말이지.’

아딘은 슬며시 펜던트를 쓰다듬었다.

조금 전, 제이크 로버츠와의 대면에서 보였던 그 은은하고도 사나운 반응은 오간 데 없이 황금사자는 조용히 전등 불빛에 자신의 금빛 찬란함을 반사하며 위용을 과시하고 있었다.

‘아니면 저런 것들 때문인가?’

아딘의 시선이 이번에는 전등으로 향했다.

21세기, 김현수가 살던 현실의 것보다는 못했지만, 촛불과 비교하면 확실히 밝기 면에서 앞서는 실용마법도구.

‘실용마법에 관해서 내가 구체적인 설정을 하지 않았다곤 하지만…… 그래도 어지간한 건 다 두루마리가 설명하는데 말이야.’

대표적으로 라인하르트가 사용하던 무한 발화 성냥.

김현수가 구체적으로 설정한 것도 아니었고, 영웅일대기에서 등장한 적도 없는 물건이었지만 그것에 대한 설명과 품질별 시세는 분명히 두루마리에 나와 있었다.

‘아니면 그냥 두루마리가 변덕이라도 부리는 건가?’

아딘은 나지막하게 침음성을 흘리며 팔짱을 낀 채 눈을 감았다.

‘그렇다고 제이크 로버츠를 잡아다가 두들겨 팰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말이야.’

힘으로야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었다.

아닌 말로 아딘과 로제의 힘이라면 노보로바야에 주둔 중인 2천 명의 용병들 따위도 얼마든지 처리 가능했다.

문제는 그런 식으로 힘을 쓸데없이 드러냈다간 결국엔 자신의 정체가 발각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괜히 적을 자극해 대비태세만 강화하게 만드는 꼴이 되고 말 터였다.

‘안 되지. 자칫 내가 용병들을 모으기도 전에 제니스 공화국에서 대규모 군대라도 파병해 버리면 곤란해져. 그랬다간 지난 내전 시즌 2가 될 뿐이야.’

아딘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다시 쌓이려는 부정적인 생각들을 떨쳐냈다.

‘그래. 여기에는 쓸데없이 실용마법 도구들로 가득해. 저 전등부터 욕조까지. 인간이 감지하진 못하지만, 목걸이가 감지할 만한 수준으로는 마력이 과다하게 분출되고 있다고 가정한다면 뭐 이상할 건 없었어.’

그렇게 아딘은 최대한 합리적인 결론을 내린 채 의자에서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지금은 이런 자잘한 거에 신경을 쓸 때가 아니야. 카판족이 멀리도 아니고 바로 근처에 있는 이상…….’

어둠에 잠긴 노보로바야와 북부의 황량한 광야를 바라보며 아딘은 그렇게 가만히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했다.

* * *

광명력 992년 11월 3일 아침.

쇠고기가 들어간 벨로디나식 수프 보르쉬와 닭고기 샤슬릭으로 든든하게 아침을 먹은 아딘과 로제는 프런티어 호텔에서 나와 노보로바야 북문으로 향했다.

“방비가 허술하네요, 오라버니.”

초소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이제 갓 교대한 용병의 곁을 지나며 로제가 아퐁어로 아딘에게 이야기했다.

아딘은 피식 웃으며 그녀에게 대답했다.

“옛날부터 여긴 이랬어. 딱히 주변에 누가 침략할 사람도 없는 후방 중에서도 후방이니까.”

“그래도 요즘 마적단이 나타났다고 하면 경계를 강화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뭐, 어디까지나 점령군이잖아.”

아딘의 말에 로제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아딘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루이 알랭이 단순히 마법만 가르친 건 아닌 것 같아.’

불멸의 신전에서 있었던 루이 알랭과의 만남 이후 로제는 많은 부분에서 긍정적인 쪽으로 변했다.

예전처럼 화가 난다고 무턱대고 공격적으로 나가는 일도 없어졌고, 적당히 자기감정을 통제할 줄도 알게 됐으며, 어느 정도의 시사상식 및 교양을 알게 됐다.

‘뭐, 결과적으로 로제에겐 좋은 일이지.’

그러면서 아딘의 생각은 서서히 혁명 이후의 일로 향하기 시작했다.

‘유리 콘스탄틴을 권좌에서 끌어내리고 북방개발조합의 세력을 몰아낸 다음 어느 정도 국정이 안정화되면……’

이미 계획해 두었던 여러 구상이 그의 머릿속에서 우후죽순처럼 떠올랐다.

드워프와 쿠만족에 대한 처리, 새롭게 나타난 변수인 카판족에 대한 처우, 기존 귀족들에 대한 처분.

‘그리고 로제는…….’

순간 그의 뇌리로 하나의 그림이 그려졌다.

지금도 가끔 꿈에서 나오는, 벨로디나 왕궁.

4개의 거대한 궁전 건물을 뒤로하고 거대한 왕성의 북쪽에 존재하는 화려한 왕궁 사원.

그곳에서 역대 국왕들이 혼례식 때마다 입었던 화려한 색동옷을 입은 채 서 있는 자신.

그리고 그 곁에서 하얀 면사포로 얼굴을 가린 채 수줍게 웃고 있는 로제.

그런 두 사람의 성혼을 사랑의 신 수르자의 이름으로 만인 앞에 선포하는 동방광명교 총대주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아딘은 쓴웃음을 지은 채 고개를 가로저었다.

‘심각한 일 앞두고…….’

그러면서 아딘은 슬쩍 로제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며 여유롭게 미소를 지은 채 사뿐사뿐 아딘과 보조를 맞춰 걷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의 그 겁에 질린 표정이라든가, 각성 이후 종종 보였던 어떤 광기 어린 모습보다 훨씬 인간적인 그 모습에 아딘은 마음속에서 알 수 없는 열기가 순간적으로 팍 치고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아직 여유롭구나. 응? 아직 여유로워.’

아딘은 허공을 바라보고 슬며시 콧김을 내뿜으면서 마음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정신 차리자. 지금 어디 소풍 가는 게 아니야. 아딘 콘스탄틴의, 나의 업보를, 과거의 망령을 만나러 가는 길이야.’

카판족을 떠올리자 서서히 뜨거워졌던 마음이 차갑게 식기 시작했다.

그렇게 아딘과 로제는 여유만만하게 북문을 통해 노보로바야를 빠져나갔다.

그리고 대략 1km 정도를 더 걸어 주위에 아무도 없는 광야길에 이르렀을 때, 두 사람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딘은 빠르게 불칸의 갑옷을 꺼내 입고서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로제도 그 뒤를 따라 비행 마법으로 공중에 떠올랐다.

“이대로 쉬지 않고 가면 오늘 저녁에 도착할 거고, 중간에 쉬었다 가면 내일 아침에 도착할 것 같은데 어떻게 하겠니, 로제?”

“음…… 중간에 쉬었다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래. 그럼 그렇게 하자.”

“네.”

그렇게 일정 조율을 마친 두 사람은 곧장 북쪽으로 쭉 날아갔다.

두 사람이 사라진 장소에는 차가운 북풍과 함께 무의미한 흙먼지만이 한 차례 쓱 일어날 뿐이었다.

그리고 그 흙먼지 속에서 서서히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 말도 안 돼…….”

제이크 로버츠의 비서 랄프 넬슨이었다.

흙먼지 속에서 은신을 풀고 모습을 드러낸 그는 멍하니 아딘과 로제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황금 갑옷이 왜 여기서 나와?”

한동안 멍하니 떨리는 눈으로 북쪽 하늘을 바라보던 랄프 넬슨은 이내 머리를 강하게 흔들어댔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그대로 랄프 넬슨은 다시 모습을 감춘 채 바람이 돼 흙먼지와 함께 노보로바야로 되돌아갔다.

노보로바야에서 은신을 풀고 빠르게 프런티어 호텔로 돌아간 그는 그대로 공간이동 마법진에 올라타 제이크 로버츠가 있는 최고층 특실로 향했다.

그리고 커피를 마시며 서류를 검토하던 제이크 로버츠에게 자신이 본 것을 모두 이야기했다.

“뭐?! 황금 갑옷?!”

“네. 분명히 황금 갑옷이었습니다.”

“확실해?”

“확실합니다. 어제 총수님께서 만나셨던 특실 손님이 황금 갑옷으로 변해서 동행인과 함께 북쪽으로 날아가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습니다.”

[탕-!]

제이크 로버츠는 그대로 탁자를 손바닥으로 내려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황금 갑옷…… 그놈이 벨로디나에는 무슨 일로……?”

제이크 로버츠는 랄프 넬슨을 바라보며 물었다.

“종단에서는…… 교주님이나 장로님으로부터는 따로 이야기가 내려온 게 있었나?”

“없었습니다. 지난번에 새로 샤를 드 퐁피두 황제께서 새로이 교주가 되셨다는 연락이 끝이었습니다.”

“젠장……”

제이크 로버츠는 주먹을 쥐고 입을 꾹 다문 채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디에고 공작이 놈과 함께 있던 여자애에게 죽었다고 했었지.’

순간 제이크 로버츠는 온몸에서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랄프 넬슨이 앞에 있었기에 가까스로 버텼을 뿐, 만약 혼자였다면 벌써 바닥에 주저앉았을 만큼 그는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내가 미쳤지. 만약에라도 그 인간이 난동을 부렸어 봐. 디에고 공작도 죽은 마당에 내가 그 인간을 어떻게 상대해?’

제이크 로버츠는 떨리는 손으로 탁자 위에 올려진 잔을 들어 커피를 한입에 쭉 넘겼다.

“이대로 여기에 있을 수는 없다. 비상사태다.”

제이크 로버츠는 랄프 넬슨을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난 먼저 아라곤으로 돌아가겠다. 가서 황제께 이 사실을 알려야겠어. 너는 여기 남아서 내가 처리하려던 상단 일을 좀 마무리해라.”

“네, 알겠습니다.”

“젠장…… 황금 갑옷이라니…….”

“그, 그래도 다행 아닙니까?”

랄프 넬슨의 말에 제이크 로버츠는 인상을 찌푸리며 그를 노려봤다.

랄프 넬슨은 침을 꿀꺽 삼키며 말을 이었다.

“저, 전대 황제이신 프랑수아 4세께서 초, 총수님을 전도자로 임명해주셨으니 말입니다. 디, 디에고 공작은 제니스인을 종단에 받아들일 수 없다 결사 반대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지금 그 이야기가 뭐가 중요해! 이미 지나간 이야기가!”

[쨍그랑-!]

갑작스럽게 제이크 로버츠가 들고 있던 잔을 벽에 집어 던지며 열불을 내자 랄프 넬슨은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푹 숙였다.

“지금 그게 중요해! 황금 갑옷이 벨로디나에 나타났다고! 이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어? 여기가 전쟁터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이야!”

“죄, 죄송합니다.”

“어이, 넬슨. 네가 종단의 신자라고 해서 계속해서 내 곁에 붙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 알겠어?”

“……”

“종단은 종단이고, 상단은 상단이야. 뭐가 중요한지, 뭘 해야 하는지 제대로 판단 못 하고 또 조금 전 같은 쓸데없는 이야기나 하면 너도 갈리는 수가 있어.”

“조심하겠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똑바로 해라. 신자 하나 더 받는 건 일도 아니니까. 알겠어?!”

“네, 총수님. 죄송합니다.”

바짝 얼어붙은 랄프 넬슨을 노려보던 제이크 로버츠는 신경질적으로 옷가지를 챙겨 입고는 방을 나섰다.

‘지난 6월 이후로 숨어있던 황금 갑옷이 벨로디나에 나타났다……. 그냥 나타나진 않았겠지. 북쪽이면…… 쿠발 광산일 건데…… 거기에 뭐가 있길래 나타난 거지?’

마법진 위로 올라서서 잔뜩 뿜어져 나오는 마력을 느끼며 제이크 로버츠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황금 갑옷이 나타난 이상 재앙은 이제 필연적으로 닥쳐올 거야. 젠장, 어떻게 키운 상단인데…… 안 돼. 이렇게 날려버릴 순 없어.’

처음 묵시록 종단에 입단하여 신자가 됐을 때, 자신을 이끌어준 전도자에게서 들었던 예언을 제이크 로버츠는 떠올렸다.

‘남풍이 대지를 불태우고 석양이 강물을 메마르게 하리라…….’

곧 환한 빛이 그의 몸을 감쌌다.

공간을 도약하는 묘한 느낌 속에서 묵시록 종단에 내려오는 예언을 곱씹으며 제이크 로버츠는 생각했다.

‘절대 안 돼. 어떻게든 막아야 해. 그렇게 하기 위해선 어떻게든 황제께서 직접 군대를 이끄시고 이곳으로 오시게 해야 해.’

그렇게 제이크 로버츠는 서두르기 시작했다.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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