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0 과거의 망령 (1)
<카판족>
<광명력 53년부터 카판 대평원에 거주해오던 유목민족.>
<과거 다이람 족속을 몰아내고 게마인샤프트를 장악한 엘프숲 남부 유목민의 방계 종족이다.>
<뛰어난 승마술과 하늘을 나는 새도 맞춰 떨어뜨릴 만큼 훌륭한 궁술로 초창기 벨로디나 왕국에게 있어 가장 큰 걱정거리가 되기도 했다.>
<광명력 901년 벨로디나 제15대 국왕 유리 1세가 군사적-외교적 방법을 총동원해 복속시킨 후 벨로디나 왕국의 일원으로서 특수한 지위를 부여받은 채 카판 대평원에서 평화롭게 거주 중이었다.>
<광명력 991년 하반기 벨로디나 내전 당시 1왕자군과 2왕자군 모두가 카판족이 상대방의 용병이 될 것을 우려한 나머지 양측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대규모 학살의 피해를 입어야 했다.>
<광명력 992년 11월 2일 현재 30,001명의 생존자가 살아남아 벨로디나 왕국 북부에서 생활 중이다.>
<목축과 농업이 불가능한 지대에서 사는 만큼 이들은 과거 자기 조상들이 그러했듯 약탈로 살아가고 있다.>
<노보로바야로 갈 광물을 중간에 탈취하여 그것을 싼 가격에 암시장에 되팔아 돈을 벌고 있다.>
노보로바야에 수많은 고아를 만들어낸 마적의 정체를 담담한 어조로 밝혀주는 두루마리.
그 위에 뜬 정보를 바라보며 아딘은 한동안 그 자리에서 망부석처럼 우두커니 서 있어야 했다.
‘카판족이었다고?’
아딘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눈을 감는 순간 그는 노보로바야 프런티어 호텔 특실에서 드넓은 카판 대평원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모두 죽여라.”
그곳에서 아딘 콘스탄틴은 자기 군사들에게 두려움에 떨고 있는 카판족을 학살할 것을 명했다.
“으아악-!”
“살려주…….”
“끄악-!”
“끼아아악-!”
중무장한 보병대가 카판족 마을을 습격했다.
곧 그들의 장막은 불타올랐다.
“남녀노소 막론하고 하나도 살려두지 마라. 하나라도 살아남았다간 내 나라를 위협하는 악성분자가 될 것이야.”
눈앞에서 자식과 함께 죽어가는 카판족 여인들의 비명을 들으면서도 아딘 콘스탄틴은 눈썹조차 움찔하지 않은 채 도리어 완전한 멸절을 주문했다.
병사들은 그의 명령에 충실하게 따랐고, 그렇게 카판족은 카판 대평원에서 보이는 즉시 이유불문 죽임을 당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그것은 내전 내내 이어졌다.
상대의 용병이 됐다간 굉장히 곤란해진다는 이유로 일어난 학살이었지만, 그 실상은 아딘 콘스탄틴의 잔혹함과 뿌리 깊은 카판족에 대한 벨로디나인의 편견이 낳은 참사였다.
‘아아…….’
아딘은 다시 눈을 떴다.
“오라버니?”
어느덧 목욕을 끝내고 가운을 걸친 채 곁에 다가온 로제가 아딘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우세요?”
로제의 물음에 아딘은 그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직 말리지 않아 물기로 촉촉해진 그녀의 검은 머릿결을 바라보며, 자신을 걱정하는 눈빛으로 올려다보는 그녀의 표정을 바라보며 아딘은 굉장한 슬픔과 죄책감을 느껴야만 했다.
‘결국 다 내가 한 거나 마찬가지야.’
아딘은 눈가에 맺힌 눈물을 손등으로 훔치고 두루마리를 도로 마법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리곤 한쪽 무릎을 살짝 꿇어 로제와 눈높이를 맞춘 후 가만히 그녀의 어깨에 양손을 올렸다.
‘로제가 학대당한 것도, 카판족이 학살당한 것도 결국엔 내가 한 거나 마찬가지야.’
아딘의 표정이 심상치 않자 로제의 표정도 덩달아 심각해졌다.
“오라버니. 무슨 일 있어요?”
로제의 물음에 아딘은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아니야.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것 같아요. 무슨 일이에요?”
“그냥 두루마리를 너무 오랫동안 보고 있어서 눈이 아파서 그랬던 거야. 걱정하지 마.”
아딘의 말에도 로제는 쉽사리 표정을 풀 수가 없었다.
그런 로제를 아딘은 가만히 안아 주었다.
그리곤 말없이 그녀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너도…… 그리고 카판족의 생존자들도…… 모두 내가 그렇게 만든 거야. 그러니 모두 내가 다시 행복하게 해 줘야 해.’
어딘지 모르게 이상한 아딘의 모습에 로제도 가만히 그를 껴안아 주었다.
“오라버니. 힘내세요. 제가 있잖아요.”
로제가 아딘의 귓가에다 대고 속삭였다.
아딘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눈을 감은 채 그녀를, 더 나아가 죽은 카판족의 원혼을 안아 주기만 했다.
* * *
“내가 특실은 비워두라 했을 텐데? 어?!”
[짜악-!]
올해 59세가 된 호텔 지배인의 뺨을 건장한 체격의 사내가 강하게 후려갈겼다.
호텔 지배인은 잠시 휘청거리다가도 다시 정자세로 꼿꼿하게 제자리에 섰다.
“오늘 분명히 말했지! 총수님이 오신다고! 특실은 이유 불문하고 다 비워 둬라고! 총수님의 사생활을 보호하려면 다 비워 둬야 한다고! 근데 내 말을 무시해!”
[짜악-! 짜악-! 짜악-!]
연거푸 호텔 지배인의 뺨을 때리는 사내, 프런티어 상단 총수 비서 랄프 넬슨의 얼굴은 곧 터지지나 않을까 싶을 정도로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 억센 손이 턱뼈를 부술 기세로 자신의 뺨을 때리고 있음에도 호텔 지배인은 아무런 저항을 하질 못했다.
“그만!”
호텔 지배인의 입가에서 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하고, 그의 입술이 터져버렸을 무렵.
랄프 넬슨의 뒤편에서 한 남성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그 목소리에 랄프 넬슨은 손찌검을 멈추곤 살짝 옆으로 빠졌다.
그러자 키가 크고 비쩍 마른 중년 남성, 프런티어 상단 총수 제이크 로버츠가 차가운 표정으로 호텔 지배인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왜 특실을 내줬지?”
“죄, 죄송합니다. 제, 제가 미처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당장 방을 비우도록 하겠습니다.”
“확인하지 못했다는 게 내가 온다는 것을 확인하지 못했다는 거야, 아니면 특실에 누군가가 투숙하는 걸 확인하질 못했다는 거야?”
“그, 그게…….”
“그리고 이왕 투숙하게 된 거 방을 또 비우게 하긴 왜 비우게 해? 쓸데없이 위약금을 물어줄 생각을 왜 해!”
손찌검 한번 하지 않았지만, 그 살벌한 목소리가 쩌렁쩌렁 방안에 울려 퍼지자 지배인은 조금 전 랄프 넬슨에게 맞을 때보다도 더 심장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정신 똑바로 차려라.”
그 말을 남기고 제이크 로버츠는 뒤로 돌아 지배인실을 나갔다.
“똑바로 해!”
랄프 넬슨이 그 뒤를 따르며 지배인에게 한 마디 더 쏘아붙였다.
“넬슨.”
“네, 총수님.”
지배인실 밖으로 나가서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마련된 이동식 소형 마법진으로 올라간 제이크 로버츠는 입을 열었다.
“저 인간 자르고 새로 지배인 하나 올려.”
[우우우웅-!]
그의 말에 대한 대답은 마법진이 발동돼 지배인실이 있는 3층에서 최상층 특실이 있는 8층으로 이동한 뒤에야 돌아왔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저녁에 밑에 층 손님하고 잠깐 얼굴 좀 봤으면 좋겠다.”
“네, 조치하겠습니다.”
할 말을 끝내고 랄프 넬슨을 뒤로한 채 제이크 로버츠는 천천히 특실로 향했다.
그런 그를 향해 랄프 넬슨은 마법진 위에서 허리를 90도로 숙이며 인사를 했다.
[우우우웅-!]
곧 마법진이 발동되었고, 랄프 넬슨은 순식간에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어떤 놈인지는 몰라도 특실을 1박 2일 동안 이용할 정도면 상당한 재력가겠지. 얼굴 정도는 봐 둬야지.’
분노는 분노고, 사업은 사업이다.
제이크 로버츠는 그렇게 생각하며 특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 * *
‘카판족이 마적이 된 것도, 그 마적이 노보로바야의 아이들을 고아로 만든 것도 다 큰 틀에선 내 책임이야.’
마적단의 정체가 카판족인 것을 알아차린 후로 아딘은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는 책임감을 느껴야 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 나라에 빨대를 꽂고 고혈을 빨아먹는 제니스 공화국을 몰아내는 것이 내가 책임을 다하는 것이지.’
그런 측면에서 자신과 로제가 머무는 8층 특실의 바로 윗층, 9층에 자리한 최상층 특실로 자신을 불러 이렇게 간단한 티타임을 갖는 남자, 제이크 로버츠는 아딘에게 타도의 대상 중 하나였다.
‘프런티어 상단. 드라기 상단의 자금을 세탁해주는 위성 상단이라 했지?’
아딘은 가만히 차를 한 모금 넘기며, 최대한 미소를 지으면서도 눈빛만큼은 날카롭고 차갑게 유지한 채 제이크 로버츠를 바라봤다.
‘이 사람이 자금 세탁의 핵심이고 말이야. 사업차 이곳에 방문했다 하지만, 이 사람의 사업이란 게 결국에는 돈세탁으로 연결되는 거고. 비열한 인간.’
그런 아딘을 향해 제이크 로버츠는 영업용 미소를 띠며 물었다.
“스미스 씨는 고향이 어디십니까?”
그 물음에 아딘도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태어나기로는 아라곤에서 태어났고, 자라기로는 라폴리움에서 자랐습니다.”
“아하.”
“그리고 지금은 여기저기 여행을 다니고요.”
“여행이라. 좋은 취미입니다. 저는 워낙에 상단 일이 바빠서 여행을 다닐 일이 시간이 없습니다.”
“하하. 뭐, 여기저기 사업차 다니시는 걸 여행이라 생각하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하하하. 글쎄요.”
제이크 로버츠는 차를 한 모금 넘겼다.
그런 그를 향해 아딘이 물었다.
“보자고 하신 이유가?”
“하하. 성격이 급하신 모양입니다.”
“뭐, 급하다기보단 궁금해서 말입니다. 프런티어 상단의 총수께서 보잘것없는 저를 찾으시는 이유가.”
“저는 사업가입니다. 사업가 입장에선 제 호텔의 특실에 묵으실 정도의 재력을 지니신 분들과 친해지는 건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하하. 안타깝지만 저는 총수님의 사업에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을 겁니다.”
“허허허. 뭐, 그래도 미리미리 알아 두는 것이 좋지요.”
제이크 로버츠는 미소를 지으며 차를 쭉 들이켰다.
‘일단 이름은 가명이겠고…… 정체가 뭘까?’
순간 제이크 로버츠의 눈이 반짝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네르갈의 목걸이도 불빛을 내며 파장을 뿜어대기 시작했다.
‘헉-!’
그 파장에 제이크 로버츠는 그만 압도당했다.
마치 야생 사자와 대면한 것과 같은 엄청난 압박감에 제이크 로버츠의 얼굴에선 미소가 사라졌고, 그의 마른 얼굴에선 핏기가 사라졌다.
‘뭐지?’
네르갈의 목걸이가 조용히 파장을 내뿜는 것을 아딘도 느꼈다.
그는 살짝 미간을 좁힌 채 제이크 로버츠를 바라봤다.
‘설마 나한테 무슨 마법이라도 쓰려고 한 건가? 두루마리에는 딱히 마법적 능력이 있다, 이런 내용은 없었는데…….’
아딘은 이내 표정을 풀고는 차를 쭉 들이켰다.
그리곤 자리에서 일어나 제이크 로버츠의 뒤편 벽면에 서 있던 랄프 넬슨에게 이야기했다.
“아무래도 먼저 일어나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총수님께서 안색이 좋지 않으셔서.”
그 말에 랄프 넬슨이 화들짝 놀라며 제이크 로버츠에게 다가갔다.
그 모습을 확인한 아딘은 제이크 로버츠를 향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인사했다.
“안타깝지만 이만 내려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총수님.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이야기를 깊게 나누고 싶습니다.”
아딘의 말에 제이크 로버츠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하십시오.”
랄프 넬슨에게도 마저 인사를 끝마친 다음에야 아딘은 제이크 로버츠의 특실에서 빠져나갔다.
“총수님, 괜찮으십니까?”
랄프 넬슨이 제이크 로버츠를 바라보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제이크 로버츠는 고개를 끄덕이며 차를 쭉 들이켰다.
그리곤 한동안 심호흡을 몇 차례 지속한 후 랄프 넬슨을 향해 이야기했다.
“넬슨. 저 인간…… 오늘 이 시간부터 쭉 감시하고 있어. 너무 가까이 다가가진 말고, 그냥 저 인간의 이동 동선에 관해서만 좀 알아봐 줘.”
“네?”
“저 인간…… 내 최면술에 걸려들지 않았어.”
“네?!”
“최면을 걸려는 순간 저 인간한테서 알 수 없는 힘이 뿜어져 나와 그걸 막아버렸어. 그뿐 아니라 나를 압박하기까지 했지.”
“아, 아니 어떻게?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제이크 로버츠가 인상을 팍 쓰며 랄프 넬슨을 바라봤다.
“그걸 모르니까 너보고 저 인간 감시하라는 거 아니야.”
“아…… 네. 알겠습니다. 확실하게 감시하겠습니다.”
“너무 가까이 다가가진 말고. 자칫 들켰다간 곤란해질 수도 있을 것 같아.”
“알겠습니다.”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