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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79화 (79/175)

079 제니스 강점기 벨로디나 (3)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노보로바야 성 니콜라이 수도원 원장 아론 사제라고 합니다. 천계의 신들께서 그대들에게 축복을 내리시기를.”

아까보단 확실히 좋아진 안색으로, 동방광명교의 사제복을 입은 채 자신들을 맞이하는 사제 아론.

그를 향해 아딘과 로제는 미소를 지으며 화답해주었다.

“사제 아론께 축복이 있기를.”

“축복이 있기를.”

두 사람의 화답을 받고 아론은 아딘과 로제를 의자로 안내했다.

다소 불편하지만 둘이서 함께 앉기에 부족함이 없는 기다란 나무 의자에 두 사람이 앉자 아론은 그들의 맞은편에 착석했다.

“우선, 두분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올리겠습니다. 올가에게 들었습니다. 감자와 순무를 훔치려다 들킨 아이를 구해주시고 식량을 사주셨다고.”

아론의 말에 아딘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고, 로제는 뿌듯한 표정으로 아딘을 바라보았다.

“요즘같이 각박한 시대에 두 분 같이 선의를 베푸시는 분은 보기 힘듭니다. 덕분에 아이들이 겪던 굶주림의 연쇄가 끊기게 됐습니다.”

그렇게 이야기하며 아론은 다시 한 번 아딘과 로제를 향해 성호를 그으며 축복 기도를 해 주었다.

‘신성력이 없는 걸 보면 고위 사제는 아니겠어. 하기야 고위 사제였다면 이런 곳에서 혼자 앓고 있었을 리도 없지.’

궁정에서 보아왔던, 신성력과 탐욕을 동시에 보유하고 있던 모순덩어리 동방광명교 사제들에 대한 아딘 콘스탄틴의 기억을 떠올리며 아딘은 쓴웃음을 지었다.

“원래 이곳이 고아원이었습니까? 아이들이 상당히 많던데.”

아딘의 물음에 아론은 씁쓸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원래 고아를 돌보는 일은 주교 성전에서 맡고 있었습니다.”

“그 일을 수도원으로 넘긴 겁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아론은 잠시 입을 다문 채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도움을 줬다고는 하지만 생판 처음 보는 사람이었던 만큼, 내밀한 이야기를 냉큼 입 밖으로 꺼내기가 힘들었다.

‘조합의 첩보원이라면 자칫…….’

그런 우려가 섞인 눈빛으로 아론은 슬쩍 아딘을 바라봤다.

그러다 이내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무슨 생각을…… 선뜻 큰돈을 써서 선의를 베푸신 은인에게…… 신들이시여 저를 용서하소서.’

그는 눈을 감은 채 가볍게 성호를 그으며 속죄의 기도를 올린 후 천천히 눈을 떠 아딘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깊은 한숨과 함께 이야기를 시작했다.

“올해 초까지만 하더라도 주교 성전에서 보호하던 고아의 숫자는 스물 내외였습니다. 그러던 것이 올여름부터 갑자기 그 수가 늘어나더니 9월부터는 주교 성전에서 도저히 감당 불가능할 정도로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고아 중 일부를 우리에게 맡긴 겁니다.”

아딘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여름부터 늘기 시작했다고?’

차라리 올해 초부터 늘기 시작했다고 한다면 내전의 여파 때문이라 생각할 수도 있었다.

실제 아딘 콘스탄틴의 1왕자군에 속해 있던 징집병 중 노보로바야 출신들이 꽤 되기도 했던 만큼, 전쟁 고아의 가능성은 충분했다.

하지만 여름부터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벨로디나가 큰 땅이라곤 하지만 그렇다고 봄에 객지에서 죽은 사람이 여름에서야 그 소식이 고향에 알려질 만큼 거대하진 않았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겁니까?”

“아시겠지만, 노보로바야에서 북동쪽으로 일주일 정도 걸어가면 쿠발 광산이 나옵니다.”

“네, 알고 있습니다. 철광과 금광의 생산지죠.”

“맞습니다. 그런데…… 이 여름부터 노보로바야와 쿠발 광산 사이의 길을 노리는 마적단이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습니다.”

“마적단?”

아딘은 의아한 표정으로 아론을 바라봤다.

“모르셨습니까?”

아론의 물음에 아딘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몇 년 동안 외국에 나가 있었습니다.”

아딘의 말에 아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그렇게 놀라실 만도 하다 생각합니다. 북부에 마적이라니…… 우스운 일 아니겠습니까?”

벨로디나 북부와 동부는 농업과 목축이 모두 불가능한 영구동토다.

동부 쿠만 지역이야 곰이나 여우, 담비같은 짐승이라도 있어 사냥으로 연명할 수나 있다지만 북부는 아예 생활이 불가능한 지역이었다.

그런 곳에서 마적단이 나타난다는 것은 분명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그것 때문에 조합 측에서는 계속해서 중앙에다가 병사 증원을 요청하고 있습니다만…… 자세한 건 저도 모르겠지만 아직은 별다른 증원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론의 말에 아딘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턱을 쓰다듬었다.

그 모습을 보며 아론이 말을 마무리했다.

“그 마적단의 습격으로 부모가 돌아오지 못한 아이들이 늘어나면서 일이 이렇게 된 겁니다. 거기다 제가 최근 몸살까지 앓아버리는 바람에……”

아론의 말에 아딘은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그 마적단에 관해 아시는 것은 없으십니까?”

아딘의 물음에 아론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죄송합니다. 저도 원래라면 예비 사제로 사역해야 하는데 급하게 원장이 된 거라……”

아직까지 중요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 윗선과 접촉할 방법이 없다는 말을 돌려서 하는 아론.

그 모습에 아딘은 더 이상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많이 힘드시겠습니다.”

그저 위로의 말을 건네기만 할 뿐이었다.

“그래도 천계의 신들께서 이렇게 좋은 분의 선의를 통해 일하시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아론의 말에 아딘과 로제는 살며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기 이거.”

아딘은 마법 주머니에서 100골드짜리 금괴 2개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둔 후 살며시 아론에게 밀어주었다.

“이, 이건?”

번쩍이는 금괴에 아론은 눈을 휘둥그레 뜨며 아딘을 바라보았다.

“헌금입니다. 아이들 밥도 잘 먹여 주시고.”

“하, 하지만 아이들 밥 먹이는 데 이 정도 돈은 필요가 없습니다.”

“올해 초까지라면 몰라도 요즘 물가로는 이 정도 돈도 식비로 금방 사라질 텐데 말입니다?”

“하, 하지만…….”

“받아 두십시오. 아이들을 위해서입니다.”

그러면서 아딘은 금괴를 아예 아론 앞에 싹 밀어 놓고는 로제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버, 벌써 가시려는 겁니까? 뭐, 뭐라도 저희가 대접을 해야……”

아딘이 200골드를 선뜻 내놓고 자리에서 일어서자 아론이 따라서 벌떡 일어섰다.

“할 일이 있어서 말입니다.”

“그, 그래도……”

“다음에…… 세상이 좀 조용해지면…… 그때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아딘은 그렇게 이야기하며 아론에게 성호를 그어 보인 후 밖으로 나갔다.

아론은 황급히 그 뒤를 따라나가 수도원 입구까지 아딘과 로제를 배웅해주었다.

“두 분께 천계의 축복이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아론의 기도에 아딘과 로제는 미소로 화답한 후 그렇게 수도원에서 멀어졌다.

그리고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아론은 씁쓸한 표정으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런 세상이…… 오겠습니까?”

* * *

아주 오랜만에 아딘과 로제는 규모가 있는 여관 특실에 방을 잡았다.

유리 2세의 등극 이후 북방개발조합이 지역을 통치하면서 노보로바야의 서민 경제는 그야말로 박살이 났다.

하지만 반대로 그간 중소규모의 상인들이 알음알음 해오던 광산 개발을 거대한 자본을 자랑하는 북방개발조합이 총괄하면서 노보로바야를 비즈니스를 목적으로 방문하는 제니스 공화국의 상인들이 많아졌고, 덕분에 그들을 수용하기 위한 시설도 여기저기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덕분에 아딘과 로제가 특실에 투숙하게 된 이곳 프런티어 호텔이 있는 노보로바야 중부 일대는 굉장히 쾌적한 환경을 자랑하고 있었다.

‘실용마법 욕조에 자동 발화 촛불 그리고 이건…… 전등?’

로제가 방으로 들어간 사이 욕실을 살피던 아딘은 벽에 붙어 있는, 익숙하지만 이 세계에선 절대 볼 수 없었던 모양을 한 물건을 보곤 흠칫 놀랐다.

아딘은 조심스럽게 벽에 걸린 물건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그 순간, 미약한 마력의 흐름이 발생하며 스파크를 일으켰고 곧 물건을 중심으로 환한 빛이 뿜어져 나와 욕실을 밝혔다.

‘제니스 공화국의 실용마법기술이 이 정도로 발달했었나?’

김현수의 소설 영웅일대기는 존 크리스토퍼 하이로드가 세계의 지배자로 우뚝 서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굉장히 오랫동안 쓴 소설인 만큼, 중요한 설정들은 매우 세부적으로 만들어 놓았다.

하지만 몇몇 설정들은 약간 듬성듬성 얼렁뚱땅 만들어지긴 했다.

실용마법이 대표적으로 얼렁뚱땅 만들어진 설정이었다.

갑갑한 전근대의 삶을 소설에서 구현하기가 싫다는 이유로 삽입한 실용마법은 자동으로 물의 온도가 조절되는 욕조부터 무한발화 성냥까지 다양한 형태로 소설에서 나타나곤 했다.

하지만 실용 마법이 어느 수준으로까지 발달했는가에 대해서까진 제대로 설정을 해두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하나는 소설 속에서 실용마법이 그렇게 부각될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영웅일대기는 일종에 대하 판타지 정치극이었기에 기술 분야에 대한 자잘한 이야기가 나올 일이 없었고 그 때문에 김현수는 실용마법에 대해 구태여 디테일한 설정까진 짜두지 않았던 것이었다.

‘아무리 내가 설정을 디테일하게 안 했다 해도 전등까지…….’

아딘은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마법 주머니에서 두루마리를 꺼내 펼쳤다.

<프런티어 호텔>

<광명력 992년 7월 6일 영업 시작>

<제니스 공화국 드라기 상단의 위성 상단인 프런티어 상단이 건설하고 운영 중인 노보로바야 최고의 호텔이다.>

<광명력 992년 11월 2일 현재, 프런티어 상단의 총수 제이크 로버츠가 사업차 방문했다.>

‘흠…….’

아딘의 시선이 이번에는 전등으로 향했다.

하지만 전등에 관한 별다른 부연 설명은 나오지 않았다.

‘뭐지?’

아딘은 다시 인상을 찌푸리며 전등을 바라보았다.

마찬가지로 두루마리에는 전등에 관한 정보가 떠오르지 않았다.

‘뭐야? 그럼 이것도?’

아딘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전등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전등에서 살짝 스파크가 일더니 이내 불이 꺼졌다.

“뭐 하세요?”

로제의 부름에 아딘은 시선을 문쪽으로 돌렸다.

수건과 갈아입을 옷을 챙겨 들고서 로제가 욕실 앞에 서 있었다.

“아…… 아니야. 뭐 좀 확인할 게 있어서. 들어와 씻어.”

아딘은 애써 로제에게 웃어 보이며 욕실을 나갔다.

“금방 씻을 게요. 오라버니도 준비 하고 계세요.”

“그래.”

로제가 문을 닫자 아딘은 다시 심각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창가로 향했다.

그리곤 다시 두루마리를 펼쳐보았다.

<제이크 로버츠>

<광명력 950년 12월 31일생, 광명력 992년 11월 2일 현재 41세.>

<프런티어 상단 총수>

<드라기 상단 총수 마리오 드라기의 최측근 인사로 주로 자금 세탁을 도맡고 있다.>

<본래 슈드 자치령과 게마인샤프트 서부를 오가며 자금 세탁을 했으나 프런티어 상단 출범 이후에는 자금 세탁 이외에 사업도 하게 되면서 활동 범위가 대륙 전체로 확대됐다.>

<가족 없이 혼자 생활하고 있으며 돈과 일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워커 홀릭이다.>

두루마리에 나온, 이 호텔의 주인인 제이크 로버츠의 초상화와 그에 대한 인적사항은 아딘의 의문을 해결해주지 못했다.

‘내가 구체적으로 설정하지 않은 것이라 하더라도 대개는 다 두루마리가 설명을 해 주었어. 근데 저 전등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건……’

아딘의 시선이 거실 벽에 붙은 전등으로 향했다.

아딘은 그것에게로 다가가 살며시 쓰다듬어 주었다.

곧 전등은 아까 욕실에서 그랬듯 스파크와 함께 빛을 뿜어댔다.

‘뭐지?’

아딘은 인상을 찌푸린 채 침음성을 내며 전등을 바라보았다.

‘그래…… 일단 지금은 이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그러다 이내 아딘은 전등에 대한 생각은 그만두기로 했다.

어차피 두루마리가 알려주지 않는 이상, 시대를 한참 앞서가고 있는 이 신문물에 대해 고민한다고 해서 건설적인 결과물이 나오진 않기 때문이었다.

대신 아딘은 본래 알아봐야 할 정보를 얻고자 다시 두루마리를 펼쳤다.

곧 두루마리 위로 최근 노보로바야와 쿠발 광산 사이에 출몰한다는 마적단에 관한 정보가 그들의 그림과 함께 자세하게 떠올랐다.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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