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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78화 (78/175)

078 제니스 강점기 벨로디나 (2)

용이 지닌 특권 중 하나인 환상 마법.

그것에 걸린 생명체는 실제 시간대와 철저히 단절된 채로 용이 설정한 시간대에 따라 살게 된다.

물론 용이 신이 아닌 만큼 어느 정도 제한은 있지만, 적어도 실제 시간 일주일을 체감 시간 1년 정도로까지는 넉넉하게 용이 늘릴 수가 있다.

불멸의 신전에서 아딘과 로제는 루이 알랭의 환상 마법을 통해 체감상 대략 1년 하고도 6개월에 가까운 시간을 보내며 심신을 단련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지금, 광명력 992년 11월 2일 아침, 벨로디나 왕국 북부 최대 도시 노보로바야 거리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괜찮니?”

이미 통역 마법을 펼친 상태였기에 로제가 내뱉는 아퐁어는 소녀에게 벨로디나어로 정확하게 전달됐다.

아딘과 루이 알랭이 모두 신경을 썼던 만큼 로제는 옷차림부터 외양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귀티가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귀티는 소녀를 더욱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웃차.”

로제가 소녀에게 손을 내민 사이, 아딘은 사내를 들어 사내의 수레 곁으로 옮겨주었다.

‘노점상이네.’

사내의 수레에 가득한 감자와 순무, 옥수수를 바라보며 아딘은 대충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로제.”

아딘의 부름에 로제는 그를 바라봤다.

아딘은 가볍게 고갯짓으로 사내에게 건 마법을 풀라고 로제에게 이야기했다.

로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볍게 검지를 살짝 휘둘렀다.

“으으으……”

마비 마법이 풀리자 사내는 그대로 중심을 잃고 넘어지려 했다.

그런 사내를 아딘이 부축해주었고, 사내는 아딘과 로제를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사내는 두 사람을 피해 도망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 귀, 귀하신 분인 것 같은데 나, 나도 다 사정이 있습니다.”

사내의 말에 아딘과 로제의 시선이 동시에 그에게로 향했다.

대강의 사정을 아는 아딘의 시선에는 이러한 상황 자체에 대한 안타까움이 묻어나 있었다.

하지만 로제의 눈에는 사내에 대한 분노와 짜증이 강하게 서려 있었다.

“히익-!”

그 서늘한 시선에 사내는 화들짝 놀라며 몸을 한 차례 부르르 떨었다.

그러더니 그나마 시선이 좀 따듯한 아딘을 바라보며 자기 사정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며칠 전부터 감자하고 순무가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는데 오늘 보니까 저 망할 계집애가 훔쳐가지 뭡니까.”

그러면서 사내는 감자와 순무를 각각 한 덩이씩 양손에 들고서 아딘에게 이야기했다.

“작년 이맘때까지만 해도 이거 한두 개 사라졌다고 제가 이렇게까지는 안 했을 겁니다. 그때는 1골드를 들고 가면 감자나 순무나 여기 수레 하나 꽉 채울 만큼 구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는 순무와 감자를 내려놓은 후 이번엔 옥수수를 들며 이야기했다.

“이 옥수수. 작년에 1실버만 내면 10개를 살 수 있었습니다. 근데 지금은 1실버로는 이거 1개도 살 수가 없습니다.”

그는 옥수수를 든 채 로제의 곁에서 쭈뼛쭈뼛 감자 세 개를 들고서 서 있는 소녀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제가 저 감자 구하려고 목숨 걸고 게마인샤프트까지 갔다 왔습니다. 그런 피 같은 감자를 마구잡이로 훔쳐 가는데 제가 참고 있어야 합니까?”

사내의 말을 곰곰이 듣던 아딘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면서 안타까운 표정으로 사내와 소녀를 번갈아가며 바라봤다.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콘스탄티노바 암시장에서 밀가루 한 포대가 2골드 67실버에 거래되는 것이 현 벨로디나의 실상이었다.

수도보다도 물자가 부족할 수밖에 없는 지방 도시에서는 그러한 인플레이션이 더 심했으면 심했지, 덜하진 않을 터였다.

아딘은 천천히 소녀에게 다가갔다.

가까이서 본 소녀의 몰골은 처참했다.

‘빈민인가?’

아딘은 가만히 소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감자. 이리 주지 않겠니?”

아딘의 말에 소녀는 황급히 감자를 쥔 손을 뒤로 감추며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저, 저, 저, 저! 저 파렴치한 계집애가!”

그 모습에 사내가 눈을 부릅뜨며 소녀를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

그러자 로제가 사나운 눈빛으로 사내를 쏘아보며 손가락을 가볍게 휘저었고, 사내는 그 자세 그대로 마비가 돼 말조차 할 수 없는 처지로 전락했다.

“네 사정은 대강 알겠어. 하지만 그래도 도둑질이 옳은 건 아니잖니. 저 아저씨도 힘들게 구한 물건이야.”

“…….”

“주지 않겠니?”

아딘의 말에 소녀는 눈을 내리깐 채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뭐래? 뭔 일이래?”

“뭐야?”

“저거 보리스 아니야? 왜 저러고 자빠졌데?”

“얼어 뒤진 거 아니야?”

지나가던 노동자들이 아침부터 거리 한복판에서 발생한 사건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인파가 몰리며 길이 정체되기 시작했다.

“이대로 가면 군인들도 주목하게 돼. 그러면 넌 감자 몇 개 훔친 죄로 감옥에 가게 될 거야.”

“……”

“집에 동생들이 네가 감옥에 가면 얼마나 슬퍼할지 생각해 봤니?”

그 말에 소녀는 화들짝 놀라며 아딘을 바라봤다.

아딘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소녀에게 이야기했다.

“감자. 주지 않겠니?”

잠시 망설이던 소녀는 이내 눈물을 흘리며 아딘에게 감자 3개를 건네주었다.

아딘은 가만히 소녀의 어깨를 토닥여 준 후 사내에게 다가갔다.

아딘이 사내에게 다가가자 로제는 바로 마법을 풀어주었다.

“이거 3개 포함해서 수레에 있는 거 다 합치면 얼마입니까?”

“……7골드 정도입니다.”

아딘은 마법 주머니에서 10골드를 꺼내 사내에게 건네주었다.

“3골드는 저 아이 용서해주는 대가에 수레값까지 포함된 겁니다.”

“아이구. 당연합죠.”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며 열불을 내던 사내는 자기 손에 떨어진, 슈드 자치령 재무국 문장이 선명하게 양각된 금화 10개를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

아딘은 그대로 수레 손잡이를 잡은 채 영문을 모르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소녀에게 이야기했다.

“앞장서. 너네 집으로.”

* * *

노보로바야 서부 외곽에 자리한 허름한 수도원.

사실상 대문의 기능을 하지 못하는, 뻥 뚫린 곳을 통과해 아딘이 수레와 함께 마당으로 들어서자 수레 뒤편에서 로제와 함께 걷던 소녀는 그대로 수도원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소녀를 포함 서른 명에 이르는 초라한 행색의 어린아이들이 우르르 뛰쳐나와 수레로 향했다.

“천천히 자기 먹을 것만 집어. 나머지는 보관해둬야 해.”

소녀의 말에 아이들은 각각 감자와 순무 하나씩을 챙겨 들고 쪼르르 주방으로 달려갔다.

‘고아원 역할을 하던 수도원인가?’

뜻밖의 수도원 방문이었기에 아딘은 한동안 아무런 말 없이 주변을 둘러보기만 했다.

“오라버니.”

그런 아딘의 곁으로 로제가 다가와 말했다.

“잘 하셨어요.”

그렇게 이야기하며 로제는 아딘을 향해 엄지를 치켜 세워 주었다.

아딘은 씩 웃으며 로제의 머리를 한 차례 쓰다듬어 주고는 천천히 마당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흥!”

마당을 둘러보던 아딘의 눈에 수도원 입구 벽면에 부착된 커다란 포스터가 눈에 들어왔다.

전형적인 제니스 공화국 시민의 옷차림을 한 남자와 벨로디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농민의 모습을 한 남자가 어깨동무를 한 채 미소를 짓고 있는 그림.

그 아래에 벨로디나어로 큼지막하게 쓰여진 글자.

<공화국의 선진 기술과 왕국의 근면함이 만나 모두가 행복해질 것이다!>

그리고 포스터 우측 하단에 찍힌 북방개발조합의 직인.

‘조잡한 선전물이구나.’

아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뜯어서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었지만, 그런 괜한 행동이 이곳에 자리한 아이들에게 악영향을 줄 것인 만큼 그는 포스터를 향해 콧방귀를 뀌는 것 이상의 행동을 하지는 않았다.

‘모두가 행복해져서 밀 한 포대가 2골드 넘는 가격에 암시장에서 거래가 되나?’

아딘은 주먹을 쥐며 이를 갈았다.

그의 뇌리로 순간 1년 전의 상황이 똑똑히 스쳐 지나갔다.

드넓은 카판 대평원 한가운데.

모두가 체력을 소진할 대로 소진한 1왕자군과 2왕자군.

그런 둘을 공격하며 나타난 제니스 공화국의 용병 군단과 사로잡힌 자신과 2왕자 드미트리를 무릎 꿇린 채 말 위에서 내려다보던 유리 콘스탄틴.

‘이딴 식으로 나라를 절단내려고 외국 군대를 불러들이셨나?’

끓기 시작한 분노에 뇌가 타들어가는 느낌마저 들 무렵, 아딘은 크게 심호흡하며 마음을 가라앉히고자 노력했다.

‘결국 내가 설정한 거야. 결국 내 책임이란 거지.’

벨로디나 왕국 땅을 밟은 뒤부터 불쑥불쑥 솟아오르는 아딘 콘스탄틴의 자아.

그것을 통제하고자 최대한 자기 객관화에 힘을 쓰는 아딘의 모습을 로제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며 가만히 그의 손을 잡아 주었다.

‘유리 콘스탄틴이 나를 고문한 순간, 나와 그 인간 사이에 은원관계가 생긴 건 맞아. 하지만 결국 그 인간이 제니스 공화국을 끌어들여 왕국을 집어삼킨 건 또한 내가 설정한 내용이기도 해. 지금은 분노하기보다는 최대한 이 상황을 극복하려는 지혜를 모아야 해.’

그렇게 아딘이 마인드 컨트롤을 하고 있을 때, 한참을 부엌에서 소란을 떨다가 쟁반에 수프가 든 그릇을 올린 채 수도원 안으로 들어갔던 소녀가 쭈뼛거리며 아딘에게 다가왔다.

“사, 사제님이 뵈, 뵙자고…….”

그 목소리에 아딘은 천천히 눈을 떴다.

“사제님?”

“네…… 저, 저기 가시면 맨 안쪽 방 안에…….”

“흐음…… 그래.”

아딘은 그대로 로제와 함께 수도원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저, 저기…….”

그런 그를 향해 소녀가 입을 열었다.

“아까는…… 감사했습니다…….”

그러면서 소녀는 아딘을 향해 꾸벅 허리를 숙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아딘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소녀에게 물었다.

“너 이름이 뭐니?”

“올가……”

“올가. 좋은 이름이네.”

그렇게 아딘은 로제와 함께 수도원 안쪽으로 들어갔고, 올가의 말대로 맨 안쪽에 자리한 방으로 향했다.

“계십니까?”

열린 문 너머로 아딘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들어오십시오.”

문 너머에서 힘없는 남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실례하겠습니다.”

아딘은 그대로 문지방을 넘어 방 안으로 들어갔다.

“천계의 신들께서 나그네에게 축복을 내려주시길.”

방 안에 들어서자 침대에 앉아 수프를 힘겹게 떠먹고 있던, 수척하지만 상당히 젊은 사내가 힘겹게 아딘을 향해 성호를 그으며 축복의 말을 건넸다.

“사제께도 천계의 신들께서 은총을 베푸시길.”

아딘의 화답에 사제는 힘겹게 웃으며 천천히 수프 그릇을 침대 옆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저희가 식사에 방해가 됐다면…….”

아딘의 말에 사제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닙니다. 몸이 좋지 않아 많이 먹지도 못…… 쿨럭! 쿨럭! 쿨럭!”

말을 하다 말고 사제는 급하게 기침을 해대기 시작했다.

기침이 쉽게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자 아딘과 로제는 동시에 사내에게로 향했다.

로제는 곧장 사내의 손을 잡으며 힘을 끌어 올렸다.

강력한 용의 힘이 부드럽게 사제의 전신으로 파고들었다.

“음……”

사제의 기침은 즉시 멈췄다.

거기서 끝나지 않고 용의 힘은 사제의 기력까지도 회복시켜주었다.

사제는 살짝 놀란 표정으로 로제를 바라보았다.

“혹시…… 주교님께서 보내신 분이십니까? 치유 능력이 있는……”

그 말에 로제는 아딘을 바라봤다.

아딘은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냥…… 좀 특별한 힘입니다. 위험하거나 사악한 능력은 아니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러면서 아딘은 로제를 바라봤다.

“그냥 몸살기가 좀 심하셨던 것 같아요.”

아딘은 다행이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며 한동안 침묵하던 사제는 이내 강한 허기를 느끼곤 얼굴을 붉히며 아딘에게 이야기했다.

“죄송하지만…… 식사를 마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완연히 혈색이 좋아진 사제의 모습에 아딘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잠시 나갔다 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아딘은 로제와 함께 다시 밖으로 나갔고, 10분 후 사제가 둘을 부르자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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