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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77화 (77/175)

077 제니스 강점기 벨로디나 (1)

광명력 992년 11월 1일 이른 아침.

벨로디나 왕국 수도 콘스탄티노바.

그 중심부에 자리한 왕궁.

그 가운데서도 국왕이 거하는 여름 궁전.

“숙면하셨습니까, 국왕 폐하.”

드넓은 국왕 침소에서, 쓸데없이 거대한 침대 위에서 몸을 반쯤 일으킨 유리 2세는 자신을 향해 인사하는 나타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거머리 같은 계집.’

아침 기상부터 밤 취침까지, 씻는 시간과 볼일 보는 시간을 빼면 항상 그의 곁에 붙어있는 이 젊은 여자에 대한 그의 감정은 불쾌함과 분노, 질색으로 요약이 가능할 터였다.

“덕분에 편히 잘 수 있었네.”

하루의 시작과 끝을 함께하는, 올해 31세가 된 이 여자에 대한 솔직한 감정과는 무관하게 유리 2세는 미소와 함께 그녀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씻을 물과 조식이 준비됐습니다.”

나타샤의 말에 유리 2세는 고개를 끄덕이며 의례적으로 기지개를 켠 후 침대에서 내려왔다.

침대에서 내려온 그의 발은 곧 푹신푹신한, 담비 가죽으로 만든 신발 속으로 쏙 들어갔다.

유리 2세는 근엄한 걸음걸이로 느긋하게 움직였다.

나타샤는 그런 유리 2세와 보조를 맞추며 끊임없이 종이에다 깃펜으로 보이지 않는 글자를 써내려갔다.

곧 유리 2세와 나타샤는 시종들로 가득한 욕실에 들어섰다.

나타샤의 동행은 문 앞에서 멈췄다.

그녀는 닫히는 문틈으로 보이는 유리 2세의 등판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하루 중 몇 안 되는 나타샤와의 분리였지만, 그렇다고 유리 2세가 자유로워진 것은 아니었다.

“팔을 들어 주소서, 폐하.”

한껏 예의와 군기가 든 채 자신의 옷을 벗기고 뜨거운 물로 가득한 욕조로 안내하는, 이 수염조차 나지 않은 어린 시종들.

그들도 나타샤와 마찬가지로 모두 귀족들이 보낸, 그들 집안의 방계 혈족들이었다.

즉, 모두가 나타샤와 같은 감시자라는 뜻이었다.

“어흠-!”

자신의 나이와 건강 상태에 딱 적당한 온도의 온수에 몸을 담근 채 머리만 내밀고서 유리 2세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버러지 같은 사생아들.’

그의 표정은 온수에 뭉친 근육을 푸는 노인의 평온함을 그대로 담고 있었지만, 속마음은 온갖 욕설과 저주로 가득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여러 감시자들의 밀착 감시 속에서, 물질적으로 호화롭기 그지없는 삶을 사는 인형.

그것이 제니스 공화국의 힘으로 왕좌를 차지한 유리 2세의 삶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삶에 염증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이러한 삶을 잃고 싶지는 않았다.

‘어떻게 생각하면 편한 거지.’

왕으로서 누릴 호사는 다 누리면서도 머리 아픈 국정에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자신이 형님인 블라디미르 2세나 아버지인 일리야 3세보단 낫다고 유리 2세는 정신승리를 하고자 했다.

그러나 막상 형님과 아버지를 떠올리자 그는 마음 깊은 곳에서 무언가 울컥하는 것을 느꼈다.

‘참아. 도대체 왜?’

그는 애써 눈물을 참으려 했지만, 눈물샘은 그의 통제를 따르지 않았다.

결국 유리 2세는 그대로 잠수를 하고 말았다.

그가 머리까지 물속에 담그자 시종들은 물끄러미 욕조를 바라봤다.

물속에서, 시종들이 바라보는 가운데, 유리 2세는 눈물을 펑펑 쏟아냈다.

무엇이 자신을 이렇게 아침부터 울게 하는 가는 알지 못했지만, 그 알 수 없는 감정으로 말미암아 유리 2세는 1분 동안 숨을 참은 채 눈물을 흘리고 또 흘려야만 했다.

* * *

11월 2일 아침.

벨로디나 왕국 북부의 중심지 노보로바야.

그곳 중심부에 자리한 커다란 식당에서 아딘과 로제는 아침 식사를 들고 있었다.

“맛있니, 로제?”

아딘의 물음에 숟가락으로 돼지고기가 든 붉은 수프를 마시던 로제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속이 시원해진다고 해야 할까요?”

“그래. 입맛에 맞다니 다행이다.”

“이거 이름이 뭐라 했죠?”

“보르쉬. 벨로디나식 수프야.”

“보르쉬? 보르쉬. 보르쉬.”

연달아 벨로디나식 수프의 이름을 되뇌던 로제는 이내 웃으며 마저 숟가락을 들었다.

그 모습을 보며 푸근한 미소를 지은 아딘은 이내 팔짱을 낀 채 주위를 쓱 둘러봤다.

‘저 사람은 보아하니 교대 끝내고 퇴근하는 군인 같고.’

가슴팍에 노보로바야를 상징하는 곡괭이 문양과 콘테 상단을 상징하는 파도를 가르는 갤리선 문양이 동시에 양각된 흉갑을 입은 군인들.

그들이 피곤한 안색으로 허겁지겁 보르쉬를 마시듯 먹는 것을 보며 아딘은 가만히 인상을 찌푸렸다.

‘벨로디나 왕국의 모든 군권은 제니스 공화국에, 정확히 말하자면 3대 상단에게로 넘어갔어.’

유리 콘스탄틴이 공식적으로 제19대 벨로디나 왕국의 국왕에 등극하면서부터 벨로디나 왕국은 급속히 제니스 공화국의 괴뢰국이 돼 갔다.

군대는 해산됐고, 기존에 군대가 하던 국방 업무는 물론 군대와는 별개의 조직이었던 치안대가 하던 일까지도 제니스 공화국이 보낸 용병이 도맡았다.

‘원래 설정대로 북방개발조합이 식민 통치를 담당하고 있기는 한데…….’

영웅일대기 1부에서 벨로디나 왕국 식민 통치는 북방개발조합이라는 사기업에서 담당했다.

그리고 지금, 소설 설정대로 벨로디나 왕국은 북방개발조합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있었다.

물론 소설과 달라진 것도 있었다.

‘원래라면 하이로드 가문이 주도하고 콘테 가문과 드라기 가문이 따라오는 수준에서 머물렀는데…….’

소설에서는 하이로드 가문이 대주주로 있고, 나머지 두 가문이 2, 3대 주주 그리고 다른 여러 중소 가문들이 소액 주주로 존재하던 북방개발조합이 현실에서는 3대 상단이 균등하게 33%씩 지분을 지녔다는 것이었다.

‘그 정도를 제외하면 내가 원래 썼던 내용과 일치해. 젠장…….’

소설을 쓸 때는 진주인공인 존 크리스토퍼 하이로드에게 힘이 되게 하고자 만든 설정이었다.

하지만 지금, 소설 속에서, 본래 1부에서 죽었어야 할 망나니 왕자 아딘 콘스탄틴으로 빙의한 현재, 북방개발조합은 아딘이 부숴야 할 존재일 뿐이었다.

‘다 업보가 돼 돌아오는구나.’

군인들을 바라보던 아딘의 시선이 이내 보르쉬를 먹는 로제에게로 향했다.

‘로제를 구했듯, 벨로디나 왕국 사람들도 구할 수 있을까?’

이틀 동안, 아딘은 말을 타고 전속력으로 달려도 2주일은 걸릴 거리를 로제와 함께 비행으로 주파했다.

‘나나 로제나 힘 자체는 정말 강해졌어. 그 거리를 그 속도로 주파해놓고도 별로 힘들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힘은 충분했다.

문제는 두 사람의 힘만으로는 북방개발조합을 무너뜨리고, 콘스탄티노바로 쳐들어가 유리 콘스탄틴을 끌어 내리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왕궁을 지키는 용병은 5천. 모두가 정규 용병이야. 거기다 소드 마스터가 셋에 수준 높은 강력한 마법사도 둘이나 있어. 이 정도 전력이면 황제 지네도 가뿐하게 사냥할 수 있겠지.’

아딘은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침이라 그런지 퇴근하는 군인들 외에는 딱히 손님은 보이지 않았다.

그랬기에 그는 슬그머니 마법 주머니에서 두루마리를 꺼내 펼쳐보았다.

<광명력 992년 11월 2일 아침 벨로디나 왕국 정세 요약 보고서>

<닷새 전 벨로디나 왕국을 방문했던 드라기 상단 총수 마리오 드라기의 요구 사항의 이행 방안으로 왕실 명의 어음 발행이 결정되었다.>

<콘스탄티노바 암시장에서 밀가루가 한 포대에 2골드 67실버에 거래가 되었다.>

“주문하신 양고기 샤슬릭 나왔습니다.”

보고서를 읽던 아딘은 종업원이 가까이 다가오자 그것을 재빨리 말아 마법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고맙습니다.”

아딘은 팁으로 종업원에게 1골드를 건넸다.

종업원은 눈이 휘둥그레진 채 잠시 아딘과 1골드 금화를 바라보다가 이내 미소를 지으며 그것을 덥석 받았다.

“가, 감사합니다. 필요한 게 있으시다면 언제든지 불러주십시오.”

아딘은 미소를 지어 보였고, 종업원은 아딘에게 90도로 허리를 꺽은 후 발걸음을 옮겼다.

“자, 메인 요리 먹자.”

“양꼬치?”

“샤슬릭이라고 벨로디나식 요리야. 향신료가 좀 들어가 있으니까, 혹시 좀 역하다 싶으면 말하고.”

“냄새 좋은데요? 히히.”

로제는 그대로 샤슬릭의 손잡이 부분을 잡았다.

‘뜨거울…… 아…… 로제는 뭐……’

25,000도에 이르는 푸른 불덩이를 손으로 쥐는 로제에게 고작 7, 80도 정도 되는 샤슬릭 손잡이가 대수랴?

그렇게 생각하며 아딘도 조심스럽게 손잡이를 잡아 보았다.

‘나도 괜찮고.’

아딘은 미소를 지으며 그대로 고기 한 덩어리를 빼 먹었다.

부드럽게 잘 익은, 향신료로 버무러진 양고기가 그의 입에서 사르르 녹아내렸다.

‘그래. 일단 먹자. 여러모로 신경 쓸 건 많다만……’

그렇게 아딘은 아주 오랜만에 벨로디나 전통 요리로 아침 식사를 끝마쳤다.

“괜찮았니 로제?”

“네. 정말 맛있어요, 오라버니. 히히히.”

“그래. 맛있었다니 다행이네. 앞으론 매일 먹어야 할 테니까.”

계산을 끝마치고, 자신을 상전 모시듯 하는 종업원의 배웅을 받으며 아딘은 로제의 손을 잡고 그녀와 함께 식당을 나섰다.

11월 벨로디나 북부의 공기는 차갑기 그지없었다.

그러한 찬공기를 뚫고 수많은 사람들이 길을 걷고 있었다.

그중에선 나름 잘 차려입은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후줄근한 차림새로 제대로 씻지 못해 꾀죄죄한 몰골을 한 채 하염없이 걷고 있었다.

‘노보로바야. 원래부터 광산업으로 흥하던 도시였는데…….’

벨로디나 왕국이 건재하던 시절까지만 하더라도 노보로바야는 중산층이 가장 많은 도시 중 하나였다.

수도 콘스탄티노바와 비교해도 중산층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곳이 이곳 노보로바야였다.

‘도망친 농노가 버려진 광산에서 금덩어리를 발견해 일약 거부가 돼 영주에게 위약금을 주고 자유민 신분이 된 사건도 비일비재했었지.’

김현수의 설정이 아닌, 한때 노보로바야의 행정관으로 일하며 실무 경험을 쌓던 아딘 콘스탄틴의 기억을 되짚으며 아딘은 씁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5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다들 안색이 좋았는데…….’

아딘 콘스탄틴이 기억하고 있던 노보로바야의 모습은 활기찬 중산층과 거드름피우는 졸부들, 꿈을 안고 도망친 농노 출신 노동자들로 가득한 곳이었다.

하지만 지금, 노보로바야에는 활기찬 중산층도, 거드름피우는 졸부도, 꿈을 품은 하층민 노동자도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거라곤 그저 북방개발조합 직원으로 보이는 자들과 눈에 초점이 또렷하지 않은 빈민 노동자들 그리고 그들을 감시하는 제니스 공화국 용병들뿐이었다.

‘불과 1년도 되지 않았는데…….’

이미 두루마리를 통해 노보로바야가 북방개발조합에 의해 어떤 꼴을 당했는가를 확인했던 만큼 아딘은 이를 꾹 다물었다.

‘더러운 것들…… 감히 내 땅에서…….’

순간 아딘은 심장이 두근대는 것을 느꼈다.

‘내 땅?’

아딘은 발걸음을 멈췄다.

로제가 가만히 아딘을 올려다보았다.

‘벨로디나 왕국에 발을 디뎌서 그런가…… 아딘 콘스탄틴의 자의식이 더 강해지고 있는 것 같아.’

아딘의 표정이 다소 어두워지자 로제도 덩달아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 거지년이!”

“아악-!”

그 순간, 한 남성의 거친 목소리와 한 소녀의 비명이 동시에 두 사람의 귀를 때렸다.

아딘은 상념에서 황급히 깨어났고, 로제도 다급히 시선을 소리의 진원지로 돌렸다.

[퍽-! 퍽-! 퍽-!]

한 중년 남성이 잔뜩 화가 난 얼굴로 한 소녀를 밟고 있었다.

바닥에 쓰러진 소녀는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사내의 발길질을 견뎌내고 있었다.

“이 도둑년이! 그동안 네가 훔쳐갔지! 내 감자 물어내! 당장 물어내 이 도둑년아!”

사내의 발길질이 점차 그 강도를 높여가기 시작하고, 마침내 그의 발이 소녀의 머리통을 밟으려 할 때였다.

“헉!”

외마디 비명과 함께 사내는 그대로 그 자리에서 얼어붙어 버렸다.

말 그대로 소녀의 머리 바로 위에서 발을 멈춘 채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사내는 눈만 껌뻑일 뿐이었다.

“괜찮니?”

그리고 로제가 사내의 발아래 놓인 소녀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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