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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76화 (76/175)

076 새 출발

“기다리고 있었사옵니다, 해방자시여.”

루이 알랭의 도움으로 드워프 마을로 공간이동을 하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팔키르가 미소를 띤 채 아딘을 반겼다.

그의 말대로 이미 드워프들은 이동 준비를 끝마친 상태였다.

겨우 200에 이르는 숫자이긴 했지만, 마을 전체를 옮기는 작업인 만큼 그들의 짐은 제법 많았다.

“이대로 동쪽으로 간다고?”

그런 드워프의 모습을 바라보며 루이 알랭이 아딘에게 물었다.

“네. 그곳에 버려진 신전이 있는데 그 주변에 일단 임시 거처를 마련해둘 생각입니다.”

아딘의 말에 루이 알랭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수레만 하더라도 150개나 되는데 어느 세월에? 다 한군데 모이라 하게.”

루이 알랭의 말에 아딘은 그가 무엇을 하려는 가를 깨닫고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두 손을 가로저었다.

“괘, 괜찮습니다.”

“아 글쎄 모아라면 모으시게.”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가……”

루이 알랭은 귀찮다는 듯 아딘을 옆으로 치우곤 팔키르에게 다가갔다.

공간이동이라든가 아딘이 어려워하는 모습 등을 통해 대충 그의 정체를 유추하고 있던 팔키르는 루이 알랭이 다가오자마자 한쪽 무릎을 꿇고 허리를 푹 숙이며 예를 갖추었다.

“드워프 마을 촌장 팔키르가 최고의 지혜를 갖춘 분을 뵙습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루이 알랭은 한 차례 콧방귀를 뀌고는 팔키르에게 이야기했다.

“인사치레는 됐고, 어서 드워프들을 짐이랑 같이 한 자리에 모으게.”

“네?”

“이렇게 복잡한 상황에서 어떻게 숲을 가로지르겠다는 건가?”

루이 알랭의 말을 이해한 팔키르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아딘을 바라보았다.

‘이거 참…… 죽을 날이 가까워졌다 해도 그렇지 용이 저렇게까지 자식을 챙기다니…….’

루이 알랭이 다소 무리하는 이유가 모두 로제 때문임을 아딘을 알고 있었다.

아딘은 팔키르를 향해 가만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 반응에 팔키르도 한 차례 고개를 끄덕인 후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드워프들에게 마을회관에 짐수레와 함께 다 모일 것을 지시했다.

한 차례 소동이 일어난 끝에 마을회관으로 쓰이는 요새에 드워프들이 모두 모였다.

“어디로 가면 된다고?”

아딘과 로제, 라인하르트까지 드워프 무리에 섞여든 것을 확인한 루이 알랭이 아딘을 바라보며 물었다.

“숲 동쪽 외곽지대에 버려진 신전이 있습니다. 그 근처로 가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버려진 신전이라……”

루이 알랭은 잠시 눈을 감았다.

“흐음…… 버려진 신전인지는 모르겠다만 버려진 건축물은 보이는군. 여기로 데려가면 되겠지?”

“아…… 네.”

“좋아.”

루이 알랭은 다시 눈을 떴다.

그 순간, 요새 내부 전체에 커다란 마법진이 생성되며 환한 빛을 뿌려대기 시작했다.

“어지러울 수도 있으니까, 공간이동 후에 알아서 토를 하든지 눕든지 해.”

루이 알랭은 퉁명스러운 말투로 드워프들에게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를 포함해 세 인간과 200여 드워프 그리고 드워프들의 짐을 실은 수레가 한꺼번에 빛에 휩싸이더니 그 자리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

“이야…… 가는 길에 그래도 말동무라도 되려고 했는데 저건 생각도 못했네?”

그리고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엘프 하게마는 황당하단 표정으로 중얼거리더니 이내 씁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래…… 세상은 변하기 마련이지…… 인간도…… 드워프도…… 용도…….”

* * *

[고오오오오오-!]

엘프숲 동부 외곽.

벨로디나 왕국과의 경계.

지름 수백m에 이르는 거대한 마법진이 나타나며 조용한 아침의 숲을 시끌벅적하게 만들었다.

[파아앗-!]

잠시 후, 마법진 위로 빛과 함께 200여 드워프 무리와 세 인간, 한 용이 나타나며 소란의 정점을 찍었다.

“우웨엑-!”

“크허억-!”

“으으으……”

여기저기서 드워프들의 헛구역질과 비명, 신음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드워프 중 비교적 강인한 축에 속하는 팔키르와 몇몇 경비대원들조차도 잠시 비틀거리며 가볍게 신음할 정도였다.

“숲을 전체적으로 관조해보니 자네가 말한 장소와 가장 유사한 곳이 이곳이었네.”

괴로워하는 드워프는 신경도 쓰지 않고서 루이 알랭은 아딘에게 이야기했다.

아딘은 먼저 로제와 라인하르트의 상태를 살핀 후, 두 사람이 별다른 이상이 없음을 확인하고는 이내 주위를 둘러봤다.

“어……?”

그리고 그는 굉장한 이질감을 느꼈다.

“신전이…… 분명 있었는데?”

콘스탄티노바를 탈출해 엘프숲 외곽으로 들어선 첫날, 그가 두루마리를 얻었던 버려진 신전.

그곳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신전이 아닌 버려진 요새가 자리하고 있었다.

“분명 신전이 여기에……”

아딘은 요새 주위의 자연 환경을 살펴보았다.

모든 것이 약 1년여 전 그가 이곳을 지나칠 때 보았던 것들과 똑같았다.

“인간의 기억에는 오류가 많다네. 아마 자네가 신전이라 기억하는 것은 실제로는 요새였을 걸세. 몇 가지 사건을 거치다 보니 그게 신전으로 바뀌었을 뿐. 인간의 기억에서는 흔한 일이야.”

루이 알랭의 말에도 불구하고 아딘은 당혹감을 떨치지 못했다.

‘분명 신전이었는데?’

아딘은 잠시 요새를 바라보았다.

문짝이 뜯겨나가고, 여기저기 성벽이 허물어진 석조 요새는 전형적인 벨로디나 양식으로 군용 요새였다.

“일단 내부에는 아무것도 없네. 버려진 지 제법 오래된 것 같군.”

마법으로 요새 내부를 훑은 루이 알랭의 말에 일단 아딘은 당혹감을 쑤셔 넣었다.

어찌 됐건 드워프들이 잠시 정착할 임시 거처를 마련하는 것이 우선이었기 때문이었다.

“일단은 들어가지.”

아딘은 팔키르에게 이야기했다.

“자자! 모두 정신 차리고! 요새로 들어가자! 저기가 당분간 우리가 지낼 새 터전이야!”

팔키르의 명령은 곧 드워프들에게 전달됐다.

대규모 공간이동에 괴로워하던 드워프들은 그 명령에 이내 모두 대열을 정비하곤 각자 수레를 이끌고 요새로 향했다.

‘달라. 완전히 달라.’

자신이 묵었던 신전과는 완전히 다른 요새 내부의 구조에 아딘은 인상을 찌푸렸다.

‘분명히 신전이었어. 이런 군용 요새가 아니었다고.’

어찌 보면 진정한 의미에서 그의 모험이 시작된 곳이라 해도 좋을 곳이 버려진 신전이었다.

그곳에서 두루마리를 습득했기에 3대 신물을 모을 생각을 했고, 그 덕분에 지금까지의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만약 두루마리를 얻지 못했다면 지금쯤 샤펠 제국의 어느 산골짜기에서 아주 힘겹게 살고 있거나 아니면 아예 죽어 버렸을지도 모를 터였다.

그랬던 만큼 아딘은 그야말로 근 1년여 만의 방문에 나름 설렘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설렘은 사라진 신전과 그 자리를 대체하고 있는 버려진 벨로디나 양식의 군용 요새로 인해 당혹감으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적당히 한 사나흘 정도 수리하면 쓸 수 있을 것 같사옵니다, 해방자시여.”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이는 드워프들을 지휘하던 팔키르가 멍하니 로제와 루이 알랭의 곁에 서 있는 아딘에게 다가와 이야기했다.

“아…… 그렇게 하시오.”

팔키르에게 알아서 하라 명령한 후 아딘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너무 힘들어서 버려진 요새를 신전으로 착각한 건가?’

달리 생각하면 요새라 해서 두루마리 같은 것이 없어야 한다는 법칙은 없었다.

놀랍고 신비로운, 살아있는 지식백과와 같은 두루마리가 꼭 신비로운 장소에 있어야 한다는 법칙도 없었다.

‘뭐, 전쟁이 끝날 때까지 드워프들이 안전하게 생활만 할 수 있다면야.’

숲의 외곽지대이니만큼 엘프는 물론 인간의 영향력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장소에 세워진 단단한 요새.

루이 알랭의 조사에 따라 요새 근처에 강과 사냥터로 쓰일 만한 곳도 있다는 정보를 들은 만큼 아딘은 일단 눈앞의 현실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래. 일단 지나간 기억을 되짚기보단…….’

그렇게 아딘은 다시 정신을 차리고 팔키르의 곁으로 가 그들과 함께 요새 재정비 및 향후 거주 계획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다.

로제는, 신기한 눈으로 드워프를 바라보면서 아딘의 곁을 마냥 쫄래쫄래 쫓아다녔다.

루이 알랭은 아딘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는 딸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라인하르트는 울적한 표정으로 시선을 어디 한 군데에 집중하지 못한 채 가만히 그 자리에 서 있기만 했다.

* * *

“정말 괜찮겠습니까?”

광명력 992년 10월 31일 이른 아침.

어느덧 멀쩡하게 복구된, 당분간 드워프들이 지낼 임시 거처가 된 요새 동문 밖에서 아딘은 라인하르트에게 물었다.

“괜찮습니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스미스 씨.”

“그래도 루이 알랭 씨가 데려다주신다고 하는데……”

“괜찮습니다. 이래저래 생각 정리할 것도 필요하고 해서 그냥 걸어서 가겠습니다.”

루이 알랭의 공간이동 서비스도 마다한 채 걸어서 뢰벡까지 가 배편으로 트링겐으로 가겠다는 라인하르트의 발상.

본인의 의지가 너무나 굳세었기에 아딘은 차마 그에게 강권하지 못했다.

“라인하르트 씨의 뜻이 그렇다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던 아딘은 이내 마법 주머니에 손을 넣어 100골드짜리 금괴 1개와 메이스 2자루를 꺼냈다.

“변변한 무기도 없으시니, 일단 메이스라도 챙기십시오. 그리고 이건 그간 어려운 여정에 함께해준 대가입니다.”

번쩍이는 금괴와 메이스를 바라보는 라인하르트의 눈에 알 수 없는 회한 같은 것이 스쳐 지나갔다.

라인하르트는 금괴는 내버려둔 채 메이스 2자루만 챙겨 허리춤에 꽂았다.

“금괴는 마음만 받겠습니다. 여비는 제가 여정 가운데 일을 구해서 충당하면 됩니다.”

“아니, 그래도 지금 가진 돈이…….”

“괜찮습니다.”

씁쓸하게 웃으며 라인하르트는 아딘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곤 로제와 루이 알랭, 팔키르에게까지 일일이 고개를 숙인 후 남쪽으로 터덜터덜 걸어가기 시작했다.

‘도대체 불멸자와는 무슨 이야기를 나눴길래?’

불멸의 신전에서 거했던 1주일 동안, 아딘과 로제는 루이 알랭이 펼친 환상 속에서 끊임없이 단련하고 또 단련했다.

아딘은 최대한 신물의 힘을 끌어다 쓸 수 있도록 정신력과 체력을 키웠다.

로제는 자신이 감당 가능한 수준의 마법을 최대한 에너지 낭비 없이 효율적으로 펼치는 노하우를 습득하는 데 시간을 보냈다.

체감 시간으로만 6개월 가까이 되는 수련이었던 만큼, 아딘과 로제의 능력은 한층 강해졌다.

반면 라인하르트는, 실제 시간 1주일 동안 샤푸르와 함께 대화를 나누면서 급격히 사람이 어두워졌다.

애초에 약간 냉소적인 모습을 가지곤 있었지만, 그래도 노래를 흥얼거리던 그 흥이 싹 빠지고 알 수 없는 무기력함과 자괴감 같은 것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내가 잘한 건가?’

1,700년의 시공을 뛰어넘어 조상과 후손을 상봉시켜보고 싶다는 자신의 호기심이 자칫 한 인간을 알 수 없는 절망의 벽으로 밀어버린 게 아닌가 아딘은 생각하며 가만히 라인하르트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나는 그러면 샤푸르에게로 돌아가 있겠네. 그 친구, 홀가분하면서도 제법 외로울 거라서 말일세.”

루이 알랭은 그렇게 아딘에게 이야기한 후 로제를 향해 이야기했다.

“아빠는 그럼 할아버지한테 돌아가 있을게. 나중에 좀 여유로워지면 오라버니랑 같이 놀러 와. 알겠지?”

루이 알랭의 말에 로제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꼭 갈게요. 가면 갈매기 고기 먹어요.”

“그래. 꼭 그러자.”

루이 알랭은 미소를 지으며 로제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후 이내 빛무리와 함께 그 자리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해방자시여.”

루이 알랭이 사라지자 팔키르가 아딘을 불렀다.

아딘은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주며 말했다.

“최대한 빨리 왕국을 내 것으로 만들고 그대들을 위한 터전을 마련해주겠소. 그때까지만 기다려주시오.”

“알겠사옵니다. 200년이 넘는 세월을 우린 기다려왔습니다. 까짓거 20년이라도 더 기다릴 수 있사옵니다.”

팔키르의 말에 아딘은 씩 웃으며 대답했다.

“2년 안에 그대들은 그대들의 도시를 가질 것이오.”

그리고 이내 아딘의 몸은 황금빛 광채에 휩싸였다.

잠시 후, 아딘은 불칸의 갑옷으로 무장한 채 하늘로 날아올랐다.

“저도 가볼게요, 드워프 할아버지!”

로제도 통역 마법을 통해 팔키르에게 이야기한 후 빠르게 아딘의 뒤를 따라 하늘로 날아올랐다.

“모든 것이 불칸께서 계획하신 대로 이루어질 것이옵니다, 해방자시여.”

두 사람이 날아간 동북쪽을 향해 팔키르는 큰절을 올리며 그렇게 기도문처럼 중얼거렸다.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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