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5 불멸의 신전 (4)
[스르릉-!]
아딘은 그대로 칼집을 잡고 검을 뽑았다.
자체발광하는 찬란한 금빛의 칼날이 방안에 모습을 드러내며 점차 짙게 깔리기 시작하는 어둠을 밀어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샤푸르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불멸의 검은 왜?”
샤푸르의 물음에 아딘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불멸자께서는 비록 신물도 물건에 불과하다 하셨지만, 신물은 신의 뜻이 깃들어있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물건들과는 확연히 다른 지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샤푸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내 그의 표정이 환해지기 시작했다.
[짝-!]
샤푸르는 가볍게 손뼉을 치며 웃기 시작했다.
“무슨 말인지 알겠구만. 흐하하하!”
단순하게 검을 뽑고, 신물이 다른 물건과는 전혀 다른 지위를 가졌다는 말 한마디에 자신이 뜻하는 것을 이해한 샤푸르.
그 모습을 바라보며 아딘은 과연 불멸자는 불멸자구나 하는 생각을 품게 됐다.
‘역시 1,700년이라는 세월은 거저 먹은 게 아니지.’
아딘은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했다.
“제가 지혜의 신 티르께 인정을 받아 불멸의 검을 뽑았듯이, 제 후손 중에서도 이 검을 뽑는 자가 있다면 그는 신으로부터 인정받은 자입니다. 신이 인정한 만큼 그에게는 능히 나라와 백성을 이끌 군주로서의 탁월함이 있다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이내 아딘은 다시 검을 칼집에 집어넣었다.
“하지만 제 후손이 이 검을 뽑지 못한다면 그는 그저 국가를 상징하는 역할만을 할 것입니다. 정치는 오랜 세월 경륜을 쌓아온 전문 정치인들이 할 것이고 말입니다.”
샤푸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의 권위가 없는 자, 권력도 없다…… 하하하. 책임을 신에게 미루는 모양새이긴 하지만, 확실한 방법이긴 해.”
그 말에 아딘은 고개를 끄덕이곤 검을 도로 마법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샤푸르가 물었다.
“그런데…… 자네 후손들은 과연 이해하고 인정하겠나?”
그 물음에 아딘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샤푸르가 물음을 이어나갔다.
“자네 아들이나 손자까지라면 모를까, 그 이후부터, 즉 자네의 삶이 역사의 한 장이 되고 난 이후로는 아마 자네의 뜻을 이해하고 순응하는 자보다는 그렇지 못하는 자가 더 많을 것 같은데?”
그 물음에 아딘은 한 차례 웃음을 터뜨린 후 샤푸르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뭐…… 꼬우면 이 검을 뽑으면 그만 아닙니까?”
“흐하하하하-!”
아딘의 대답에 샤푸르가 박장대소할 때, 2층 계단에서 라인하르트가 내려왔다.
“아으윽…… 한숨 푹 자니까 그래도 피로가 좀 풀립니다, 스미스 씨.”
그리고 신전 정문이 열리며 로제와 루이 알랭도 들어왔다.
“오라버니, 할아버지 다녀왔어요~! 아, 용병 아저씨도 안녕!”
밝고 쾌활한 로제의 목소리에 신전 전체의 분위기가 밝아졌다.
아딘은 자신에게 다가와 살포시 안기는 로제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후 루이 알랭을 바라보며 고개를 숙였다.
“크흠-!”
그 모습을 바라보며 루이 알랭은 한 차례 헛기침했다.
“허허허. 이거, 벌써 시간이 저녁 시간이 됐어.”
그 모습을 보고 한 차례 너털웃음을 터뜨린 샤푸르는 부엌으로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그러고 보니!’
문득 아딘은 로제의 안위와 루이 알랭의 존재 그리고 불멸의 검으로 인해 잠시 잊고 있던 이슈를 떠올렸다.
아딘은 잠시 로제를 놓은 후 샤푸르와 라인하르트를 번갈아 보았다.
고대 다이람인의 외모적 특성을 그대로 갖춘 샤푸르와 현대 게마인샤프트인의 외형적 특성을 모두 갖춘 라인하르트.
전혀 무관해 보이는 조상과 후손을 바라보던 아딘은 미소를 지은 채 샤푸르에게 고대 다이람어로 이야기했다.
“그러고 보니 이 자리에 혈연관계가 둘이나 된다는 걸 깜빡했습니다, 불멸자님.”
아딘의 말에 고대 다이람어를 알아듣는 샤푸르와 루이 알랭이 의아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아딘은 루이 알랭과 로제를 바라보며 말했다.
“여기 계시는 루이 알랭 님은 로제의 아버지가 되시지요.”
그리고 샤푸르와 라인하르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 불멸자님은 저기 있는 제 용병, 라인하르트의 조상이 되십니다. 그것도 부계로 말입니다.”
아딘의 말에 샤푸르와 루이 알랭이 모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라인하르트를 바라봤다.
“응? 어…… 왜?”
두 사람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자 라인하르트는 괜히 얼굴을 붉히며 머리를 긁적였다.
“허-!”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샤푸르가 이내 헛웃음을 터뜨렸다.
루이 알랭도 재밌다는 듯 입을 다문 채 미소를 지어 보였다.
* * *
라인하르트가 샤푸르의 부계 후손이라는 아딘의 말은 루이 알랭의 마법적 능력으로 두 사람 사이에 유전적 연관성이 밝혀지면서 공식적으로 확인됐다.
아딘은 라인하르트에게도 샤푸르가 그의 직계 조상임을 알려주었다.
갑작스럽게 1,700년 전의 조상과 마주한 라인하르트는 황당함과 당혹감이 어린 표정으로 샤푸르를 바라보았다.
샤푸르 또한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라인하르트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다소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네 사람과 한 용은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식사가 끝난 다음, 샤푸르는 조용히 라인하르트에게 게마인샤프트 동부 방언으로 말을 걸며 그를 신전 뒤뜰로 데려갔다.
아딘은 로제와 함께 저녁 티타임을 가졌고, 루이 알랭은 두 사람의 대화에 자신이 방해물이 되지 않도록 잠시 자리를 비켜주었다.
로제와 함께 차를 마시며 앞서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나누면서, 아딘은 한 가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떨어지고 나서 그렇게 오래되진 않은 것 같은데…… 로제가 굉장히 밝아졌어.’
처음 슈드 자치령 최북단 파세레빌에서 만났을 때부터 발스에서의 각성과 뢰벡에서의 사역 그리고 렝고스에서의 고생을 거치며 로제의 성격은 많은 변화를 겪었다.
하지만 그 4개월여 동안 겪은 변화보다 지난 며칠 못 본 사이 그녀가 겪은 변화가 더 극적이었다.
‘이것도 용의 힘인가?’
그런 의문을 품으며 아딘은 로제에게 드워프와의 이야기 그리고 앞으로 자신이 할 일에 관한 이야기 등을 들려주었다.
“저도 힘이 되어 드릴게요. 오라버니가 하시는 일이라면 분명 옳은 일일 테니까요.”
로제는 아딘의 복수와 혁명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그를 돕겠다 다짐하며 주먹을 꽉 쥐어 보였다.
그런 로제의 아기자기한 주먹을 양손으로 잡고서 아딘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 고마워, 로제.”
구체적으로 그녀가 해야 할 일에 관하여서는 아직 결정된 바가 없었지만, 로제가 진심으로 도와주겠다는 마음을 품었다는 것 자체가 중요했던 만큼 아딘은 미소를 지으며 가만히 그녀의 손을 잡고 쓰다듬어주었다.
그 모습에 로제는 얼굴을 살짝 붉혔다.
“저쪽이나 이쪽이나 대화가 끝날 생각을 안 하는군.”
때마침 2층에 올라가 있던 루이 알랭이 1층으로 내려왔다.
아딘은 가만히 로제의 손을 놓아주었다.
그 모습을 보고 루이 알랭은 한 차례 코웃음을 친 후 미소를 지으며 로제에게 이야기했다.
“자, 로제. 이제 올라가서 자야지?”
“벌써요?”
“늦었잖니. 그리고 나도 네 오라비와 할 말이 있고 말이다.”
아딘과 할 이야기가 있다는 말에 로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곧바로 수긍했다.
“그럼 먼저 올라가서 잘게요, 내일 봐요, 오라버니, 아빠.”
로제는 아딘과 루이 알랭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고, 아딘과 루이 알랭도 그녀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잠시 후, 로제가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가자 루이 알랭은 편하게 아딘의 맞은편, 로제가 앉았던 의자에 앉았다.
아딘은 잔을 하나 더 꺼내 차를 따르려 했지만, 루이 알랭이 손짓을 하며 그럴 필요가 없음을 표하였다.
“용이 무슨 차를 마시나? 인간 사회에 섞여들기를 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아딘은 고개를 끄덕인 후 자기 잔에만 차를 따랐다.
“자네가 로제와 함께한 시간이 얼추 넉 달 정도 되는 걸로 아는데. 맞나?”
루이 알랭의 물음에 아딘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럼 그 아이의 체감 시간상으로는 자네보단 내가 더 오래 보낸 존재가 맞을 걸세. 환상 속에서 근 1년 가까이를 나와 함께하며 마법을 배웠으니까.”
그 말에 아딘은 미소를 지을 뿐, 무어라 대답하진 않았다.
루이 알랭 또한 무슨 답변을 바라진 않았는지 곧장 자기 할 말을 이어갔다.
“로제도 마찬가지고 자네도 마찬가지고 모두 약해. 특히 자네는 말도 못 할 만큼 약해. 내 딸을 맡기기에 불안할 정도로 말일세.”
자신과 로제를 싸잡아 약하다고 평가하는 루이 알랭의 모습에 아딘은 순순히 수긍하는 모습을 보였다.
‘용의 입장에선 누가 강한 존재겠어?’
그런 아딘의 모습을 바라보며 루이 알랭은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나는 가능한 두 사람을 강하게 만들어서 내보내고 싶다네.”
그 말에 아딘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최소한 용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와도 1대1 대결에서 밀리지 않을 수준으로는 강해져야지 않겠나? 수만 명의 병력과 싸우면서 그들을 모두 죽이진 못하더라도 최소한 혼자 탈출은 가능할 정도로는 강해져야 하겠고 말이야.”
아딘은 고개를 끄덕였다.
“도와주신다면, 기꺼이 강해지기 위해 단련하겠습니다.”
그 말에 루이 알랭도 고개를 끄덕였다.
“뭐, 일단 자네는 오늘 오전에 있었던 나와의 환상 속 싸움에서 한 단계 성장하긴 했다네.”
“네?”
“환상 속에서 자네가 내 공격을 피하거나 손으로 막은 것 그리고 공중에서 날아다니며 나를 공격한 것. 그 모든 것이 자네의 실제 능력이 됐다는 걸세.”
“아……”
아딘은 고개를 끄덕였다.
루이 알랭과의 환상 속 전투 이후 왠지 모르게 정신력이 강화됐다는 느낌은 받았지만, 확신은 없던 차에 루이 알랭의 말은 그에게 확신을 심어 주었다.
“일주일간 나는 자네와 로제를 환상 속에서 단련시키고 싶어. 저기 조상과 후손 사이에도 그 정도 기간은 필요한 것 같기도 하고 말일세. 어떤가?”
당연히 거부할 이유는 없었다.
아딘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아버님의 수고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그 말에 루이 알랭은 콧방귀를 뀌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아버님은 무슨…… 루이 알랭이라고 부르게. 몇 번을 말한 것 같은데.”
“하하…… 알겠습니다, 루이 알랭님.”
“가급적 님자도 빼고. 그냥 루이 알랭이라 불러. 정 귀찮으면 알랭 씨라고 하든가.”
“알겠습니다, 알랭 씨.”
“말은 잘 들어서 좋네.”
그 말에 아딘은 씩 웃었다.
루이 알랭도 콧방귀를 뀌면서도 마주 웃어 보이긴 마찬가지였다.
* * *
광명력 992년 10월 17일 아침.
“그동안 신세 많았습니다.”
아딘은 불멸의 신전 마당에서 샤푸르를 향해 허리 숙여 인사하며 그렇게 이야기했다.
“허허허. 아닐세. 나야말로 정말 오랜만에 인간 방문자가 우르르 와서 즐거웠다네.”
그러면서 그는 라인하르트를 바라봤다.
“잊고 있던 내 흔적을 발견해서 뜻깊은 자리이기도 했고 말이야.”
그 시선에, 지난 일주일간 계속해서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던 라인하르트는 쓴웃음만 지어 보일 뿐이었다.
“그럼 가보시게. 나중에 여유가 되면 한 번 놀러라도 오고.”
이미 샤푸르로부터 그가 루이 알랭이 죽은 후에야 승천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만큼, 아딘은 분명 다시 만날 날이 있으리라 확신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반드시, 다시 찾아 뵙겠습니다, 불멸자 샤푸르님.”
샤푸르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자, 출발하지.”
그런 그들을 향해 루이 알랭이 이야기했다.
“드워프 마을로 곧장 이동하도록 하지.”
그러면서 루이 알랭은 불멸의 신전 밖에서 공간이동을 위한 준비를 끝마쳤다.
“엘프들에게는 확실히 말해 두었지? 알아서 갈 테니 기다리지 말라고?”
루이 알랭을 향해 다가가는 아딘을 향해 샤푸르가 물었다.
“그것들 자존심은 강해서 무시당한다 생각하면 화를 많이 낼 거야.”
그 말에 아딘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걱정마십시오, 불멸자 샤푸르님.”
아딘의 말에 샤푸르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곧 아딘과 로제, 라인하르트가 루이 알랭의 곁에 모여들었다.
곧 루이 알랭의 주변으로 마법진이 생겨났고, 거기서 뿜어져 나온 빛이 넷을 감쌌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샤푸르는 가만히 손을 흔들어 주었고 아딘과 로제도 마주 손을 흔들어 주었다.
[파앗-!]
잠시 후, 환한 빛과 함께 넷은 순식간에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들이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던 샤푸르는 이내 손을 내렸다.
“후우…….”
그러면서 그는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저의 의무는 끝입니다.”
그 말에 화답이라도 하듯,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와 샤푸르의 수염과 머리카락을 살포시 흔들었다.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