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4 불멸의 신전 (3)
“……네?”
샤푸르의 말에 아딘은 황당하단 표정으로 반문했다.
샤푸르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검이 자네를 택한 게 아니라, 자네가 검을 택한 거라고 했네.”
그 말을 아딘은 쉽게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불멸의 검이…… 신물이 내 선택을 받은 거라고?’
비록 맥거핀에 그치긴 했지만, 3대 신물에 관하여 김현수는 분명한 설정을 해 두었다.
그 설정에 인간이 신물을 선택한다는 내용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애초에 인간이 신물을 택할 수 있다면, 그걸 신물이라 부르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라고 김현수가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김현수가 공들여 만든 맥거핀 중 하나인 불멸자 샤푸르는 아딘이 신물 불멸의 검을 택했노라 주장하고 있었다.
“그게 말이 됩니까?”
“말이 안 될 건 또 뭐 있나?”
“아니…… 아니 어떻게 인간이 신물을 택합니까? 신물이 인간을 택하는 거지?”
“허허허.”
“분명 불멸자께서도 신물의 택함을 받지 않으셨습니까?”
샤푸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난 선택을 받는 입장이었지.”
“아니, 그런데 무슨 제가 신물을 선택했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딘의 물음에 샤푸르는 즉답하지 않았다.
그저 차를 한 모금 입에 머금고 그 향을 음미하며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아딘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 시선에 순간 아딘은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려보았다.
‘혹시…… 빙의에 대해 아는 건가?’
아딘은 침을 꿀꺽 삼켰다.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것이, 막상 한 번 생각해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무려 1,700년 이상을 살아온 인간이야. 오랜 세월, 루이 알랭과 친구로 지내며, 저 바다를 바라보며, 어쩌면 때로는 신들과 소통하며 불멸의 검을 지닌 채 살았겠지. 어쩌면…… 그 세월 동안 어떠한 깨달음이라도?’
혹여나 아딘이 이 세계의 창조자인 김현수라는 것을 모른다 하더라도, 최소한 아딘 블라디미로비치 콘스탄틴이라는 인간의 육체에 전혀 다른 인격체의 영혼이 빙의했다는 사실만이라도 안다면,
그렇다면 자신이 지닌 근본적인 의문, ‘왜 나는 이 세계에 빙의했나?’에 대한 답 혹은 해답의 실마리라도 알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아딘의 뇌리를 강하게 뒤흔들기 시작했다.
입안이 바싹바싹 마르는 것을 느끼며 아딘은 차를 한 모금 넘겼다.
그 달고 은은한 향을 아딘이 채 음미하기도 전에 샤푸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예전에…… 내가 젊었을 때…… 지혜의 신께서 날 찾아오셨다네.”
샤푸르는 무려 1,700년도 더 지난 젊은 시절을 회상하기라도 하듯 아련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분께서는 내게 불멸의 검을 주시며 말씀하셨지. 검이 나를 택했다고 말이야.”
샤푸르는 차를 한 모금 넘겼다.
“그래서 나도 그런 줄 알았어. 하지만 내가 속세의 일을 정리하고 세상을 떠돌아다니다 이곳에 정착한 뒤로, 그리고 오랜 세월 많은 것을 생각하면서 문득 깨달음을 얻었다네.”
샤푸르는 가만히 아딘을 바라보았다.
“신물은 어디까지나 물건이라는 것을. 비록 그것이 생명을 지닌 것처럼 보여도,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여겨져도,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신물은 물건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이야.”
샤푸르가 찻잔을 비웠다. 아딘이 사기 주전자를 들어 그의 잔을 채워 주었다.
“날 택한 건 지혜의 신이셨어. 그분께서 날 택하시고 이 신물을 주신 것이었지. 그리고 내게 후에 이 신물을 찾으러 올 자에게, 즉 그분께서 택하신 자에게 이것을 건네라는 사명과 함께 불멸의 삶을 주셨지.”
샤푸르는 차를 한 모금 넘겼다. 그리곤 말을 마무리했다.
“자네는 이미 두 분의 신께서 인정한 존재라네. 자네가 지닌 갑옷과 목걸이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지. 그리고 두 분의 신께서 자네를 인정하셨다는 것은 곧 지혜의 신께서도 자네를 인정하셨다는 것을 뜻하는 거고 말이야. 그러니 신물 입장에서는 자네가 뽑아준 것이지, 자네에게 뽑혀준 건 아니지 않겠는가? 하하하하.”
호탕하게 웃으며 샤푸르는 말을 마쳤다.
그리고 아딘은 기분 좋은 표정으로 차를 마시는 샤푸르를 보며 다소 실망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기대할 걸 기대해야지…….’
아무리 김현수가 공들여 만들었다 해도, 아무리 1,700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왔다 해도, 아무리 신과 직간접적으로 소통한다 해도, 어디까지나 샤푸르는 인간이었다.
김현수의 설정대로 곧 신들의 축복을 받아 천계로 올라가 신으로 인정받는다고 할지라도 아직까지 그는 인간이었다.
‘불칸도, 네르갈도 모르던 걸 한낱 인간이 아는 게 이상하긴 하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아딘은 한 차례 쓴웃음을 지은 후 차를 쭉 들이켰다.
그런 아딘을 바라보며 샤푸르가 물었다.
“그래, 우리 세 분의 신께서 인정하신 인간께서는 앞으로 무얼 하실 생각이신가?”
샤푸르의 물음에 아딘은 잠시 입을 다문 채 생각을 정리했다.
그가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샤푸르는 그의 잔을 채워 준 후 자기 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리고 샤푸르가 잔을 내려놓자 아딘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샤푸르는 은은한 미소를 띤 채 마치 손자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할아버지와 같은 표정으로 아딘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복수와 혁명을 할 것입니다.”
그 말에 샤푸르는 더욱 진하게 미소를 지으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광명력 992년 10월 10일 오전.
벨로디나 왕국 수도 콘스탄티노바.
왕비가 거하는 가을 궁전.
벨로디나 왕국 제19대 국왕 유리 2세가 지켜보는 가운데 왕비가 궁정 사제에게 손을 내민 채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궁정 사제는 왕비의 손바닥과 손등을 아래위로 약간의 거리를 두고 감싼 채 조용히 기도문을 읊조리고 있었다.
잠시 후, 궁정 사제는 손을 아래로 내리곤 공손히 왕비에게 이야기했다.
“축하드리옵니다. 왕비께옵서 왕자마마를 품고 계시옵니다.”
궁정 사제의 말에 왕비와 그 주변에 서 있던 궁녀들의 표정이 환해졌다.
“축하드리옵니다!”
“축하드리나이다!”
“감축드리옵니다!”
궁녀들과 근위병들이 모두 왕비에게 축하 인사를 올렸다.
왕비는 미소를 지으며 그 인사들을 받아주었다.
그러다 그녀의 시선이 유리 2세에게로 향했다.
“국왕 폐하. 드디어 폐하의 뒤를 이을 후사가 생겼나이다.”
왕비의 말에 그때까지 가만히 서 있기만 하던 유리 2세가 애써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손뼉을 쳤다.
“축하하오.”
“감사하나이다.”
“몸조리 잘하시기 바라오.”
“염려 붙들어 매소서, 폐하.”
“종종 찾아오겠소.”
유리 2세는 그 말을 남기곤 등을 돌려 방을 빠져나갔다.
콘스탄틴 왕가를 상징하는 쌍두독수리와 제니스 공화국 드라기 상단을 상징하는, 상호교차하는 쌍검이 양각된 흉갑을 입은 근위병들이 그 뒤를 따라 방을 빠져나갔다.
드라기 상단에 속한 용병들로 이루어진 근위병들에 둘러싸인 채 가을 궁전을 빠져나가는 유리 2세의 발걸음은 무겁기 그지없었다.
궁전 밖으로 나와 마찬가지로 드라기 상단의 상징과 왕가의 상징이 함께 그려진 마차에 유리 2세는 올라탔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향해 재상이 주도한 어전회의에서 결정된 사안을 읽어주는 비서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창문을 열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오는 10월 26일에 드라기 상단의 총수이신 마리오 드라기님이 국왕 폐하를 알현하기 위해 오실 예정입니다. 이를 위해 특별히 왕궁에 자리한 공간이동 마법진을 가동할 계획이며, 이에 재무관 야블로프 백작께서 콘테 상단과 루비오 상단으로부터 마법사를 고용하기 위한 경비 지출에 서명하셨습니다.”
국왕의 뜻과 무관하게 굴러가는 국정 업무에 대한 보고가 끝나자 유리 2세는 습관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비서 겸 감시자인 나타샤는 가만히 유리 2세에게 고개를 숙인 후 창밖을 바라보는 척하며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폈다.
자신을 향한 감시의 시선에 유리 2세는 겉으로 최대한 불편한 티를 내지 않은 채 속으로 생각했다.
‘벌레 같은 년…….’
왕비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유리 2세는 그녀를 향해 마음속에 담아둔 온갖 말들을 마음속으로 퍼부었다.
‘예상은 했다만…….’
하늘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 슬픈 감정이 순간 묻어났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형님…… 이렇게 될 줄 알고는 있었지만…… 이 정도라고는 생각도 못 했습니다…….’
그런 그를 향해 감시자 나타샤가 물었다.
“그리고 축하드립니다, 폐하.”
그녀의 말에 유리 2세는 가만히 시선을 그녀에게로 돌렸다.
나타샤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왕비께서 후사를 가지셨으니, 국왕 폐하뿐 아니라 이 나라 신민 모두가 축하받을 일 아니겠습니까?”
그녀의 말에 유리 2세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맙네.”
그리고 그는 다시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나타샤는 깃펜의 촉을 혀끝으로 한 차례 핥은 후 그것으로 종이에 무어라 끄적이기 시작했다.
그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잉크로 작성하는 자신의 감시 일지임을 알고 있었지만, 유리 2세는 모르는 척할 수밖에 없었다.
* * *
점심 후 티타임부터 시작된 아딘과 샤푸르의 대화는 저녁 시간까지 이어졌다.
그 대화에서 아딘은 자신이 품고 있는 복수와 혁명에 관한 생각을 샤푸르에게 남김없이 털어놓았다.
“세습 귀족도, 노예도 없이 모두가 동등한 권리를 지닌 시민 국가라.”
“그렇습니다. 모든 시민은 국가에서 제공하는 교육을 받을 것이며, 그것의 결과에 따라 직업과 사회적 지위가 결정될 것입니다. 자기 조상이 누구건 관계없이 오로지 자기 능력과 노력에 따라 성취가 정해지는 것입니다.”
샤푸르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딘이 말을 이었다.
“이러한 세상을 만드는 데 있어 기득권을 지닌 귀족들의 반발은 당연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을 누르기 위해서라도 혁명은 필요합니다.”
“그렇겠지. 누구나 자신이 누리던 것을 빼앗긴다 생각하면 가만히 있을 리가 없겠지.”
샤푸르는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손뼉을 쳐 주었다.
“훌륭해. 아주 괜찮은 구상이야. 가히 혁명적이라 부를 수 있겠어.”
“감사합니다.”
샤푸르의 칭찬에 아딘은 고개를 숙였다.
그런 그를 향해 샤푸르가 박수를 멈추곤 말했다.
“그런데 말일세. 자네의 구상에는 한 가지 맹점이 있어 보이는데 말이야.”
아딘은 예상했다는 듯 미소를 지어보였다.
샤푸르가 말을 이었다.
“귀족과 노예가 사라지고 모두가 시민이 되더라도, 평등하지 않은 세습적 지위를 가진 집단은 남게 된다네.”
그러면서 샤푸르는 아딘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바로 왕으로 있을 자네와 자네의 밑에서 태어나 왕족으로 있을 자식들이지.”
샤푸르의 말에 아딘은 고개를 끄덕인 후 입을 열었다.
“저도 그렇고, 제 자식도 그렇고 말씀대로 왕이라는 존재로는 분명히 남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능력이 없다면 절대적 권력을 지닌 군주로 통치하지는 못할 겁니다. 그저 국가 통합의 상징으로나 존재하게 될 겁니다.”
아딘의 말에 샤푸르는 미소를 지으면서도 반문했다.
“자네야 능력이 이미 신들에게 검증을 받았으니 문제가 없겠지만, 자네 자손들의 능력은 누가 검증하겠나? 결국 자네가 왕이 되는 순간 자네 자식들은 왕족이 될 거고, 그러면 자연스럽게 대를 이어가며 왕족을 중심으로 다시 귀족 세력이 나타날 거야. 그렇게 된다면 자네의 혁명은 오랜 이상으로만 남게 되겠지.”
샤푸르의 말에 아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왕이 없는 정치를 하기에는, 공화정이라는 체제가 아직 세상에 익숙한 체제도 아니고.”
샤푸르는 물었다.
“이 맹점에 대한 해결 방안이라도 있나?”
그 물음에 아딘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샤푸르도 미소를 지어 보이며 이야기했다.
“말해주겠나?”
아딘은 고개를 끄덕였다.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리곤 마법 주머니로 손을 넣었다.
“보여줘?”
샤푸르는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아딘을 바라봤다.
그런 샤푸르를 바라보며 아딘은 마법 주머니에서 손을 뺐다.
아딘의 손에는 황금빛을 뿜어대는 불멸의 검이 칼집째 쥐어져 있었다.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