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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71화 (71/175)

071 용 (3)

[휘이이잉-!]

찬 바람이 아딘의 얼굴을 때렸다.

“……?”

아딘은 의아한 눈으로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멀쩡해?’

흑룡이 퍼부었던 마법으로 황폐해졌던 불멸의 영역, 그 차가운 대지는 상처 하나 없이 멀쩡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나는…….’

아딘은 물론 라인하르트도 돌풍이 불기 전 자세 그대로 멀쩡하게 서 있었다.

‘도대체 방금 전에 그건……’

아딘은 라인하르트를 바라봤다.

라인하르트도 눈을 껌뻑이며 아딘을 바라봤다.

“스미스 씨도 용하고 싸우셨습니까?”

“그럼 라인하르트 당신도?”

“저는 바짝 엎드린 채 구경만 했는데…….”

자신과 라인하르트 모두 동일한 환상을 봤다는 사실에 아딘은 침을 꿀꺽 삼켰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아딘은 다시 주위를 둘러봤다.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돌풍이 불기 전이나 지금이나 불멸의 영역은 여전히 차가웠고, 그 대지에 자리한 잡초와 조그만 들쥐들은 질긴 생명을 이어가고 있었다.

[휘유우우웅-!]

또다시 돌풍이 불어닥쳤다.

아딘과 라인하르트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세를 바짝 낮춘 채 양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응?’

하지만 이번에 불어온 돌풍은 견딜만 한 수준의 것이었다.

자세를 낮추고 얼굴을 양팔로 가린 게 무색할 정도의 바람 세기에 아딘과 라인하르트는 잠시 서로를 바라보더니 다시 몸을 일으켰다.

‘도대체 무슨 일이……’

아딘은 살짝 인상을 찡그린 채 주위를 둘러봤다.

‘응?’

그리고 그의 눈에 한 남성이 포착됐다.

‘어, 언제……’

그야말로 기척도 없이 나타난 중년 남성은 무심한 표정으로 뒷짐을 진 채 아딘을 바라보고 있었다.

‘설마…….’

북풍을 등진 채 불어오는 바람에 윤기가 흐르는 검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중년 남성.

심연과도 같은 그의 동공을 직시하는 순간 아딘은 그의 정체를 본능적으로 간파할 수 있었다.

‘용…….’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고 뒷골과 정수리가 서늘해짐을 느끼며 아딘은 침을 꿀꺽 삼켰다.

‘조금 전의 싸움은 모두가 저 용이 마법으로 펼친 환상이었어. 어쩌면 나와 싸우기 전 시뮬레이션을 한 걸 수도 있겠지.’

만약 조금 전 싸움이 시뮬레이션이었다면, 아딘 입장에선 용의 허를 찌를 수단을 모두 상실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푸른 불덩어리와 얼음 작살이 동시에 날아든다면…… 아니면 시작부터 허공에 떠버린 채 마법을 쏟아부어 버린다면 난……’

아딘은 떨리는 눈으로 사내를 바라보았다.

혹여나 사내가 조금이라도 이상한 행동을 보인다면 그때부터가 진짜 싸움의 시작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휘이이잉-!]

그렇게 한동안 아딘과 사내는 차가운 북풍을 맞으며 대치했다.

아딘과 똑같은 환상을 자신의 시점으로 목격했던 라인하르트는 슬금슬금 뒤로 발을 빼기 시작했다.

그렇게 숨 막힐 듯한 대치가 차 한잔 마실 시간 정도 이어지던 때였다.

‘응?’

미동도 없이 뒷짐을 진 채 무심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흑발 중년 남성의 뒤편에서 무언가가 빠르게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음을 아딘은 확인할 수 있었다.

‘저건…… 순간이동? 아니지 저 정도면…… 단거리 공간이동?’

가까워지는 속도가, 점차 그 크기가 커지는 속도가 비정상적일 정도로 빨랐다.

‘어……?’

다가오는 존재의 크기가 커짐에 따라 점차 그 외형이 제대로 식별될 때쯤, 아딘의 굳은 표정에 미소가 지기 시작했다.

“오라버니-!”

소리보다 더 빠르게 다가오는 소녀.

‘로제!’

순식간에 아딘의 앞에 도착한 로제는 그대로 그에게 달려들다시피 하며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오라버니!”

반가움에 하이톤으로 올라가는 로제의 목소리에 아딘도 웃으며 그대로 로제의 허리를 끌어안아 주었다.

로제는 아딘의 몸에 메달린 채 양다리로 그의 허리를 꼭 감았다.

마치 어미에게 찰싹 달라붙은 새끼 원숭이처럼 로제는 아딘에게 안긴 채 연거푸 “오라버니.”라는 말만 큰소리로 외칠 뿐이었다.

“로제. 무사했구나.”

이성적으로는 로제가 무사하리라 아딘은 생각했다.

용의 딸이니만큼, 용이 그녀를 해치진 않았으리라 판단했다.

설령 용이 나쁜 마음을 품고 있다 하더라도 불멸자 샤푸르가 그녀를 지켜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막상 불멸의 영역으로 들어와 흑룡이 만들어낸 환상 속에서 놈과 싸우면서 그러한 이성적 판단과 믿음은 흔들렸다.

“정말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로제.”

다행히 아딘의 판단과 믿음은 올바른 것이었다.

아딘을 꼭 껴안은 채 그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로제는 이내 고개를 뒤로 빼내며 아딘을 바라보았다.

활짝 웃고 있는 와중에도 눈물을 글썽이는 그녀의 모습에 아딘은 속에서 무언가 왈칵 터져 나오는 것을 느꼈다.

그대로 아딘은 로제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춰 주었다.

그리곤 다시 꼭 그녀를 껴안아 주며 토닥여 주었다.

“크흠-!”

그 모습을 무심한 눈으로 지켜보던 중년 남성이 헛기침을 하며 처음으로 반응을 보였다.

그것에 아딘은 다시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 참.”

아딘에게 안겨 웃으면서 울고 있던 로제는 눈물을 훔치곤 아딘에게서 떨어졌다.

그리곤 그의 손을 잡고는 중년 남성에게로 이끌고 갔다.

“아빠.”

그리고 로제는 중년 남성을 향해 이야기했다.

“제가 이야기했던 오라버니예요.”

아딘은 눈이 휘둥그레진 채 로제와 남성을 번갈아 가며 쳐다봤다.

그런 아딘을 바라보며 로제가 말했다.

“오라버니. 아빠예요, 제 아빠예요.”

그녀의 천진난만한 표정에도 불구하고 아딘은 얼빠진 표정을 지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아빠…… 라고?’

아딘은 멍하니 입을 벌린 채 중년 남성을 바라보았다.

중년 남성, 로제의 아버지는 무심한 표정으로 가볍게 콧방귀를 뀌며 아딘을 바라보았다.

* * *

아딘이 로제와 상봉하고 그녀의 아비와 대면하고 있을 때.

같은 시각 엘프숲 동부 드워프 마을 입구.

중후한 인상의 남성 엘프 하나가 땅 위를 미끄러지듯 이동하고 있었다.

“멈추십시오!”

외곽 경비 책임자 쿠다르와 그 부하들이 글레이브를 든 채 나타나 엘프의 앞을 막아섰다.

드워프들의 등장에 엘프도 움직임을 멈췄다.

엘프는 완전한 나체 상태였기에 쿠다르는 최대한 시선을 엘프의 눈으로 향하게 두며 소리쳤다.

“엘프가 우리 영역에는 무슨 일로 오시는 겁니까?”

쿠다르의 물음에 엘프는 피식 웃으며 드워프어로 대답했다.

“너희 촌장 만나러 왔으니까, 길이나 안내해.”

엘프답지 않은 말투에 일순간 쿠다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전해 들은 바가 없습니다.”

쿠다르의 말에 엘프는 콧방귀를 뀌었다.

“가서 너희 촌장한테 하게마가 찾아 왔다고 전해.”

쿠다르는 입을 다문 채 잠시 동안 엘프의 눈을 바라봤다.

“너희 둘이 갔다 와.”

쿠다르는 엘프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자기 우측에 있던 두 드워프에게 명령했다.

곧 드워프 둘이 마을 쪽으로 달려갔고, 엘프는 드워프들이 짧은 다리로 달려가는 걸 바라보며 씩 웃더니 이내 뒷짐을 진 채 늘어선 불칸 신상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둘 사이에 잠시 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은 잠시 후 돌아온 두 드워프에 의해 깨졌다.

“모셔 오라고 하십니다.”

드워프들의 말에 쿠다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촌장님께서 허락하셨습니다.”

“허락이 없어도 갈 생각이었어. 앞장서.”

엘프의 계속되는 하대에 쿠다르는 눈썹과 광대를 동시에 씰룩였다.

‘참자.’

그렇게 다섯 드워프를 앞세운 채 엘프는 천천히 그 뒤를 따라 드워프 마을로 들어섰다.

“어머나!”

벌거벗은 엘프가 마을로 들어서자 마을 입구에 있던 드워프 여성들이 화들짝 놀라며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 모습이 썩 재미있기라도 한지 엘프는 실실 웃으며 더욱 당당하게 보폭을 넓혀 걷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들은 촌장 팔키르의 집에 도착했다.

“거 뭐라도 걸치고 좀 오지?”

팔키르의 말에 엘프는 씩 웃으며 답했다.

“너희들이 숲을 망쳐놓은 것도 내가 봐줬는데, 너희도 내가 벗고 다니는 것 정도는 봐줘야 하는 거 아닌가?”

“하여간 혓바닥은……. 들어 와.”

팔키르가 집으로 들어갔고, 곧 엘프도 뒤따라 들어갔다.

“술이라도 줘?”

팔키르의 말에 엘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여간 입맛 까다롭기는……”

팔키르는 구시렁거리며 과일주를 병째 한 모금 들이켠 후 의자에 앉았다.

“그래. 엘프 장로 하게마 씨가 무슨 일로 이 누추한 곳에 찾아오셨을까?”

팔키르의 말에 엘프, 하게마는 방안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벌써 200년이 다 돼가네. 자네 조상이 이 집을 지은 지도 말이야.”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지으셨지.”

“해방자가 나타났다고?”

“자네 손자가 그러디?”

“그래. 고드리고가 이야기해 주더라.”

팔키르는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떠나겠지?”

“떠나야지. 해방자께서 인도하시는 곳으로. 왜, 아쉽나?”

“좀 아쉽긴 하지.”

하게마의 말에 팔키르는 웃으며 과일주를 쭉 들이켰다.

“예언대로라면 이제 자네들은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될 거야. 그리고 그 소용돌이는 분명하게 말하겠지만 피바람을 동반하겠지.”

하게마가 웃음기 없는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팔키르도 더 이상 웃지 않은 채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우리 드워프는 엘프와 달라. 역사의 소용돌이니 피바람이니 하는 것들이 두려워 숲에 숨어 살거나 하진 않는다고.”

“자칫 드워프라는 종족 전체가 멸절될 수도 있어.”

하게마의 말에 팔키르는 씩 웃었다.

“해방자께서 우리를 인도해 주시는 한, 그럴 일은 없어.”

“나도 그리되기를 바라고 있어.”

“엘프는 따로 뭐 방침이라도 정해뒀나?”

하게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가 그런 거 안 정하는 걸 잘 알고 있으면서 물어보는 심보가 참 고약하군.”

“크크크.”

팔키르는 자리에서 일어나 찬장에서 새 술병을 꺼냈다.

그리곤 하게마를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이래서 자네들과는 오래 갈 수가 없는 거야. 우리는 인간들하고 함께 있는 게 어울려.”

“그 인간들이 자네들의 조상을 터전에서 몰아내고 노예로 삼았지.”

“그리고 그 인간들 가운데 우리의 해방자가 나올 것이라고 신께서 예언해주셨지.”

팔키르는 술을 한 모금 넘겼다.

그리곤 결의에 찬 표정으로 하게마에게 이야기했다.

“그게 우리의 길이야.”

하게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한 모금 주겠나?”

팔키르가 씩 웃으며 병 주둥이를 흔들어 술을 쏟아 냈다.

병에서 빠져나온 술은 그대로 허공에서 멈췄다.

그리곤 하게마의 입으로 쭉 들어갔다.

“어때? 죽이지?”

팔키르의 물음에 하게마는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자네들 길과 우리 길은 달라.”

그 말에 팔키르가 소리내어 웃기 시작했고, 하게마도 따라서 웃음을 터뜨렸다.

* * *

‘로제의 아버지라…….’

김현수는 영웅일대기를 쓰면서 많은 부분을 맥거핀으로 남겨두었다.

로제의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로제가 용의 딸이라는 설정만이 있었을 뿐, 구체적으로 그녀의 아비에 관한 설정은 따로 해두지 않았다.

즉, 지금 아딘의 곁에서 라인하르트와 함께 하늘을 날아다니며 신나게 웃고 있는 로제를 바라보는 중년 남성은 그가 설정해두지 않은 존재라는 의미였다.

‘이건 아예 맥거핀 수준을 넘어서는 존재와의 조우구만.’

아딘은 그렇게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려고 했다.

“루이 알랭이라 부르게.”

중년 남성의 말에 아딘은 잠시 눈을 껌뻑거리며 그를 바라봤다.

중년 남성, 루이 알랭이 그런 아딘을 바라보며 무심한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내 이름을 물어보려고 하지 않았나?”

“아…… 네…….”

“로제의 어미와 만나던 시절, 내가 인간 사회에 섞여들기를 하면서 불리던 이름일세.”

그러면서 루이 알랭은 자신의 옷을 눈으로 가리키며 이야기했다.

“자네도 알겠지만, 나름 10년 전까지 슈드 자치령에서 유행하던 스타일일세.”

“아…… 네…….”

아딘은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허공에 뜬 로제와 그녀의 도움으로 함께 떠오른 라인하르트에게로 돌렸다.

잠시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그 침묵은, 로제와 라인하르트가 고도 150m 정도 허공까지 치솟아 올랐을 때쯤, 루이 알랭에 의해 깨졌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네.”

“아, 네. 물어보십시오.”

루이 알랭이 아딘을 바라봤다.

그 무심한, 심연과도 같은 눈동자를 아딘은 최대한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며 바라봤다.

“자넨 누군가?”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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