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5 엘프숲 (2)
‘심상치 않다.’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면모만을 강조한 듯한 미남미녀의 반라 혹은 전라를 보면서 넋을 놓은 로제나 라인하르트와는 달리 아딘은 온몸의 신경이 곤두선 상태였다.
나무 위에서 자신들을 내려다보는 세 엘프 남녀의 표정에서, 결코 숨겨지지도 않고 숨길 의사도 없어 보이는 강렬한 적의와 분노를 읽은 아딘은 침을 꿀꺽 삼키며 양팔을 천천히 위로 들어 올렸다.
자신은 적의가 없으며, 싸울 의사도 없음을 표명하는 것이었다.
그 상태로 아딘은 천천히 입을 열어 정중한 어조의 엘프어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반갑습니다. 숲의 종족이여.”
아딘의 입에서 능숙한 엘프어가 나오자 순간 세 엘프는 당황했다.
서로의 눈치를 살피던 엘프들은 이내 다시 시선을 아딘에게로 고정했다.
여전히 누그러지지 않은, 오히려 적의와 분노에 의혹이라는 감정까지 씌워버린 것 같다는 느낌을 받으며, 아딘은 말을 이었다.
“우리는 불멸의 신전으로 참배하고자 순례길에 오른 순례자입니다. 우리는 그대들은 물론 숲에 자리한 모든 생명체에게 그 어떠한 해도 입히지 않았으며, 또한 입히지 않을 생각입니다.”
그 말에 엘프들의 시선이 일순간 아딘의 앞에 누운 대왕 독거미의 사체에게로 향했다가 다시 아딘에게로 향했다.
그러한 시선의 움직임에서, 그리고 여전히 굳어 있는 엘프들의 표정에서 그들이 무슨 오해를 하는 가를 간파한 아딘은 손을 내저으며 이야기했다.
“대왕 독거미의 죽음과 우리는 무관합니다. 우리가 왔을 때, 이미 대왕 독거미는 죽어 있었습니다.”
아딘의 말에 세 엘프는 한 차례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엘프 여성, 실루레아가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녀가 눈을 감은 순간, 숲의 기억이 그녀에게로 전달됐다.
그리고 그 기억에서 그녀는 대왕 독거미가 이 자리에 나타난 것과 상처 하나 없이 내장이 사라진 사체가 된 것 그리고 아딘과 로제, 라인하르트가 나타난 것을 볼 수 있었다.
실루레아는 다시 눈을 떴다. 그리곤 자신을 바라보는 실루고르와 고드리고에게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어 보였다.
실루고르는 살짝 당황한 표정으로 아딘을 바라봤다.
‘됐어.’
엘프가 숲의 기억을 볼 수 있다는 것.
그 설정을 직접 만든 만큼, 아딘은 엘프들이 자신들에게 품은 오해가 풀리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상황은 아딘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숲의 기억을 살펴보았던 실루레아가 고개를 흔들자 이번엔 고드리고가 눈을 감았다.
그리고 고드리고는 숲의 도움을 받아 아딘과 로제, 라인하르트가 지닌 힘의 총량을 확인했다.
‘이, 이건……!’
별 볼 일 없는, 일반적인 인간에 불과한 라인하르트를 확인한 후 그의 감각이 아딘과 로제에게로 향했을 때 고드리고는 그만 눈을 번쩍 뜰 수밖에 없었다.
이마에서 식은땀을 흘리며 고드리고는 아딘과 로제를 바라보았다.
‘이 정도 힘이면…… 젊은 용에 필적할 정도야. 도대체……’
고드리고는 흔들리는 눈으로 아딘과 로제를 바라보며 실루고르와 실루레아에게 자신이 확인한 것을 조용히 읊어 주었다.
그의 이야기를 들은 실루고르와 실루레아도 모두 화들짝 놀라며 아딘과 로제를 바라봤다.
‘뭐지?’
자신들에 대한 적의와 분노가 천천히 공포로 변해가는 것을 보며 아딘은 일이 또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음을 직감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그대 종족과 이 숲 전체에 그 어떠한 적의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불멸의 신전으로 가는 순례자일 뿐입니다. 대왕 독거미의 죽음은 우리와는 전혀…….”
아딘의 자기 변론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실루고르가 입을 열어 그 말을 막았다.
“그대들의 힘은 지나치게 강하다.”
실루레아가 그 말을 이어받았다.
“그대들의 힘은 숲의 종족을 죽이기에 충분하다.”
고드리고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설령 그대들이 숲에서 일어난 괴이한 사건과 무관하다고 하더라도, 이대로 그대들을 두는 것은 위험하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한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그러므로 그대들에게는 숲의 심판이 필요하다.”
아딘은 확실히 일이 틀어짐을 깨달았다.
“자,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이건 말도 안 됩니다. 우린 이 일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아딘이 다급하게 목소리를 높이자 그제야 로제와 라인하르트도 일이 심상찮음을 느꼈다.
“우리는 당신들에게 적대적이지 않습니다!”
아딘은 강하게 엘프들에게 항변했다.
하지만 그의 말은 더 이상 엘프들에게 먹히지 않았다.
[쿠구구구구구-!]
땅이 들썩이기 시작했고, 숲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곧 아딘과 로제, 라인하르트 사이로 울창한 넝쿨과 나무들이 생겨나며 서로를 분리하기 시작했다.
“오라버니!”
로제가 다급한 목소리로 아딘에게 손을 뻗으며 외쳤다.
하지만 그녀의 손길은 자라난 나무와 넝쿨에 의해 가로막혀 버렸다.
“로제! 내가 한 말 잊지 마! 절대! 절대 숲의 생명을 건드려서는 안 돼!”
“오라버니!”
“로제…… 반드시 구하러 갈게! 반드시 구하러 갈 테니까!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어!”
그 말을 끝으로, 아딘과 로제는, 서로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을 만큼 멀리 떨어지게 됐다.
* * *
엘프는 생명의 존엄성을 지지하는 자연주의적 종족이다.
나무 열매를 채취하는 것을 제외하면, 그들은 숲에 존재하는 생명체에 그 어떠한 훼손도 가하지 않았다.
이것은 과거 그들의 조상이 아직은 석기 시대에 머물고 있던 인간과 함께 살 때부터 종족 전체에 각인돼 있던 하나의 정언명령이었다.
그랬기에 그들은 폭력적인 인간에게 밀려나 엘프숲에 숨어들게 됐다.
그리고 그들은, 비록 조상이 인간에 의해 엘프숲에 밀려나 숨어 살게 됐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살생의 원칙을 지켜나가고 있다.
“젠장…….”
실루고르와 실루레아, 고드리고 이 세 엘프는 아딘과 로제, 라인하르트를 죽이지 않았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들이 직접 나서서 이들을 죽이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그들이 보기에 이 세 사람이 위험한 존재라 한들, 어쨌건 하나의 생명이었으니까.
‘일이 이런 식으로도 꼬일 수가 있다니…….’
아딘은 자기 눈앞에 드리워진 울창한 수목을 바라보며 이를 갈았다.
엘프와 어느 정도 접촉할 것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일찍, 그것도 가장 최악의 상황으로 만나는 것은 미처 생각지도 못했었다.
그리고 그것이 결과적으로 아딘을 로제와 라인하르트로부터 떨어뜨려 놓고야 말았다.
‘지금 위치가 어떻게 된 거지?’
아딘은 혼란한 마음을 다잡고자 노력하며 마법 주머니에서 두루마리를 꺼내 펼쳤다.
곧 두루마리 위로 자신을 중심으로 엘프숲의 상세 지도가 나타났다.
숲을 훼손하지 않고 이동할 수 있는 루트를 기준으로 아딘과 로제는 약 4일 정도는 이동해야 만날 수 있는 거리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라인하르트는 또 로제가 있는 곳에서 4일 정도는 이동해야 만날 수 있는 거리에 자리해 있었다.
‘아직은 그래도 숲 동부야. 다행히도 말이야.’
아딘은 두루마리를 도로 마법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리곤 머릿속에 기억해둔, 로제에게로 향하는 루트를 떠올리며 불칸의 갑옷을 꺼내 입었다.
찬란한 황금빛 갑옷으로 무장한 아딘은 그대로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거의 한 걸음마다 10m는 쭉쭉 돌파할 만큼 빨리 이동하면서도 아딘은 주변의 식물들을 훼손하지 않았다.
‘이미 엘프와 오해가 생긴 상황이야. 이 상황에서 쓸데없이 숲을 건들여서 더 오해를 심화시킬 필요는 없어.’
용조차도 이 숲에서는 엘프보다 한 수 아래다.
아딘이 3대 신물을 모두 손에 쥐고 정신력을 극한으로 성장시켜 신물들의 힘을 모두 끌어낼 수 있게 된다면, 그래서 사실상 신적 존재가 된다면 모를까. 적어도 지금 상황에선 엘프와 싸워서 좋을 건 없었다.
‘오해는 얼마든지 다시 풀 수 있어.’
최대한 로제가 숲의 생명체를 해치지 않기를, 최대한 라인하르트가 운이 좋기를 간절히 바라며 아딘은 그렇게 계속해서 쭉쭉, 빠르게 달리고 또 달렸다.
그렇게 한참을 달린 끝에 아딘은 조그만 호수를 끼고 있는 공터에 도착했다.
[츠츠츠츳-!]
‘응?’
그리고 그곳에서 아딘은 볼 수 있었다.
상처 하나 없이 내장만 싹 사라진 채 죽은 대왕 독거미의 사체와 그 앞에서 혀를 날름거리는 뱀 인간을.
‘저건……?’
고블린을 앞세운 채 샤펠 제국의 중보병과 골렘에 맞서 싸우던 뱀 인간.
로제에 의해 모두가 소용돌이에 휩쓸려 갈려 나간 존재.
그런 뱀 인간을 기억해낸 아딘은 대왕 독거미의 사체 앞에서 혀를 날름거리며 손으로 자기 가슴과 목을 긁적이는 놈의 모습에 홀연히 깨달음 하나를 얻을 수 있었다.
‘저 자식들이구나!’
아딘을 곤경에 빠뜨린, 상처 하나 없이 내장이 사라진 대왕 독거미의 사체.
‘저 자식들이!’
그 범인이 뱀 인간일 것이라는 깨달음이 아딘의 뇌리를 강타했다.
‘저 자식들 때문에!’
아딘은 그대로 뱀 인간을 향해 쭉 나아갔다.
[츠츳-?]
[쿠우웅-!]
그리고 뱀 인간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아딘의 기척을 느낀 순간, 불칸의 갑옷으로 무장한 아딘은 그대로 뱀 인간을 향해 몸통박치기를 시전했다.
* * *
‘절대 생명을 해치지 말라고 하셨어. 오라버니는 분명히 그렇게 말씀하셨어.’
홀로 남은 로제는, 점차 어두워지는 숲에서, 정신을 갉아먹기 시작하는 공포와 맞서 싸우며, 고립감을 밀어내기 위해 애를 쓰며 아딘의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반드시 찾으러 가겠다던 그 말, 절대로 숲의 생명체들을 해치지 말라던 그 말, 엘프는 우리를 영원히 가둬버릴 수도 있다는 그 말.
그 말들을 떠올리며 로제는 가까스로 견뎌내고 있었다.
[꾸우윅?]
하지만 지금, 그녀의 앞에 나타나 코를 벌름거리며 입맛을 다시는 녹색 괴수, 트롤은 그녀에게 있어 하나의 딜레마가 되고 말았다.
‘절대 숲의 생명을 해치면 안 돼.’
아딘의 말에 따르면 그녀는 결코 트롤을 해쳐서는 안 됐다.
‘하지만 지금 트롤은 나를 잡아먹으려고 하고 있어.’
문제는 아딘의 말을 따를 경우, 그녀가 트롤에 의해 죽게 된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하지?’
밀려오는 당혹감 속에서 딜레마에 빠진 로제는 천천히 자신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하는, 3m에 육박하는 트롤을 바라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에라도 25,000도에 달하는 푸른 불덩이를 소환해 산채로 녹여버리고 싶었지만 그럴 순 없었다.
‘바람으로 날려버릴까?’
하지만 바람을 잘못 일으켰다간 숲이 훼손될 우려가 있었다.
‘어떻게 하지?’
로제의 두뇌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트롤이 점점 가까워짐에 따라 점차 트롤의 몸에서 나는 썩은 악취가 코를 찌르는 사이, 로제의 머릿속에서는 수십 개의 대처 방법이 떠올랐다.
‘아!’
그리고 그중 가장 적절한 것을 로제는 떠올릴 수 있었다.
‘할 수 있을까?’
물론 확신은 다소 부족했다.
하지만 이것 이외에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로제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곤 트롤을 노려보며 천천히 힘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심장에서 뿜어져 나온 용의 힘이 무형의 파장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 파장은 아지랑이처럼 그녀의 온몸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꾸위익?]
그리고 그 파장에 정면으로 노출된 트롤은 발걸음을 멈춘 채 가만히 로제를 바라봤다.
그사이 로제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힘은 더욱 강해졌다.
[꾸위이이이익-!]
그 압도적인 힘의 파장에 마침내 트롤은 로제가 자신의 먹잇감이 아님을 깨닫고는 황급히 몸을 돌려 도망가기 시작했다.
‘됐어!’
로제는 미소를 지으며 힘을 흩어내기 시작했다.
‘이대로 오라버니가 구하러 오실 때까지 기다리면 될 거야.’
비록 식량이고 뭐고 다 아딘에게 있었지만, 그래도 로제는 믿었다.
아딘이 빠른 시일 내에 자신을 구하러 올 것이라고.
‘오라버니…… 서두르세요…….’
그렇게 로제가 간절한 마음으로 아딘을 찾고 있을 때였다.
[휘이이이잉-!]
갑자기 돌풍이 불어닥쳤다.
돌풍에 옷자락이 펄럭이기 시작하자 로제는 눈을 감은 채 힘을 끌어올려 바람에 저항했다.
잠시 후, 바람은 사그라들었다.
로제도 힘을 흩으며 다시 눈을 떴다.
‘사, 사람?’
그리고 로제는 볼 수 있었다.
자신의 정면에서, 뒷짐을 진 채 묘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한 중년 남성을.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