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4 엘프숲 (1)
광명력 992년 10월 3일 아침.
아딘과 로제, 라인하르트는 드라이분데스를 떠나 엘프숲으로 향했다.
“엘프는 자연주의적 종족이야. 그래서 인위적으로 한 종이 다른 종을 길들이는 걸 혐오하지. 그래서 말을 타서도 안 되고, 말에다 짐을 지게 해서도 안 되는 거야.”
마차를 모두 팔고, 어지간한 짐은 마법 주머니에 모두 집어넣은 이유를 그렇게 설명하며 아딘은 앞장섰다.
드라이분데스에서 엘프숲 외곽까지의 거리는 그리 길지 않았던 만큼, 세 사람은 정오가 되기 전에 숲의 초엽에 들어설 수 있었다.
“이제부턴 정말 정신 바짝 차려야 해. 풀을 밟는 것까지야 어쩔 수 없다지만, 고의로 풀을 뜯는다든가 나무를 훼손한다든가 하는 행위는 절대 해서는 안 돼.”
그렇게 하다간 엘프의 분노에 직면할 것이라고 아딘은 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괜히 따라왔나?’
라인하르트는 그렇게 생각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
‘그냥 힘으로 다 밀어버리면 될 것 같은데…….’
그리고 로제는 이해할 수 없단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 모습을 보고 로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를 간파한 아딘은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웃음기 하나 없는 건조한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로제. 절대 엘프를 힘으로 이기려 하지 마.”
자기 생각을 정확하게 꿰뚫은 아딘의 말에 로제는 처음에 살짝 당황했지만, 이내 단호한 표정으로 자기 의사를 표명하기 시작했다.
“어째서 그래야 하는 거죠? 엘프가 아무리 강해도 오라버니하고 제가 힘을 합치면 아무 문제도 없을 것 같은데.”
그 말에 아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허허벌판에서 엘프와 마주한다면 로제 말대로 되겠지. 하지만 기억해. 여기는 엘프숲이야. 엘프의 고향이자 그들의 정신과 숲 전체가 하나가 된 공간이지.”
“정신과 숲 전체가…… 하나요?”
“엘프가 마음만 독하게 먹는다면 우린 숲에서 영원히 빠져나갈 수 없을 거야. 아무리 나무를 불태우고, 칼로 베어내더라도 숲은 계속해서 우리 앞을 가로막으며 영원히 한 장소를 빙빙 돌도록 할 테니까.”
“하늘로 날아가면 되지 않나요?”
“아니. 하늘로 떠오르더라도 숲을 빠져나갈 순 없어.”
“어째서요?”
“우리가 하늘로 날아오르려고 하면, 모든 식물의 줄기가 우리 발목을 잡을 거니까. 베어도 베어도, 태워도 태워도 계속해서. 끊임없이.”
엘프숲은 엘프의 멸종을 방지하는, 말하자면 종의 보루와도 같은 역할을 하는 엘프의 성지다.
이 숲 밖에서는 인간의 조직력 앞에서 엘프가 불리할진 몰라도, 적어도 숲 안에서만큼은 그들을 능가할 종이 없었다.
심지어 용조차도 엘프가 작정하고 가둬버리면 영원히 숲을 헤메다 죽어야만 할 정도였다.
그만큼 엘프숲에서의 엘프란 막강한 존재였다.
“세상에…….”
그제야 자기 생각의 가벼움을 인지한 로제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아딘은 게마인샤프트 동부 방언으로 조금 전 로제에게 했던 이야기를 라인하르트에게 똑같이 전해주었다.
그 소리를 들은 라인하르트는 안색이 창백해진 채 다리를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상당히 긴장한 모습을 보이자 아딘은 역으로 안심할 수 있게 됐다.
‘그래. 엘프숲에선 저렇게 좀 긴장한 모습을 보여야 해. 느슨하게 일반적인 숲처럼 생각하고 움직였다간 자칫 영원히 숲에 감금될 수 있으니까.’
아딘은 고개를 끄덕인 후 다시 앞장서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로제가 아딘의 곁에 바짝 붙어섰고, 아딘은 그런 로제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가, 같이 갑시다.”
라인하르트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가까스로 옮기며, 최대한 주위 식물을 밟지 않으려 애쓰면서 그 뒤를 따랐다.
“아 참, 그리고 엘프는 굉장히 자연주의적이라 옷도 안 입어. 뭐, 그래도 기본적으로 가릴 곳 정도는 어떻게 땅바닥에 떨어진 나뭇잎을 모아서 가리거나 하지만 그것조차도 자연을 훼손하는 거라며 아예 나체로 돌아다니는 것들도 있어.”
그 이야기를 아딘은 아퐁어와 게마인샤프트 동부 방언으로 각각 로제와 라인하르트에게 이야기해주었다.
로제는 별 감흥 없다는 듯, 그저 아딘의 곁에서 그의 손을 꼭 붙든 채 걸을 뿐이었다.
그리고 라인하르트는 안색이 창백한 와중에도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반짝였다.
‘엘프 여자가 그렇게 미녀라든데…….’
그 표정에서 라인하르트가 무슨 생각을 하는가를 파악한 아딘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 직접 마주하지 않으면 무슨 상상이건 못할까?’
비록 영웅일대기 본편에서는 제대로 등장하지도 않고, 단지 간단하게 몇 차례 언급만 됐을 뿐이었지만 그 설정 자체는 김현수가 상당히 공을 들인 장소가 엘프숲이었다.
‘엘프숲에서 엘프를 만나는 경우는 두 가지지. 최북단에 가까워졌거나, 그들이 우리를 적대하거나.’
불멸의 신전 근처에 도착하면 엘프는 모습을 드러낼 터였다.
그때는, 아딘이 잘만 설명한다면, 그리고 불멸자 샤푸르가 자기 의지를 강하게 내비친다면 엘프와의 조우는 별다른 충돌 없이 끝날 것이다.
하지만 불멸의 신전 근처에도 가지 않았는데 엘프와 만난다면, 그 만남은 결코 우호적이진 않을 터였다.
‘뭐, 최대한 조심해야겠지.’
그렇게 아딘은 로제와 라인하르트를 이끌고 엘프숲 동부에서 천천히 최북단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 * *
“뭔가 보이십니까?”
낙엽을 엮어 하복부를 가린 엘프 남성이 굵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무것도 안 보입니다. 숲은 그저 이 호랑이가 여기 나타난 장면과 이렇게 시체가 된 장면만을 보여주고 있을 뿐입니다. 그 사이의 과정은 완벽하게 날아가고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낙엽을 엮어 가슴과 하복부를 가린 엘프 여성이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벌써 열 번째입니다. 우리가 발견한 것만 해도 말입니다.”
엘프 남성의 말에 엘프 여성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엘프 남성, 실루고르가 말을 이었다.
“숲이 기억하지 못한다는 건, 결국 이 사달을 만들어내는 것들이 마법적 능력을 갖추고 있음을 뜻하는 겁니다.”
그 말을 엘프 여성, 실루레아가 이어받았다.
“굉장히 강력한 마법적 능력일 겁니다. 어쩌면 용에 필적할 수도 있는…….”
그 말에 실루고르는 인상을 찡그렸다.
한동안 심각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던 두 엘프는 이내 시선을 바닥의 호랑이에게로 돌렸다.
‘상처도 없고, 내장도 없고…….’
상처 하나 없이 내장만 깔끔하게 사라진 야수와 괴수의 사체.
최근 1주일 사이 호랑이부터 늑대, 트롤 심지어 엘프숲 야생 생태계 최상위 포식자 중 하나인 대왕 독거미마저도 이런 식으로 내장이 사라진 채 죽음을 맞이했다.
사체를 발견한 엘프들은 곧장 숲의 기억을 뒤져가며 범인을 색출하려 했지만, 숲의 기억에는 사체가 되기까지의 과정은 생략된 채 사체가 되기 직전과 직후의 장면만이 남아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1년 전, 흔하게 숲에서 볼 수 있었던 고블린이 보기 드물어졌을 때부터 뭔가 숲에 심상찮은 일이 생기고 있음을 감지한 실루고르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실루레아도 마찬가지로 심각한 표정으로 가죽만 남은 호랑이 사체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실루레아가 물었다.
“혹시 용이……?”
실루고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용들은 이미 10년 전에 모두 잠들었습니다. 그들이 깨어나려면 적어도 500년은 지나야합니다.”
“아직 그는 깨어 있지 않습니까?”
“그는 신전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깨어있는 건 이제 곧 그가……”
실루고르가 말을 막 마치기 전,
“실루고르, 실루레아 형제.”
다른 엘프가 나타났다.
실루고르나 실루레아와는 달리 신체의 모든 부위를 드러낸 엘프 남성, 고드리고는 잔뜩 굳은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숲에 인간이 들어왔습니다.”
고드리고의 말에 실루고르와 실루레아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서로를 바라봤다.
“인간?”
“인간이라면……”
“인간이니까…….”
두 엘프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동시에 고드리고를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갑시다.”
“인간이 있는 곳으로.”
고드리고도 고개를 끄덕인 후 가볍게 땅을 박차고 나무 위로 뛰어 올랐다.
실루고르와 실루레아도 그 뒤를 따라 나무 위로 사뿐히 올라섰다.
이윽고 세 엘프는 빠르게, 나무를 일절 훼손하지 않으며 나무에서 나무 사이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 * *
아딘은 숲길을 걸으며 로제와 라인하르트에게 숲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야수와 괴수의 존재였다.
하지만 로제와 라인하르트는 딱히 그것들에 대해서는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았다.
이미 렝고스에서 아딘이 황제 지네를 통제하는 것을 본 이상, 그리고 그 지네를 타고 뵌가르트까지 이동해본 이상, 호랑이니 늑대니 트롤이니 하는 것들은 별다른 걱정거리가 되지도 않았다.
실제로 세 사람을 노리고 종종 늑대와 호랑이 그리고 트롤이 나타나곤 했지만 그때마다 아딘이 네르갈의 목걸이를 사용함으로써 세 사람은 별 해를 입지 않고, 또 해를 끼치지도 않으며 전진할 수 있었다.
그렇게 엘프숲에 들어선 지 사흘이 지나 10월 6일이 됐다.
챙겨온 식량은 넉넉했고, 중간중간 계곡이나 호수도 자주 보였기에 그 사흘간 세 사람은 별다른 부족함이나 불편함을 느끼지 않으며 걸을 수 있었다.
‘아름다운 풍경이야.’
처음 아딘의 경고로 인해 상당히 긴장했던 라인하르트도 사흘 동안 별다른 큰일이 없자 슬슬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다.
‘벌거벗은 엘프 여자는 안 나타나려나?’
그리고 그의 긴장이 완전히 풀려버렸을 무렵
“헉-!”
세 사람의 눈앞에 대왕 독거미의 사체가 나타났다.
“뭐, 뭐야 이건?”
라인하르트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눈앞에 나타난 대왕 독거미의 사체를 바라봤다.
당혹스럽기는 아딘과 로제도 마찬가지였다.
‘무슨 시체가…….’
골격과 외피만 남은 채, 속은 싹 비어버린, 바닥에 납작하게 붙어 있는 대왕 독거미의 사체를 바라보던 아딘은 천천히 그것을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상처가 하나도 없는데…….’
대왕 독거미 사체 주위를 한 바퀴 빙그르르 돌며 상태를 확인한 아딘은 인상을 찌푸리며 마법 주머니에서 두루마리를 꺼냈다.
<대왕 독거미>
<최대 높이 3m, 길이 7m까지 자라는 거대한 독거미다.>
<독 자체는 생명에 지장을 주지 않지만, 극소량이라도 중독되면 반년 이상 전신 마비를 겪게 된다.>
<엘프숲 전체에 두루 퍼져 있다.>
두루마리는 그저 대왕 독거미에 관한 정보만을 알려주고 있을 뿐이었다.
아딘은 대왕 독거미 종 전체가 아닌, 눈앞에 있는 개체에 관한 정보를 얻고자 계속해서 상념을 떠올리고 또 떠올렸다.
하지만 두루마리는 종에 관한 정보 이상을 제공해주지는 않았다.
‘에이 씨. 한 번씩 이따위라니까.’
아딘은 신경질적으로 두루마리를 말아 마법 주머니에 집어 넣었다.
그리곤 천천히 대왕 독거미의 사체로 다가가 그것을 슬쩍슬쩍 만져보기 시작했다.
‘죽은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외피에선 여전히 윤기가 흐르고 있었다.
가볍게 눌러보아도 푸석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온기가 아직 남아 있었다.
즉, 죽은 지 정말 얼마 되지 않은 존재란 것이었다.
“로제. 혹시 네 힘으로 얘가 어떻게 죽었나 확인할 수 있겠니?”
아딘은 사체를 바라보며 로제에게 물었다.
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로제?”
아딘은 고개를 뒤로 돌려 로제를 바라봤다.
로제는 멍한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것은 라인하르트도 마찬가지였다.
“로제?”
아딘의 시선이 로제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입을 살짝 벌린 채 멍하니 허공의 한 지점을 응시하고 있었다.
가만히 로제를 바라보던 아딘이 그녀의 시선을 따라 허공으로 시선을 옮겼다.
‘젠장!’
그리고 아딘은 볼 수 있었다.
나뭇잎으로 대충 신체 주요 부위를 가린 두 엘프 남녀와 아무것도 가리지 않은 한 엘프 남성을.
잔뜩 굳어 있는 그들의 표정을.
나무와 혼연일체가 돼 살살 불어오는 바람에 나뭇가지와 함께 흔들리면서도 묵직한 무게감과 힘이 느껴지는, 분노한 엘프를.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