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3 복귀 (3)
광명력 992년 9월 11일 아침.
아딘과 로제, 토리, 라인하르트 네 사람은 뵌가르트에서 배를 이용해 트링겐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곧장 브릴트로 가는 선박에 오른 네 사람은, 일주일간의 항해 끝에 9월 18일 정오에 브릴트항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하루 쉬는 동안 아딘은 토리를 파라곤에 자리한 잭슨 가문의 저택에까지 호위할 용병을 물색했고, 두루마리까지 동원한 철저한 검증 끝에 믿을 만한 용병 둘을 구할 수 있었다.
그리고 9월 19일 정오.
브릴트항에서 아딘과 로제, 라인하르트는 토리를 배웅하게 됐다.
“감사합니다. 정말…… 정말 스미스 씨 덕분에…….”
파라곤행 갤리선으로 올라가는 계단 아래에서 토리는 아딘을 향해 수 차례 허리를 숙여가며 감사를 표했다.
눈물이 글썽이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아딘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부디 다음에 여행이 끝나시고 파라곤에 들르신다면 꼭 잭슨 저택으로 찾아와 주십시오. 제가 반드시 은혜를 꼭 갚겠습니다.”
토리의 말에 아딘은 고개를 끄덕였다.
‘암. 찾아가야지. 잭슨 가문의 정치적 영향력을 생각한다면…….’
토리가 실종된 1년 동안, 잭슨 가문의 힘은 더욱 강해졌다.
3대 상단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바로 그 아래에 이름을 올릴 정도로까지 성장한 잭슨 가문은 적어도 파라곤에서 만큼은 3대 상단보다 더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됐다.
‘잭슨 가문은 벨로디나에 별다른 이권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 충분히 내 편으로 만들 수 있을 거야.’
유리 콘스탄틴에게 복수하고, 본래 아딘 콘스탄틴에게 갔어야 할 왕좌를 차지하게 된다면 제니스 공화국과의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 되고 말 터였다.
그때 자신이 토리에게 받은 호의를 활용하여 잭슨 가문의 영향력을 활용한다면, 최소한 아무런 공작을 하지 않는 것보단 유리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 분명했다.
‘뭐, 그건 토리 잭슨이 복귀 후에 얼마나 영향력을 회복하는 지에 달려있겠지만.’
아딘이 그렇게 정치적 계산을 하고 있는 동안, 토리는 로제의 손을 잡아주며 그녀에게도 작별의 말을 건넸다.
“정말 고마웠어, 로제. 로제가 있어 줘서 내 마음이 조금은 더 빨리 치유가 된 것 같아.”
토리의 말에 로제는 수줍게 미소를 짓더니 이내 와락 토리를 껴안았다.
“언니. 다음에 오라버니하고 꼭 찾아갈게요.”
“그래. 꼭 찾아와. 그땐 내가 정말 파라곤에서 제일 좋은 식당에서 크게 대접해줄게.”
그렇게 로제와의 아쉬운 작별을 뒤로하고 토리는 라인하르트에게까지 의례적인 인사를 한 후 두 사람의 용병과 함께 배에 올랐다.
[뿌우우우-!]
갑판에서 승객들의 탑승을 지켜보던 선원이 나팔을 불어 출발하라는 신호를 보내자 계단은 치워지고 돛은 펼쳐졌으며 노가 저어지기 시작했다.
점차 동쪽으로 떠나가는 갤리선 갑판 위에서 토리는 아딘과 로제, 라인하르트를 바라보며 하염없이 손을 흔들어 주었다.
“갔네…….”
갤리선이 조그맣게 보일 무렵, 로제는 아쉬운 듯 혼잣말을 내뱉었다.
그런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며 아딘은 미소를 지어 보였고, 로제도 고개를 끄덕이며 아쉬움을 뒤로한 채 아딘을 손을 잡았다.
“저…….”
그리고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고 라인하르트가 쭈뼛거리며 말문을 열었다.
“근데…… 저는…… 언제까지…… 그…….”
덩치와 외모에 어울리지 않는 소극적인 모습에 아딘은 피식 웃으며 라인하르트에게 이야기했다.
“원래라면 트링겐에 내린 순간 계약이 끝난 거였지만 개인적으로는 좀 더 계약을 연장하고 싶습니다. 라인하르트 씨도 계약 연장을 바라기에 여기까지 오신 것 아닙니까?”
트링겐에서 브릴트로 가는 배의 승선권을 구매할 때, 아딘은 라인하르트의 의사를 따로 물어보지도 않고 네 사람 치를 주문했다.
거기에 대해 라인하르트는 별다른 이견을 제기하지 않았다.
그것이 묵시적인 계약 연장 동의 아니냐는 아딘의 말에 라인하르트는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말 하면…… 좀 우습게 들릴 수도 있지만…… 댁하고 같이 다니면 뭔가…… 뭔가…… 아무튼 뭔가 살아 있다는 느낌이 확 듭니다. 뭐라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데.”
한 마디로 스릴이 느껴지고, 그것이 너무나 좋기에 따라다닌다는 라인하르트의 말에 아딘은 미소를 지으며 그의 팔을 가볍게 쳤다.
“우린 여기서 하루만 더 쉬었다가 이동합시다. 편안하게, 마차로.”
“어…… 근데 이번엔 어디로 갑니까?”
라인하르트의 물음에 아딘은 씩 웃으며 대답했다.
“숲.”
* * *
9월 21일 아침.
토리를 태운 갤리선은 파라곤항에 정박했다.
갑판 위에서 아주 익숙한, 다시는 못볼 것 같았던 파라곤항 일대의 풍경을 바라보며 토리는 또 한번 눈물을 흘렸다.
용병들의 부축을 받아 떨리는 다리로 겨우 배에서 내린 토리는 아딘이 준 돈으로 마차를 빌려 잭슨 저택으로 향했다.
1년하고도 1개월 정도 되는 시간 동안 파라곤은 놀라울 정도로 변해 있었다.
항구 근처의 노후화된 건물들은 모두 새 건물로 바뀌었고, 시청을 중심으로 도시 사방으로 연결된 도로는 마차가 다니기 편하도록 깔끔하게 정비돼 있었다.
“전임 시장이셨던 앤드루 잭슨 님이 공화국 원로회 의원이 되시고, 그 큰 아드님이신 피터 잭슨 님이 시장이 되시면서 대대적인 도시 정비가 이루어졌습니다.”
아딘과의 계약에 따라 용병들은 토리를 잭슨 저택까지는 호위해야 했지만, 그들이 파라곤의 지리까지는 몰랐기에 불가피하게 토리는 마차와 함께 마부도 빌릴 수밖에 없었다.
그 마부가 전해준 이야기를 들으며 토리는 감동과 함께 쓰라린 아픔도 느껴야 했다.
‘오라버니가 나와의 약속을…….’
종종 토리가 도시 정비의 필요성을 역설할 때, 자신이 시장이 되면 반드시 네 뜻대로 해주겠다던 그녀의 오라비, 피터 잭슨의 말을 기억한 토리는 어서 빨리 그를 만나고 싶은 마음에 애간장이 타는 것을 느꼈다.
잠시 후, 토리를 태운 마차는 잭슨 저택에 도착했다.
토리는 용병들에게 감사를 표한 후 마부와 함께 다시 두 사람을 파라곤항으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그녀는 굳게 닫힌 파라곤 저택의 거대한 철문을 바라보며 두근거리는 마음을 주체하질 못했다.
‘다들…… 다들……’
그때, 철문이 열리며 사두마차 한 대가 천천히 저택에서 빠져나왔다.
마차에 부착된 파라곤 시장의 상징물을 보고 토리는 마차의 내부에 자신의 오라비 피터 잭슨이 타고 있음을 확신했다.
“오, 오라버니…….”
토리는 마차를 향해 힘없이 외쳤다.
그녀의 조용한 외침은 마차를 양옆에서 호위하는 기병들에 가로막혀 마차의 내부로 전달되지 못했다.
“오라버니.”
토리가 조금 더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마차의 우측, 토리가 있는 방향에서 호위를 하던 기병이 그녀에게 관심을 보였다.
“오라버니!”
마침내 토리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크게 외쳤다.
그 순간, 마차가 멈춰섰다.
그리고 마차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토리?”
귀밑머리가 하얗게 센 파라곤 시장 피터 잭슨이 믿을 수 없단 표정으로 토리를 바라보았다.
“오라버니…….”
토리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토리!”
피터 잭슨은 그 즉시 마차에서 내려 토리에게 달려와 그녀를 안아주었다.
“오오…… 토리…….”
“오라버니…….”
긴말은 필요 없었다.
그저 서로를 부르는 것만으로도 남매는 자기들이 지난 1년간 가슴 속에 묻어 두고 있던 감정을 토해낼 수 있었다.
그렇게 토리 잭슨은 잭슨 가문에 복귀했다.
* * *
9월 20일 아침.
아딘과 로제, 라인하르트는 흑마 두 마리가 이끄는 마차를 타고 브릴트를 빠져나가 북부로 올라갔다.
두루마리를 통해 뢰벡의 영주 아돌프 폰 브라운실트가 광명교와 시민자문위원회의 신임을 잃어 정치적 위기에 봉착했음을 확인했지만, 구태여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었던 만큼 다소 돌아가더라도 아딘은 안전한 길을 택했다.
다행히 게마인샤프트는 렝고스와는 달리 그래도 인간 문명이 존재하는 곳이었기에 아딘의 마차는 큰 어려움 없이 북진했고, 브릴트를 출발한 지 4일이 지난 9월 24일 정오에 슈타인부르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엄청난 규모의 철광산과 거기서 나오는 질 좋은 강철을 활용한 무기나 농기구가 장인 조합에 의해 생산되어 제니스 공화국으로 수출되는 도시이긴 했지만, 슈타인부르크 자체적으로는 크게 뭐 볼거리는 없었다.
그랬기에 아딘은 그곳에서 하루만 머문 후 25일 아침에 다시 길을 나섰다.
‘슈타인부르크…… 존이 5부에서 드워프의 도움을 받아 산업도시로 탈바꿈시켰었는데…….’
김현수의 소설 영웅일대기의 주인공 존 크리스토퍼 하이로드는 화산 열도의 침공으로 폐허가 된 제니스 공화국과 게마인샤프트를 접수한 후 엘프숲에 숨어 살던 드워프의 도움을 받아 재건했다.
그 과정에서 본래부터 철광산 산지로 유명했던 슈타인부르크는 장인 조합에 의한 폐쇄적인 생산 체제가 아닌, 그야말로 산업이라 부를 정도로 규격화된 생산 시스템을 갖추게 됐다.
‘원래라면 6부에서 구상한 바다 건너 민족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한 장치로 고안해낸 거긴 한데…….’
소설 속에서 존 크리스토퍼 하이로드가 해냈던 슈타인부르크의 산업화.
과연 그것을 자신이 이룩할 수 있을까?
그렇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며 아딘은 마차에 몸을 맡긴 채 북부로 올라갔다.
그리고 광활한 초원을 닷새 동안 지난 끝에 9월 30일 정오에 아딘의 마차는 드라이분데스에 도착했다.
엘프숲과 게마인샤프트 그리고 벨로디나 왕국의 경계가 겹치는 이 소도시에서 아딘은 마차를 처분한 후 최고 수준의 여관에서 최고로 호화로운 방을 잡았다.
‘원래라면 여기도 벨로디나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곳이었지만 지금은…….’
유리 콘스탄틴이 19대 국왕으로 즉위한 후 국가 전체가 사실상 제니스 공화국의 괴뢰국이 되면서 벨로디나 왕국은 게마인샤프트 북부에 대한 영향력을 모두 상실했다.
두루마리를 통해서도, 그리고 현격히 죽어버린 드라이분데스의 도시 분위기에서도 아딘은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뭐, 덕분에 로제의 생일 파티는 마음 놓고 열 수 있게 됐으니까.’
* * *
10월 1일 아침.
“생일 축하해 로제. 그리고 성인이 된 것도 축하해.”
광명교의 율법에 따라 대륙의 모든 사람은 16세 생일이 지나면 성인으로 인정받는다.
즉, 오늘 로제는 생일 파티와 성인식을 모두 치르는 것이었다.
“오, 오라버니……”
생전 처음 받는 생일 축하에 로제는 아침부터 눈물을 흘려야만 했다.
축하해주는 사람이 비록 아딘과 라인하르트 둘 뿐이긴 했지만, 로제에게는 최고의 생일 파티이자 성인식이었다.
아침부터 시작된 로제의 날을 위한 아딘의 노력은 저녁에 이르러 절정에 이르렀다.
로제를 위해 주문 즉시 도축한 송아지가 부위별로 실력 좋은 요리사의 손을 거치며 최고급 요리가 돼 그녀의 앞에 올려졌다.
드라이분데스의 영주로부터 직접 구매한 샤펠 제국산 최고급 포도주, 샤토 아로강스에는 금가루가 뿌려졌다.
몇 달째 일이 없어 해산 직전까지 갔던 악단은 오로지 로제만을 위한 곡을 쉼 없이 연주해주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한 최고로 호화로운 파티를 열어주고서 아딘은 로제에게 물었다.
“선물은 로제가 원하는 대로 줄게. 아무리 비싼 거라도, 그래서 당장에는 못 구하더라도 반드시 줄 테니까, 부담 갖지 말고 이야기해.”
아딘의 말에 로제는 잠시 고민을 하더니 금가루가 떨어진 샤토 아로강스를 쭉 들이켰다.
그리고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아딘에게 이야기했다.
“전…… 다른 건 원하지 않아요, 오라버니. 그냥…… 그냥…….”
잠시 뜸을 들이던 로제는 이윽고 아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냥 전 오라버니가 제 곁을 떠나지만 않아 주셨으면 좋겠어요. 오라버니가 제 곁에 있는 게 제게 필요한 최고의 선물이에요.”
그녀의 소박한 소망에 아딘은 미소를 지으며 화답해주었다.
“응. 그렇게 할게. 절대로 로제의 곁을 떠나지 않을 게.”
그러면서 아딘은 가만히 그녀의 손을 잡아 주었다.
로제는 얼굴을 붉힌 채 수줍게 미소를 지었고, 아딘은 미소를 띤 채 복잡한 심경이 고스란히 드러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로제의 화려한 생일은 지나갔다.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