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2 복귀 (2)
광명력 992년 9월 9일 새벽.
뵌가르트 남부 7km 지점.
[쿠우우우-]
황제 지네가 포효도 내지르지 않고, 최대한 수백 개의 다리를 조용히 움직여 땅의 진동과 소음도 최소화한 채 뵌가르트 성벽이 보이는 초원에 도착했다.
시간이 시간인 만큼, 모두가 잠들어 있었기에 이 거대한 괴수의 등장을 눈치챈 사람은 없었다.
[펄럭-!]
대왕 독수리도 조용히 날갯짓을 하며 라인하르트와 토리를 내려주었다.
“우웨엑-!”
라인하르트는 땅에 서자마자 토악질을 하기 시작했다.
[팡-! 팡-! 팡-!]
토리는 그의 곁에서 그의 등을 손바닥으로 쳐주었고, 라인하르트는 그렇게 몇 차례 더 토악질한 끝에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로제는 가볍게 라인하르트를 향해 손짓했다.
이내 환한 빛이 안개와 함께 라인하르트의 발밑에서 시작돼 그의 몸을 아래에서 위로 쭉 훑은 후 허공에서 흩어졌다.
“……고맙습니다.”
라인하르트가 더듬더듬, 토리에게서 배운 간단한 아퐁어 단어를 떠올려 로제에게 이야기했다.
로제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 후 이내 아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고생들 했어.”
아딘은 황제 지네의 더듬이와 대왕 독수리의 부리를 쓰다듬어주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두 괴수는 아딘의 의지에 따라 크게 소리도 지르지 못한 채 그저 가볍게 반응할 뿐이었다.
“이만 살던 곳으로 돌아들가.”
아딘의 말은 곧 네르갈의 목걸이에 의해 괴수들의 언어로 변환돼 놈들에게 전달됐다.
[쿠구구구구-!]
[부우우웅-!]
황제 지네는 땅속으로 최대한 소리를 죽인 채 들어갔고, 대왕 독수리도 최대한 조심스럽게 날갯짓을 하며 날아올랐다.
두 괴수가 각각 하늘과 지하를 통해 렝고스 중부로 떠나는 것을 확인한 후 아딘은 주변을 챙기기 시작했다.
“곧 동이 틀 겁니다. 그러면 뵌가르트 성문도 열리겠지요. 천천히 걸어갑시다. 잠은 여관에서 오랜만에 편안하게들 자고요.”
아딘은 라인하르트와 토리에게 그렇게 이야기한 후 로제를 바라봤다.
로제는 밝은 표정으로 아딘의 허리를 양팔로 꼭 감싸 안은 채 그의 곁에 착 달라붙어 있었다.
아딘은 그런 로제와 함께 보조를 맞춰 앞장서서 뵌가르트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토리가 곧 그 뒤를 따랐고, 라인하르트는 로제에 의해 멀미가 치유됐음에도 여전히 메스꺼움을 느끼며 터덜터덜 대열의 맨 뒤에 서서 움직였다.
7km라는 거리는 그렇게 긴 거리가 아니었던 만큼, 네 사람은 동이 틀 무렵 성문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제야 토리는 비로소 자신이 그 악몽 같던 오크의 손길에서 해방돼 인간 세계로 돌아왔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아아…….”
토리는 성문 앞에 줄지어 서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소리 없이 흐느꼈다.
로제가 당장 그녀에게 다가가 곁에서 그녀를 안아주며 위로했다.
“괜찮아요. 이제 정말 괜찮아요. 집으로 갈 일만 남았어요.”
자신 또한 노예에서 해방됐을 때의 그 느낌을 알기에, 비록 돌아갈 집은 없지만, 비로소 악몽 같던 장소에서 벗어난 그 기분을 알기에, 로제는 토리에게 공감하며 함께 눈물을 흘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며 아딘은 뿌듯함을 느꼈고, 라인하르트는 알 수 없는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 결과적으로 좋은 경험 했잖아. 나중에 적당히 나이가 들어서 지금의 일이 역사가 됐을 때, 술집에서 지껄일 무용담이 생긴 거야.’
그렇게 네 사람은 뵌가르트에 들어섰다.
아딘과 로제, 라인하르트가 네르갈의 신전을 향해 떠난 지 50일 만의 복귀였다.
그리고 토리가 여행차 뵌가르트에서 렝고스 서남부 일대로 떠난 지 딱 1년 만의 복귀였다.
* * *
9월 9일 이른 아침.
뵌가르트에서 가장 호화로운 검은 물소 여관으로 네 사람은 들어섰다.
아딘은 종업원에게 1골드를 팁으로 주며 최고로 좋은 방을 요구했고, 종업원은 살짝 흥분한 상태에서 1일 숙박 비용이 50실버에 이르는 2개의 특실로 안내했다.
두 특실을 빼면 모든 방에 다 투숙객이 있는 만큼, 불가피하게 네 사람이 둘씩 방을 나눠야 했다.
당연히 아딘은 라인하르트와 한방을, 로제는 토리와 한방을 쓰기로 했다.
거기서 로제는 강한 아쉬움을 느꼈다.
아딘과 둘이서 여행할 때에는, 상황에 따라 다르긴 했지만, 종종 한방을 같이 쓰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사람이 네 명이나 되는 상황에선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차마 자신과 아딘이 한방을 쓰고, 라인하르트와 토리가 한방을 쓰자는 소리까지는 할 수 없었기에 로제는 아쉬움을 뒤로한 채 토리와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것을 보며 토리는 확신에 찬 눈으로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해. 로제는……’
여하간 네 사람은 모두 피로한 몸을 이끌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실용 마법 욕조 따위는 없었지만, 종업원들이 데워다가 대령한 따뜻한 물로 목욕을 마친 후 깊은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당일 저녁.
로제와 라인하르트가 여전히 깊은 잠에서 깨어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을 때, 라인하르트의 코골이에 잠에서 깬 아딘과 싱숭생숭한 마음에 잠에서 깬 토리가 특실에서 나와 식당으로 내려가 마주 앉았다.
팁으로 무려 1골드나 뿌리는 큰손이었던 만큼, 두 사람에게는 조용히 대화가 가능한 별실이 안내됐다.
그곳에서 다소 질긴 가젤 고기가 아닌, 부드러운 송아지 고기와 낮은 도수의 포도주로 저녁 식사를 즐기며 아딘과 토리는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파라곤을 떠난 지 1년 3개월이니까, 아마 제 가족이랑 친구들은 모두 절 죽은 사람으로 생각할 거예요. 장례식을 치렀을 수도 있고요.”
“이제 가셔서 현실을 알려주시면 됩니다. 당당하게 돌아왔다는 것을, 살아 있다는 것을. 그리고 다시 일상을 시작하시면 됩니다. 비록 회복하기까지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원래 제가 하던 사업이 있었어요. 오라버니가 실질적인 소유주고 저는 실무선에서 운영을 총괄하는 지위이긴 했지만…… 그 일에 다시 열중하면 상처도 잊혀지겠죠.”
토리의 말에 아딘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어주었다.
두 사람이 가볍게 잔을 부딪혔고, 이내 포도주는 두 사람의 입을 지나 식도를 타고 위장으로 부드럽게 넘어갔다.
잔을 내려놓고, 토리는 잠시 아딘의 눈치를 살피다 천천히, 자신이 렝고스에서부터 품고 있던 의문에 대한 질문을 꺼냈다.
“저기…… 이런 질문을 하면 참 이상해 보일 수도 있지만, 그리고 절 구해주신 은인에게 하기에는 굉장히 무례한 질문인 것도 알지만……”
토리는 다소 뜸을 들였다.
그 모습에 아딘은 미소를 지으며 편하게 말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해 주었다.
아딘의 표정에 용기를 얻은 토리는 가까스로 입을 뗐다.
“스미스 씨와 로제 말이예요.”
“네.”
“남매로 알고 있는데…… 진짜 이런 질문이 무례하단 건 알지만…… 혹시……”
토리는 말끝을 흐렸지만, 묻고자 하는 바는 명확히 아딘에게 전달됐다.
아딘은 고개를 끄덕이며 순순히 토리의 물음에 응답해주었다.
“자세한 사정을 말씀드릴 순 없지만, 친남매는 아닙니다. 다만 피를 나눈 남매보다도 더 각별하다는 것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아딘의 부드러운 대답에 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아딘의 눈치를 살피던 그녀는 홀로 포도주를 쭉 들이켠 후 술의 힘을 빌려 하고자 한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스미스 씨는 로제를…… 친여동생처럼 생각하고…… 계신가요?”
처음으로 아딘의 표정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아딘은 의아한 표정으로 토리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토리는 침을 꿀꺽 삼킨 후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스미스 씨가 알고 계신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곁에서 본 바로는 로제는…… 로제는…… 스미스 씨를…… 오빠 이상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서요.”
아딘은 팔짱을 꼈다.
토리는 자신의 빈 잔에 포도주를 반쯤 채운 후 그것을 또 한 번에 쭉 들이켜고나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뭐랄까…… 로제는…… 스미스 씨를 어떤 우상 같은 존재로 여기는 것 같아요. 우상, 의지할 수 있는 최고의 존재, 그 사람이 한 말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만 하는 어떤 절대적인 존재.”
아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는 이미 그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기도 했다.
애초에 로제 스스로가 벗어날 수 없으리라 여겼던 노예 상태에서 자유롭게 해준 것이 아딘이었으니까.
그런 로제의 인식은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하지만 이어진 토리의 말에 아딘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한 사람의 남자.”
아딘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입을 살짝 벌렸다.
토리는 살짝 그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모르셨어요?”
아딘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했다.
‘혹시?’ 하는 생각을 은연중에 품기는 했지만, 항상 그 생각의 끝에 나오는 대답은 ‘에이.’였으니까.
그런 것을 토리가 그다지 완곡하지 않은 방법으로 꺼내버리자 아딘은 당혹감에 일순간 사고가 마비되는 것을 겪어야만 했다.
그리고 그 모습에서 토리는 자신이 추측하던 것들이 맞아 떨어짐을 느끼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자신의 잔을 채웠고, 또 잔을 비웠다.
그러자 이번엔 아딘이 자신의 잔을 비웠다.
토리가 자기 잔과 아딘의 잔을 채워주었다.
“솔직히 평범한 사람들로는 안 보였어요. 스미스 씨는 이게 가능하나 싶을 만큼 대단한 무력을 가지셨고 또 그 존재가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괴수들을 통제하셨죠. 그리고 로제는 제가 들었던 그 어떤 마법사들보다도 강력한 대마법사고요.”
토리가 잔을 들었다.
유리로 된 잔 표면으로 촛불 빛이 반사되며 포도주의 색깔과 더불어 묘한 빛깔을 연출했다.
“하지만 아무리 뛰어난 전사고 사육사라 한들, 아무리 대단한 대마법사라 한들, 기본적으로 인간임에는 변함이 없죠.”
토리는 가만히 아딘을 바라봤다.
어느새 아딘은 토리의 이야기에 빠져든 상태였다.
초원에서 오크를 상대로 보여주던 단호함이나 괴수를 통제하던 모습과는 전혀 일치하지 않는, 다소 멍청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 모습에 토리는 살짝 웃음을 터뜨렸다.
“스미스 씨가 어떻게 생각하는진 모르겠지만, 로제는 스미스 씨에게 감정을 품고 있어요. 여자가 남자에게 느끼는 그런 감정 말이에요. 그리고 그런 감정이 스미스 씨에 대한 우상 숭배적인 마음과 섞이면서 다소 복잡한 모습으로 표면화되고 있어요.”
토리는 그대로 포도주를 쭉 들이켜 잔을 비웠다.
그리곤 더 이상의 포도주는 필요하지 않다는 듯, 잔을 뒤집어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지금은 별문제가 없을 거예요. 그리고 당분간도. 로제는 아직 어리고, 제가 보기에 두 사람의 정신없는 모험이 아직 끝난 것 같지도 않으니까요. 그게 뭔진 모르겠지만. 하지만…….”
토리는 냅킨으로 입가를 닦은 후 진지한 표정으로 아딘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마무리했다.
“이 모험이 끝나고, 두 사람이 다소 여유로운 상황에 처했을 때, 스미스 씨는 확실하게 결정하셔야 할 거예요. 로제를 계속해서 동생처럼 여길지, 아니면 로제가 스미스 씨에게 가지고 있는 감정을 받아들일지.”
토리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인에게, 무례할 수도 있고 주제 넘는 훈수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제가 보고 느낀 것에 대해 침묵하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았어요. 기분 나쁘셨다면, 정말 죄송합니다.”
아딘은 토리를 바라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토리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 숙여 인사한 후 특실로 올라갔다.
“여기! 포도주 하나 더!”
홀로 남은 아딘은 지나가던 종업원에게 포도주 한 병을 더 부탁했다.
곧 포도주가 나왔고, 아딘은 그 마개를 뜯은 후 홀로 계속해서, 끊임없이, 맛과 향도 제대로 느끼지 않은 채 그것을 위장으로 부어 넘겼다.
‘선택?’
술의 힘을 빌려 용기를 낸 토리와는 달리, 술을 마셔도 마셔도 취하지 않는 자신의 모습에 아딘은 씁쓸함을 느끼며 그렇게 홀로 술을 마시고 또 마시며 저녁 시간을 보냈다.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