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0 네르갈의 신전 (6)
“앞으로 우리나라가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이런 질문을, 김현수는 근 30년 이상을 살아오는 동안에, 교육과정마다 교육자로부터 받았다.
거기에 대해, 김현수는 교육과정마다 다른 대답을 했다.
“아름다운 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좀 정치인들이 안 싸우는 나라가 됐으면 좋겠어요.”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나라만 안 되면 좋겠는데요.”
“계층 간 격차 해소, 미래세대를 위한 노동 및 연금 개혁, 공정한 시장 경제 체제를 위한 재벌개혁 등등 너무도 많습니다. 확실한 건 이 나라가 가야 할 방향은 분명 험난하지만, 반드시 가야만 하는 그런 길이란 겁니다.”
그리고 매번 김현수는 그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많은 고민을 해야 했다.
그런데 지금, 네르갈이 던진 질문은 그런 질문을 초월한 종 전체의 미래에 관한 물음이었다.
“남들이 다 할 수 있는 대답을 하면 절대 사람은 특별한 취급을 받지 못한다네. 이건 직장에서도 마찬가지고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일세.”
문득, 왜 자기한테 B0를 줬냐고 담당 교수에게 물었을 때, 그 교수가 했던 이야기가 아딘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딘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이건 네르갈의 시험이야. 단순히 대학 발표 과제도 아니고, 고등학교 수행 평가도 아니야. 신물을 얻기 위한 신의 시험이야. 평범한 대답은 안 돼.’
잠시 눈을 감고 아딘은 생각을 정리했다.
네르갈은 가만히 아딘의 대답을 기다려주었다.
“후우-!”
다시 한번 크게 심호흡을 한 후 아딘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눈에 영롱한 황금빛을 발하는 네르갈의 목걸이가 들어왔다.
황금빛 사자의 얼굴이 마치 자신에게 “나를 가져 보겠나?”라고 속삭이는 것 같은 착각을 받으며 아딘은 네르갈의 눈을 직시했다.
“한 소녀가 있습니다. 용과 인간의 딸이자, 용과 인간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아이입니다.”
* * *
[퍼어엉-!]
푸른 불꽃이 폭발하며 주위에 넓게 퍼져 있던 대왕 사마귀들이 모두 폭발의 여파에 휩쓸렸다.
순식간에 20마리에 이르던 대왕 사마귀가 불타 죽어 버렸고, 사체 중 일부가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쿠구구구구-!]
그러자 땅속에 있던 거대 전갈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그 조각들을 집어 들고 사라졌다.
[꾸워어어억-!]
마차 주위를 둥글게 포위하고 있던 열두 마리의 오거는 입맛을 다시며 슬금슬금 마차와의 거리를 좁히고 있었다.
“푸흡-!”
그리고 로제는 입에서 피를 토해내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젠장! 말들도 다 뒤졌으니까 그냥 안전지대로 가자고! 이대로 있으면 너도 죽고 나도 죽고 저 아가씨도 죽어!”
라인하르트가 오거에게 화살을 날리며 고함을 질렀다.
“로제, 안전지대로 가자. 여기에 계속 있으면 위험해.”
토리가 로제를 부축하며 이야기했다.
로제는 입가에 피를 묻힌 상태에서도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오, 오라버니가…… 여, 여기를…… 지켜라…… 했어요…… 안…… 돼요…….”
“더럽게 고집 부리고 있네 진짜!”
토리의 통역 없이도 라인하르트는 로제가 뭐라 했는가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아딘이 사라진 지난 며칠 동안 라인하르트는 아퐁어 중 ‘안 돼.’라는 단어만큼은 확실히 외우게 됐다.
[휘리리릭-!]
[까앙-!]
두 번째로 쏜 화살이 그대로 오거의 어깨와 충돌하며 부러지는 모습을 보고서 라인하르트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리곤 허리춤에 차고 있던 도끼를 뽑았다.
“오라버니는…… 반드시…… 다시…… 오실 거예요…….”
로제는 다시 두 다리로 일어섰다.
그녀의 양손에 푸른 불꽃이 피어올랐다.
그녀는 그것들을 허공으로 던졌고, 허공에서 만난 푸른 불꽃은 곧 12개의 조그만 불똥이 돼 오거들에게 날아갔다.
[꾸워워어어어-!]
[꾸우와악-!]
청색 화염은 오거들의 피부를 파고 들어가 내부에서 타오르기 시작했다.
오거들은 모두 비명을 지르며 불타기 시작했고, 이내 모두가 내장이 싹 익어버린 채 죽었다.
불꽃은 오거의 생명과 함께 꺼졌고, 죽은 오거의 사체는 땅속에 있던 거대 전갈들이 분해하여 챙겨갔다.
“벌써 새벽이야……”
밤새도록 공격을 받았던 터라 세 사람은 잠들지도 못했다.
그리고 그중 가장 기력소모가 심한 것은 로제였다.
대왕 사마귀와 오거의 침공이 일단락되자 로제는 그대로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말았다.
“로제!”
토리가 황급히 로제를 부축해 주었다.
“조금만…… 조금만 잘게요…… 조금만…….”
그리고 로제가 잠들려고 할 때.
[퍼어엉-!]
[사사사사사삭-!]
괴수들의 사체를 뜯어 먹으며 기회를 노리던 거대 전갈 여섯 마리가 땅을 뚫고 지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을 바라보며 로제는 한숨을 내쉬곤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부들거리는 다리로 가까스로 선 채 양손에 불꽃을 피워 올렸다.
크기도 이전만 못했고, 색채도 붉었으며, 온도도 낮았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이것만이 유일하게 이 캠프를 지킬 무기였다.
‘오라버니…….’
로제는 터져 나오려는 울음과 코피를 참으며 거대 전갈들을 향해 붉은 불꽃을 집어 던지기 시작했다.
* * *
“어느 귀족 가문의 노예로서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아오던 그녀에게 어느날 구원의 빛이 다가왔습니다. 빛은 그녀에게서 노예의 족쇄를 풀어주었고, 그녀는 자유로운 상태에서 마침내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힘까지 각성했습니다. 이제 그녀는 더 이상 약한 노예 소녀가 아닙니다. 아주 강력한 용의 딸이자 대마법사입니다.”
문득 아딘은 자신의 눈가가 촉촉해져 있음을 깨달았다.
이 눈물의 의미가, 자신이 가혹한 운명을 선사했던 한 소녀에 대한 죄책감에서 오는 것인지 아니면 바람에 나부끼는 돌조각에 의한 것인지 아딘은 알지 못했다.
“이 소녀는 특별히 운이 좋은 경우입니다. 좋은 사람을 만나 악한 길로 빠지지 않을 수 있었고, 용의 피를 지니고 있었기에 일정 기한만 지나면 힘을 각성할 수 있었습니다.”
아딘은 네르갈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인간 사회에는 여전히 이 소녀와 같이 자신의 재능을 펼치지 못한 채 억압된 삶을 살아가는 존재들이 있습니다.”
마법사와 소드 마스터는 선천적인 자질과 후천적인 교육 모두가 중요하다.
아무리 자질이 좋아도 교육이 없으면 마법사나 소드 마스터가 될 수 없었고, 반대로 교육을 받더라도 자질이 없으면 그저 교육만 받은 일반인으로 남게 될 뿐이었다.
“똑같이 마법사와 소드 마스터의 자질을 갖고 태어났지만 누구는 귀족이기에 그 자질을 갈고 닦을 기회를 얻고, 누구는 귀족이 아니기에 그럴 기회를 얻지 못하는 게 현실입니다.”
아딘은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다. 그리곤 네르갈이 낸 시험에 관한 자신의 구술답변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런 현실을 바꾼다면, 부모의 상태와 무관하게 자질을 갖춘 이들 모두가 적절한 교육을 받아 마법사와 소드 마스터로 각성할 체제만 구축한다면, 인간의 멈춘 진화 시계는 다시 움직일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오크에게 그러했듯 인간에게도 그런 기회를 줄 것입니다.”
정견 발표와 같은 아딘의 답변이 끝나자 네르갈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물었다.
“듣기는 좋아. 당위성도 있고. 하지만…… 어떻게 그런 세상을 만들 것인가? 이때까지 기존 체제하에서 특권을 누리고 살아오던 자들이 분명히 저항할 텐데?”
그 물음에 아딘은 단호한 어조로 대답했다.
“혁명입니다.”
“혁명?”
“막강한 힘을 가진 기득권의 연합을 분쇄할 압도적인 힘으로 혁명을 일으킨다면, 그래서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그려나간다면 그런 세상을 만들 수 있습니다.”
네르갈이 씩 웃었다.
“그래서 신물을 모으고 다니는 건가?”
“그 대의와 제 개인적인 복수심이 함께 있습니다.”
네르갈은 한 차례 크게 웃었다.
이윽고, 그의 몸이 변했다.
머리와 하반신은 성체 수컷 사자의 형상이요, 상반신은 건장한 인간 남성의 형상인, 광명교 만신전에 그려진 모습 그대로 네르갈은 변신했다.
그리고 그는 자기 목에서 목걸이를 풀어 양손으로 든 채 아딘에게 물었다.
“근데…… 그 혁명을 끝내고 그대가 이야기한 신세계가 펼쳐졌을 때, 결국 그대가 또 다른 기득권이 되지 않을까?”
아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는 절대 그럴 일이 없을 겁니다.”
네르갈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여전히 목걸이는 그의 손에 붙들려 있었다.
“설령 그대가 초심을 잃지 않는다고 하여도 그대의 자손은 분명 다른 생각을 품을 것이다. 그대를 혁명의 상징이자 우상으로 만들고, 그 후광을 입고서 또 다른 기득권이 되겠지.”
아딘은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에 대한 대비책이 있나?”
네르갈이 물었다.
아딘은 고개를 끄덕이며 네르갈을 바라봤다.
그리곤 천천히 입을 열어 자신이 구상해온 것을, 뵌가르트에서 출발해 이곳까지 오는 지난 1개월여 동안 그린 큰 그림을 네르갈에게 상세하게 알려주었다.
가만히 네르갈은 아딘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아딘의 말이 끝났을 때, 네르갈은 활짝 웃고 있었다.
“그 방법대로라면 무능하고 탐욕스러운 사람이 그대의 후광을 입어 권력을 장악할 수는 없겠어.”
네르갈은 미소를 지으며 아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의 목에 목걸이를 걸어주었다.
[크오오옹-!]
아딘의 목에 걸리자마자 네르갈의 목걸이는, 황금 사자 펜던트는 포효했다.
그리고 아딘은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심장에서 시작해 전신으로 혈관을 타고 뻗어가는 강한 에너지를, 뱃속에 잠든 불칸의 갑옷과 네르갈의 목걸이가 공명하는 것을, 전신에 차오르는 활력을.
“감사합니다.”
자신을 바라보는 네르갈을 향해 아딘은 황홀한 표정으로 말했다.
네르갈은 씩 웃으며 아딘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그리고 물었다.
“그런데 말이야. 지금 생각해보니 자네의 방안이라는 거, 한 가지 전제 조건을 달고 있군.”
아딘은 가만히 네르갈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씩 웃었다.
거기서 네르갈은 아딘의 자신감을 엿볼 수 있었다.
“그래. 좋아.”
네르갈은 아딘에게서 떨어졌다.
그 순간, 그의 몸이 환한 광휘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잊지 말라. 그대가 오늘 내게 한 말을. 우리 천계의 모든 신이 기억할 그대의 다짐을.”
네르갈의 말에 아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그를 향해 오체투지의 경배를 올렸다.
잠시 후, 번쩍이는 섬광과 함께 네르갈은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가 사라지고도 한참 동안 오체투지의 자세로 엎드려 있던 아딘은 천천히 땅을 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새 그는 평지에 내려와 있었다.
렝고스 한가운데에 우뚝 솟아 있던 네르갈의 신전은 마치 처음부터 그런 건 없었다는 양 통째로 사라져버렸다.
아딘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동쪽에서 뜬 태양이 만물을 깨우고 있었다.
[끼요오오오-!]
저 창공에서 거대한 독수리 한 마리가 우렁차게 울었다.
아딘은 오른손으로 네르갈의 목걸이를 살살 쓰다듬었다.
그 순간, 펜던트가 빛을 번쩍였다.
[끼요오오오-!]
창공을 날아다니던 독수리가 우렁찬 울음과 함께 아딘이 있는 곳으로 급강하했다.
[부웅-!]
날갯짓 한 번으로 엄청난 강풍을 일으키며 독수리는 아딘 앞에 앉았다.
[끼요오오오-!]
머리부터 발끝까지 3m, 왼쪽 날개 끝에서 오른쪽 날개 끝까지 9m에 이르는 거대한 대왕 독수리가 아딘을 바라보며 한차례 울부짖었다.
아딘은 가만히 대왕 독수리의 부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대왕 독수리는 기분 좋다는 듯 아딘의 몸에 부리를 비벼댔다.
“귀엽게 생겼네.”
아딘은 미소를 지으며 대왕 독수리의 부리와 머리, 목을 한 차례 쓱 쓰다듬어 주었다.
[끼요오오오-!]
대왕 독수리는 그대로 아딘에게 자기 등판을 보여주었다.
아딘은 그대로 독수리의 등판에 올라탔다.
[끼요오오오-!]
[부우웅-!]
우렁찬 울음소리와 함께 독수리는 날개를 펄럭였다.
강풍이 불어닥치며 주변에 있던 잡초들을 눕게 만들었다.
[끼요오오오-!]
대왕 독수리는 순식간에 상공 300m까지 날아올랐다.
“가자. 로제한테.”
아딘이 대왕 독수리에게 이야기했다.
[끼요오오오-!]
대왕 독수리는 마치 그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우렁차게 울부짖고는 빠르게 서북쪽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