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9 네르갈의 신전 (5)
[쩌저저적-!]
바위가 쪼개지는 소리와 함께 네르갈 신상에는 보기 흉측할 정도로 심하게 균열이 발생했다.
아딘은 침을 꿀꺽 삼키며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꽈르르릉-!]
잠시 후, 천둥소리와 함께 갈라진 네르갈의 신상은 그대로 폭삭 주저앉았다.
엄청난 흙먼지가 피어오르며 사방으로 뿜어졌다.
아딘은 눈을 감고 양팔로 얼굴을 가린 채 몸을 최대한 웅크렸다.
잠시 후, 흙먼지는 가라앉았다.
아딘은 천천히 팔을 내리고 눈을 떴다.
‘뭐, 뭐야?’
네르갈의 신상이 있던 자리에는 족히 수천 조각은 돼 보이는 크고 작은 돌덩어리들로 가득했다.
마치 돌덩어리들을 모아 조그만 언덕이라도 만든 것 같은 모양에 아딘은 그만 말을 잃고 말았다.
이제까지의 수고가 모두 물거품이 된 건가? 아니면 이것이 신물 주기를 거부하겠다는 네르갈의 뜻인가? 난 이때까지 뭘 한 거지?
이런 생각이 아딘의 내면에서 솟구쳐 오르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부스럭-!]
돌 더미 속에서 무언가가 꿀렁거리며 부스럭거리기 시작했다.
아딘은 다시 바짝 긴장하며 메이스를 쥔 채 전투태세를 취했다.
[부스럭- 부스럭-]
한동안 돌 더미가 꿀렁거리더니, 돌덩이 하나가 허공으로 살짝 치솟았다가 능선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빼끔-]
그리고 돌덩이가 사라진 자리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머리를 내밀었다.
‘응?’
아딘은 순간 몸에서 힘이 탁 빠짐을 느꼈다.
마치 수사자처럼 갈기를 가진 조그만 황색 고양이는 돌 더미 위에 올라선 채 가만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곤 허공을 바라보며 크게 하품한 뒤 가만히 아딘을 바라봤다.
그 모습이 퍽 귀여워 아딘은 피식 웃으며 메이스를 마법 주머니에 집어 넣었다.
그리곤 천천히 고양이를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고양이는 잠시 아딘을 바라보더니 이내 천천히 능선을 따라 아래로 폴짝폴짝 내려오기 시작했다.
돌 더미 언덕 위에서 내려온 고양이는 그대로 멈춰선 채 도도한 자세로 아딘을 올려다봤다.
고양이에 가까이 다가간 아딘은 미소를 지으며 도망가지도 않는 고양이를 쓰다듬으려 쭈그려 앉았다.
그 순간,
“경배하라, 인간이여.”
고양이의 입이 열리고 굵직한 사내의 목소리가 흘러나와 아딘의 귀를 때렸다.
그 순간, 아딘은 자기도 모르게 그 자리에 무릎을 꿇은 후 고양이를 향해 절했다.
그의 발등과 무릎, 팔꿈치와 손바닥 그리고 이마가 정확하게 땅에 닿았다.
‘뭐, 뭐야?’
마치 엄청나게 강한 힘이 누르기라도 한 것처럼, 자신도 모르게 갈기 달린 고양이를 향해 절을 한 아딘은 당혹감을 느끼며 고개를 들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마치 자신의 것이 아니기라도 한 것처럼.
“그리고 찬양하라. 인간이여.”
다시 고양이의 입에서 굵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즉시 아딘은 상반신을 일으키고 양팔을 활짝 위로 펼쳐 든 채 입을 열고 어떠한 단어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흐라브마-! 꺅졜릐붸뮈에르-! 네뷔쉬이르하카흐라마-!”
일정한 음정을 가진 아딘의 방언.
‘이, 이게 뭐야?!’
자기 자신의 의지와 무관한 오체투지와 찬양에 아딘은 도무지 정신을 차리질 못했다.
잠시 후, 아딘은 천천히 팔과 고개를 내렸다.
그리곤 멍한 눈으로 갈기 달린 고양이를 바라봤다.
순간 고양이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마땅히 나 천계의 신 네르갈을 영접하는 자라면 먼저 경배와 찬양부터 해야 함이 옳도다.”
갈기 달린 새끼 고양이, 야생의 신 네르갈의 말에 아딘은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그런 아딘을 향해 네르갈은 물었다.
“그래, 소감은?”
아딘은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네르갈은 여전히 미소가 은은히 베여 있는 얼굴로 아딘에게 말했다.
“종의 진화를 지켜본 소감이 어떻냐고 물었다.”
진화라는 말에 아딘은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뭔 소리야?’
그저 의아한 표정으로 미소 짓고 있는 고양이, 네르갈을 바라볼 뿐이었다.
* * *
[이히이이잉-!]
황색 말이 거대 전갈의 집게에 붙잡힌 채 무기력하게 땅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구슬프게 울부짖으며 황색 말은 로제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로제는 녀석을 구해줄 여유가 없었다.
[휘유우우웅-!]
[퍼엉-! 퍼엉-!]
마차 근처를 날아다니는 열 마리의 대왕 사마귀 중 두 놈에게 푸른 불덩이를 날린 로제는 다시 또 다른 불덩이들을 소환하여 대왕 사마귀들을 노렸다.
[히히히힝-!]
붉은 말은 자기 발밑으로 꿈틀꿈틀 지나다니는 거대 전갈의 움직임에 공포를 느끼며 발작하기 시작했다.
[휘유우우웅-!]
[퍼엉-! 퍼엉-!]
또 두 마리의 대왕 사마귀가 청색 불덩이를 맞고 흔적도 없이 녹아 없어졌다.
하지만 놈들은 제법 넓게 산개해 있었기에, 폭발의 여파로 날개가 익어 추락하는 놈은 하나도 없었다.
여섯 마리 남은 대왕 사마귀를 바라보며 로제는 침을 꿀꺽 삼켰다.
[우지끈-!]
그사이 붉은 말도 거대 전갈이 마차와의 연결 부위를 부순 후 땅속으로 끌고 들어갔다.
그간 제법 정이 들었던 녀석까지도 끌려갔지만, 로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끼이이- 쿠웅-!]
그녀는 말들이 사라지며 앞으로 기울어지다 부서진 마차 연결 부위 덕분에 가까스로 살짝 기울어지는 데 그친 마차 위에서 균형을 잡느라 바빴다.
[휘유우우웅-!]
[퍼엉-! 퍼엉-!]
또 두 마리의 대왕 사마귀가 푸른 불덩이에 맞았다.
그 폭발의 여파에 이번에는 세 마리의 대왕 사마귀가 휩쓸렸다.
로제가 에너지를 제법 많이 응축시켰기에 폭발 범위가 늘어난 덕분이었다.
‘크윽…….’
하지만 덕분에 로제는 심장에 약간의 통증을 느껴야만 했다.
‘안 돼…… 버텨야 해…….’
하지만 그녀는 고통을 호소할 틈도 없었다.
땅바닥에 떨어진 3마리의 대왕 사마귀를 거대 전갈들이 부위별로 분해하고, 그런 거대 전갈들을 향해 홀로 살아남은 대왕 사마귀가 날아와 앞발을 휘두르는 것을 보며 이것이 기회임을 깨달은 로제는 곧장 토네이도를 일으켰다.
[휘이이이이잉-!]
엄청난 크기의 토네이도가 대왕 사마귀와 거대 전갈이 다투는 곳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콰드드드득-!]
땅까지 헤집어가며 일어난 토네이도는 순식간에 거대 전갈과 대왕 사마귀를 집어삼켰다.
이 거대한 바람의 힘 앞에서 단단한 키틴질 외피를 자랑하던 괴수들은 너무나도 손쉽게 흔적도 없이 갈려버렸다.
“커헉-!”
하지만 결국 로제도 코피를 터뜨리고 말았다.
다행히 마차 주변을 습격했던 괴수들은 모두 죽어버린 상태였다.
“로제!”
문을 열고 뛰쳐나온 토리가 지붕 위에서 균형을 잃고 흔들리던 로제를 바라보며 화들짝 놀랐다.
“이리로 내려와.”
토리는 로제를 향해 팔을 뻗었다.
로제는 힘겹게 그녀를 향해 몸을 던졌고, 토리는 가까스로 로제를 받았다.
“이리 주십시오.”
라인하르트가 로제를 받아 안아 든 다음 바닥에 눕혔다.
그리곤 옷을 찢어 그녀의 코피를 닦아 주었다.
‘큰일났네.’
라인하르트는 로제의 피를 닦아 준 후 입술을 깨물며 주위를 둘러봤다.
마차는 기울어져 있어 안에 들어가 있기 힘들었다.
말들이 사라진 만큼, 이제 괴수들이 먹잇감으로 삼을 만한 존재는 자기들뿐이었다.
‘괜히 들어왔어…… 제기랄…….’
한편, 로제는 힘겹게 시선을 네르갈의 신전 쪽으로 돌렸다.
힘겨운 와중에도 그녀는 그곳을 바라보며 속으로 외쳤다.
‘오라버니…… 어서…… 돌아와 주세요……’
그렇게 광명력 992년 8월 27일 초저녁의 괴수 침공은 말 2마리를 잃는 손실을 일으키며 끝났다.
* * *
“네가 처음 만난 거대 유인원. 1,200만 년 전 이곳 렝고스 일대에서 서식했던 원시 인류 중 하나다.”
네르갈의 말이 끝나자 그의 뒤편에 아딘과 처음 맞붙어 싸웠던 거대 유인원이 나타났다.
신기루처럼 등장한 거대 유인원은 이내 모습을 감추었다.
“인간보단 못하지만 인간에 근접한 지능을 지녔고, 오거보단 못하지만 오거에 근접한 지능을 지녔던 존재지.”
네르갈은 그 거대 유인원이 1,200만 년 전 원시 오거와 원시 거인족으로 분화됐다고 알려주었다.
“따뜻한 렝고스 지역에 살던 것들은 뇌가 퇴화되는 대신 근육과 뼈가 발달했지. 그 결과 4m 정도이던 키는 5m가 됐고, 근력이나 스피드는 거대 유인원보다 다소 빨라졌지.”
그리고 원시 거인족의 경우 뇌가 발달하는 대신 키와 근력, 스피드는 줄어들었다고 네르갈은 설명했다.
“거대 유인원의 후예인 오거와 거인족 중 오거는 그런대로 변화하는 환경에 맞게 잘 적응해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하지만 거인족의 경우 인간과 교류하고 함께하기 시작하며 점차 인간에 동화됐지. 그리고 1백만 년 전 완전히 멸종했고.”
네르갈의 뒤편으로 오거와 거인족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나는 모든 생명의 진화를 촉진하고 바라보는 존재다. 진화가 멈춘 것 같으면 진화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조성하도록 노력하지. 거대 유인원도 마찬가지 이유로 분화시킨 후 진화시켰다.”
그 말이 끝나자 네르갈의 뒤편으로 다섯 명의 벌거벗은 인간이 나타났다.
샤펠인과 제니스인, 게마인샤프트인, 벨로디나인 그리고 쿠만인이었다.
“너희 인류는 현재 진화가 멈춘 상태다. 그리고 모든 종은 진화가 멈추는 순간 퇴보하기 시작해 마침내 멸망하고 말지.”
다시 인간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오크가 나타났다.
“오크는 느리게 진화하고 있었다. 그런데 약 한 달 전부터 서북부의 녹색종 오크 사이에서 굉장히 빠른 진화가 발생하기 시작했지.”
순식간에 주변 풍경이 변했다.
아딘은 네르갈과 함께 허공에 뜬 채 발아래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카르갈?’
자신에게 염소를 바치며 평화와 우호를 부탁하던 카르갈이 자신이 건넨 강철검을 든 채 오크들을 통솔하고 있었다.
“네가 왕이란 존재의 개념을 알려준 순간, 저 녹색종 오크는 한 단계 진화했다. 외형적으로는 큰 차이가 없지만, 내부적으론 굉장한 변화를 가져오고 있지. 이미 주변의 다른 군소 부족 3개를 복속시켜 그들로부터 조공을 받고, 부족장 중 부족장, 대족장의 칭호를 듣고 있지.”
다시 아딘과 네르갈은 산 정상으로 되돌아왔다.
네르갈은 더 이상 웃고 있지 않았다.
“불칸이 너에게 갑옷을 준 이유는 아마 네가 그의 마음에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밑바닥으로 떨어진 악인이 개과천선하여 다시 위로 올라가는 그런 드라마를 불칸은 좋아하니까.”
순간 네르갈과 아딘 사이에 섬광과 함께 목걸이 하나가 나타났다.
황금빛 사자 얼굴 모양을 한 펜던트가 달린 신물, 네르갈의 목걸이였다.
“네가 인간들은 물론 오크들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나의 신전으로 온 이유는 이것 때문일 것이다.”
네르갈의 물음에 아딘은 고개를 끄덕였다.
“불칸이 그러했던 것처럼, 너 또한 내게 시험을 받아야 한다. 네가 나를 만족시킨다면, 넌 이것을 얻을 것이고 그렇지 못한다면 넌 그저 최초로 이 산 정상에 오른 것을 기념하며 내려가게 되겠지.”
네르갈의 말에 아딘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런 아딘을 바라보며 네르갈은 근엄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오크는 너의 덕을 받아 앞으로 급격한 진화를 겪게 될 것이다. 돌덩이나 다루고, 조그만 움막 마을에서 1천 마리 정도가 모여 미개하게 살던 모습을 집어던지고 본격적으로 문명다운 문명을 일구겠지.”
네르갈의 목걸이가 네르갈의 목에 걸렸다.
“하지만 인간은 더 이상 진화할 일이 없다. 그리고 나는, 우리 천계의 신들은, 진화하지 못하는 종은 항상 멸종시켰다. 고여있는 존재가 땅을 장악하면, 그 땅은 반드시 썩기 때문이지.”
아딘은 침을 삼켰다.
이다음에 이어질 네르갈의 말이 곧 그가 치러야 할 시험임을 깨달은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네르갈의 입에서 질문이 튀어나왔다.
“멈춰버린 인간의 진화를 위해 넌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내가 이 목걸이를 네게 줌으로써 멈춰버린 너의 동족들이 멸종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문명의 진보라든가, 한 인종의 발전이 아닌 한 종의 진화.
너무나도 거대하여,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심지어 과학의 시대에 살던 김현수일 때에도 생각지 못했던 질문에 아딘은 한동안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