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7 네르갈의 신전 (3)
광명력 992년 8월 24일 초저녁.
석양이 서쪽 지평선에 쫙 깔리고 어둠이 동쪽 지평선으로부터 점차 하늘을 뒤덮어가기 시작할 무렵, 아딘은 비교적 경사가 완만한 오르막길에 올라섰다.
‘얼마나 올라온 거지?’
아딘은 아래를 내려다봤다.
2시간 동안 그가 타고 올라온 암벽 아래 펼쳐진 풍경이 제법 아찔했다.
아딘은 씩 웃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중간보단 조금 덜 올라왔네. 보자. 이 길로 가면…… 나선형으로 쭉 이어져 있던가?’
제일 처음, 두루마리가 알려준 루트를 바라보며 아딘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쉬었다가 한 5시간 정도 딱 각잡고 올라가면……’
아딘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파아앗-!]
갑작스럽게 불칸의 갑옷에서 환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응?”
아딘은 전혀 듣도보도 못한 현상에 일순간 당황했다.
그리고 그가 당황스러워하는 그 짧은 순간, 갑옷은 저절로 해제되어 벨트로 돌아갔고 벨트는 아딘의 몸속으로 들어가 잠들어버렸다.
‘뭐, 뭐야 이거?!’
아딘은 당혹스러워하며 배를 만져보았다.
그리고 벨트를 느끼려 했다.
하지만 완벽하게 잠든 벨트는 아딘의 뜻에 아무런 공명을 일으키지 않았다.
‘이, 이게…….’
아딘은 곧장 두루마리를 펼쳤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두루마리는 마치 그저 아무런 쓸모도 없는 낡은 물건인 양 누리끼리한 표면만을 아딘에게 보여줄 뿐이었다.
‘설마…….’
아딘은 고개를 들어 높다란 곳에 자리한 산 정상을 바라보았다.
‘네르갈의 시험인가? 오로지 인간적인 힘만으로 올라오라는?’
아딘은 두루마리를 품에 집어넣고 마법 주머니를 열었다.
다행히 마법 주머니는 잘 작동하고 있었다.
‘내 힘으로 이 산을 올라간다고?’
산길 자체는 평탄했다.
정상으로 가는 길은 그리 복잡하지도 않아 그냥 나선형으로 산을 빙 두르고 있는, 아딘의 눈앞에 펼쳐진 길만 따라가면 그만이었다.
문제는 그 길이였다.
아무리 아딘이 불칸의 갑옷 덕분에 기초체력이 상당히 좋아졌고, 어지간한 움직임에는 지치지도 않게 됐다지만 에베레스트산보다 높은 네르갈의 신전 정상으로 가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일단 올라가다 실수로 미끄러지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아딘은 품에서 두루마리를 꺼네 마법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곤 마법 주머니를 허리춤에 꽉 메고는 크게 심호흡한 후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태양이 완전히 질 때까지만 오르자. 아직은 괜찮아.’
서쪽 지평선으로 점차 사라져가는 태양을 바라보며 아딘은 앞으로 전진했다.
‘네르갈의 시험이 단순히 등반이라면 다행일텐데…….’
하지만 과연 신의 시험이 그 정도일까? 하는 생각에 아딘은 심각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불칸의 신전으로 가는 길도 평탄하지 않았어. 그 시험 자체는 결과적으로는 크게 어려운 시험은 아니었다지만 어쨌건 불칸의 갑옷을 얻는 과정도 그리 쉽진 않았지.’
그래도 설마 죽기야 하겠냐는 낙관론과 혹시 모른다는 비관론이 아딘의 내면에서 충돌하고 갈등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 갈등이 아딘의 마음과 더 나아가 그 몸 전체를 진동시키기 시작할 때, 홀연히 안개가 아딘의 주위에 깔리기 시작했다.
‘안개?’
아딘은 인상을 찌푸렸다.
대기 중 습도가 낮은 렝고스에서 안개는 굉장히 특이한 현상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딘은 바짝 긴장한 채 마법 주머니에서 메이스 2자루를 꺼내 양손으로 꽉 붙들었다.
[우우어어어어-!]
곧, 안개 속에서 우렁찬 포효가 터져 나왔다.
오거의 것 같기도 하고 곰의 것 같기도 한 굵직하고 묵직한 포효에 아딘은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우어어어어어-!]
[두두두두두-!]
잠시 후, 안개를 뚫고 거대한 유인원이 나타났다.
고릴라와 오거 사이 어딘가에 있을 법한 얼굴에 매우 인간적인 7등신 비율을 가진 4m 신장의 거대 유인원은 가슴을 두드리며 아딘 앞에 섰다.
그리곤 날카로운 이빨을 번뜩이며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아딘을 바라보았다.
‘저건 도대체 뭐야?’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아딘은 조심스럽게 마법 주머니에서 두루마리를 꺼냈다.
역시나 두루마리에는 아무런 정보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딘은 다시 그것을 집어넣고는 양손으로 메이스를 쥔 채 긴장한 표정으로 유인원을 바라보았다.
[크릉-!]
유인원도 살짝 긴장한 눈초리로 아딘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마치 사람이 그러하듯 양팔로 가드를 올린 채 천천히 아딘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도대체 이건 뭐야?’
오거나 고릴라 등의 거대 영장류에게선 보기 힘든, 굉장히 인간적인 결투 자세에 아딘은 정신을 바짝 차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양자 사이에는 한동안 긴장된 침묵이 흘렀다.
[우어어어-!]
그리고 그것은 거대 유인원의 선공으로 깨졌다.
[부우웅-!]
바람을 가르고 거대 유인원의 주먹이 아딘에게 날아왔다.
엄청난 스피드와 파워에 아딘은 기겁을 하며 몸을 굴렸다.
[쿠웅-!]
유인원의 주먹은 그대로 아딘이 있던 자리를 내리찍었다.
단단한 암석에 금이 가고, 땅이 일순간 흔들릴 정도로 강한 일격이었다.
‘도대체 이 똥파워는 뭐……’
그 강력함에 아딘이 경악하기도 잠시, 곧장 거대 유인원의 2차 타격이 들어왔다.
‘허억-!’
아딘의 안면을 향해 거대 유인원의 왼발이 날아들었다.
자기 상반신 만한 거대한 발등을 아딘은 가까스로 뒤로 자빠져 누우며 피했다.
그러자 거대 유인원은 그대로 몸을 반 바퀴 돌린 후 왼발로 다시 땅을 밟아 균형을 잡고 오른발을 들어 그대로 아딘의 몸을 밟으려 했다.
‘흐억-!’
아딘은 그대로 오른쪽으로 몸을 굴렸다.
[쿠웅-!]
간발의 차로 거대 유인원의 발은 아딘이 있던 곳을 밟았고, 놈의 발은 땅바닥에 약 3cm 정도 박혔다.
아딘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싸울 줄 아는 놈이다.’
아딘은 침을 꿀꺽 삼켰다.
등뒤로 서늘한 바람이 훑고 지나갔다.
아딘은 힐끔 아래를 내려다봤다.
어느새 그는 벼랑 끝에 내몰려 있었다.
‘다시 안쪽으로 들어가야 해.’
아딘은 거대 유인원의 몸을 살폈다.
처음 긴장했던 모습은 오간 곳 없이 거대 유인원은 실실 웃으며 오른손 중지를 까딱거리고 있었다.
‘도발?’
너무나 인간적인 그 모습에 아딘은 순간 당황했다.
아딘은 그대로 가만히 거대 유인원을 바라봤다.
그러자 거대 유인원은 다시 가드를 올리곤 몸을 앞뒤로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우워우-!]
거대 유인원이 빠르게 상체를 앞으로 뺐다. 아딘은 흠칫 놀라며 살짝 뒤로 움직였다.
‘젠장!’
발뒤꿈치가 허전한 것이, 그야말로 벼랑 끝에 발을 살짝 걸치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딘은 다시 살짝 앞으로 움직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심리전을 한다고? 유인원 따위가?’
아딘은 이를 뿌드득 갈았다.
‘밀려날 순 없어.’
어째서 생명체가 주위에 하나도 없는데 정작 신전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산속에 이런 괴수가 있는지, 이놈은 도대체 뭐하는 놈인지, 아딘은 더 이상 그런 것을 고민하고 있을 순 없었다.
불칸의 갑옷도, 두루마리도 무용지물이 된 지금,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을 장소에서 죽지 않기 위해선 최선을 다해 싸워야만 했다.
[타탓-!]
아딘은 그대로 땅을 박차고 거대 유인원을 향해 달려들었다.
거대 유인원은 아딘의 그런 행동에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팔 길이 1.8m 다리 길이만 2.3m에 이르는 자신의 리치를 믿어 의심치 않으며 거대 유인원은 달려드는 아단의 면상을 향해 발을 뻗었다.
그것을 아딘은 몸을 앞으로 한 바퀴 굴리며 피했다.
[부우웅-!]
아딘이 몸을 굴리자마자 앞으로 뻗었던 유인원의 발은 그대로 아래로 내려왔다.
[뻐억-!]
“커헉-!”
유인원의 발뒤꿈치가 정확하게 아딘의 등판을 찍었다.
아딘은 내부가 진탕이 나는 통증을 받으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거대 유인원이 씩 웃으며 발을 들어 고꾸라진 아딘의 등짝을 밟으려 들었다.
그 순간, 아딘은 필사적으로 몸을 움직여 앞으로 한 바퀴 굴렀다.
그리곤 간발의 차로 자신이 누워 있던 곳을 내리찍은 거대 유인원의 아킬레스건을 메이스로 온 힘을 다해 후려갈겼다.
[까앙-!]
마치 쇳덩어리로 돌덩어리를 치는 듯한 소리가 나며 메이스는 거대 유인원의 오른쪽 아킬레스건을 때렸다.
[꾸어어어억-!]
거대 유인원이 처음으로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거기서 아딘은 멈추지 않았다.
아딘은 곧장 용수철처럼 웅크렸다가 뛰어오르며 거대 유인원의 하복부를 메이스로 찔렀다.
[푸욱-!]
[뻐억-!]
하나는 거대 유인원의 고환을 찔러 올렸고, 다른 하나는 거대 유인원의 고환과 항문 사이, 인간으로 치면 회음혈에 해당하는 부분을 찔렀다.
[끄아아아악-!]
마치 사람처럼 비명을 내지르며 거대 유인원은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아딘은 몸을 한 차례 굴려 거대 유인원의 뒤편으로 향했다.
거대 유인원은 양손으로 하복부를 부여잡은 채 바닥에 누워 입에 거품을 문 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퉤-!”
아딘은 속에서 올라온 피를 침과 함께 뱉어내며 피인지 뭔지 모를 거대 유인원의 체액이 묻은 메이스를 든 채 놈에게 다가갔다.
거대 유인원은 오른손을 아딘을 향해 펼쳤다.
마치 인간이 “아, 잠깐. 타임! 잠깐! 나 뼈 맞았어!”라고 하는 것 같은 그 모습에 아딘은 황당하다는 듯 코웃음을 치고는 그대로 놈의 손을 메이스로 갈겼다.
[우드득-!]
놈의 손가락이 부서졌다. 놈은 고통에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고, 아딘은 그대로 놈에게 다가가 놈의 머리통을 메이스로 내려쳤다.
[까앙-! 까앙-! 까앙-! 까앙-!]
양손으로, 마치 빨랫방망이를 휘두르듯 아딘은 신나게 거대 유인원의 머리통을 때리고 또 때렸다.
[꾸어…… 꾸어억…… 꾸윽……]
거대 유인원은 제대로 된 저항도 하지 못한 채 간헐적으로 비명을 내질렀다.
[뻐억-!]
마침내, 아딘의 메이스가 거대 유인원의 두개골을 함몰시키고 그 속에 든 뇌를 강타했다.
거대 유인원은 온몸을 한동안 부르르 떨더니 이내 축 늘어졌다.
“허억…… 허억…… 이게 임마…… 살을 주고…… 뼈를 친다는 거야…… 알겠냐? 덜떨어진 원숭이 새꺄…….”
아딘은 씩 웃었다.
동시에 그의 입에서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아딘은 눈을 까뒤집으며 그 자리에서 허물어지듯 쓰러졌다.
“드르릉-!”
그리고 그는 곧장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 *
“아저씨! 마차로 들어가요!”
마차 지붕 위에서 로제가 소리쳤다.
“마차로 들어오라고 해요!”
토리가 그것을 라인하르트에게 통역해 주었다.
라인하르트는 후다닥 마차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키이이이잇-!]
[키이이잇-!]
[키이이이이이-!]
대왕 사마귀가 무려 3마리나 마차 위 허공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사사사사삭-!]
거대 전갈 네 마리가 마차 주위를 빠르게 돌고 있었다.
[우어어어어-!]
털 없는 고릴라처럼 생긴 신장 5m짜리 회색 오거 다섯 마리가 거대 전갈로부터 약간 떨어진 곳에서 포효하며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로제는 양손에 푸른 불덩어리를 든 채 긴장한 표정으로 사방을 경계하고 있었다.
‘오라버니…….’
그녀는 눈물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으며 공격의 때를 기다렸다.
지난번과는 달리 숫자도 많고 그 움직임도 굉장히 복잡했기에 로제는 불덩이를 던짐에 있어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키이이잇-!]
[키잇-!]
그 순간, 하늘을 날던 대왕 사마귀 셋 중 둘이 잠시 허공에서 움직임을 멈췄다.
[휘유우웅-!]
[퍼엉-! 퍼엉-!]
그때를 놓치지 않고 로제는 두놈을 향해 푸른 불덩이를 집어 던졌다.
불덩이는 정확하게 놈들의 몸에 명중하며 폭발했고, 제법 로제가 무리를 해가며 크기와 위력을 키웠던 탓에 놈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키이익……!]
또한 놈들의 주변을 날던 다른 대왕 사마귀는 폭발에 휩쓸리며 날개가 불에 타서 땅으로 추락했다.
[사사사사삭-!]
대왕 사마귀가 땅으로 추락하자마자 거대 전갈 4마리가 놈에게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대왕 사마귀는 산 채로 해체됐고, 거대 전갈들은 각각 대왕 사마귀의 신체 부위를 들고 땅을 파고 지하로 내려갔다.
로제의 시선이 곧장 오거들에게로 향했다.
오거들은 자기들의 경쟁자들이 사라지자 좋다고 마차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런 놈들을 향해 로제는 조그만 푸른 불덩어리 다섯 개를 연이어 날렸다.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