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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56화 (56/175)

056 네르갈의 신전 (2)

아딘이 저 멀리, 구름모자를 쓴 암석산으로 떠나는 것을 확인하며 라인하르트는 말들을 달래 1km 후방으로 이동했다.

후퇴하자마자 말들은 금새 안정을 되찾았고, 언제 그랬냐는 듯 라인하르트의 통제에 순응했다.

적당한 위치에 자리를 잡고 모닥불을 피워 야영 준비를 하며 라인하르트는 문득 깨달았다.

‘여기까지 온 용병은 내가 최초겠지?’

라인하르트는 장작을 쌓은 후 주위를 둘러보았다.

허허벌판, 산 하나 언덕 하나 없이 그저 기다란 갈대만이 시야를 방해하는 것의 전부인 대초원.

드넓은 지평선이 사방으로 깔린 렝고스 중심부에서 라인하르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괜히 자존심 부렸나?’

처음 아딘이 로제와 함께 그에게 와서 의뢰 내용을 말할 때, 라인하르트는 자존심이 팍 상했다.

마치 자신을 딱 그 정도 의뢰나 받아 줄 삼류 용병 정도로 보는 듯한 그 모습에 라인하르트는 배짱을 부렸다.

사실 지난 3년간 자기 철칙 지킨답시고 렝고스에서 나는 부산물을 하나도 안 챙긴 덕분에 당시 그의 주머니 사정은 굉장히 어려웠다.

일반적으로 경력 2년 이상의 숙련 용병 일당인 10실버보다도 더 낮게 쳐줘도 의뢰를 받아야할 만큼 사정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라인하르트는 자존심에 배짱을 부렸고, 결과적으로 아딘이 그의 철칙을 존중함에 따라 이렇게 여기까지 오게 됐다.

‘왜 내가 필요 없다 했는지를 알겠네.’

라인하르트는 시선을 아딘이 간 방향으로 돌렸다.

이미 그의 모습은 조그만 점이 돼 잘 보이지도 않았다.

라인하르트의 시선이 이번에는 마차 지붕 위에서 하염없이 암석산을 바라보는 로제에게로 향했다.

어딘지 모르게 당돌함과 나약함이 공존하는 것 같이 느껴지는 이 조그만 소녀가 부렸던 마법들을 떠올리며 그리고 아딘이 보여주었던 무용을 떠올리며 라인하르트는 몸을 한 차례 부르르 떨었다.

‘잡일이나 하자. 그게 내 일이야.’

라인하르트는 가만히 주머니에서 무한 발화 성냥을 꺼내 바닥에 긁어 불을 붙인 후 모닥불을 피웠다.

‘겸손해야 해. 사람은 겸손해야 해.’

그렇게 이제는 괜찮은 용병단에 몸을 담고 있는 친구의 조언을 떠올리며 라인하르트는 가만히 파이프에 연초를 넣고 불을 붙였다.

* * *

‘행군하는 것 같기도 하고, 이것 참.’

하염없이 펼쳐지는 단조로운 풍경을 바라보며 아딘은 의미 없는 옛날 생각에 잠겼다.

‘행군만큼은 진짜 하기 싫었는데, 말년까지 행군을 할 줄은 몰랐었지.’

군 시절 행군에 관한 추억이라든가.

‘서울에 있을 때는 한강변을 걷기도 했고, 부산에선 온천천이 걷기 좋았지.’

전역 후 종종 운동 삼아 걸었던 일이라든가.

‘그때는 하루에 15km만 걸어도 힘들었는데 지금은 그런대로 괜찮네. 아딘 콘스탄틴의 체력이 원래 좋았던 것도 있겠지만 역시나 불칸의 갑옷 덕분이겠지? 착용자의 순수한 육체적 능력도 강화시켜 주는 신물이니까.’

현재 자신의 강인한 체력에 대한 생각까지.

허허벌판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이렇게 홀로 생각하는 것밖에는 없었다.

하다못해 야생 동물이라도 있으면, 그것이 비록 아무리 흉악한 맹수라 하더라도, 이렇게 심심하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하며 아딘은 가만히 전방을 바라봤다.

‘그래도 가까워지긴 많이 가까워졌네.’

서쪽 지평선으로 태양이 내려가고 있는 저녁, 석양에 물든 네르갈의 신전이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출발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손톱보다 작아 보이던 것이 이제는 확연히 그 웅장한 자태와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히말라야를 가까이에서 본 사람들이 이런 느낌인 걸까?’

풀 한 포기 없이 산 전체가 흰 돌로 이루어진 네르갈의 신전은 산봉우리에 구름을 걸친 채 단단하게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저 꼭대기에 네르갈의 신상이 있고, 그 신상 앞에 서면 네르갈이 찾아 온다고 했지. 그래, 그렇게 설정해 두었지.’

불칸의 경우 그를 부르기 위해선 그의 신상 앞에 간절한 마음으로 절을 해야 했다.

하지만 네르갈은 그런 게 없었다.

단지 자신의 신상 앞에 찾아오기만 하면 나타나 주었다.

‘에베레스트보다 높은 산 정상까지 가는 것 자체가 엄청난 수고를 요하니까.’

아딘은 잠시 그 자리에 서서 석양을 바라보다가 이내 두루마리를 꺼내 펼쳤다.

곧 자신과 네르갈의 신전 사이의 거리를 보여주는 지도가 나타났다.

‘24km…… 허. 오늘 하루만 26km를 걸었네?’

아딘은 씩 웃으며 두루마리를 말아 품에 넣었다.

그는 잠시 주변을 둘러본 후 그대로 그 자리에 주저앉아 마법 주머니를 열어 육포와 건어물을 꺼넸다.

‘네르갈은 야생의 신이야. 뭐, 애초에 그런 특성 자체가 인간이 만든 거라고 설정하긴 했지만 대체로 신들의 성향은 인간이 칭하는 것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지.’

광명교의 5대 주신.

아텐, 불칸, 티르, 아이크, 수르자.

정의, 근면, 지혜, 용맹, 사랑.

각각 대칭되는 신들의 성향은 엄밀히 따지자면 신 자신들이 그렇게 칭하는 게 아닌, 인간이 그렇게 분류한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한편으로 5대 주신들의 성향 자체도 딱히 인간적 정의에서 벗어나진 않았다.

적어도 김현수는 그렇게 설정했다.

무슨 의도였는지는, 지금에 와서는 까먹었지만, 고1 신학기 시즌의 김현수는 그런 식으로 설정했다.

그렇다면 광명교에서 비주류로 취급되는 신인 네르갈은 도대체 어떤 성향을 가지고 있을까?

‘뭐 내가 구체적으로 네르갈이 이렇다, 저렇게 설정한 게 크게 없으니…….’

네르갈은 그저 야생의 신이자 생명의 진화를 촉진하고 유도한 존재라는 것이 김현수의 설정이었다.

그 외에 그가 어떠한 성향인지에 대해선 딱히 기입한 것이 없었다.

‘그리고 보통 내가 구체적으로 설정해 두지 않은 건 이 세상에서 알아서 그 형상을 하고 있었고 말이야.’

아딘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시선이 이제는 부쩍 가까워진 네르갈의 신전으로 향했다.

석양이 반사돼 붉은빛을 뿜어대는, 구름 모자를 쓴 저 거대한 암석산 정상을 바라보며 아딘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일단 악신은 아니겠지? 악한 존재는 죄다 마계에 있다고 설정해뒀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아딘은 긴장된 표정으로 건어물을 한입 물어뜯었다.

* * *

[키이이잇-!]

[부우웅-!]

거대한 날갯짓 소리와 함께 대왕 사마귀의 기괴한 울음소리가 마차 주변을 뒤흔들었다.

[히히히힝-!]

[이히이이잉-!]

말들은 공황상태에 빠져 앞발을 치켜든 채 날뛰었고, 라인하르트는 마부석에서 그것들을 진정시키느라 애를 먹고 있었다.

‘젠장! 저건 또 왜 나타난 거야?!’

딱 1km 사이를 두고, 천국과 지옥이 갈렸다.

아딘이 홀로 떠나고 뒤로 물러나자, 지나왔을 때와 달리 이곳에는 별의별 야수와 괴수들이 날뛰고 있었다.

지금 나타난 대왕 사마귀가 대표적인 괴수였다.

[키이이잇-!]

사마귀가 원래 저런 소리를 냈나? 싶은 소리를 입으로 내며 대왕 사마귀는 마차 위 10m 상공에서 맴돌며 먹잇감을 물색하고 있었다.

[키이이이…….]

[휘유우웅-!]

[퍼어엉-!]

하지만 곧 놈은 푸른 불덩이에 직격당하며 그대로 땅으로 추락했다.

[쿵-!]

가벼운 충돌음과 함께 대왕 사마귀의 복부가 땅바닥에 떨어졌다.

복부에 달린 다리 한쪽이 잠시 꿈틀거리다 이내 완전히 움직임을 멈췄다.

[쿠구구구구-!]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마차 주변의 땅속에서는 거대 전갈이 빠르게 움직이며 마차를 노리고 있었다.

[구우우우-!]

그러나 놈이 움직임은 곧이어 닥친 지진에 멈춰버렸다.

[퍼엉-!]

땅 내부가 미친 듯이 흔들리며 붕괴될 위험에 처하자 거대 전갈은 그대로 땅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휘유우웅-!]

[퍼어엉-!]

그런 놈의 몸통을 향해 푸른 불꽃이 또 날아가 폭발했다.

폭발에 휘말린 신체 절반이 그대로 녹아 없어졌고, 꼬리와 그 부근의 다리 몇 개만이 남아 꿈틀거리다 이내 완전히 축 늘어졌다.

그제야 말들이 다소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본능적으로 자기들을 노리던 상위 포식자가 사라졌음을 깨달은 것이었다.

“워, 워, 워, 워.”

가까스로 말들을 진정시킨 라인하르트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어 마차 지붕 위를 바라봤다.

순식간에 대왕 사마귀와 거대 전갈을 죽인 소녀, 로제가 슬픔 가득한 눈으로 네르갈의 신전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라비는 소드 마스터에 동생은 대마법사? 이게 도대체 뭔…….’

라인하르트는 침을 꿀꺽 삼키며 조용히 연초를 다시 태우기 시작했다.

‘진짜 용병 일 하면 볼꼴, 못 볼꼴 다 본다더니…… 별걸 다 보네…….’

그러면서 라인하르트는 달빛 아래 드러난 대왕 사마귀와 거대 전갈의 사체를 바라봤다.

잠시 그것을 바라보던 라인하르트는 마차 미닫이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곧 문이 열리며 토리가 이야기했다.

“무슨 일이세요?”

아딘이 사라지고, 이 마차에서 유일하게 게마인샤프트 동부 방언과 아퐁어에 모두 능숙한 사람이 그녀뿐이었기에 라인하르트는 토리에게 이야기했다.

“저거 시체 저대로 내버려두면 밤에 하이에나부터 사자까지 별것들이 다 몰려들 것 같다고 좀 말씀해 주세요.”

토리는 라인하르트의 말을 그대로 로제에게 전해주었다.

[휘이이이잉-!]

그 순간, 거대한 토네이도 2개가 발생해 대왕 사마귀와 거대 전갈의 남은 신체를 집어삼켰다.

[콰드드드득-!]

토네이도는 순식간에 두 시체를 흔적도 남기지 않고 분쇄해버렸고 이내 허공으로 사라졌다.

‘오라버니……’

로제는 가만히 네르갈의 신전을 바라보았다.

아딘에게 구원받은 후 단 하루도 떨어져 있지 않았건만, 이렇게 기약 없이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불안이 그녀를 괴롭게 했다.

‘보고 싶어요…….’

그렇게 로제는 조용히 눈물을 한 방울 흘렸다.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라인하르트는 그 강력한 힘에 어울리지 않는 소녀 같은 모습에 기괴함을 느끼며 온몸을 부르르 떨어야 했다.

그렇게 광명력 992년 8월 23일 밤은 지나가고 있었다.

* * *

8월 24일 늦은 오후.

“후아……!”

아딘은 드디어 네르갈의 신전 초입에 들어섰다.

허리를 뒤로 휘게 해야 겨우 보이는 거대한 정상을 바라보며 아딘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품에서 두루마리를 꺼내 펼쳤다.

두루마리 위로 곧 정상까지 오르는 최단 거리 루트가 나타났다.

‘이야. 최단 거리인데도 하루가 걸려?’

아딘은 그 말도 안 되는 거리에 황당함을 느꼈다.

‘아무리 산을 오르는 거라지만…… 하긴 에베레스트산은 보니까 전문 등반인들도 굉장히 오랫동안 오르긴 하더라…….’

그러다 문득 아딘은 한 가지 생각에 이르렀다.

‘이거 혹시 맨몸으로 올랐을 때 기준으로 작성된 건가?’

아딘의 시선이 다시 두루마리로 향했다.

여전히 두루마리에는 최단 거리 루트와 함께 예상 소요 시간이 적혀 있었다.

‘그렇다면……?’

아딘은 그대로 불칸의 갑옷을 착용했다.

황금빛 섬광과 함께 그의 전신이 불칸의 갑옷으로 덮였다.

그 상태로 아딘은 다시 두루마리를 확인했다.

곧 두루마리 위의 내용이 바뀌기 시작했다.

최단 거리 루트 자체가 달라졌고, 예상 소요 시간도 달라졌다.

‘예상 소요 시간…… 7시간…… 근데 루트가…….’

아딘은 인상을 찌푸리며 지도와 네르갈의 신전을 번갈아 바라봤다.

‘이거 그냥 사실상 암벽타기 하라는 거 아니야?’

아딘은 황당함을 느꼈다.

그의 시선이 다시 네르갈의 신전으로 향했다.

‘올라갈 수는 있을 것 같긴 한데…… 이건 뭐…….’

잠시 황당함을 느끼던 아딘은 이내 두루마리를 도로 집어넣고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래, 한번 해보자. 뭐, 정 안되면 떨어질 때 잘 떨어져서 죽지만 않으면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아딘은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육중해보이는 외관과는 달리 엄청난 속도로 산 초엽을 뛰어오르던 아딘은 이내 깎아진 절벽이 나타나자 그대로 그 자리에서 도약했다.

[쿵-!]

30m가량을 한 번에 도약한 아딘은 암벽에 손을 박아 넣었다.

‘할 만하네.’

그렇게 아딘의 네르갈의 신전 등반은 시작됐다.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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