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4 초원의 문명 (6)
오크의 언어를 할 줄 아는 인간은 사실상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잭 존슨같이 특이한 경우가 아닌 이상, 인간이 오크의 언어를 배울 일은 없었다.
그랬기에 아딘은 녹색종 오크 카르기아족 족장 카르갈에게 자신의 실명을 밝혔다.
물론 자칫 성씨까지 이야기했다간 라인하르트나 토리가 알아들을 수도 있는 만큼, 오크어의 하나인 것처럼 이름만 말했다.
아딘의 말에 카르갈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우리는 그대와 평화를 원한다. 우리는 그대와 싸우고 싶지 않다. 우리는 그대가 우리를 호가르의 야만족이나 베뭉가르의 천박한 것들에게 그러했듯, 우리에게도 재앙을 내리지는 않길 바란다.”
그러면서 카르갈은 품에 안고 있던 염소를 양손으로 들어 앞으로 내밀었다.
그것이 상대방과의 평화와 우호를 원한다는 녹색종 오크의 외교적 표현임을 두루마리에서 확인한 아딘은 고개를 끄덕이며 카르갈에게 이야기했다.
“그 두 부족은 우리를 공격했다. 그래서 내가 멸망시켰다. 하지만 나는 조금 전에 보았다. 그대들은 인간을 건들지 않는다는 것을. 그러니 우리는 그대의 부족과 적대할 생각이 없다. 안심해도 좋다.”
아딘의 말에 카르갈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뒤를 따라왔던 둘째, 셋째 아들과 예언자도 아딘의 말에 안심했다.
“고맙다. 긍지 있는 카르기아의 모두를 대표해 그대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리고 나는 우리 부족과 그대 사이의 평화와 우호를 기념하여 그대를 우리 부족의 영역으로 초대하고자 한다.”
카르갈의 말에 아딘은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오크 마을로?’
그가 본 오크 마을은 호가르족의 것뿐이었다.
곳곳에 인간의 유골과 썩다 만 시체가 있던 끔찍한 장소.
아딘이 구태여 마을 전체를 불로 태운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쟤들 마을은 그렇진 않겠다만…….’
그래도 구태여 신석기 수준의 움막으로 가득한 곳에 찾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무엇보다도 토리가 문제였다.
‘트라우마는 쉽게 지워지지 않아. 다행히도 자기 손으로 잭 존슨을 죽이고, 눈앞에서 내가 오크들을 때려죽이는 모습을 봤으니 좀 나아지긴 했겠지만, 구출된 지 얼마 안 돼 다시 오크 마을로 들어가면…… 아마 미쳐버릴지도 몰라.’
숙고 끝에 아딘은 그 초대는 거부하기로 했다.
“그건 곤란하다. 우리 사정이 있어서 그대들의 마을에 갈 수는 없다. 마음만 받겠다.”
그러자 이번엔 카르갈이 당황했다.
그는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솔직하게 말하겠다. 지금 우리 부족은 모두 그대를 두려워하고 있다. 그대에 대한 공포로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 그대와 우리 사이에 평화와 우호가 생겼음을 그들의 눈으로 확인시켜야만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다.”
카르갈의 말에 아딘은 턱을 쓰다듬었다.
‘솔직히 내가 저것들 부족 문제에 상관할 바는 아니긴 한데…….’
그래도 오크 사회에서 최고의 권위와 힘을 자랑하는 부족장이 직접 자기 앞에 염소를 들고 온 만큼, 무언가 성의를 보이는 것이 또 예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아딘은 품었다.
아딘은 고개를 끄덕이며 마법 주머니에서 검을 칼집째 꺼냈다.
‘어차피 손맛은 메이스가 좀 더 좋으니까. 검은 당분간 뭐 필요도 없으니…….’
아딘은 그대로 마차 지붕 위에서 내려와 천천히 카르갈에게 다가갔다.
카르갈은 아딘이 자신에게 다가오자 흠칫했다.
뒤에 있는 아들들과 예언자는 보지 못했지만, 아딘은 확실히 볼 수 있었다.
그가 자신을 상당히 두려워하고 있음을.
‘그래도 인간 지도자보단 낫네. 부하를 앞에 내세우지 않고 자기가 직접 오니까.’
아딘은 미소를 지으며 카르갈에게 검을 건넸다.
“그대가 염소를 주니 나는 검을 주겠다. 이것이 나와 그대 사이에 맺어진 평화와 우호의 증거다. 가서 부족민들에게 이것을 보여주라. 그리고 이야기하라. 우리 시대의 평화가 여기에 있다고.”
아딘의 말에 카르갈의 얼굴에 미소가 번져갔다.
카르갈은 아딘이 건넨 검을 왼손으로 받았고, 아딘은 카르갈이 건넨 염소를 양손으로 받았다.
[메에에에-!]
염소가 가볍게 울었다.
아딘은 염소의 등을 한 차례 쓰다듬은 후 카르갈을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언젠가 우리의 평화와 우호가 더욱 발전하길 바란다. 그대가 한 부족의 족장이듯, 나 또한 곧 한 나라의 왕이 될 것이다.”
“왕?”
“여러 부족장을 아래에 두고 거느리는 부족장 중의 부족장이라 보면 될 것이다. 나는 그런 존재가 될 것이다.”
카르갈의 눈이 순간 살짝 떨렸다.
‘부족장 중의 부족장? 왕?’
아딘의 말에 카르갈은 심장이 두근거림을 느꼈다.
아딘은 카르갈을 향해 미소를 지어보인 후 다시 마차 지붕 위로 올라갔다.
곧 마차는 출발했고, 카르갈과 두 아들들 그리고 예언자는 길 한복판으로 비켜선 채 마차가 떠나는 것을 바라보았다.
‘왕?’
카르갈은 멀어져가는 아딘의 뒷모습과 그가 주고 간 강철검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부족장 중의 부족장?’
[스르릉-!]
카르갈은 검을 뽑았다.
햇빛을 반사하며 칼날이 그 시퍼런 예기를 드러냈다.
“이, 이게 뭡니까, 족장님?”
둘째 아들이 물었다.
셋째와 예언자도 모두 멍한 표정으로 칼을 바라보고 있었다.
호가르족과는 달리 인간을 습격한 적이 없어 인간에게서 전리품을 빼앗은 적 또한 없기에, 그들에게 강철검은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우리 시대의 평화…….”
카르갈이 몽롱한 눈으로 검을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부족장 중의 부족장…….”
카르갈의 그런 모습에 아들들과 예언자가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왕…….”
* * *
“오크한테 칼을 준 거 말입니다. 괜찮겠습니까?”
저녁 시간.
모닥불 주변에 모여 앉아 염소 고기로 저녁을 때우는 와중에 라인하르트가 아딘에게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아까 보니까 죄다 돌도끼나 들고 설치던데…… 그런 것들한테 쇠붙이를 줘도 괜찮겠습니까? 오크 자체가 인간보다 육체적으로 훨씬 강한데 그런 것들이 철기로까지 무장해 버리면…….”
라인하르트의 걱정은 일견 타당했다.
오크가 렝고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철기의 부재였으니까.
아무리 육체적으로 그들이 인간보다 강하더라도 철기로 무장한 인간 조직을 이기진 못했으니까.
그런 그들에게 철기가 들어간 것이니 라인하르트는 우려할 수밖에 없었다.
“인육을 먹던 놈들도 그리고 그 외에 인간을 습격하는 다른 놈들도 모두 철기는 수중에 넣었을 겁니다.”
아딘은 염소 목살을 뜯다 말고 라인하르트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하지만 저들에게는 철기를 관리할 기술도 지식도 없습니다.”
실제로 아딘은 며칠 전 호가르족의 움막을 뒤지면서 구석에 방치돼 있던 철기 몇 개를 보기도 했다.
대부분 녹이 슬어 있었고, 일부는 돌로 깨기라도 했는지 부서져 있기까지 했다.
“아까 제가 검을 준 것은 일종에 우호의 표식이었습니다. 그게 그 오크의 권위를 강화시켜 줄지는 몰라도, 오크족 전체의 기술적 진보를 이끌지는 못할 겁니다.”
아딘의 말에 라인하르트는 입을 다물었다.
딱히 반박할 거리가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라인하르트가 입을 다물자 오물오물 고기를 씹어 먹고 있던 로제가 아딘에게 물었다.
“근데 아까 그 오크는 왜 오라버니한테 염소를 준 거예요?”
사람을 잡아먹는 근육질 유인원.
사람만 보면 달려드는 괴물.
이것이 로제가 오크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인식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가 난생처음 만난 오크가 호가르족과 베뭉가르족이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인식이었다.
그랬기에 그녀는 오늘 아침에 있었던, 아딘과 카르갈의 평화로운 모습을 이해하지 못했다.
비록, 가젤보다 육질이 연한 염소 고기를 먹어 기분이 좋긴 했지만 여전히 그녀에게 오크는 괴물 유인원에 불과했다.
“오크라도 다 같은 오크는 아니야. 인육을 먹는 놈, 인간을 공격하는 놈도 있지만, 인간과 평화롭게 지내려는 놈도 있어.”
그런 로제에게 아딘은 차분히 오크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아퐁어를 전혀 못 하는 라인하르트는 눈만 껌뻑이며 고기만 뜯을 뿐이었고, 아퐁어를 할 줄 아는 토리는 아딘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가히 전문가라 해도 무방할 오크에 관한 지식을 들으며 넋을 잃고 그를 바라보았다.
“오크가 염소를 선물로 주는 건 상대방과 평화롭게 지내며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싶다는 의지를 보이는 거야. 마치 사람이 다른 사람과 친하게 지내고 싶을 때 선물을 주는 거랑 같은 이치지.”
아딘의 설명에 로제는 “아~” 하는 짧은 감탄사를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오라버니가 칼을 오크한테 준 건 무슨 의미예요?”
“아, 그거?”
아딘은 로제를 바라보며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쪽 오크 부족이 나하고 로제를 무서워한대. 그래서 우리가 자기네들에게 적대적이지 않다는 걸 보여주는 증표가 필요하다 해서 준 거야.”
‘우리’라는 말에 로제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오라버니하고 저를 무서워해요?”
“응. 엄청 무서워하더라고.”
“히히히.”
뭐가 그리 기쁜지 로제는 웃음을 터뜨리며 고기를 왕 하고 깨물어 뜯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던 아딘이 이내 시선을 로제의 곁에서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는 토리에게로 돌렸다.
“잭슨 양.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딘이 제니스어로 토리에게 물었다.
토리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가로젓고는 웃어 보였다.
“바, 박학다식하셔서요. 오크들하고 싸우시던 모습하고 좀 다르게…… 그게 의외라서요.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릴게요.”
“아닙니다. 불쾌할 일이 뭐가 있습니까.”
그러면서 아딘은 툭 던지듯 한 마디를 그녀에게 내뱉었다.
“그나저나 웃으시는 모습이 참 보기 좋습니다. 앞으로 상처는 잊고 그렇게 늘 웃으시길 바랍니다.”
그러고 나서 다시 아딘은 목살을 마저 뜯기 시작했다.
그리고 토리는 알 수 없는 두근거림을 느끼며 얼굴을 살짝 붉힌 채 고개를 떨궜다.
그렇게 밤은 지나고 있었다.
* * *
카르갈은 부족원들을 모아두고 그들 앞에서 검을 보여주며 평화가 왔음을 선포했다.
공포에 잠식돼 있던 부족원들은 모두 환호성을 내질렀고, 이날 하루만큼은 계급과 무관하게 모두가 어우러져 축제를 즐겼다.
늦은 밤까지 이어지던 축제는 새벽녘이 돼서야 마무리됐다.
그리고 카르갈은 달빛 아래에서 예리한 칼날을 바라보며 계속해서 두근거리는 자신의 심장 박동을 느끼고 있었다.
“예언자.”
카르갈의 부름에 그의 뒤에 서 있던 예언자가 대답했다.
“네, 족장님.”
“아까 그 인간이 하는 말, 들었나?”
“무슨 말 말입니까?”
“왕. 부족장 중의 부족장.”
“아, 네. 들은 것 같습니다.”
카르갈이 검을 칼집에 집어넣고 예언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혹시 그대는 왕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나?”
예언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인간 사회에 대해서 제게 주어진 예언은 없었습니다. 저도 아까 그 인간에게 처음 들었습니다.”
카르갈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항상 생각했어. 인간이 우리보다 나은 건 그들이 철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카르갈은 칼집에서 검을 살짝 뽑았다.
“이 날카로운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보다 낫다고 나는 생각했어.”
그는 다시 칼을 집어넣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어. 인간이 우리보다 나은 건 왕이라는 존재가 있기 때문이었어.”
예언자는 가만히 카르갈의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우린 그동안 다른 부족을 약탈의 대상 혹은 멸족의 대상으로만 봐왔어. 하지만 인간은 다른 부족을 복속시키고 그 부족 위에 부족장 중의 부족장, 왕을 두고 있지. 그래서 그들은 그렇게 강해질 수 있었던 거야.”
카르갈이 예언자를 바라봤다.
“나는 왕이 될 거야. 내 남은 삶, 부족장 중의 부족장이 될 거야. 오크왕. 그게 이제부터 내 남은 생을 모두 바쳐 이룩할 나의 꿈이야, 예언자.”
예언자는 볼 수 있었다.
카르갈의 눈에서 피어오르는 강한 야망을, 그의 눈에서 폭발하는 포부를.
“그대가 날 도와줘야 해. 이제껏 그랬듯, 앞으로도 말이야.”
카르갈의 말에 예언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족장님.”
카르갈은 고개를 끄덕이며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점차 비구름에 가려지기 시작하는 달빛이 오늘따라 유난히도 밝았다.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