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0 초원의 문명 (2)
로제는 화들짝 놀라며 사내에게 다가가려 했다.
하지만 아딘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오라버니?”
로제가 의문스런 표정으로 아딘을 올려다 보았다.
아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후 검을 양손으로 쥔 채 천천히, 언제든 사내를 벨 수 있는 자세로 그에게 다가갔다.
“당신 누구요?”
안전거리를 확보한 채 아딘이 물었다.
라인하르트도 마부석에서 화살을 꺼내 활에 먹인 채 언제든 시위를 당길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흐으윽…… 제, 제 약혼녀가…… 제 약혼녀가 오크에게…… 오크에게 납치됐습니다.”
사내는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떨궜다.
아딘은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사내를 바라봤고 라인하르트는 주위를 둘러보며 마차 쪽으로 누군가 다가오는 사람이 없는가를 확인했다.
“먼저 당신이 누구인지를 밝히시오.”
아딘이 다시 사내에게 이야기했다.
사내는 고개를 들어 아딘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 저는 잭 존슨이라고 합니다.”
사내는 자신의 정체를 제니스 공화국 파라곤에서 온 탐험가라고 밝혔다.
“저와 제 약혼녀 제니는 모두 탐험을 즐겼습니다. 제 아버지는 부농이시고 제니의 아버지는 제법 큰 규모로 도매상을 하시는 분이라 재산이 넉넉했습니다.”
결혼을 석 달 앞둔 두 사람은 결혼 전 추억을 만들고자 렝고스 탐험을 나섰다.
돈이 많았던 만큼 용병도 제법 괜찮은 사람들로 다섯 명이나 고용한 상태였다.
“처음에는 괜찮았습니다. 사람들이 많고 또 용병들이 전부 베테랑들이라 짐승들이 전부 우리에게 접근하지 못했습니다.”
문제는 이곳에서 약 5km 정도 떨어진 호숫가를 지나면서였다.
“저희는 물을 구하려고 모두 마차에서 내렸습니다. 그런데 그때…… 그때…… 오크들이……”
풀숲에 매복해 있던 녹색 피부의 오크들은 용병들이 모두 물을 뜨느라 방심한 사이 기습을 감행했다.
용병들은 제대로 된 저항조차 하지 못한 채 오크들에게 살해당했고 약혼녀는 납치당했다.
“저는…… 저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 순간에…… 제가 살아야겠다는 생각밖엔 안 들어서…….”
잭 존슨은 결국 다시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라인하르트는 이미 활을 내려놓았고, 로제는 어금니를 앙 다문 채 이를 갈고 있었다.
“오크…… 약혼녀가 오크에게 잡혔다면 그것도 여기서 5km 떨어진 지점이었다면 지금쯤 아마……”
오크에게 납치된 인간이 어떤 최후를 맞이하는지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던 라인하르트는 말을 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도와주십시오…… 제발…… 지금도 늦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무리한 부탁인 줄은 알지만…… 제발 제니를…… 제 약혼녀를 구해주십시오.”
잭 존슨의 말에 로제가 아딘의 팔을 잡았다.
“오라버니.”
로제는 표정으로 아딘에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도와주면 안 되겠느냐고.
“댁의 딱한 사정은 잘 알겠는데, 겨우 이 구성으로 오크 소굴로 사람 구하러 가는 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요.”
라인하르트는 딱 잘라 거절 의사를 표명했다.
하지만 역시나 그도 시선을 아딘에게로 돌리긴 마찬가지였다.
아딘이 실세임을 확인한 잭 존슨은 빠르게 그에게 다가가 발치에 머리를 박은 채 애걸했다.
“귀하게 크신 도련님…… 제발…… 제발 도와주십시오. 사례는 얼마든 하겠습니다. 오크들은 아마 분명 짐가방을 들고 갔을 겁니다. 거기에 우리 식량이 있었으니깐 말입니다.”
잭 존슨이 눈을 들어 아딘을 올려다보았다.
“거기에…… 거기에 2천 골드가 있습니다. 다 드리겠습니다. 제발…… 제발 제니를 구해주십시오.”
2천 골드란 말에 라인하르트가 흠칫했다.
로제는 좀 더 확실하게 자기 의사를 표시했다.
“오라버니. 도와드려요. 네?”
그러자 라인하르트가 다시 정신을 차리며 신중론을 펼쳤다.
“그건 미친 짓이요. 보통 오크 소굴에 다 큰 수컷들만 100이 넘는데 그런 곳을 단 넷이서 들어가자고? 그것도 전투에 쓸모있는 건 둘뿐인 상황에서?”
라인하르트의 말에 로제는 그를 흘겨봤다.
로제의 시선에 라인하르트는 콧방귀를 뀌었다.
그리고 아딘은,
‘과해.’
잭 존슨을 내려다보며 그를 의심하고 있었다.
‘너무 과해. 이 인간 말만 들어보면 이 인간은 오크가 기습하자마자 빠져나왔어. 그런데 이 흙먼지라든가 피라든가…… 옷 상태…… 너무 과해.’
아딘은 마차 뒤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곤 품에서 두루마리를 꺼내 펼쳤다.
곧 두루마리 위로 잭 존슨에 관한 정보가 떠올랐다.
<잭 존슨>
<광명력 965년 4월 4일 생>
<떠돌이 여행자>
<언어적 재능이 뛰어나 아퐁어와 제니스어, 게마인샤프트 4대 방언 및 벨로디나어에 능통하다.>
<광명력 990년 3월 2일 녹색종 오크 부족 호가르에 잡힌 후 호가르 족이 먹을 인육을 유인하는 미끼 역할을 하고 있다.>
두루마리는 곧장 잭 존슨에 대한 진실을 알려주었다.
아딘은 험악한 표정으로 두루마리를 품에 집어넣은 후 성큼성큼 잭 존슨에게 다가갔다.
“제발…… 제발 도……”
[빠악-!]
아딘은 그대로 잭 존슨의 면상을 발로 까버렸다.
“끄아악-!”
잭 존슨은 뒤로 나뒹굴며 고통을 호소했다.
로제는 물론 라인하르트도 눈이 휘둥그레진 채 아딘을 바라보았다.
아딘은 당장에라도 잭 존슨을 찔러 죽일 기세로 검을 들고 그에게 다가갔다.
“왜, 왜, 왜, 왜 이러십니까? 제, 제가 도대체 뭘 잘못……”
잭 존슨은 항변하려 했다.
하지만 아딘은 그의 목에 검을 겨눈 채 으르렁거리며 그의 말을 잘랐다.
“오크한테 우리를 인육으로 바치려고 한 네놈을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아딘의 말에 잭 존슨은 물론 라인하르트와 로제도 모두 화들짝 놀랐다.
“그, 그, 그…….”
잭 존슨이 말을 더듬거렸다.
“히끅-!”
급기야 그는 딸꾹질까지 하기 시작했다.
아딘은 그런 잭 존슨의 면상을 발로 한 번 더 찼다.
“크허억-!”
잭 존슨이 다시 뒤로 나뒹굴었다가 바닥에 대자로 뻗었다.
아딘은 그대로 잭 존슨의 가슴팍을 발로 밟고 칼을 그의 목젖에 갖다 댔다.
이대로 아딘이 조금만 힘을 주면 잭 존슨의 목에는 칼이 깊숙이 박힐 터였다.
“사, 사, 살려주십시오.”
잭 존슨은 자신의 목에 드리워진 서늘한 칼날의 감촉에 공포를 느끼며 아딘에게 빌기 시작했다.
“이야기해. 내가 네놈 다리 힘줄을 잘라 사자 무리에 던져 줄지, 단칼에 죽여 줄지. 골라 봐.”
아딘의 말에 잭 존슨은 급기야 오줌을 지리기까지 했다.
“이보쇼. 지금 도대체 뭘 하는 거요?”
가만히 보고 있던 라인하르트가 마차에서 내려 아딘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로제도 아딘에게 다가가 그의 곁에 섰다.
아딘은 의구심 가득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는 라인하르트와, 분노한 표정으로 잭 존슨을 내려다보는 로제를 바라보았다.
그리곤 다시 잭 존슨을 향해 이야기했다.
“말해라.”
“뭐, 뭘 말입니까?”
“모든 것. 네놈이 오크 부족에서 한 일 모두.”
아딘은 칼을 살짝 옆으로 비스듬하게 흘렸다.
그러자 잭 존슨의 목살이 살짝 베이며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마, 말씀드리겠습니다. 제, 제발 살려만 주십시오.”
곧 잭 존슨은 자신이 오크 부족에서 한 일들을 다 털어놓기 시작했다.
* * *
일단 잭 존슨이 처음 그들에게 한 말은 대부분 실제 자신이 겪은 일이었다.
광명력 990년 3월 2일 오후.
용병 다섯을 고용해 약혼녀 제니 와이퍼슨과 함께 렝고스 초원을 여행하던 잭 존슨은 녹색종 오크 부족 호가르의 사냥꾼들로부터 기습을 당했다.
용병들은 그 자리에서 모두 오크에 의해 죽었고, 잭 존슨과 제니 와이퍼슨은 납치돼 놈들의 영역으로 끌려갔다.
그곳에서 잭 존슨은 죽은 용병의 시체를 어린 오크들이 생으로 뜯어 먹는 모습과 자신처럼 납치된 사람들이 오크 사냥꾼들에게 산 채로 먹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약혼녀가 수십에 이르는 오크 남성에게 몹쓸 짓을 당하고 산 채로 잡아 먹히는 것을 보았다.
“저, 저는 죽는 줄 알았습니다. 아니,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잭 존슨이 죽음을 실감하며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을 때, 오크들은 그를 두고 자기들끼리 심각한 논쟁을 벌였다.
그리고 논쟁의 끝에, 우두머리로 보이는 녀석이 다가와 어눌한 게마인샤프트 동부 방언으로 잭 존슨에게 이야기했다.
“인간. 살려준다. 우리 노예. 가서 인간 유인해라. 그럼 편하게 살게 준다.”
잭 존슨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고 회상했다.
“살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그 이후로 잭 존슨은 2년 동안 이 짓을 반복했다.
정찰 나간 오크가 인간이 지나간다는 신호를 보내면 이런 식으로 온몸에 오크가 먹다 버린 인간의 시체에서 짜낸 피를 칠하고 흙먼지를 덮어쓴 채 달려와 읍소하는 것이었다.
거의 대부분은 그런 잭 존슨의 말을 듣고는 그를 따라 오크의 영역으로 향했다.
자기들 딴에는 오크 부족의 전력을 확인해 보기 위함이었지만, 그게 사실 함정이었다.
그들은 대기 중이던 오크 사냥꾼들에게 살해당하거나 납치당했고, 이후 식량이자 욕구 해소를 위한 물건이 됐다.
“대, 대신 저에게는 여, 여자가 주어졌습니다. 제 시중을 들어줄 여자 말입니다. 그리고 전 또 풍족하게 먹을 수 있었고…… 무엇보다도 살 수 있었습니다.”
“이런 쓰레기 새끼가!”
[뻐억-!]
이야기를 듣다가 흥분한 라인하르트가 잭 존슨의 머리통을 발로 찼다.
“네가 사람이야? 그러고도 인간이야? 남자야? 약혼녀가 그런 식으로 죽었는데 지 목숨 하나 살아 보겠다고 같은 인간을 오크한테 넘겨줘?”
[뻐억-! 뻐억-! 뻐억-!]
“크아악-!”
라인하르트의 분노의 발길질은 순식간에 잭 존슨의 얼굴에 멍 자국을 만들고, 치아를 부러뜨렸다.
로제는 아딘의 곁에서 주먹을 꽉 쥔 채 부들거리며 콧김을 내뿜고 있었다.
아마 아딘이 아니었다면 잭 존슨을 마법으로 녹여 버리거나 했을 기세였다.
“배신자 새끼! 더러운 새끼! 비겁한 새끼!”
“그만!”
아딘은 라인하르트의 폭력을 중지시켰다.
라인하르트는 아딘을 바라본 후 잭 존슨의 얼굴에다 침을 뱉고는 발길질을 멈췄다.
“로제.”
아딘은 부들부들 떨고 있는 로제를 바라봤다.
로제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아딘을 바라봤다.
“복수할까? 이때까지 저 인간한테 속아 죽은 사람들을 위해?”
“네! 복수해요. 불쌍하게 죽은 사람들을 위해서, 그 사람들을 위로해주기 위해서!”
로제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아딘은 씩 웃으며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러면 흥분을 가라앉혀야 해. 이 상태로 복수를 하러 가면 무리를 하게 되니까.”
그 말에 로제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며 심호흡을 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아딘은 이내 라인하르트를 향해 게마인샤프트 동부 방언으로 이야기했다.
“갑시다.”
“네?”
“오크 소굴로 갑시다.”
그 말에 라인하르트는 눈을 부릅뜬 채 아딘을 바라봤다.
아딘은 짐칸으로 가 밧줄을 하나 챙겨 나왔다.
그리곤 그것으로 잭 존슨을 포박한 후 일으켜 세웠다.
“앞장서. 오크 놈들 소굴로.”
아딘이 하는 모습을 보고 있던 라인하르트가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다, 당신 미쳤수?”
아딘이 라인하르트를 바라봤다.
라인하르트가 도무지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오, 오크 소굴로 들어간다고? 그,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쇼? 숙련된 병사가 대대급으로 있어야 싸울 수 있는 게 저 괴물들인데 고작 우리 셋이서? 미친 거요?”
아딘은 피식 웃었다.
“댁보고 싸우란 소리는 안 할 거니까, 이 자식 옆에 앉혀 놓고 길이나 안내받으십시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정말 미친 거요? 아무리 당신이 마법사라지만 오크 소굴에는 못해도 100…….”
그 순간, 섬광과 함께 찬란한 황금빛이 아딘의 전신을 감쌌다.
그 빛에 라인하르트는 오른팔로 얼굴을 가리며 눈을 질끈 감아야 했다.
잠시 후, 빛이 가라앉자 라인하르트는 팔을 내리며 눈을 떴다.
그리고 그는 눈을 부릅뜨고 입을 쩍 벌렸다.
“저번부터 이야기하고 싶었던 건데, 난 마법사가 아닙니다. 내 동생이 마법사지.”
불칸의 갑옷을 입은 아딘은 그렇게 이야기하며 로제를 안고 마차 지붕 위로 올라갔다.
“출발합시다. 싸움은 우리한테 맡기고 당신은 그냥 거기까지 마차만 몰아주면 됩니다.”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