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9 초원의 문명 (1)
“흑갈색 진주목걸이는 선술집 주인장 딸에게 갖다 주고 저쪽 편 용병의 칼은 대장장이에게 갖다 주고~”
라인하르트가 마부석에 앉아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우와~!”
로제는 창문을 통해 저 멀리서 단체로 이동하는 코끼리 떼를 신기한 표정으로 넋을 놓고 구경하고 있었다.
“……”
그리고 아딘은 팔짱은 끼고 눈을 감은 채 라인하르트의 노래와 로제의 감탄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자기만의 상념에 빠져 있었다.
‘네르갈의 목걸이는 착용자가 본인의 정신력과 무관하게 모든 야생 동물을 완전하게 통제하게 해줘. 그리고 정신력이 탁월할수록 한 번에 통제 가능한 야생 동물의 숫자가 늘어나고.’
김현수가 맥거핀으로 남겨둔, 설정상으로는 존재하지만, 소설 본편에선 등장하지 않은 3대 신물.
그중 하나인 네르갈의 목걸이는 불멸의 검을 얻기 위해 엘프숲으로 갈 때를 대비해 반드시 갖춰야 하는 신물이었다.
‘엘프숲에서 나나 로제가 야수나 괴수에게 무력을 휘두르는 순간, 아마 평생 숲에 갇혀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되겠지. 거긴 엘프들이 작정하고 묻어버리면 용이라 해도 빠져나올 수 없는 곳이니까.’
아무리 아딘이 불칸의 갑옷을 입고 메이스를 휘둘러도, 아무리 로제가 화끈한 마법을 난사해도, 아무리 두 사람의 공격력이 강하다 하더라도 엘프숲에선 그게 무용지물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엘프숲을 가기 위해선 네르갈의 목걸이가 필요했기에 아딘은 바로 엘프숲으로 가지 않고 이렇게 렝고스로 먼저 가는 것이었다.
‘야생 동물의 범위에는 문명을 구축한 존재는 포함이 되지 않아. 그래서 인간이나 엘프, 오크는 네르갈의 목걸이로도 어떻게 못하지. 하지만 용은…….’
모든 생명체를 통틀어 가장 우수한 두뇌와 전투력을 지녔지만, 그렇기에 따로 문명이라는 개념 없이 자유분방하게 사는 존재인 용.
과연 용도 야생 동물로 분류할 수 있는가?
소설을 구상할 때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점을 떠올리며 아딘은 점차 뜨거워지는 렝고스의 초여름을 이겨내고 있었다.
‘하기사 어차피 용은 지금 모두 잠들어 있잖아? 내가 그렇게 설정했으니까.’
소설을 쓸 때, 최대한 밸런스 붕괴를 막기 위해 용들이 모두 광명력 982년부터 집단 수면에 들어갔다는 설정을 넣은 과거의 자신에게 고마워하며 아딘은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 소리에 로제가 코끼리를 보다 말고 아딘을 바라봤다.
‘더우신가?’
아딘의 이마와 목덜미에 송골송골 맺혀있는 땀을 바라보며 로제는 자신의 이마와 목덜미에도 땀이 흥건함을 깨달았다.
‘흐음…….’
잠시 고민하던 로제는 이윽고 용의 힘을 끌어올렸다.
그 순간, 마차 내부가 마치 한겨울처럼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응?”
가만히 눈을 감은 채 더위를 무의미한 생각으로 이겨내던 아딘은 느닷없이 살결이 차가워지는 느낌에 눈을 떴다.
그리고 그는 마차 내부가 시원해졌음을 깨닫곤 로제를 바라봤다.
아딘의 시선에 로제는 수줍게 웃으며 시선을 다시 창밖으로 돌렸다.
“로제. 네가 했어?”
아딘이 물었다.
로제는 다시 아딘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딘이 씩 웃으며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쳐 주었다.
“잘했어. 근데, 심장에 무리가 가는 것 같으면 멈춰야 해. 알겠지?”
“걱정 마세요. 이 정도는 아무 느낌도 안 와요. 히힛.”
로제의 모습에 아딘은 고개를 끄덕이며 양팔을 벌린 채 마차 안에서 늘어졌다.
‘시대적 배경이 중세 후기에서 절대왕정 사이라…… 실용 마법으로 에어컨까지 만들 생각은 안 했는데…… 참 좋긴 좋네. 어으으.’
살짝 몸을 부르르 떨면서 아딘은 다시 생각에 잠겼다.
자신이 만든 세계관에 대한 생각, 3대 신물을 모은 후 행보에 관한 계획, 복수 이후의 삶에 대한 고민까지.
그렇게 아딘과 로제는 라인하르트에게 고삐를 맡긴 채 렝고스 서북부를 지나쳐 중심부에 자리한 네르갈의 신전으로 향했다.
* * *
카르갈의 우람한 팔뚝과 두꺼운 종아리에 수북이 자라난 털을 그의 두 부인이 성심성의껏 고르고 있었다.
두 오크에게 털 고르기를 맡긴 채 카르갈은 눈을 감고 예언자가 발작적으로 내지른 예언을 생각하고 있었다.
‘황금빛 폭풍이 몰려와? 모든 오크가 멸종될 수도 있어?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야?’
자신과 자신의 부족을 여기까지 오게 해준 존재.
서남부에서 온 회색종 오크 예언자의 예언은 항상 미래에 일어날 확정적인 일에 대해서만 알려주었다.
언제 적대적 부족이 침략할 것인지, 언제 가뭄이나 홍수가 올 건지 등등.
그랬기에 카르갈은 불안한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의 불안은 그의 털을 고르고 이를 솎아내던 부인들에게 전달됐다.
부인들은 서로 눈치를 살피다 이내 다시 털을 고르는 데 집중했다.
‘피해야 한다니…… 우리 터전을 버리고 도망가자는 건가? 그럼 폭풍을 만나기 전에 다른 부족과의 전쟁에 직면할 건데? 도대체 무슨 뜻이지?’
그렇게 카르갈이 고뇌하고 있을 때, 그의 움막 문이 열리고 한 오크가 들어왔다.
카르갈의 호위였다.
“족장님. 예언자님이 찾아왔습니다.”
예언자가 왔다는 말에 카르갈이 눈을 떴다.
“들어오라 해. 부인들은 나가 있고.”
카르갈의 말에 부인들은 호위와 함께 움막을 빠져나갔다.
잠시 후, 예언자가 들어와 카르갈 맞은편에 앉았다.
“또 새로운 예언인가?”
카르갈의 말에 예언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카르갈은 입이 바짝 마름을 느끼며 토기에 담긴 물을 쭉 들이켰다.
그사이 예언자는 힘겹게 말문을 열었다.
“당분간 부족원들에게 사냥 나가는 것을 멈추도록 명하십시오. 그냥 영역 안에서 가축이나 돌보라고. 괜히 영역 밖으로 나갔다가 자칫…… 자칫 그 인간들과 부딪히면 우리 전부가 몰살당하고 말 것입니다.”
카르갈의 미간이 좁혀졌다.
“인간이라고?”
“인간입니다. 거대한 힘을…… 인간이 가질 수도 없고, 가져서도 안 되는 거대한 힘을 품은 두 인간이 이곳을 지날 겁니다. 그때 우리는 조용히 숨어야만 합니다. 그래야 재앙을 피할 수 있습니다.”
카르갈은 입은 다문 채 팔짱을 꼈다.
‘부족원들을 영역 안에서 나가지 못하게 막으라고?’
오크 부족은 철저하게 강자가 모든 것을 취하는 구조다.
부족장이 가장 많은 여자를 거느리고, 부족장 휘하 전사들이 그다음으로 많은 여자를 거느리는 것이 렝고스에 사는 모든 오크 사회의 시스템이었다.
반면 사냥을 하기엔 하자가 있어 가축이나 치고 열매나 따는 남자들에게는 단 한 명의 여자도 허락되지 않았다.
그랬기에 욕구 불만으로 고통받는 하자 있는 남자 오크들은 영역 밖에서 약한 초식 동물을 상대로 엄한 짓을 하기도 했다.
‘그런 것들을 한동안 영역 안에만 놔두면…….’
밖에서 야생 짐승에게 하던 짓을 가축들에게까지 한다는 생각에 카르갈은 몸을 부르르 떨며 인상을 찡그렸다.
‘하지만…….’
카르갈은 천천히 눈을 떴다.
예언자는 불안한 표정으로 카르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하지. 예언이 그렇다면야…….”
카르갈의 말에 예언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현명한 선택이십니다, 족장님. 잠시 동안은 힘들겠지만, 장기적으로는 우리 부족 전체를 위한 일이 될 것입니다.”
예언자의 말에 카르갈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예언은 내려왔고, 예언자는 조언을 했으며, 족장은 그에 따른 조치를 결정했다.
이제 남은 것은 그 조치의 충실한 이행뿐이었다.
* * *
7월 21일 아침, 뵌가르트를 떠난 아딘과 로제, 라인하르트는 일주일가량 마차로 이동하며 렝고스 서북부 제법 깊숙한 곳까지 진입했다.
중간중간 하이에나 무리가 멀리서 마차를 노려보기도 했고, 들개 무리가 밤에 마차 주변을 어슬렁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라인하르트가 마차 주변에 퍼뜨려 놓은 다 탄 연초와 피워둔 불꽃 덕분에 특별히 야수에게 공격받는 일은 없었다.
거기다 육포와 건어물, 말린 과일에 아딘과 로제가 신물을 느낄 때쯤, 라인하르트가 화살로 가젤을 잡아다 요리해주며 단조로운 식사에 색다른 맛을 첨가해 주기도 했다.
‘뵌가르트에 두고 왔으면 정말 후회할 뻔했어.’
광명력 992년 7월 28일 오후.
로제가 만든 냉기 속에서 라인하르트의 마차 운전에 몸을 맡긴 채 아딘은 자신이 라인하르트를 데려온 것이 신의 한 수였음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정말 최고였어.’
그렇게 아딘이 생각하고 있을 때, 마부석에 앉아 있던 라인하르트가 마차 내부를 향해 말을 걸었다.
“근데 말이요.”
라인하르트의 말에 아딘은 마부석 미닫이문을 살짝 열었다.
“일주일 정도 무작정 이동만 한 것 같은데, 정확하게 목적지가 어디요?”
지난 일주일간, 아니 이전에 아딘이 라인하르트에게 고용 의사를 밝혔을 때도, 라인하르트는 구체적인 목적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없었다.
“뭐, 보통 고객들이 비밀이 있는 경우가 많아서 구체적으로 뭘 안 물어보는 게 우리 업계의 암묵적 법칙이긴 한데, 일주일 동안 마냥 마차 안에만 있으니까…….”
라인하르트의 말에 아딘은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대답했다.
“여행을 겸해서 뭐 겸사겸사 좋은 물건 있으면 줍고 그럴 생각입니다.”
아딘의 말에 라인하르트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문을 닫았다.
어차피 고객이 비밀에 붙이려는 걸 캐물어 봐야 좋을 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나야 뭐 무사히 의뢰만 끝내면 그만이니까.’
그러면서 라인하르트는 주위를 둘러봤다.
저 멀리, 커다란 나무 아래 그늘에서 사자 무리가 휴식을 취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하이에나나 들개면 모를까 사자는 좀 위험해. 뭐, 오크를 안 만나는 게 제일 중요한 거긴 하다만. 그나저나 저 양반 마법사인가? 마차 전체가 시원한 게 땀도 안 나고 딱 좋네.’
마법사라면 뭔가 일반인에게 밝히기 힘든 무언가가 있을 테지.
라인하르트는 그렇게 생각하며 더 이상 아딘의 목적에 관심을 두지 않기로 했다.
“로제. 심장에 무리는 없어?”
아딘은 미닫이문을 닫고는 로제에게 물었다.
로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아무 문제 없어요.”
“그래? 흐음…….”
처음 로제가 마차 안을 냉각시켰을 때, 아딘은 그녀에게 심장에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온도를 좀 낮추고 범위를 넓혀 보라 주문했다.
그러자 로제는 마부석은 물론 말들에게까지 시원한 공기가 흐르도록 온도를 왜곡했다.
덕분에 라인하르트는 아딘을 마법사로 여기기 시작했지만, 그것 말고는 아직까지 큰 문제는 없었다.
‘항상 중요한 건 로제의 심장이야. 너무 지나치게 용의 힘을 남용해 마법을 사용해 버리면 이 아이가 제 명에 못 살아.’
그렇게 생각하며 아딘은 팔짱을 끼곤 창밖을 내다봤다.
저 멀리서, 사자 무리가 쉬는 것을 보며 아딘은 생각했다.
‘그나저나 렝고스에는 오크가 살고 있을 텐데, 한 놈도 못 봤네? 일부러 인간을 피하는 건가?’
신석기 수준의 문명을 구축한 채 렝고스에서 살아가는 오크에 대해 아딘이 생각하고 있을 때, 갑자기 마차가 멈춰섰다.
“여기 좀 나와 보셔야겠수다.”
라인하르트가 심상찮은 목소리로 아딘을 불렀다.
아딘은 그대로 마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고, 로제가 그 뒤를 따랐다.
“저건?”
마차 밖으로 나오자마자 아딘은 저 멀리서 이곳을 향해 직선으로 달려오는 한 인간을 볼 수 있었다.
‘사람?’
아딘이 굳은 표정을 라인하르트를 바라봤다.
라인하르트가 인상을 찡그린 채 달려오는 인간을 바라보며 아딘에게 말했다.
“꼴이 말이 아니네…… 뭐지? 짐승들한테 공격이라도 당했나?”
라인하르트는 그렇게 이야기하며 아딘을 바라봤다.
“아무래도 좀 위험해질 것 같수다.”
라인하르트의 말에 아딘은 고개를 끄덕이며 마법 주머니에 슬쩍 손을 넣어 검을 꺼냈다.
그런대로 괜찮은 쇠로 만들어 예기가 살아 있는 검을 쥔 채 아딘은 전방의 인간을 바라봤다.
“사, 살려주세요!”
잠시 후, 마차와 가까워진 인간은 비명처럼 살려달라 고함질렀다.
“살려주세요! 오, 오크에게! 오크가! 제 약혼녀를……!”
여기저기 흙먼지와 피가 범벅된, 초라한 행색의 한 남자가 눈물을 흘리며 마차 앞에서 쓰러졌다.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