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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48화 (48/175)

048 불멸자의 후손 (2)

위대한 고대의 군주 불멸자 샤푸르.

하지만 그의 가문에는 이상하리만치 아들이 귀했다.

당장 샤푸르 본인부터가 총 4명의 부인으로부터 9명의 자식을 봤지만 아들은 한 명뿐이었다.

그 아들조차도 2명의 부인으로부터 6명의 자식을 봤지만 마찬가지로 아들은 한 명뿐이었다.

샤푸르가 세상에서 모습을 감춘 후 그의 뒤를 이어 왕이 된 그의 손자 바흐람 3세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암흑기 513년, 카반드 왕조가 반란으로 무너지고 일가가 뿔뿔이 흩어진 이후에도 아들이 귀한 운명은 변하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라인하르트는 샤푸르의 적통 중 적통이었다.

그것이 아딘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마치 운명의 장난처럼, 그야말로 정말 우연하게 마주하게 된 불멸자의 후손.

‘로제는 최소한 두루마리가 만날 수 있게 해주기라도 했지…… 불멸자의 후손은…….’

아딘은 두루마리를 말아 품에 집어넣었다.

‘과연 불멸자가 자기의 유일한 남자 후손을 만난다면 어떻게 생각할까?’

렝고스에서 네르갈의 목걸이를 획득하고 나면, 아딘은 곧장 불멸의 신전으로 향할 예정이었다.

그곳에서 불멸자 샤푸르를 만나 그로부터 불멸의 검을 받은 후 벨로디나로 건너가 복수를 하는 것이 그가 세운 계획표였다.

그리고 만약 이곳에서 아딘이 라인하르트를 고용해 불멸의 신전까지 함께 간다면 1,700년의 시공을 초월해 조상과 후손이 상봉하는 극적인 장면을 볼 수도 있을 터였다.

그런 어떤, 말도 안 되는 드라마틱한 장면에 대한 상상이 아딘의 발걸음을 라인하르트에게로 이끌었다.

“푸우-!”

라인하르트는 싸구려 연초를 태우며 허공에 흩어지는 연기를 바라보다가 아딘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확인하곤 그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용병입니까?”

아딘이 짐짓 모르는 척, 라인하르트에게 물었다.

라인하르트는 코로 연기를 내뿜으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보면 모르쇼?”

“혹시 지금 누군가와 계약이 된 상태입니까?”

“그렇게 보이요?”

“그렇게는 안 보입니다.”

“근데 왜 물어봐?”

라인하르트는 짐짓 짜증스러운 어조로 이야기했지만, 그의 표정은 웃고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무례해 보이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인간적인 그의 모습에서 아딘은 알 수 없는 호감을 느꼈다.

물론 그 호감의 베이스는 라인하르트가 불멸자의 후손이라는 사실이었지만.

“고용을 하고 싶은데 말입니다.”

아딘의 말에 라인하르트는 피우다 만 연초를 바닥에 버린 후 파이프를 주머니에 넣고는 벽에서 등을 뗐다.

“무슨 일로?”

“뵌가르트까지 가려고 하는데, 승선 허가증을 받기 위해선 용병이 필요하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뵌가르트란 말에 라인하르트가 피식 웃었다.

“뵌가르트…… 왜, 렝고스에 가서 뭐 보물이라도 찾아오시려고?”

라인하르트의 입에서 뜻밖에 자신의 목적이 나오자 아딘은 흠칫했다.

그 모습을 보며 라인하르트는 뭐가 그리 웃긴지 한 차례 킬킬거린 후 말을 이었다.

“뭘 그리 놀라쇼? 렝고스 초원에서 자생하는 커피나 담배를 가지러 가는 것들이 뭐 한둘인가? 쥐뿔도 볼 것도 없는 뵌가르트로 간다 하면 다 그거지.”

라인하르트의 말에 아딘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후 말했다.

“렝고스에는 저와 여동생 단둘이서만 갈 겁니다. 당신은 뵌가르트에서 대기하다가 우리가 돌아오면 같이 배를 타고 이곳으로 넘어와 주면 됩니다.”

아딘의 말에 라인하르트가 오른쪽 눈썹을 위로 올리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건 또 뭔 소리요? 난 뵌가르트에서 대기하라니?”

“말 그대로입니다. 렝고스에는 나와 여동생 둘만 갑니다. 당신의 역할은 우리가 뵌가르트로 가는 배에 탈 수 있도록 법적 요건을 맞춰주는 것뿐입니다.”

“허어, 참.”

라인하르트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가만히 아딘을 바라봤다.

“내가 3년 동안 렝고스에 드나드는 사람들 호위 노릇을 몇 번 했는데, 이런 의뢰는 또 처음이네. 허어.”

“뭐, 한 번은 편한 의뢰 받을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아딘의 말에 라인하르트는 콧김을 내뿜으며 웃었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다시 파이프를 꺼냈다.

“난 그런 의뢰는 안 받아요.”

라인하르트는 파이프에 연초를 집어넣은 후 성냥을 벽에다 긁어 불을 붙였다.

“차라리 적선을 받으면 받을까, 대놓고 고용인 돈 날로 먹는 그런 거, 난 안 합니다. 그리고, 법으로 용병을 고용하게 하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어요. 행정관들이 무슨 꼬장을 피우는 게 아니라고.”

제니스산 무한 발화 성냥을 주머니에 구겨 넣고 코로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라인하르트는 이야기했다.

그가 너무 정색하고 이야기했기에 아딘은 살짝 당황했다.

‘뭐야? 직업 윤리 뭐 그런 거야?’

아딘이 당혹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라인하르트는 자신의 철학을 몇 마디 던져 주었다.

“용병 인생, 많이 벌면 하루 10실버, 보통은 일주일에 10실버고 못 벌면 한 달에 10실버요. 저기 바다 건너 서쪽으로 가면 제국이나 공화국에선 용병들 몸값이 높을진 몰라도, 적어도 여기는 그래요.”

그가 허공으로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싸구려 연초 냄새가 아딘과 로제의 코를 찔렀고, 로제는 인상을 찌푸리며 코를 손으로 잡아 막았다.

아딘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라인하르트의 말을 계속해서 들었다.

“내가 비록 당장에 지금 들고 있는 연초 다 떨어지면 남이 태우다 만 것들 모아다가 태워야 할 형편이라지만, 이 무한 발화 성냥도 기한이 사흘밖엔 안 남았다곤 하지만, 그래도 고용인 돈 날로 먹을 만큼 내 일을 하찮게 여기진 않습니다.”

그러면서 라인하르트는 다시 벽에 등을 기댔다.

그리곤 아딘으로부터 시선을 뗀 후 허공을 바라보며 연초를 피워대기 시작했다.

명백하게 더 이상 대화할 의지가 없음을 드러낸 것이었다.

‘흐음?’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며 아딘은 얼굴 반쪽에 미소를 걸치며 상당히 기괴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생긴 건 영락없는 한량인데…… 뭐지?’

소설에서 단 한 차례도 직접 등장하지 않았던, 그저 설정집 속에서나 존재했던 위대한 고대의 군주 샤푸르.

하지만 그를 창조하던 시점에, 즉 중3 시절에 김현수는 갑갑한 학교와 세상에서 벗어나고자 위대한 옛 군주들의 일대기에 푹 빠져있던 상황이었다.

바빌로니아의 네부카드네자르, 페르시아의 키루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로마의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 몽골의 보르지긴 테무친 등등.

고대와 중세에 걸쳐 영웅적인 업적을 남긴 군주들의 일대기를 보며, 그들의 위대함을 본따 창조한 캐릭터가 바로 샤푸르였다.

정작 본편에는 등장하지 않았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현수는 나름대로 샤푸르에 대한 애정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권태로운 표정으로 벽에 기댄 채 싸구려 연초를 태우며 자존심을 지키려는 불멸자의 후손을 바라보며 아딘은 굉장히 묘한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거르는 게 맞기는 한데…….’

원래대로라면 라인하르트가 이런 식으로 나오는 이상 다른 사람을 찾는 게 맞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미 주변에서 아딘과 라인하르트의 대화를 들은 다른 용병들이 관심을 표하고 있었다.

아딘은 이대로 라인하르트를 뒤로하고 다른 용병을 구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말이야.’

하지만 호기심이, 어린 시절 자신이 갑갑함 속에 책에서 만난 위대한 옛 군주들을 본 따 만든 불멸자 샤푸르의 후손에 관한 관심이 아딘을 고민하게 했다.

‘생각해보면 잡일을 해줄 사람도 필요하잖아. 지금이야 로제가 좀 적응을 했다지만, 여전히 말을 탈 때 힘들어 하기도 하고…… 마차를 타고 가려면 마부가 필요하고 그 역할을…….’

잠시 그 자리에서 고민하던 아딘은 이내 미소를 지으며 라인하르트에게 이야기했다.

“좋습니다.”

라인하르트가 슬쩍 아딘에게 시선을 돌렸다.

“저와 제 동생이 렝고스로 가는 데 함께 해주십시오.”

그 말에 라인하르트가 씩 웃으며 벽에서 등을 뗐다.

* * *

1주일에 10실버를 주기로 계약한 후, 아딘과 로제는 라인하르트와 함께 관청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승선 허가증을 발급받은 세 사람은 곧장 배를 타고 뵌가르트로 넘어갔다.

그리고 뵌가르트에서 아딘과 로제는 라인하르트의 조언을 받아 장거리 여행에 필요한 물품들을 모두 구비했다.

[히히히힝-!]

[이히이이잉-!]

광명력 992년 7월 21일 아침.

파세레빌에서부터 아딘과 로제의 발 역할을 해준 붉은 말과 뵌가르트에서 새로 산 황색 말이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울음소리를 내며 투레질했다.

아딘은 마차 짐칸에 육포와 건어물, 말린 과일을 싣고는 로제와 함께 마차에 올라탔다.

“출발합시다.”

마부석과 연결된 조그만 미닫이문을 열고 아딘이 이야기했다.

“자, 가자!”

마부석에 앉은 라인하르트는 고삐를 능숙하게 당겼다.

[히히히힝-!]

[이히히히잉-!]

붉은 말과 황색 말이 기분 좋게 투레질하며 마차를 끌고 나가기 시작했다.

아딘은 미닫이문을 닫은 후 그대로 마차 의자에 몸을 맡겼다.

제법 돈을 써서 그런지, 딱딱한 나무 위로 푹신한 솜이불을 박아 넣었기에 앉기도 좋았고 눕기도 편했다.

다소 편한 자세로 늘어진 채 아딘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천천히 지나가는 뵌가르트의 풍경 속에 점차 성벽이 가까워짐을 아딘을 볼 수 있었다.

‘렝고스 자체는 사실 크게 위험한 건 없어. 다행히 소설 진행의 편의성을 위해 용들은 모두가 10년 전부터 수면에 들어갔다고 설정한 게 유효하니까, 용을 만날 일도 없고.’

약간 신경을 써야겠지만, 그런대로 마부이자 요리사이자 짐꾼 역할을 할 용병도 있겠다, 진짜 감당하기 어려운 용도 없겠다, 아딘은 다소 긴장이 풀림을 느꼈다.

‘아니야. 긴장을 풀면 안 돼. 네르갈의 신전은 용보다 더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

성벽 너머, 광활한 초원으로 마차를 타고 족히 한 달은 가야 나올 네르갈의 신전.

그곳에서, 자신조차 알지 못하는 네르갈의 시험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아딘은 최대한 긴장의 끈을 놓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아주 오랜만에 자기 손이 안 가도 되는 여정에 나서면서 결국 아딘은 긴장을 풀 수밖에 없었다.

‘그래, 어차피 가기 전까진 뭔지도 모르니까, 그 시험이란 게…….’

* * *

렝고스.

샤펠 제국과 벨로디나 왕국, 게마인샤프트를 모두 합친 것보다 더 광활한 초원.

엘프숲과 함께 야수와 괴수가 어우러져 사는 야생의 대지.

그러나 렝고스에 사는 모든 생물이 야생 상태에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인간으로 치면 신석기 시대 수준이긴 하지만, 오크는 엄연히 문명을 구축한 채 다른 야수나 괴수를 길들이거나 사냥하며 비교적 지적이고도 윤택한 삶을 누리고 있었다.

카르기아 부족은 그런 렝고스의 오크 중 서북부 일대에서 큰 세력을 자랑하는 녹색종 오크 집단이었다.

지혜롭고 용맹한 족장 카르갈의 영도 하에 1천에 이르는 부족원들은 저마다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게 살며 부족의 문명을 이어가고 있었다.

“뭐가 보이나, 예언자?”

올해 태어난 지 40이 된 카르갈은 우람한 팔뚝을 쓰다듬으며 긴장된 표정으로 부족의 예언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렝고스 서북부 오크 특유의 녹색 피부가 아닌, 서남부 오크에게서나 볼 수 있는 회색 피부를 한 예언자는 눈을 감은 채 들개 뼈로 만든 지팡이를 흔들고 있었다.

“출발…… 출발했습니다.”

예언자의 말에 카르갈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부족이 이곳에서 제법 큰 규모를 이룰 수 있는 것도, 카르갈이 오크로선 흔치 않게 40이 다 되는 지금까지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가 이 예언자의 예언 덕분이었다.

그런 예언자가 지난밤, 악몽 속에서 서남부 오크의 언어로 괴성을 지르며 예언을 했다.

그것을 지금, 예언자는 그것을 다시 되짚으며 서북부 오크의 언어로 카르갈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이었다.

“폭풍이…… 폭풍이…… 금빛 폭풍이…… 거친 분노가…… 출발했습니다.”

예언자가 눈을 번쩍 떴다.

그는 덜덜덜 떨리는 손으로, 공포에 잠식된 눈으로 잔뜩 겁에 질린 채 카르갈에게 이야기했다.

“피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자칫 우리 모두가…… 이곳에 있는 모든 오크가 멸종될 수도 있습니다.”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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