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6 좋은 귀족 (3)
오토 폰 라이덴트로프.
올해로 15세가 되는 이 귀족 소년이 사라진 것은 지난 밤이었다.
로제에게 수작을 걸려다 아딘에 의해 저지당한 귀족 소년은 그대로 화장실로 향했다.
화장실로 가던 그는 하인에게 바닷가에다 오줌을 싸고 올 거라며 선실에서 대기하라 명령한 후 갑판으로 나갔다.
“그 뒤를 저 여자가 따라갔습니다. 그리고 조금 뒤에 저 여자가 들어왔고, 도련님은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게 됐고요.”
라이덴트로프 가문의 하인은 그렇게 이야기하며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찢어진 천조각이었다.
“갑판 구석에서 이런 걸 발견했습니다. 아마 저 여자가 도련님을 바다에 빠뜨릴 때 옷이 걸린 게 찢어진 것일 겁니다.”
하인은 로제를 가리키며 핏발 선 눈으로 고함쳤다.
“당장 잡아야 합니다! 당장 잡아다…….”
점차 그의 말이 험악해지려 할 때,
“그만!”
아딘이 정색하며 짧게 소리 질렀다.
벨트의 힘이 가미된 그의 일성에 일순간 방문 앞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모두 기가 죽었다.
아딘은 서늘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하인을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말 함부로 하지 마. 하인이면 하인 주제에 맞는 소리만 해.”
아딘의 말에 하인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아딘은 문을 닫았다.
그리고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자신이 비난받았단 사실조차 모르는 로제의 어깨를 양손으로 짚으며 물었다.
“로제.”
“네, 오라버니.”
“저 사람 말로는 네가 어제 그 귀족 소년을 바다에 빠뜨렸다는데 사실이니?”
로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는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에요. 제가 왜 그런 짓을 해요?”
“저 사람 말로는 그 소년이 갑판으로 나간 다음 네가 뒤따라 나갔데. 그리고 조금 뒤에 들어왔고, 소년은 아직까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하고.”
“아니에요. 저 정말 안 그랬어요.”
로제는 급기야 눈물을 글썽이며 울상을 지었다.
아딘은 가만히 그녀의 눈을 직시하며 이야기했다.
“그럼 어제 갑판에는 왜 나갔던 거야?”
“화장실을 막상 찾으려니까 못 찾았어요. 나가니까 갑판이길래 그냥 다시 들어온 거고요. 믿어주세요.”
결국, 로제는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습기로 가득한 그녀의 검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아딘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아딘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대로 로제를 안아 주었다.
그는 가만히 로제의 등을 토닥여주며 말했다.
“그래. 믿을게.”
“오라버니가…… 싸우는 걸 싫어하시니까…… 제가 왜 그러겠어요…… 오라버니가 싫어하시는데…….”
“그래. 미안해. 의심한 건 아니었어. 단지 상황을 파악해야 해서 그랬던 거야. 미안해.”
그렇게 한동안 로제를 달래준 후 아딘은 다시 문을 열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요켈하임으로부터 산 신분증을 꺼내며 이야기했다.
“나와 내 동생은 제니스 공화국 시민이다. 감히 제니스 공화국 시민에게 이런 식으로 함부로 누명을 씌울 수 있는 건가?”
아딘이 꺼낸 제니스 공화국 신분증을 본 사람들은 모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제니스 공화국 시민권을 무시할 수 있는 국가는 샤펠 제국뿐이었다.
벨로디나 왕국이나 게마인샤프트의 소국들은 감히 그것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다소 기세가 누그러드는 것을 본 아딘은 곧바로 말을 이었다.
“내 동생은 단지 화장실을 찾으려다 선박의 구조를 잘 모르고 밖에 나갔다가 곧장 들어온 거다. 네놈의 주인이 어떻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 동생과는 무관해.”
아딘의 말에 라이덴트로프의 하인이 눈치를 보며 말했다.
“그, 그래도 어제 우리 도련님이 그쪽 동생한테…… 그 관심을 보이다가……”
“그래서, 그거 하나로 내 동생이 네놈의 주인을 빠뜨렸다고 단정 짓고 아침부터 쳐들어온 건가? 미쳤어? 제정신이야?”
아딘은 강하게 나가기로 했다.
이야기의 합리성이나 논리성보다는 신분으로 말의 무게가 결정되는 것이 이 세계의 룰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 상황에서 아딘이 해야 할 것은 제니스 공화국 시민이라는 거짓 신분을 무기로 방문 앞에 찾아온 자들을 깔아뭉개는 것이었다.
‘다행히 귀족은 하나도 없어.’
문 앞에 모인 사람들이 모두 하인들임을 확인한 아딘은 강하게 몰아붙였다.
“내가 트링겐에 하선하자마자 우리 공화국 무역 사무소로 찾아가서 이 일을 반드시 따지겠다. 감히 일개 하인들 따위가 아침부터 공화국 시민을 모함했다고 말이야.”
아딘은 고의로 눈을 부라리며 라이덴트로프의 하인을 노려봤다.
하인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며 시선을 회피해야만 했다.
“일 없으면 다들 문 앞에서 사라져. 그리고 앞으로 할 말 있으면 선원을 통해 정식으로 대화를 요청해. 조금 전처럼 미친 듯이 문을 두드리지 말고.”
[쾅-!]
아딘은 일부러 힘을 줘 문을 닫은 후 잠가버렸다.
“후우-!”
그리고 그는 창가로 가 한숨을 폭 내쉬며 바다를 바라보았다.
‘일단 임기응변으로 당면한 문제는 해결하긴 했는데…….’
귀족이 실종됐다.
하필 실종된 귀족의 뒤를 로제가 따라갔다.
아딘은 로제를 믿었다.
그녀의 눈물은, 그 표정은 도무지 거짓을 말하는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발스에서의 각성 이후 로제는 자기 의사를 자유롭게 표현하게 됐을 뿐이었다.
아직은 누군가를 기만하거나 하기에는 여러모로 견문이 부족하고 순수한 아이였다.
‘귀찮게 됐어.’
로제가 밀지 않았다면 답은 하나였다.
갑판에서 술에 취한 채 오줌을 싸다가 균형을 잃고 바다에 빠진 것.
그 과정에서 옷자락이 어딘가에 걸려 찢어진 것.
‘분명 자기 부주의지만…….’
대학 시절 해군 갑판병 출신 선배가 술자리에서 해주었던, 밤에 갑판에서 오줌싸다 그만 바다에 빠져 실종 처리된 수병이 있다는 으스스한 이야기를 떠올리며 아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라버니……”
로제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아딘을 불렀다.
아딘은 표정을 푼 후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돌아다 봤다.
“저 정말 아니에요.”
로제는 흐느끼는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아딘은 로제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그래. 믿어. 로제가 안 그랬다고, 난 정말 믿어. 저 사람들한테도 그대로 이야기했어.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흑……”
설움이라도 폭발했는지 눈물을 그치지 못하는 로제를 아딘은 또 가만히 안아 줄 수밖에 없었다.
가만히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아딘은 생각했다.
‘정말 어떻게 된 거지? 진짜 바다에 빠졌나?’
그 순간, 아딘의 뇌리로 무언가 하나 떠올랐다.
아딘은 곧장 로제를 뗴어 내고 품에서 두루마리를 꺼내 펼쳤다.
‘그 귀족 소년!’
아딘은 두루마리를 바라보며 머릿속으로 어젯밤 보았던, 아직 젖살이 빠지지 않은 오만한 귀족 소년, 오토 폰 라이덴트로프의 얼굴을 떠올렸다.
곧 두루마리 위로 그의 초상화와 함께 아딘에게 꼭 필요한 정보가 떠올랐다.
<오토 폰 라이덴트로프>
<광명력 977년 4월 14일 생>
<라이덴트로프 남작 프리드리히의 차남>
<광명력 992년 7월 14일 현재 연안 여객선 상어호의 돛대 망루에서 숙면 중>
아딘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웃으며 두루마리를 접어 품에 집어넣었다.
“로제. 가자.”
“네?”
아딘은 영문을 몰라 하는 로제를, 그녀가 아직 눈물도 다 훔치기 전에 이끌고 밖으로 나갔다.
아직 문 앞에서 해산하지 않은 채 자기들끼리 어정쩡하게 있던 하인들은 갑자기 아딘이 로제와 함께 나오자 흠칫 몸을 떨었다.
“너희들도 다 따라와.”
아딘은 그들에게 그렇게 이야기하곤 성큼성큼 앞장섰다.
로제가 바로 그 뒤를 따랐고, 하인들은 영문을 몰라 하면서도 그 뒤를 따랐다.
잠시 후, 선박 후미 갑판으로 나온 아딘은 돛대 최상부에 자리한 망루를 쳐다보며 소리쳤다.
“오토 폰 라이덴트로프!”
아침을 밝히는 파도 소리 외에는 그 무엇도 아딘의 부름에 응답하지 않았다.
“오토 폰 라이덴트로프!”
아딘이 배에 힘을 팍 주고, 벨트의 힘을 끌어모아 외쳤다.
일순간 약한 진동이 배 전체를 살짝 흔들리게 만들었다.
“끄으으……”
그리고 돛대 위 망루에서 누군가의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후우우…… 뭐야? 왜 다들 모여 있어?”
숙취에 찌든 귀족 소년, 오토 폰 라이덴트로프가 망루 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민 채 아딘과 로제 그리고 하인들을 바라보았다.
* * *
지난밤.
오토 폰 라이덴트로프는 로제에게 수작 걸려던 시도가 아딘에 의해 차단당하자 곧장 화장실로 향했다.
화장실로 가던 도중 그는 술김에 변덕을 부리며 하인을 내버려 둔 채 갑판으로 나갔고, 그곳에서 위태위태하게 소변을 보았다.
소변을 본 후 그는 우연히 어둠 속에서 아른거리는 돛대와 최상부의 망루를 보고는 술김에 그 위로 올라갔다.
그 과정에서 어딘가에 옷자락이 걸려 일부가 찢어져 갑판 위로 떨어지는 불상사가 생기긴 했지만, 어쨌건 그는 무사히 망루로 올라갔고 그곳에서 별빛 아래 드러난 시커먼 바다를 바라보다 이내 잠들었다.
“고작 그런 일을 가지고 그 난동을 피운 거야?”
귀족 소년은 아딘과 하인으로부터 아침에 있었던 일을 듣고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는 곧장 하인의 오금을 발로 툭 찼다.
하인은 그대로 아딘과 로제에게 무릎 꿇은 후 머리를 처박고 빌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제가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죄송합니다!”
죽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친 사람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딘이 작정하고 덤벼들면 죽어나는 것은 하인뿐이었다.
라이덴트로프 가문이야 하인 책임으로 돌리고 모르쇠로 일관하면 그만이었으니까.
“용서해 주십시오! 죄송합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아딘은 곁에서 화가 난 얼굴로 입을 굳게 다물고 있는 로제를 바라보며 물었다.
“어떻게 할래?”
“지금 이 사람, 저한테 죄송하다고 하나요?”
“응. 그러고 있네. 자기가 잘못했다고.”
잠시 하인을 바라보던 로제는 이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딘은 하인과 귀족 소년에게 로제가 용서해 주었음을 알려준 후 로제와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
“좋은 귀족은 말이야.”
로제가 문을 잠그자 아딘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마 상대적인 개념이 아닌가 싶어.”
아딘의 말에 로제는 눈을 깜빡거리기만 할 뿐,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좀 전에 저 귀족 소년도 말이야. 자기 하인에게는 다소 폭력적이었지만, 그게 결과적으론 모두에게 좋은 것으로 돌아갔잖아. 너와 나는 자존심을 세울 수 있었고, 저 귀족은 자기 체면을 세웠고, 하인은 하인대로 책임에서 벗어났으니까.”
그 말에 로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저 자리에서 그 귀족이 하인을 감싸주었더라면, 하인에게는 좋은 귀족일 수도 있었겠지만 우리에게는 나쁜 귀족이었겠지?”
아딘의 논리에 동조하지는 않는 듯 로제는 시큰둥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예전에 내가 이야기했지? 내 본명 말이야. 존 스미스가 아닌, 아딘 블라디미로비치 콘스탄틴이라는 본명.”
“네.”
“콘스탄틴 가문은 벨로디나 왕국의 왕가야. 귀족 중의 귀족이란 말이지.”
로제도 기억하고 있는, 아믈리에 남작의 사과밭에서 밝힌 아딘의 진정한 정체.
그것을 다시 아딘이 상기하자 로제는 침묵했다.
귀족에 대한 증오와 아딘에 대한 미묘한 감정이 복잡하게 충돌하며 그녀의 내면을 어지럽혔다.
그런 로제에게 아딘은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했다.
“로제가 나와 약속을 했으니, 나도 로제하고 약속을 할게.”
“약…… 속이요?”
아딘이 약지를 내밀었다.
로제도 약지를 내밀어 아딘의 약지에 걸었다.
“나중에…… 벨로디나로 돌아간다면…… 다시 내 자리를 찾는다면…… 좋은 귀족이 될게. 로제가 보기에도,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도.”
아딘의 말에 로제의 눈이 흔들렸다.
아딘은 미소를 지으며 엄지를 치켜 세웠다.
잠시 떨리는 눈빛으로 아딘을 바라보던 로제는 이내 자기 엄지를 펼쳐 아딘의 엄지를 꾹 눌렀다.
“너와 나의 약속. 반드시 지켜질 거야. 로제가 나와의 약속을 지켰듯, 나도 로제와의 약속을 지킬게.”
아딘의 그 말에 로제는 수줍게 웃었다.
그렇게 시끌벅적했던 7월 14일의 아침이 지나갔다.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