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5 좋은 귀족 (2)
분노를 가까스로 삭이는 로제를 아딘은 안쓰러운 표정으로 지켜봤다.
‘귀족이 싫겠지. 정말 싫겠지.’
어려서 어미에게 버림받고, 거지 생활 1년 차에 노예 상인에게 붙잡혀 아테인 가문의 노예로 팔려가고.
그곳에서 비참한 노예 생활 3년 차에 가까스로 아딘에 의해 해방된 만큼, 그녀의 마음에 귀족 집단에 대한 증오가 자리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정확히는 그녀의 마음에 귀족에 대한 증오가 자리하도록 김현수가 만들었다.
그래야 영웅일대기 2부 스토리가 진행이 됐으니까.
귀족이 존재하지 않는 제니스 공화국 출신 존 크리스토퍼 하이로드와 로제를 이어주기 위해, 존이 그녀를 희생양 삼아 귀족이 되게 만들기 위해.
그 이유 때문에 로제의 마음에는 이 세계의 창조주 김현수가 심어 둔 귀족에 대한 뿌리 깊은 증오가 자리하고 있었다.
아테인 가문에서의 학대는 그런 증오의 존재를 논리적으로 가능케 하기 위한 장치에 불과했다.
그리고 지금, 그런 증오를 심어 준 당사자는 그녀를 바라보며 이 증오를 어찌해 볼 수 없을까 하는 고민을 하고 있었다.
‘지금이야 뢰벡에서의 봉사 활동이라든가, 나의 존재 때문에 통제가 된다지만 계속 이런 식으로 귀족에 대한 증오를 안고 살면 언젠가는 폭발하게 될지도 몰라.’
만약 아딘이 3대 신물을 미처 모으지 못했을 때 로제가 폭주하게 된다면, 아딘은 그녀의 공격을 고스란히 맞고 이 세상에서 지워질 터였다.
반대로 만약 아딘이 3대 신물을 모두 모으고, 그것들의 힘을 십분 활용할 수 있을 만큼의 정신력이 생겼을 때 그녀가 폭발한다면, 아딘이 그녀의 심장에 칼을 꽂게 될 터였다.
‘안 돼.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돼.’
아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로제에게 죽는 일도, 로제를 죽이는 일도 그가 바라는 전개나 결말은 아니었다.
‘내가 저렇게 만들었으니, 내가 바꿔야지.’
아딘은 결의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후 이내 미소를 지으며 로제를 불렀다.
“로제.”
로제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로제는 귀족이 밉지?”
로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딘도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쳐 주었다.
“그래. 미워하는 거, 충분히 이해해. 나 같아도 미워할 거니까.”
로제의 등에 여전히 살아 있는 뱀 모양의 흉터.
그녀의 성격을 억압해둔 지난 세월의 기억.
그것들 자체를 아딘은 부정할 순 없었다.
하지만 아딘은 그것이 로제가 극복해야 할 것들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모든 귀족이 다 로제가 미워해야 할 만큼 나쁜 사람들일까?”
아딘의 말에 로제는 무언가 말을 하고 싶은 듯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끝내 그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나쁜 귀족들도 많겠지만, 마찬가지로 착한 귀족들도 많지 않을까? 난 그렇게 생각해. 그러니까, 앞으로 로제가 무작정 귀족이란 이유만으로 특정인을 미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
“진짜 미워해도 될 나쁜 놈만 미워하고, 그렇지 않아도 될 착한 사람은 미워하지 않는 거. 어려울까?”
아딘의 말에 로제는 즉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잠시 아딘을 바라보며 입술을 파르르 떨기만 할 뿐이었다.
아딘은 인자한 표정으로 그녀가 입을 열길 기다려주었다.
잠시 후, 로제는 심호흡을 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좋은 귀족이라면……”
아딘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귀족이라면…… 제가 미워할 이유는 없겠죠.”
아딘은 미소를 지었다.
다소 전향적이기까지 한 그녀의 발언이었던 만큼 뭔가 아딘은 뿌듯함마저 느꼈다.
하지만 그 느낌은 뒤에 이어진 로제의 말에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하지만 좋은 귀족은 죽은 귀족뿐이에요, 오라버니.”
아딘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 그게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예요. 좋은 귀족은 죽은 귀족뿐이에요.”
로제의 과격한 논리에 아딘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아니, 죽은 귀족도 좋은 귀족이 아니에요. 자기 장례식과 무덤을 위해 가난한 사람들 수백 명이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식량을 사고도 남을 돈을 쓰니까요.”
로제는 단호한 어조로 아딘에게 이야기했다.
“좋은 귀족은 없어요, 오라버니. 심지어 태어나지 않은 귀족조차도 나쁜 귀족이에요.”
* * *
달이 아름답게 바다 위에 뜬 밤.
드넓은 연회장에서는 다섯 명의 악사들이 현악기로 듣기 좋은 선율을 연주하며 분위기를 돋우고 있었다.
“하하하하-!”
“호호호-!”
여기저기서 귀족들은 음악과 술에 취해 자기들끼리 웃고 떠들며 마시고 있었다.
그리고 아딘과 로제는 그런 귀족들과 거리를 둔 채 창밖으로 펼쳐진 어둠과 밤하늘을 수놓은 별의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태어나지 않은 귀족조차도 나쁜 귀족이라고?’
달과 함께 반짝이는 수많은 별을 바라보며 아딘은 낮에 로제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내가…… 그러니까 창조주라 할 수 있는 김현수가 확정적으로 박아 둔 설정이라 그런 건가? 도저히 변할 수 없는 그런 설정인 건가? 무슨 수를 쓰더라도?’
아딘은 시선을 로제에게로 돌렸다.
로제는 창밖 어둠과 별을 바라보곤 있었지만, 낮에 갈매기들을 바라보던 때와는 달리 지금은 그저 귀족들의 꼴이 보기 싫어서 어쩔 수 없이 본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진짜 해결이 불가능한 걸까?’
아딘이 로제를 바라보며 그렇게 안타까운 표정을 짓고 있을 때, 두 사람의 곁으로 웨이터가 다가왔다.
웨이터는 쟁반에 받쳐 들고 온 음식을 아딘과 로제의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싱싱한 채소와 최고급 쇠고기로 만든 스테이크, 해산물이 들어간 파스타 그리고 17년산 포도주 한 병.
“즐거운 식사 되시기 바랍니다.”
웨이터가 사라지자 아딘은 미소를 지으며 로제에게 이야기했다.
“로제, 먹자.”
로제는 시선을 아딘에게 돌린 후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한 뒤 천천히 식사를 들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선율 속에서, 귀족들의 시끄러운 대화와 웃음소리 속에서, 아딘과 로제는 그렇게 아무 말 없이 저녁 식사를 묵묵히 들었다.
잠시 후, 식사가 끝나고 아딘은 포도주 마개를 땄다.
그리곤 자기 잔과 로제의 잔에 적당량을 부은 후 그녀에게 잔을 건넸다.
“로제, 술 마셔 본 적 있어?”
아딘이 건넨 포도주잔을 받으며 로제는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아딘은 미소를 지으며 잔을 들었다.
“자, 나처럼 잔을 들어 봐.”
아딘의 손모양을 보고 로제가 어설프게나마 잔을 쥐고 들었다.
아딘은 그런 로제의 잔에 가볍게 자기 잔을 부딪친 후 포도주를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잠시 포도주를 음미한 후 아딘은 이내 그것을 꿀꺽 삼켰다.
로제는 그런 아딘을 바라보며 포도주를 한 모금 넘겼다.
하지만 미처 음미하지도 않고 그대로 포도주를 목구멍으로 넘기고 말았다.
“콜록-! 콜록-!”
그리 도수가 높지는 않았지만, 생전 처음 흡입한 알코올의 강렬한 향에 로제는 그만 기침을 하고 말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아딘은 미소를 지으며 다른 잔에 물을 따라 그녀에게 건네 주었다.
“콜록-! 감사…… 콜록-!”
로제는 물을 벌컥벌컥 들이켠 후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좌우로 맹렬히 흔들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아딘은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하하하하.”
아딘의 웃음에 로제는 살짝 토라진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미안해. 그냥…… 뭐랄까 귀여워서 말이야. 나도 모르게 웃었어.”
이어진 아딘의 말에 로제는 흠칫하더니 이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딘이 다시 포도주를 한 모금 마셨고, 로제도 천천히 아딘을 따라 포도주를 마셨다.
아딘이 그랬듯 입안에 머금고 한동안 포도주를 음미한 후 목구멍으로 넘긴 로제는 의외로 맛이 괜찮음에 놀라며 연거푸 포도주를 들이켰다.
“워워워, 너무 그렇게 빠르게 마시지 마. 그건 포도주 마시는 방법이 아니니까.”
그렇게 아딘은 로제에게 술 예절을 가르치며 그녀와 순식간에 포도주 1병을 비우고 새로 1병을 추가로 주문했다.
그 대부분은 아딘이 마셨지만, 로제도 제법 많이 마셨다.
그리고 용의 딸이라 그런지, 로제는 의외로 취하지는 않았다.
“술 잘 마시네? 근데 너무 잘 마셔도 안 돼. 술은 항상 적당히, 분위기를 망치지 않고 자기 자신에 대한 통제력을 잃지 않을 만큼만 마셔야 해.”
“네. 히끅. 명심할게여. 히끅.”
물론 취하지만 않았다 뿐이지 이미 그녀의 혀는 꼬였고 딸꾹질은 시작됐다.
‘그래. 이렇게 좀 분위기를 풀어 줘야지.’
낮의 대화로 잠시 분위기가 이상했던 것을 풀기 위한 술 대작.
그 결과는 아딘의 예상대로 만족스러웠다.
어딘지 모르게 로제와의 사이에 생긴 어색함이 금세 풀렸기 때문이었다.
“어이쿠. 이 아가씨, 누가 이렇게 술을 먹였대?”
그때, 한 불청객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한 손에는 포도주병을 쥔 채 비틀거리며 아딘과 로제에게 다가오며 말을 건 사람은, 낮에 선미 갑판에서 보았던 귀족 소년이었다.
“아가씨. 다른 사람들은 다 저렇게 즐기는 데 왜 이렇게 여기 이 어두운 곳에 숨어 계셔?”
명백히 술에 취한 귀족 소년의 모습에 아딘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응? 뭐야?”
소년이 아딘을 바라봤다.
아딘은 아무 말 없이 정색하며 소년을 바라보았다.
“뭐? 그렇게 보면 뭐?”
소년은 하찮다는 듯 아딘을 보며 이야기했다.
마찬가지로 아딘은 아무 말 없이 소년을 노려보기만 했다.
“어디 감히 날 그딴 눈으로……”
그 순간, 아딘의 몸속에 잠들어 있던 벨트가 눈을 떴다.
벨트는 아딘의 몸속에서 강한 파장을 뿜어대기 시작했다.
파장은 아딘의 의지에 따라 귀족 소년에게 집중됐다.
그리고 귀족 소년은 영문모를 섬찟함에 말을 더 이상 잇질 못했다.
‘됐어. 가능해.’
아딘은 여전히 정색하고 있었지만, 속으로 활짝 웃었다.
발스에서의 경험 이후, 불칸의 갑옷과 아딘은 조금 더 공명을 이룰 수 있게 됐다.
그만큼 아딘의 정신이 성장했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오늘, 아딘은 자신이 설정해 둔 불칸의 갑옷의 능력 중 하나를 시험삼아 귀족 소년에게 사용해 보았다.
‘갑옷을 입지 않아도, 갑옷의 에너지를 파장의 형태로 뿜어내 상대방을 위축시키는 능력.’
아딘은 씰룩이려는 광대를 가까스로 억제한 후 귀족 소년의 후방 3m에 서 있던 하인을 바라봤다.
하인은 조심스럽게 귀족 소년에게 다가와 그를 부축했다.
“도련님. 취하신 것 같습니다.”
“으으으…… 취하긴 개뿔…… 놔 봐. 화장실 갔다 올 거니까.”
귀족 소년은 왠지 모를 섬찟함에 더 이상 아딘과 로제에게 말을 거는 것을 포기하곤 그대로 연회장을 나갔다.
하인마저 귀족 소년의 뒤를 따라 연회장을 빠져나가자 그제야 아딘은 자리에 앉았다.
“이상한 놈이 분위기를 망치고 있어.”
아딘의 말에 로제는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잠시 그녀는 귀족 소년과 하인이 빠져나간 문을 바라보더니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응? 왜? 어디 가려고?”
아딘의 물음에 로제는 그를 바라보며 부끄러운 듯 몸을 한 차례 꼬고는 답했다.
“화장실…… 좀…….”
“아……. 그래. 다녀와. 조심해서 다녀와야 해.”
차마 화장실까지 따라가는 건 도무지 예의가 아닌 것 같았기에 아딘은 그대로 로제를 보냈다.
잠시 후, 10분 정도가 지났을 무렵 그녀는 돌아왔다.
“막잔하고 이제 슬슬 들어갈까, 로제?”
아딘의 제안을 로제는 수락했다.
두 사람은 마지막으로 포도주를 한 잔씩 마신 후 자리에서 일어나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 * *
7월 14일 아침.
[쾅쾅쾅쾅-!]
“빨리 문 열어!”
[쾅쾅쾅쾅-!]
“어서 문 열어!”
아침부터 아딘과 로제의 방문을 누군가가 심하게 두드리며 두 사람을 깨웠다.
“끄으으…….”
아딘이 먼저 침대에서 일어났고, 로제도 이어서 그녀의 침대에서 일어났다.
[쾅쾅쾅쾅-!]
“어서 문을 열란 말이야!”
아딘은 인상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문가로 향했다.
로제도 그 뒤를 따랐다.
아딘은 곧장 문을 열었다.
그리고 아딘과 로제는 자기 방문 앞 복도에 모여든 10여 명가량의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뭔가 심상찮은 일이 생겼음을 느낀 아딘이 정신을 차리곤 그들에게 물었다.
그들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문을 두드린 것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한 중년인에게 턱짓을 했다.
‘저 사람?’
중년인, 귀족 소년의 하인은 잠시 아딘과 로제를 보더니 눈을 부릅뜨며 로제를 가리켰다.
“저 여자입니다! 저 여자가 우리 도련님을 바다에 빠뜨렸습니다!”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