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4 좋은 귀족 (1)
“말젖과 벌꿀을 섞어 만든 술입니다. 피곤한 몸을 회복하기에 아주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오포 강에서 2km 떨어진 곳에 자리한 유목민 장막.
할아버지를 정점으로 다섯 아들과 며느리들, 아들들의 아들들과 그 며느리들이 모여 사는 이곳에서 아딘은 첫째 아들이란 사람이 건넨 술을 공손히 양손으로 받았다.
“혹시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 불러 주십시오.”
첫째 아들은 푸근한 미소를 지어보였고, 아딘도 마주 웃으며 조심스럽게 술을 한 모금 넘겼다.
비릿함 뒤로 달달함이 밀려오는 묘한 맛에 웃지도 인상을 쓰지도 못한 채 어정쩡한 표정으로 아딘은 입맛을 다셔야 했다.
그 모습을 보고 한 차례 더 웃어보인 첫째 아들은 그대로 장막을 나섰다.
‘묘하네.’
이상한 중독성을 가진 말젖 꿀술을 쭉 들이켠 후 아딘은 그릇을 바닥에 내려 놓았다.
그리곤 양털로 만든 담요 위에 누운 채 잠들어 있는 로제를 바라본 후 장막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히히히힝-!]
[메에에에-!]
[월-! 월-! 월-!]
말과 양, 개가 어우러지며 시끌벅적한 분위기를 풍기는 장막.
아딘은 잠시 오포 강이 있는 서북부로 시선을 돌렸다.
‘여기는 뢰벡과 브릴트의 경계에 해당하는 지점이야. 그 누구도 영유권을 가지지 못한, 그래서 그 누구나 영유권을 주장하는.’
물론 아돌프가 미쳐 날뛰어서 강을 건너올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딘은 그럴 가능성을 굉장히 낮게 봤다.
‘샤펠 제국과는 달리 이곳은 영주가 독재권을 행사할 수는 없으니까.’
게마인샤프트의 독립 소국들은 샤펠 제국의 군주정과 제니스 공화국의 공화정이 묘하게 섞인 형태를 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영지는 그 영지를 소유한 한 가문에서 세습되지만, 그 가문 내에서라는 전제하에 영주는 얼마든지 교체가 가능했다.
만약 아돌프가 미쳐서 오포 강을 건너는 순간, 알프레드가 위원으로 있는 시민 자문위원회가 아돌프를 강제로 영주 자리에서 끌어내릴 수도 있었다.
물론 이것도 영지마다 천차만별이긴 했지만, 적어도 뢰벡의 경우에는 시민 자문위원회에서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었다.
‘뭐, 정 미쳐서 넘어오면 그땐 내가 다 처리하면 되겠지. 여차하면 이 유목민들 힘도 좀 빌리고.’
그렇게 생각하며 아딘은 주변을 둘러봤다.
60여 명에 이르는 장성한 남자들이 각자 맡은 일을 열심히 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사람들이 원래 여기 원주민이었지? 내 설정대로라면?’
소위 게마인샤프트 족속이라 불리는, 이 지역 주류 인종의 조상은 과거 엘프숲 남부에서 거주하던 유목민 집단이었다.
본래 게마인샤프트 지방은 다이람이란 이름의 족속이 구르간 왕국이라는 정치체 아래에서 상당히 높은 수준의 문명을 구축하고 있었다.
그러다 지금으로부터 1,200년 전 구르간 왕국이 전염병과 자연재해로 흔들리는 사이 엘프숲 남부의 유목민들이 대대적인 침략과 이주를 감행했다.
전쟁은 가볍게 유목민들의 승리로 끝났고, 유목민들은 곧 원주민 다이람 족속을 몰아내고 그들의 성읍과 도시를 차지했다.
이윽고 세월이 흐름에 따라 유목민들은 농경과 상업에 종사하며 스스로를 게마인샤프트 족속이라 칭하기 시작했고 다이람 족속은 광활한 목초지와 황무지로 쫓겨나 유목 생활을 하게 됐다.
‘왜 그런 설정을 했더라?’
아직 영웅일대기를 쓰기 전, 세계관이나 끄적이고 있던 중3 겨울 방학 때 만들어낸 설정이었다.
당연히 그 이유가 기억날 리는 없었다.
‘어쨌건 이 사람들이 본래 원주민들인데 말이야. 흐음…… 불멸자 샤푸르도 이걸 알고 있을까?’
구르간 왕국의 최전성기를 이끈 존재이자 현재 엘프숲에서 불멸의 검과 함께 그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불멸자 샤푸르.
정작 영웅일대기 본편에서는 맥거핀 취급받았던 전설 속 군주를 떠올리며 아딘은 잠시 이런저런 상념에 잠겼다.
‘뭐, 그래도 나그네를 왕처럼 대접하는 문화를 가졌다는 설정을 만들어 둔 덕에 이렇게 좀 편하게 가는 거지.’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후 아딘은 기지개를 쭉 켰다.
[메에에에-!]
그런 아딘을 바라보며 양 한 마리가 울었고, 아딘은 그런 양을 바라보며 한 차례 미소를 지은 후 장막 안으로 들어갔다.
‘계획을 수정해서, 브릴트에서 배를 타고 바로 트링겐으로 가야겠어. 돈은 좀 깨지겠지만…… 괜히 브라운실트 가문의 영향권에 있는 도시로 갔다가 귀찮은 일에 휘말리긴 싫으니까.’
그렇게 아딘은 사흘간 유목민의 장막에서 편하게 로제를 간호하며 보낼 수 있었다.
* * *
<요켈하임>
<광명력 951년 7월 1일 생>
<브릴트에서 제일가는 위조범>
<현상금 320골드>
광명력 992년 7월 12일 정오.
이름없이 그저 커다란 가오리가 양각된 나무 간판이 전부인 허름한 선술집.
낮임에도 칙칙한 분위기가 맴도는 이곳 구석자리에서 아딘은 로제와 함께 누군가를 기다리며 두루마리로 한 사람의 정보를 확인하고 있었다.
[끼이익-!]
그때, 선술집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들어왔다.
2m 가까이 되는 거구에 덥수룩한 수염과 대조되는 반들반들한 대머리를 지닌, 험상궂게 생긴 남성이었다.
아딘은 두루마리에 나타난 초상화와 사내의 얼굴이 같음을 확인한 후 두루마리를 천천히 말아서 품에 집어넣었다.
사내, 요켈하임이 들어서자 선술집 주인은 턱으로 아딘을 가리켰다.
요켈하임은 아딘을 한 차례 쓱 쳐다본 후 주인으로부터 맥주 한 잔을 받은 뒤 성큼성큼 아딘 쪽으로 걸어와 맞은편에 앉았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어떻게 날 알고?”
“처음 보는 얼굴인데 아무런 경계도 안 하는 걸 보면 역시 믿는 뒷배가 있는 모양이네?”
아딘의 말에 요켈하임은 피식 웃었다.
“뒷배? 뭐, 함정을 파서 날 잡을 계획이 세워지면 그걸 알려 주는 사람은 몇 있지. 그래서, 용건은?”
“손재주가 좋다던데. 덩치에 비해 굉장히 정교한 기술을 가졌다고.”
요켈하임은 어깨를 으쓱하며 가볍게 자기 손바닥을 보여주었다.
도무지 저 손이 무언가를 위조할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아딘은 그런 겉으로 보이는 면모를 신경 쓰진 않았다.
두루마리에 따르면 요켈하임은 게마인샤프트 전역을 통틀어 최고의 위조 전문가다.
“내가 동생하고 여행 중인데 신분증을 중간에 잃어버렸어. 강을 건너다 그만 빠뜨렸지.”
“그래. 그랬겠지.”
“신분증을 다시 발급 받으려면 아라곤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귀찮잖아. 여기까지 와서 다시 돌아가기도 그렇고.”
“신분증 2개라……. 이름하고 생년월일 그리고 출생지가 어떻게 되지?”
“난 존 스미스, 동생은 로제 스미스. 난 970년 10월 3일. 동생은 976년 10월 1일. 출생지는 둘 다 제니스 공화국 아라곤.”
요켈하임은 아딘의 입에서 나온 정보를 입으로 몇 차례 중얼거린 후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외웠고. 제니스 공화국 신분증은 위조하기가 좀 까다로워. 워낙에 쓸데없는 그림들이 많이 들어가서 말이야.”
“개당 100골드씩, 200골드. 선금은 절반, 잔금은 물건 확인 후에.”
아딘은 마법 주머니에서 100골드짜리 금괴를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요켈하임은 씩 웃으며 금괴를 챙겨 주머니에 집어넣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 이 시간에 이 자리에서 보자고.”
“그러지.”
그렇게 요켈하임은 밖으로 나갔고, 아딘도 칙칙함을 견디지 못해 로제와 함께 선술집을 나섰다.
“뭘 사신 거예요?”
로제의 물음에 아딘은 웃으며 대답했다.
“신분증. 배를 타려면 필요해서.”
“배를요?”
“뢰벡에서 브라운실트 가문하고 부딪혔잖아. 여기야 브라운실트 가문하고 사이가 나쁜 하이센 가문의 영역이라지만 여기를 벗어나면 바로 브라운실트 가문의 영역이 이어지거든.”
“아하…… 그래서 배를 타고……”
“그래. 배를 타고 바로 가는 거야. 트링겐으로.”
로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딘이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로제는 배 타봤어?”
로제는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한 번도?”
“네. 한 번도…….”
“허어…… 멀미는 안 하겠지?”
말을 해놓고 아딘은 터무니없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용의 딸이 멀미는 개뿔…….’
아딘은 로제의 손을 잡고 그녀에게 이야기했다.
“하루 정도 시간이 있으니까, 여기 구경이나 다닐까?”
로제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대신, 저번처럼 막 아픈 사람이나 장애가 있는 사람 치유해주고 그러면 안 돼. 알았지?”
“……”
“여기서까지 자칫 뢰벡에서처럼 시비가 붙으면 우리 정말 힘들어져.”
“…… 네. 알겠어요.”
“그래. 그럼 가자.”
그렇게 아딘은 로제와 함께 게마인샤프트 서부의 해상 관문 도시 브릴트를 한 바퀴 돌며 독특한 해양 문화를 만끽했다.
그리고 다음 날, 7월 13일 정오, 아딘은 선술집에서 요켈하임으로부터 정교하게 위조된 제니스 공화국 신분증을 받은 후 잔금을 치른 뒤 선착장으로 향했다.
* * *
[끼룩-! 끼룩-! 끼룩-!]
갈매기들이 배 주변을 날아다니며 울고 있었다.
로제는 그것들이 신기한지 입을 헤 벌린 채 바라보고 있었다.
“부산 갈매기~ 부산 갈매기~ 너는 벌써 나를~”
아딘은 자기도 모르게, 이 세계에는 존재하지도 않는 한국어로 노랫말을 흥얼거렸다.
생전 처음 듣는 언어에 갈매기를 바라보던 로제는 흠칫하며 아딘을 바라봤다.
아딘은 어색하게 웃으며 짧게 해명했다.
“고대 언어야…….”
“아…….”
로제는 다시 갈매기와 바다를 바라보며 입을 헤 벌렸다.
‘아직도 봄에만 빠따에 불이 붙고 있으려나?’
김현수가 사는 현실 세계에서, 한때 그의 여자친구였던 대학 동기가 좋아한 야구팀과 그 응원가였던 노래를 떠올리며 아딘은 쓴웃음을 지었다.
‘다들 잘 지내고 있으려나?’
바다 위 갈매기와 그 갈매기를 통해 떠올린 한국의 노랫말은 순식간에 아딘의 상념을 대한민국 김현수의 삶으로 가져다 놓았다.
“어흠.”
그때, 굉장히 경박한 음색의 헛기침이 아딘과 로제가 서 있는 선미 갑판 위에 울려 퍼졌다.
아딘과 로제의 시선이 동시에 헛기침의 주인공에게로 옮겨갔다.
“어흠!”
고작해야 10대 중반 정도나 됐을까?
아직도 젖살이 볼에 남아 있는 소년이 뒷짐을 진 채 거만하게 턱을 치켜든 자세로 허세를 부리고 있었다.
그 뒤에선 40은 넘어 보이는 남성이 소년에게 굽신거리며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귀족인가?’
아딘이 로제와 함께 게마인샤프트 동부에 자리한 트링겐까지 가기 위해 선택한 5단 노선.
선원 제외 총정원이 150명에 육박하는, 제법 거대한 이 호화 여객선은 브릴트에서 트링겐까지 가는 비용이 편도로만 1인당 50골드에 달했다.
그리고 현재 이 배에는 선원들을 제외하면 20명의 귀족과 그들을 수행하는 하인 28명 그리고 아딘과 로제만이 타고 있었다.
‘일주일인가?’
브릴트에서 트링겐까지 배로 이동하는 시간을 떠올리며 아딘은 로제를 바라봤다.
아니나 다를까, 로제는 정색하며 귀족 소년을 노려보고 있었다.
“로제.”
아딘은 로제를 불렀다.
로제가 아딘을 바라봤다.
아딘은 턱으로 선실을 가리키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로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딘과 함께 배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두 사람은 두 사람에게 배정된 넓은 방에 도착했다.
원탁에 마주 앉은 두 사람은 가만히 서로를 바라보며 대화하기 시작했다.
“로제.”
“네.”
“일주일 동안은 이 배를 타고 움직여야 해.”
로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너도 알겠지만, 이 배에서 귀족이 아닌 사람은 너하고 나 둘뿐이야.”
“……”
“귀족이 미운 건 알겠지만, 그래도 일주일 동안만은 좀 참아 줘. 바다 위에서 자칫 싸움이라도 벌어졌다간 굉장히 곤란한 일들이 발생할 거야.”
마지막 말은 진심이었다.
당장 바다 위에서 싸우다 로제가 분노를 조절하지 못해 배를 침몰시키기라도 한다면, 귀족들은 물론 아딘과 로제의 생명마저도 장담할 수가 없었다.
불칸의 갑옷이 심해의 수압을 견딜 수 있다곤 하지만, 아직 아딘의 정신력으로는 그 정도 능력 발휘는 불가능했다.
“알겠지? 로제?”
아딘이 로제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잠시 테이블을 바라보던 로제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참아볼게요.”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