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3 소녀와 귀족 (2)
게마인샤프트는 다른 국가들처럼 통일된 정치체를 구성하지 못했다.
35개의 독립적인 소국들이 도시 단위로 혹은 여러 도시의 연합 단위로 자기들만의 시스템 속에서 주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통일된 정치체가 없다 보니 효율적인 생산 방식이 정착하지를 못했고, 덕분에 게마인샤프트는 샤펠 제국 북부의 2배에 달하는 광활한 땅에 고작 330만 정도의 인구만이 거주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런 만큼 각 독립 세력 간의 경계에는 드넓은 목초지나 황무지, 강과 산이 펼쳐져 있었다.
이런 곳에는 각 영지에서 쫓겨난 유랑민들이 목축업을 하거나 화전을 일구며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다.
[두두두두두-!]
뢰벡과 브릴트의 사이에 펼쳐진 40km 정도의 목초지가 딱 그런 경우였다.
“하앗-! 하앗-! 하앗-!”
신나게 말을 몰며 빠르게 달리는 아딘과 그 뒤를 약 2km 차이를 두고 쫓는 50여 기사들은 광활한 목초지를 가로지르며 달리고 있었다.
[메에에에-!]
한쪽에서 풀을 뜯던 양 무리가 화들짝 놀라며 허둥댔고, 양치기와 개들은 바쁘게 뛰어 다니며 양들을 진정시키기에 바빴다.
“도대체 뭔 일이래?”
양들을 진정시키며 양치기는 추격전을 벌이는 인마 무리를 바라봤다.
이곳저곳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만큼, 양치기에게 있어서 화적떼나 기사들이나 다를 건 없었다.
양치기는 최대한 숨을 죽인 채 멀리서 경주하는 두 무리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받으며 아딘은 미친 듯이 말을 몰고 또 몰았다.
“오라버니! 그냥 제가 나설게요! 저랑 같이 저것들 싹 쓸어버리면 되잖아요!”
로제는 갑갑하단 말투로 아딘에게 이야기했다.
아딘은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나흘 연속 힘을 쓰느라 로제는 굉장히 지친 상태야. 이런 상황에서 마법까지 써버려? 안 돼. 몸에 굉장한 무리가 갈 게 뻔해.’
7월 4일 저녁부터 시작된 치유 사역은 7월 8일 새벽까지 이어졌다.
로제가 한 사람이라도 더 치료하고 싶다 고집부렸기에 아딘이 하는 수없이 허락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적어도 여관 근처까지 와서 치료를 못 받은 사람은 없게 됐지만, 로제는 굉장히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피로해진 상황이었다.
‘그리고 좋은 일을 하면서 성녀 소리를 들었어. 이건 분명 로제의 정신에도 좋은 영향을 끼칠 거야. 이 아이가 귀족에 대한 분노로 마녀가 되는 것을 막고, 선한 마법사가 될 수 있는 그런 영향을 말이야.’
명확하게 로제가 마녀가 되는 어떤 수치 같은 건 없었다.
마치 게임에서처럼 어떠한 수치가 일정 수준을 초과하면 마녀가 된다든가, 일정 수준 아래로 떨어지면 선한 마법사가 된다든가 하는 기준이 그녀에게는 없었다.
그것이 아딘을 더 갑갑하게 했다.
그런 기준이 없으니, 아딘으로서는 최대한 로제가 힘의 사용처를 결정하는 데 있어 신중하길 바랄 뿐이었다.
‘만약 여기서 저 사람들을 쓸어버리기라도 한다면…….’
불가능하진 않을 터였다.
일단 아딘 자체가 지난번 발스에서의 혈투 이후 굉장히 정신적으로 성숙해졌고 덕분에 불칸의 갑옷은 그에게 더 강한 전투력을 부여해주었다.
로제도 최대한 아딘이 무리하지 말라고 요구하면, 적당한 선에서 서포트해줄 수 있었다.
로제의 서포트와 아딘의 공격 및 방어 앞에서 소드 마스터 하나 없는 기사단 따위 아무 문제도 없었다.
마법사들이 살짝 걸리긴 했지만, 불칸의 갑옷의 방어력을 뚫을 정도로 강하진 않으리라 아딘은 생각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돼. 만약에라도 로제가 힘 조절에 실패한다면 이 아이의 몸도 망가질 거고 마음도 망가질 수 있어. 안 돼. 어차피 조금만 더 가면 브릴트 외곽이야. 그 이상으로는 절대 추격하지 못해.’
생각을 정리한 아딘은 단호하게 말했다.
“안 돼. 참어.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야. 참어, 로제. 알았지?”
아딘의 말에 결국 로제는 다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녀도 알았다.
아딘이 무엇을 걱정하는지를.
‘어차피 조금 심장이 뜨거운 느낌만 받으면 그만인데…….’
아딘의 허리를 감은 로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조금 아파도 참으면 되는데…… 저 나쁜 귀족놈들 다 쓸어버리고 오라버니랑 편하게 가면 되는데…….’
발스에서의 일로 힘을 각성한 후로 그녀의 마음에 내재돼 있던 귀족에 대한 공격성은 강해졌다.
알프레드의 경우 예외적이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그가 로제 스스로가 하고자 했던 자선 행위에 도움을 주었기에 그랬을 뿐이었다.
더구나 아돌프는 그녀가 가장 혐오하는 권위의식 가득한 귀족 그 자체였다.
일반 백성의 목숨은 하찮게 생각하고 자기들의 조그만 상처에도 호들갑을 떠는 귀족들.
13세 때부터 아딘에게 해방되기까지 근 3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귀족으로부터 채찍을 맞아가며 그녀가 내린 결론은 귀족은 쓰레기라는 것이었다.
‘오라버니는 내 걱정에 이렇게 하시는 거지만…….’
아딘이 자신을 위해 이렇게 필사적으로 도주하는 것을 택했음을 아는 만큼 로제는 자기 고집을 꺾을 수밖엔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뒤에서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가 고막을 때릴 때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살심(殺心)을 꾸역꾸역 눌러 담느라 온몸에 힘을 바짝 줘야만 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한참을 달렸다.
말이 입에서 단내가 날 때까지, 이대로 가다간 말이 죽는 게 아닌가 싶을 때까지 달리고 또 달렸다.
[히히히힝-!]
그러다 아딘과 로제는 멈춰설 수밖에 없었다.
‘젠장!’
폭이 족히 30m는 돼 보이는 강이 엄청난 물살을 일으키며 둘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아딘은 황급히 품에서 두루마리를 꺼냈다.
<오포 강>
<상류 수원지에 지난 이틀간 폭우가 내려 현재 수심이 깊어지고 물살이 빨라졌다.>
미처 확인하지 못했던 정보에 아딘은 이를 갈았다.
“오라버니. 이렇게 된 이상…….”
로제의 말에 아딘은 인상을 찌푸리며 두루마리를 품에 넣었다.
그리곤 마법 주머니에서 메이스 두 자루를 꺼내 손에 쥔 후 말에서 내렸다.
“로제. 넌 어지간하면 개입하지 마. 알았지?”
아딘은 로제를 올려다보며 이야기했다.
그 간절한 표정에 로제는 차마 입을 열어 그의 말을 거부할 수가 없었다.
아딘은 곧장 전방을 바라보며 자신과 점점 거리를 좁히는 기사 무리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말들 또한 상당히 지쳤는지 속도는 확실히 느려져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느리다 하더라도 2.5km 정도 되는 거리를 주파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으리라 아딘은 생각했다.
“후우.”
아딘은 심호흡을 한 후 불칸의 갑옷을 입으려 했다.
그 순간,
“오라버니!”
로제가 아딘을 불렀다.
아딘은 로제를 바라봤다.
로제는 아딘에게 고개를 끄덕인 후 강을 바라보며 양손을 뻗었다.
‘뭐 하려는 거지?’
아딘은 의아한 표정을 지어보이면서도 불칸의 갑옷을 꺼내 입었다.
아딘의 전신이 금빛으로 뒤덮였다가 이내 그 빛이 사라지며 불칸의 갑옷을 입은 아딘이 드러났을 때쯤.
[쿠구구구구구구-!]
묵직한 소음과 함께 강물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이, 이건?!’
엄청난 힘이 강물을 밀어내고 있었다.
상류에서 내린 폭우로 수위가 올라가고 물살이 강해진 강물은 앞을 가로막고 자신을 밀어내는 강한 힘에 거세게 저항했다.
그러나 그 저항은 결국 힘을 이겨내지 못했다.
마침내 강물의 흐름이 일시적으로 멈추었고, 곧 강바닥이 드러나며 건너편으로 갈 길이 만들어졌다.
‘이건 뭐야? 모세야?’
아딘은 황당한 표정으로 로제를 올려다봤다.
“로제!”
그리고 그는 코와 입에서 피를 흘리는 로제를 보며 화들짝 놀랐다.
“오라버니…… 어서…… 어서 올라타세요…… 오래는 못 버텨요.”
로제의 말뜻을 알아차린 아딘은 곧장 불칸의 갑옷을 해제하고 말에 올라탔다.
“하아-!”
곧 말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말은 빠르게 강바닥을 건너 반대편 대지에 올라섰다.
[쿠구구구구구-!]
아딘과 로제가 탄 붉은 말이 대지에 발을 딛는 순간, 강물의 흐름을 막고 있던 보이지 않는 장벽이 사라지며 물살은 다시 거세고 도도하게 흐르기 시작했다.
“커헉-!”
그리고 로제는 아딘의 등으로 피를 한 바가지 토했다.
“로제!”
아딘은 곧장 말에서 내리며 힘을 잃고 말에서 떨어지는 로제를 붙잡았다.
“로제. 어째서 그렇게 무리한 거야?”
코와 입가에 피를 가득 묻히고 안색이 창백해진 로제를 안은 채 아딘은 울먹일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봤다.
“오라…… 버니가…… 싸우시는 걸…… 싫어…… 하는 것…… 같아서…….”
“내가 싫어한 건 싸우는 게 아니라 로제가 이렇게 무리하는 거야.”
“괘, 괜찮아요. 조, 조금만 쉬고 나면…….”
그러면서 로제는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아딘은 황급히 품에서 두루마리를 꺼내 펼쳤다.
<로제 콘스탄틴의 현재 몸상태>
<장기간 고된 노동으로 피로도가 누적된 상태다.>
<과도한 힘의 남용으로 심장에 무리가 온 상태이며, 회복까지 72시간이 걸릴 예정이다.>
<당분간 무리하지 말고 가만히 쉬기를.>
두루마리는 마치 의사라도 되는 양 로제의 현 상태를 진단한 후 처방까지 내렸다.
혹시나 해서 펼쳐봤는데 그런대로 도움이 되는 정보를 얻게 된 아딘은 황당함에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웃어 보이곤 두루마리를 도로 집어넣었다.
“로제. 말에 탈 수 있겠어?”
“팔에…… 힘이…… 안 들어가요…….”
아딘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그녀를 앞으로 안은 채 말 고삐를 잡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기서는 쉬기가 좀 그러니까, 조금만 더 움직였다가 쉬자. 알았지?”
“네…… 오라버니…… 죄송…… 해요…….”
“아니야. 로제. 미안해할 건 없어. 로제가 잘못한 건 없어.”
그렇게 이야기하며 아딘은 자기도 모르게 로제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춰 주었다.
로제는 힘겹게 눈을 떠 아딘을 바라보다 이내 얼굴을 붉히며 다시 눈을 감았다.
아딘도 뒤늦게 자신의 무의식적 행위를 인지하고는 흠칫 몸을 떨어야 했다.
“야이 개돼지 같은 것들아! 이 지옥에 떨어질 것들아!”
그때, 강 건너편에서 아돌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게마인샤프트 서부방언으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아딘과 로제를 저주하고 있었다.
“빨리 아까 저것들이 한 것처럼 해 봐! 강의 물길을 막아봐란 말이야!”
아돌프는 마법사들을 닦달했다.
하지만 마법사들은 질색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못 합니다. 어떻게 사람이 자연을 거스를 수 있습니까?”
“용이라면 모를까, 사람은 못 합니다.”
마법사들의 지극히 상식적인 반응에 아돌프는 입에서 침을 튀겨가며 광분했다.
“그럼 저것들이 조금 전에 한 건 뭐야! 저것들은 용이라도 된단 말이야!”
아돌프는 다시 강 건너편의 아딘과 로제를 바라보며 고함쳤다.
“너희 잡것들이 그 알량한 힘으로 내 아들을 치료해 줬다면! 그랬더라면! 내 아들! 내 귀여운 아들! 내 착한 아들이 죽었을 이유가 없어! 죽지 않았을 거라고! 살았을 거란 말이다!”
아돌프의 말에 아딘은 순간 멍하니 입을 벌린 채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너희들이 죽인 거야! 너희들이 내 아들을 죽였어! 너희들이! 너희들이 말이야! 이 개돼지 같은 것들아!”
어째서 아돌프가 그렇게까지 극단적으로 자신들을 쫓아왔는지, 광명교의 힘까지 이용해 자기들을 구속하려 했는지.
그제야 아딘은 이해할 수 있었다.
“오라…… 버니…… 뭐라고…… 하는…… 거예요?”
게마인샤프트 서부방언을 알아듣지 못하는 로제의 물음에 아딘은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보고 가다가 말똥이나 밟고 미끄러지라네.”
“칫…… 말똥…… 같은 소리…….”
로제는 말똥이라는 말이 웃기기라도 한 듯 기침을 하면서도 키득키득 웃었다.
“으아아아아아아-! 아돌프! 아돌프! 아돌프! 내 아들아! 으아아아아아-!”
강 건너편에서 자식 잃은 아비의, 짐승의 울음소리 같은 절규를 들으며 아딘은 온몸에 소름이 돋음을 느꼈다.
“빨리 가자. 저기 보니까 유목민의 장막이 보이는데, 적당히 대가를 지불하면 며칠 쉴 수 있게 해 줄 거야.”
아딘은 뒤에서 들리는 귀족의 울부짖음을 외면한 채 로제를 안고 말을 손으로 이끌며 천천히 2km가량 떨어진 유목민의 장막을 향해 걸어갔다.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