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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42화 (42/175)

042 소녀와 귀족 (1)

광명력 992년 7월 8일 아침.

“다 챙겼어?”

“네, 오라버니. 출발하면 돼요.”

로제와 아딘은 슈타인하르츠 여관 앞마당에서 말 안장에 짐을 싣고 있었다.

여느 투숙객들이 그러했듯 두 사람의 체크아웃도 크게 다를 건 없었다.

하지만 오늘, 여관에 근무하는 인력 모두가 여관의 경영자 알프레드 폰 슈타인하르츠와 함께 마당에 선 채 두 사람을 환송하고 있었다.

“웃차.”

아딘이 로제를 먼저 안장에 올리고 자신도 마저 말에 올라타자 알프레드가 천천히 그에게 다가오며 손을 내밀었다.

“말 고삐는 내게 주게. 성녀님과 그 수호 기사의 떠나는 길, 뢰벡의 경계까진 내가 이렇게 마부로 사역하고 싶네.”

미소를 짓는 알프레드의 모습에 아딘도 마저 웃어 보였다.

“끝까지 로제의 후광을 이용하려 하시다니…… 대단합니다.”

“뭐, 꿈이 있는 한 남자의 지혜라고 말해두지.”

그러면서 알프레드는 아딘의 뒤에 앉아 그의 허리를 꼭 껴안고 있는 로제를 바라보았다.

“실례가 안 된다면, 제가 성녀님의 마부 노릇을 해도 괜찮겠습니까?”

알프레드의 말에 로제는 키득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소녀다운 모습에서 그녀가 떠난 후 뢰벡에서 자신이 갖게 될 명성을 바라보며 알프레드는 말 고삐를 잡고 천천히 정문으로 향했다.

굳게 닫혀 있던 정문이 건장한 두 남자의 힘을 받으며 활짝 열렸다.

“나오신다! 나오신다!”

“성녀님! 성녀님!”

“기사님! 기사님! 여기 좀 봐 주세요!”

정문 밖에는 문자 그대로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 있었다.

대부분 후줄근한 차림새이긴 했지만, 모두 다 아침에 세수라도 했는지 얼굴은 반들반들했다.

“성녀님 만세!”

“기사님 만세!”

슈타인하르츠 남작이 직접 보낸 기사들이 질서 유지를 하며 만들어 낸 길 사이로 아딘과 로제가 들어서자 그 양쪽에 자리한, 로제로부터 치유를 받은 빈민들이 모두 쌍수를 들며 아딘과 로제를 향해 만세를 불러 외쳤다.

“알프레드 님 만세!”

중간중간에 어설프게 빈민의 차림새를 꾸며낸 것처럼 보이는 자들이 아딘과 로제에 대한 찬양 사이로 알프레드에 대한 찬양을 끼워 넣었다.

알프레드 자체도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굉장히 대범한 모습을 보인 만큼, 빈민들은 이내 자연스럽게 아딘과 로제, 알프레드를 찬양했다.

“이래서 군중심리가 무서운 건가 봅니다. 중간중간에 꾼들 몇 섞어 놓으니 아주 자연스러워지네요.”

아딘이 알프레드를 향해 이야기했다.

알프레드는 그저 미소만 지을 뿐,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성녀님 만세!”

“성녀님이시여 만수무강하소서!”

빈민들이 보내는 찬양 중 가장 많은 지분을 차지하는 것은 로제에 대한 찬양이었다.

로제는 수줍게 웃으며 아딘의 등에 얼굴을 파묻었다.

“손을 흔들어 줘. 저 사람들은 널 보며 마음의 위안을 얻고, 삶의 희망을 품게 될 테니까.”

아딘이 나지막히 로제에게 이야기했고, 로제는 고개를 들어 잠시 아딘의 등판을 바라본 후 수줍게 손을 들어 빈민들을 향해 흔들어 주었다.

“와아아아-!”

그 모습에 빈민들의 환호가 절정에 이르렀을 무렵이었다.

[히히히힝-!]

[두두두두-!]

빈민들의 환호와 시끌벅적한 웃음소리를 뚫고 성난 말의 투레질과 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땅이 진동하기 시작했고, 그것을 인지한 사람들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소리와 진동의 진원지를 바라보았다.

“브라운실트 백작…….”

저 멀리, 빈민으로 벽을 세운 길 너머로 보이는 한 무리의 인마와 브라운실트 백작을 상징하는 깃발.

그것을 본 알프레드의 표정이 굳어버렸다.

아딘과 로제도 심상찮음을 느끼며 긴장한 표정으로 인마 무리를 바라보았다.

“워워워-!”

약 50에 이르는 완전무장한 기사들 틈으로 마찬가지로 완전무장을 한 아돌프 폰 브라운실트 백작이 나타났다.

핏발 선 눈으로 콧김을 뿜어가며 아딘과 로제를 노려보던 아돌프의 곁에서 부관이 두루마리를 위아래로 쫙 펼치며 큰 목소리로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광명교 뢰벡 사원 주임사제 요하네스는 뢰벡 영주 아돌프 폰 브라운실트 백작의 의뢰를 받아 소위 성녀라 불리우는 여인에 대한 약식 마녀재판 심문이 필요함을 인지하여 천계의 신들께서 주신 권한으로 당사자를 약식 마녀재판에 소환하기로 결의하였다. 광명력 992년 7월 7일 광명교 뢰벡 사원 주임사제 요하네스 발표.”

낭독이 끝나자 부관은 두루마리를 뒤집어 모두가 볼 수 있도록 활짝 펼쳐주었다.

“마, 마녀재판? 그게 뭔 소리래?”

“지금 성녀님보고 마녀라고 한 거여?”

“이게 말이 돼?”

“사제가 미쳤는가봐?”

빈민들이 당혹감에 서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젠장. 그렇게 사원에다 돈을 버리듯이 봉헌하더니…… 결국 이런 술수를…….’

비록 광명교 교단 조직이 중앙집권화되지 않은 채 독립적인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곤 하지만, 그들의 결속력 자체는 대단히 강했다.

벨로디나의 중앙집권적 조직인 동방 광명교에 비하면 약하다지만, 자칫 그들을 잘못 건드렸다간 굉장히 피곤한 일에 휘말리게 될 터였다.

‘이런 일에 형수님을 끌어들일 수도 없고…….’

알프레드는 아돌프를 노려봤다.

아돌프는 실성한 사람처럼 실실 웃으며 핏발 선 눈으로 아딘과 로제를 노려보며 고함쳤다.

“들었느냐! 사제께서 너희가 마녀인지 아닌지 구분할 필요가 있다고 하니 썩 따라오거라!”

그의 말이 끝나자 그의 좌우로 푸른 로브와 망토를 입은 남녀 두 사람이 나란히 말머리를 대고 섰다.

‘마법사?’

아딘은 심각한 표정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로제 때문에 마법사까지 동원한 모양인데…….’

중무장한 기사만 50에 마법사가 둘.

굉장한 전력이었다.

뢰벡으로 들어서기 전, 두루마리를 통해 확인한 정보에서 브라운실트 가문의 기사 중 소드 마스터는 없는 것으로 확인됐지만, 그래도 저들 자체의 무력은 강했다.

게마인샤프트 서부의 맹주 역할을 하는 브라운실트 가문이 직접 먹이고 입히고 훈련시키는 자들이니 만큼, 당연한 일이었다.

‘더구나 여기서 싸움이라도 일어났다간 저 사람들 모두가 휘말리고 말 거야.’

더구나 지금 당장 싸움이 일어난다면, 로제에게 치유받아 그녀의 은총에 감사를 표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인 저 빈민들 모두가 불의의 사고를 당해 죽거나 크게 다치게 될 터였다.

‘거기다 저 사람…… 브라운실트 백작…… 눈이 딱 맛이 간 눈이야. 빈민들 몇 백 명 죽는 건 신경도 안 쓸 분위기인데…….’

그렇게 아딘이 고민하고 있을 때, 아돌프는 미치광이처럼 웃으며 기사들에게 명령했다.

“가서 잡아 와!”

그 명령에 기사 둘이 창을 꽉 쥔 채 아딘과 로제에게 접근했다.

그 순간,

“응? 뭐야?”

한 소년이 기사들의 앞을 가로막으며 양팔을 쫙 펼쳤다.

“안 비켜?”

기사가 투구 사이로 험악한 눈빛을 보내며 창끝으로 소년을 겨누었다.

소년은 크게 심호흡한 후 눈을 질끈 감았다.

마치 찌를 테면 찌르라는 듯한 기세였다.

“어, 어?”

그것이 기폭제였다.

소년의 옆으로 한 중년 여인이 서서 소년과 똑같은 자세를 취했다.

그 옆으로 나병에서 깨끗해진 사람이 섰고, 그 옆으로, 그 뒤로 계속해서 빈민들이 서서 길을 가로막았다.

“당신네 사제인지 지랄인지 하는 사람이 우리가 아프다하건 말건 신경도 안 쓸 때, 저 성녀님은 쉬시지도 않고 우릴 치유해줬어!”

“마녀? 그럼 우린 마녀한테 치유 받은 마물인가? 그럼 우리도 잡아 가!”

“그래! 우리도 잡아 가!”

빈민들은 점차 길을 메우며 인간 장벽을 만들었다.

“이, 이 천한 개돼지 같은 것들이!”

아돌프가 이를 갈며 빈민들을 바라봤다.

기사들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웅성거렸다.

“마녀는 느그 귀족들이랑 사제들이 마녀겠지! 우리 피를 빨아서 사치를 부리고 세상 편하게 사는 마녀!”

“맞아! 성녀님은 우리를 외면하지 않았어! 우리한테 아무것도 받지 않으셨다고!”

점차 분위기가 험악해지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귀족에 대한 비난과 광명교 사제단에 대한 욕설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배, 백작님. 사, 사태가 심상치 않아 보입니다.”

부관이 아돌프에게 귓속말을 전했다.

“시끄러워! 사태가 심상치 않으면 다 밀어 버리면 되는 거 아니야!”

“배, 백작님!”

아돌프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컸기에 빈민들에게까지 들릴 정도였다.

그리고 그것이 빈민들의 타오르는 분노에 기름을 끼얹어버리고 말았다.

“밀어?! 다 밀어 버리면 돼?!”

“그래, 어디 한 번 밀어 봐! 어차피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뒤질 땐 뒤지더라도 성녀님한테 은혜는 갚고 뒤져야지!”

“밀어! 밀라고 이 새끼들아!”

빈민들이 서로 팔짱을 낀 채 기사들에게 한 걸음 씩 다가서기 시작했다.

기사들은 그 기세에 밀려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지금이야. 도망가게.”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알프레드가 아딘에게 말 고삐를 건네며 이야기했다.

아딘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몰아 남쪽으로 빠르게 달려갔다.

“성녀님! 몸 성히 가십시오!”

“뒤는 우리에게 맡기십시오! 성녀님께 입은 은혜 반드시 갚겠습니다!”

자신을 향해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이야기하는 빈민들을 보며 로제는 아딘에게 물었다.

“오라버니.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모든 대화들이 게마인샤프트 서부방언으로 이루어진 만큼, 로제는 대략적인 분위기나 느꼈을 뿐 구체적인 내용은 파악하지 못했다.

아딘은 말을 타고 한참을 달려 남쪽에 자리한 뢰벡 경계를 지나 드넓은 목초지에 들어서고 나서야 로제에게 조금 전의 일들을 개괄적으로 이야기해 주었다.

“마녀? 마녀라고요?”

로제가 눈을 부릅뜨며 화가 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정확히는 약식 마녀재판 심문이야. 네가 마녀인지 아닌지를 간단하게 묻겠다는 거지.”

“그게 저보고 마녀라고 하는 소리잖아요!”

로제는 당장 말에서 내려 뢰벡으로 돌아갈 기세로 몸을 움직였다.

“로제!”

아딘이 뒤로 돌아 로제를 바라보았다.

“괜찮아. 아무 일 없을 거야. 저 사람들이 널 위해 길을 막고 있어. 우린 이대로 동남쪽으로 내려가면 돼.”

“하지만…… 저 귀족놈들은 분명 저 불쌍한 사람들을 모조리 죽이고 길을 뚫을 거예요!”

“그랬을 거면 진즉에 그렇게 했을 거야. 알프레드가 거기 있어. 알프레드 정도 귀족이면 알아서 잘 막아 줄 거야. 그러니까 우린 떠나면 돼.”

“하지만…….”

“가서 괜히 싸우기라도 하면 도리어 네가 치유해준 사람들만 더 다치게 돼.”

아딘의 설득에 결국 로제는 입을 다문 채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보며 아딘은 한시름 놓으며 다시 말을 몰았다.

그렇게 아딘이 말을 몰고 대략 10분 정도 더 동남쪽으로 내려갔을 무렵이었다.

[두두두두두-!]

저 멀리서 먼지와 함께 한 무리의 인마가 나타났다.

뢰벡 동부 경계에서 남하하는 모양새였다.

‘젠장! 우회했구나!’

흙먼지 사이로 나부끼는 브라운실트 가문의 깃발을 보며 아딘은 속도를 높였다.

로제도 달려오는 인마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아딘에게 이야기했다.

“오라버니! 여긴 안전해요! 그냥 여기서 제가 싹 쓸어버릴게요!”

로제의 말에 아딘은 다급한 어조로 말했다.

“안 돼!”

“어째서요? 보는 사람들도 없고, 저 정도 쓸어버리는 건 제 심장에 무리도 안 간단 말이에요.”

“구태여 손에 피를 안 묻힐 수도 있을 땐 사람을 죽일 필요가 없잖아.”

“하지만…….”

“이대로 쭉 동남부로 내려가면 브릴트 경계로 들어서게 돼. 거기 정도 가면 브라운실트 가문의 기사들도 더 이상 추격하질 못할 거야.”

결국, 로제는 아딘의 말에 자기 고집을 꺾을 수밖에 없었다.

그저 분을 삭이기 위해 어금니를 앙다물고 아딘의 허리를 감싼 팔에 힘을 주는 것 만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로제의 상태를 확인한 아딘은 그대로 말을 전속력으로 달리게 했다.

“쫓아! 저 년놈들을 잡아!”

그리고 두 사람을 확인한 아돌프는 흙먼지가 입으로 들어가건 말건 고래고래 침을 튀겨가며 고함쳤다.

“잡아! 반드시 잡아! 잡아서 내 아들! 아돌프의 복수를 해 줘야 해! 잡아 죽여! 찢어 죽이란 말이다!”

그렇게 광기에 찬 귀족은 기사들과 함께 드넓은 목초지로 들어섰다.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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